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호 기독교세계관 논쟁 2ROUND] 기독교 세계관의 논리적 구조와 문제점들

2007-08-20     복음과상황

대략 20~30년 정도의 역사를 갖는 기독교세계관(이하 기세)운동은 한국 교회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미쳤다. 기세운동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사회와 문화,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특히 ‘문화를 변혁하자’는 슬로건이 상투어가 될 정도로 문화 변혁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 역시 기세의 중요한 공헌 중 하나다. 그러나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 예컨대 이랜드 사태나 혹은 아프간 인질 사건 등은 기세의 문화변혁운동의 실효성을 의심하게 한다. 과연 기세는 실효성이 있는가? 사실 기세 반성 작업은 이미 여러 차례 이루어진 바 있어서 다소 식상할 만한 주제다. 그러나 아직까지 기세를 대체할 만한 대안이 나오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기세 반성은 아직 계속되어야 하리라고 본다. 필자는 기세의 논리적 구조를 간단히 밝히고 재고해 보아야 할 몇 가지 기세의 문제점들을 보이고자 한다. 이것을 통해 기세에 대한 보다 심도 깊은 반성과 대안이 모색되기를 바란다.

통상 기세라고 불리는 ‘개혁 기세’는 이론과 방법론이 결합된 복합체이다. 이론이라 함은 기세가 세계를 이해하는 지도(map) 역할을 한다는 의미에서요, 방법론이라 함은 새로운 세계 건설, 혹은 사회 개혁 방법론을 제시한다는 점에서다(니고데모의 안경, 27).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개혁 기세가 ‘세계관’(worldview)이라는 말을 쓸 때, 이는 단순히 철학적 개념이나 용어를 차용하는 것을 넘어서 그 용어로부터 사회를 변혁하고 개조하는 방법론까지 끌어낸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확실히 개혁기세만의 독특한 특징이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이 기세를 ‘기독교세계관운동’으로 부르게 한 이유다. 기세는 다음의 삼단논법의 논리적 구조를 갖는다.

I: 세계관은 세계를 형성한다.
II: 기독교는 세계관이다.
III: 기독교 세계관은 기독교 세계를 형성한다.

이상의 삼단논법에 근거하여 기세의 구체적인 실천 강령과 약속을 도출할 수 있는데, 실천강령이란 “세계관을 기독교 세계관으로 바꾸라”이고, 약속은 “그리하면 조만간 기독교 세계가 도래하리라”는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의 논리적 구조

I. 세계관은 세계를 형성한다.
종종 기세의 핵심 내용을 전제 II, 즉 창조·타락·구속이라고들 하는데(물에 빠져 죽은 오리, 276) 사실 기세의 핵심은 전제 I에 있다. 왜냐하면 II, III은 모두 대전제 I의 적용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대전제 I은 크게 두 가지 중요한 주장으로 구성된다. I-1 세계관의 개념에 대한 소개와 I-2 세계와 세계관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 그것이다.

I-1. 세계관은 피할 수 없다.
정의상 세계관은 ‘세계 인식의 틀’이며, 개인이 견지하고 있는 ‘원칙들’이나 ‘전제들’이다. 그런데 기세가 강조하는 것은 만인을 세계관 아래 가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본성상 세계를 이해하고 싶어하고 세계 이해를 위해서 세계관은 필수적으로 요구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며, 세계관은 전포괄적이어서 문화와 사회 전 영역을 포괄한다. 또한 속성상 세계관은 무의식적이어서 자신은 세계관이 없다고 아무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즉 그도 모르게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관은 전논리적이고 전과학적이다. 여기서 과학의 독점적 지위는 해체된다. 과학도 세계관의 산물일 따름이다. 이 점에서 기독교나 과학은 동일하다.
 
I-2. 세계관은 세계를 형성한다.

