[156호 특집]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다?

교회력 따라 고난주간 보내기…부활절은 주인도 객도 없는 신세

2005-04-14     양희송

교계는 연합예배나 대형 이벤트를 준비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부활절 맞이 계획이 없어 보인다. 개별 교회 차원에서도 특별히 고난주간이나 부활절을 기념하는 노력이 많이 보이지는 않는다. 대체 어찌된 일일까.

젊은이들은 발렌타인 데이(2월 14일)다, 화이트 데이(3월 14일)다 해서 거의 매달 무슨 기념일을 만들어서 떠들썩한 것이 요즘 세태이다. 오죽하면 빼빼로 데이(11월 11일), 블랙 데이(4월 14일)까지 나왔을까. 반면에 부활절은 기껏 삶은 달걀 나눠주는 또 다른 기념일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는 듯싶다. 하물며 고난주간을 지키는 것은 얼마나 더 성가신 일이랴.

떠뜰썩해야 부활절이다? 

굳이 교회력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기독교적 정체성의 핵심이 성육신(incarnation)을 의미하는 성탄절과 십자가와 부활(cross & resurrection)을 의미하는 부활절 양 절기에 응축되어 있음은 쉽게 공감할 수 있다. 성탄절은 이미 예수의 성육신보다는 산타클로스가 주인이 된 떠들썩한 연말 쇼핑 대목이 된 지 오래다.

부활절은 아예 주인도 객도 없는 신세로 잊혀져 가는 것은 아닌지. 우리 부활절은 현충일 하루 순국선열 기념하겠노라 부산떨며 기념식 치르고는 즉각 잊어버리는 관행과 많이 다른가. 아니면 조상님 음덕(蔭德)을 기리겠노라고 차례 지내는 설날이나 추석의 풍습과 더 닮아 있는 건가. 음복(飮福)대신 성찬식인가. 길일(吉日)을 잡아 이사도 하고, 결혼도 하는 것처럼 단지 세례받기 좋은 날로 기억되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도대체 부활절 맞이를 어떻게 하고 있는 것인가.

미국의 뉴스위크나 타임 같은 잡지나 신문들은 성탄절이나 부활절 무렵이면 자주 기독교 관련 특집기사들을 올린다. 성탄절에는 예수의 탄생과 관련된 의혹을 제기한달지, 부활절에는 육체의 부활이나 예수의 죽음에 관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는 이론들을 새롭게 소개하는 식이다. <다빈치 코드>류의 글들은 이런 절기마다 언론의 단골 메뉴에 속한다.

'예수 세미나'에 참가하는 학자들이 언론에 노출 빈도가 부쩍 높아지는 것도 이 시기이다. 선정적이기는 하나 그래도 서구에서는 부활절이란 시기가 기독교 신앙을 되짚어보는 계기를 준다. 한국의 부활절은 스캔들도 없고, 센세이션도 없는 -있다면 기껏 부활절 연합예배에 몇 명이 모였는지, 왜 많이 안 모였는지, 어디랑 어디랑 사이가 좋고, 누구는 사이가 나쁘다는 가십 정도가 될까-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는 딱한 신세가 되었다. 개인 차원에서라도 적용해볼 만한 실천 과제들을 찾아보자.

묵상과 기도를 위한 제안

죽음과 삶에 대한 묵상 : 양화진에 가보라. 비석마다 새겨진 사연들이 울리는 무게가 만만치 않다. 죽음에 대한 성찰이 모자라면 삶에 대한 환희를 말하기가 허전하다. 아픈 사람, 가난한 사람, 변두리로 밀려난 사람, 죽음을 앞둔 사람을 굳이 찾아서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은 남들보다도 자기 영혼의 건강을 위해 도움이 된다.

교회력의 적용: 교회사를 보면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마지막 주간 행적을 따라가며 묵상과 기도를 하는 전통이 이어져 왔다. 물론 교단과 교파에 따라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되새길 만한 내용이 있다. 교회적으로 적용할 수 있으면 가장 좋겠으나,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개인적으로나, 주변의 사람들이 그룹으로 실험을 해보는 것도 권할 만하다.

종려주일에는 이사야서 '고난 받는 종의 노래'(50:4~9)을 전통적으로 읽었고, 신약에서는 예수가 예루살렘 성에 들어올 때 종려가지를 흔들며 환영한 내용(마 21:1~11)을 묵상했다. 고난주간 목요일(Maundy Thursday)에는 유월절 식사 자리에서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것을 기억하며 '세족식'과 '성찬식'을 거행하였다.

출교당한 사람들이 회중 앞에 죄를 고백하고 다시 공동체로 받아들여지는 '화해의 의식'이 거행되는 경우도 있었다. 금요일(Good Friday)에는 요한복음의 수난이야기(18-19장)를 읽었다. 회개의 예배를 드리며, 예수의 고난을 기억했는데, 특별히 오늘날 이 세계에서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을 위한 중보기도가 드려지기에 적합한 시간이다.

토요일은 극도의 어둠으로 휩싸인 날이다. 금식을 하기도 하고, 토요일 밤에서 부활절 새벽까지 예배와 기도를 드리며 부활의 아침을 맞는 전통이 있다. 한국교회에서는 이것이 부활절 새벽 연합예배로 자리 잡았지만 요즘은 그 처연한 침묵의 시간은 잊어버린 채 떠들썩한 이벤트로 전락하는 느낌이 있다.

부활의 아침에 느끼는 감동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고난주간을 어떻게 보냈는가에 거의 전적으로 달려있을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를 거치지 않고 부활을 맞이하지 않은 것처럼, 우리도 고난주간 없이 제대로 부활절을 맞이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