기세는 세계관과 세계의 관계를 인과 관계로 보고 있다. 즉 세계관이 세계 형성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월터스토프는 세계관이 사회를 구성하는 주된 요인이라고 했다(그리스도인의 비전, 9). 미들톤과 왈쉬도 일본과 캐나다의 목욕문화에 대한 마가렛 미드의 분석을 예로 들면서 두 나라의 목욕문화의 차이는 인생관의 차이로부터 비롯된다고 했다. 신국원은 세계관이 “세계를 형성하기 위한 전략으로 나타나고 그로 인해 다양한 문화가 만들어진다”고 했다(니고데모, 29). 미들톤과 왈쉬도 “문화적인 삶은 지배적인 세계관에 뿌리를 내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삶은 그 세계관에 부응되도록 방향지워진다”고 했다(그리스도인의 비전, 39). 즉 세계관은 문화를 형성한다. 물론 문화를 통해 세계관을 배우고 습득하고 전수받는다. 하지만 문화가 세계관을 형성하지는 않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 세계관은 원인이고 세계는 결과다. 이와 관련하여 기세는 최소한 두 가지 함축적 주장을 하는 셈인데, 첫째는 전체 문화는 소수의 세계관으로 환원된다. 즉 소수의 핵심원리로서의 세계관은 ‘문화의 뿌리’ 혹은 ‘근본 동인’이다(니고데모, 28). 둘째, 세계관, 곧 신념이 실재보다 앞선다. 이에 대해 대로우 밀러는 “생각은 결과를 낳는다”고 명료하게 표현한 바 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세계 변혁의 중요한 전략을 우리는 확보하게 된 셈이다. 세계를 바꾸기 위해서는 세계관만 바꾸면 된다.

II. 기독교는 세계관이다.
소전제 II는 대전제 I에 대한 기독교적 적용이라고 할 것이다. 소전제 II는 다시 두 가지 중요한 주장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II-1 기독교는 세계관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II-2 기독교 세계관의 내용은 창조·타락·구속의 구도로 설명된다는 것이다.

II-1. 기독교는 세계관이다.
기독교를 종교가 아닌 하나의 세계관으로 보자는 것도 상당히 독특한 주장이다. 기독교를 세계관으로 보자고 하는 이유는 기독교 신앙이 종교라는 영역 안에 가두어 두어서는 안 된다는 기세의 문제의식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는 공적 영역에서 철수하여 사적인 영역으로 축소되었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사실과 가치, 세상과 교회의 이분법은 현대사회와 교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다(완전한 진리, 44). 기세는 이러한 이분법을 반대한다. 여기서 기세의 이원론에 대한 신랄한 반대를 만나게 된다. 기세에 의하면 기독교 신앙이란 모름지기 포괄적이고 일관성 있는 삶의 체계이어야 한다(삶의 체계로서의 기독교). 그리하여 세계관으로서의 기독교는 정치·경제·문화의 영역까지 포괄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II-2. 기독교 세계관의 내용은 창조·타락·구속의 구도로 설명된다.
기세가 가장 중점을 두어 설명하는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다. 소위 창조·타락·구속이라고 불리는 이 대목은 기세 이론의 주된 내용을 형성한다. 이와 관련한 기세의 주장에서 세 가지 특징이 있는데, 먼저 창조·타락·구속의 포괄성에 대한 강조이다. 둘째, 기세주의자들은 세 가지 중 창조를 더 강조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완전한 진리, 176). 셋째, 창조·타락·구속의 구도는 세계와 인간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탁월한 설명체계라는 확신이다.

III. 기독교 세계관은 기독교 세계를 형성한다.
삼단논법에서 소전제 II를 대전제 I에 적용할 때 결론 III은 자동적이다. 이러한 추론의 자동성은 기세 방법론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다시 말해서 기세에 의하면, 뇌관만 건드리면 불꽃이 도화선을 따라 타들어가 폭탄을 자동적으로 폭발시키듯, 조건만 충족되면 기독교 세계는 자동적으로 건설된다. 그리고 조건은 세계관을 기독교 세계관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러한 필연성과 자동성은 ‘세계관’이라는 용어 자체에 이미 함축되어 있었다. 전체 문화가 소수의 원리로 환원될 수 있다는 세계관 환원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기세의 실천강령: 세계관을 기독교 세계관으로 바꾸라.
이상의 설명으로부터 한 가지 명확한 실천강령이 도출된다. 그것은 세계관을 기독교 세계관으로 바꾸라는 것이다. 세계관 전환은 우선 지적인 차원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세계관 공부와 연구는 중요하다. 아울러 세계관 전환은 실천적 차원에서도 일어나야 한다. 참다운 영성이란 삶으로 기독교 세계관을 살아내는 것이다. 기세의 실천은 원리에서 적용으로, 개론에서 각론으로 나아간다. 즉 세계관은 정치·경제·문화, 학문의 영역으로 적용되어져야 한다. 그리하여 기독교 정치, 기독교 경제, 기독교 문화, 기독교 학문을 만들어 내야 한다. 이때 각 분과에서 기세를 실천하는 것은 각 분과에 뛰어 들어간 기세 헌신자들의 연구와 노력으로 가능하다. 자기 분과에 기세를 적용하는 것이 바로 전도요 선교고, 사역이다.

기세의 약속: 그리하면 조만간 기독교 세계가 도래하리라

기세는 세계관을 변혁하면 문화가 변혁되고, 기독교 세계가 곧 도래할 것이라고 약속한다. 그렇다면 기독교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이 세계는 기독교 신앙이 전체 삶의 영역 속에 영향을 미친 세계일 것이다. 즉 기독교 세계는 기독교 정치, 기독교 경제, 기독교 문화가 구체화된 세계일 것이다. 이것은 이 땅에 구현된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수도 있다(니고데모, 154~5). 물론 기세는 주님의 재림 때까지 이 땅에서 기독교 세계가 완전하게 이루어지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론상 기독교 세계의 건설은 가능하고, 지상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내림도 가능하다. 그리고 성도들은 이 일을 위해 부름 받았다고 주장한다.

이상의 기세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기세가 약속했던 나라는 오지 않았다. 기독교 정치, 기독교 경제, 기독교 문화 등 어느 것 하나 가시적인 열매를 보지 못하고 있다. 오리라고 약속했던 기독교 세계는 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약속은 빗나갔고 사람들은 기세를 향해 질문을 쏟아 붓는다.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기세가 열매를 내지 못하는 이유는 기세 이론 자체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하나씩 살펴보자.

기독교 세계관의 문제점들

I. 세계관은 세계를 형성하는가?
  I-1. 세계관의 개념에 대해서
세계관(Weltanshauung)이란 독일 관념론 철학에서 유래된 용어인데, 20세기 들어서 철학, 심리학, 사회과학, 심지어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어찌 보면 모더니즘의 산물이라고도 할 수도 있는 이 개념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지식을 거부하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도 상당히 좋아하는 개념이 되었다. 기세에 따르면 모든 지식은 세계관에 기초한다. 모든 지식은 세계관 의존적이기에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지식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세계관’이라는 용어 자체도 중립적일 수 없다. 세계관이라는 용어 자체도 특정 세계관의 산물일 수 있다는 말이다.

세계관(worldview)은 세계(世界)에 대한 관(觀)이다. 여기서 세계는 ‘볼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전제되어 있다. 기세의 가장 중요한 주장 중 하나는, ‘우주는 이해될 수 있다’이다(생각은 결과를 낳는다, 113). 곧 세계는 이해할 수 있고 조망할 수 있으며, 눈앞에 현전하는 어떤 것이다. 이러한 세계에 대한 개념은 다분히 그리스적이다. 신국원은 이에 대해 정확히 지적했다. “봄을 중시하는 것은 그리스 전통의 영향 때문이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들음을 중시했다.”(니고데모, 24~5) 세계관이라는 말은 성서보다는 그리스 철학의 전통과 깊은 관계가 있다. 뿐만 아니라 인식주체가 대상이 되는 세계를 눈앞에 펼쳐놓고 본다고 말한다는 점에서 세계관은 근대 인식론의 철학적 전제를 그대로 함축하고 있다. 또한 월터에 의하면 세계를 가시적인 어떤 것으로 전제하는 것은 현대 기술사회의 산물이다(Worldview, 333). 즉 ‘세계관’이라는 용어와 개념 자체가 이미 중립적이지 않으며 특정 문화권의 산물일 수 있다는 말이다. 만일 ‘세계관’이 중립적인 개념이 아니라면 ‘기독교-세계관’과 같은 하이픈(-) 조합은 이미 모순어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I-2. 세계관이 세계를 형성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세계관은 세계를 형성하는가? 기세에 의하면 세계관은 문화의 원인이요, 문화는 세계관의 결과다. 이 주장과 함의는 기세 방법론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다. 만일 세계관이 세계를 형성하지 않는다거나, 혹은 세계를 형성하는 또 다른 원인이 존재한다고 말할 경우, 문제가 상당히 복잡해진다. 그럴 경우 세계관 변혁을 통한 문화 변혁은 불가능하거나 부분적으로만 가능하게 된다. 그렇다면 굳이 세계관 변혁을 위해 전력투구할 이유가 사라진다. 그러나 기세의 방법론은 세계관 변혁을 통해 세계 변혁을 꿈꾸고 있다. 따라서 이 꿈을 위해서라도 세계관이 세계를 결정적으로 형성한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I-2의 주장은 근거가 대단히 취약하다. 과연 세계관이 문화 형성의 원인인가? 확실히 세계관은 문화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지침을 제공한다. 기세 말마따나 세계관은 문화의 밑그림이고 지도다. 이러한 점에서 세계관이 문화의 원인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세계관과 문화 사이의 인과관계가 논리적 인과관계인지 실제적이고 역사적인 인과관계인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예컨대 형태심리학에 따르면 인간의 지각은 부분에서 전체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전체상, 곧 게슈탈트에서 부분으로 나아간다고 한다. 논리적으로 보면 전체상에 대한 지각은 부분에 대한 지각의 선행조건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부분에 대한 지각이 전혀 없이 전체상을 지각할 수는 없는 일이다. 두 가지는 동시에 이루어진다. 즉 논리적인 선행조건이 반드시 실제적인 선행조건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세계관이 문화의 논리적 원인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실제적 원인일 수는 없는 것이다.

토마스 쿤에 따르면 패러다임은 정상과학에 우선한다(과학혁명의 구조, 77). 패러다임에 기초하여 보다 진전된 과학실험과 발견이 가능하다. 이러한 점에서 패러다임은 정상과학의 선행조건이다. 그러나 반드시 패러다임이 과학실험과 발견을 진전시키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역으로 과학의 발견과 실험이 패러다임을 진전시키기도 한다. 여기서 방향은 역전된다. 곧 패러다임과 과학활동 사이의 관계는 상호적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와 베버 사이의 유명한 사회과학 논쟁과도 연관이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형성과정에서 물질적인 요인을 강조한 반면 베버는 정신을 강조했다. 이 두 사람의 논쟁은 모든 것의 원인을 지적 사상으로 보는 버논 프랫과 사회적 과정이 지성적 과정을 낳는다는 앨리스데어 매킨타이어의 논쟁에서도 반복된다(19세기 유럽정신의 세속화, 22). 정신이 우선인가, 물질이 우선인가 하는 문제는 아직도 결론이 나지 않은 문제다.

사실 이 문제를 기세주의자들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예컨대 월터스는 세계관을 행동의 원인으로 보는데 그는 그 반대로 보는 사람들로 알고 있다. 마르크시스트나 몇몇 심리학자들은 세계관은 행동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로서 먼저 행동을 하고 그 뒤에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세계관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여기서 선후는 뒤바뀐다. 월터스는 이들의 “증거를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창조·타락·구속, 17). 그러나 월터스의 결론은 무척 황당하다. 결국 이 문제는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문제라기보다는 세계관적 문제라고 단정해 버린다. 그리고는 말하기를 “기독교적 입장에서 볼 때… 신념이 생활 가운데서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17-8). 이것은 일종의 자기 신념 강화를 위한 순환논리요, 쉐퍼식으로 말하자면 ‘신앙으로의 도약’이다. 결론은 이것이다. 세계관이 반드시 세계를 형성한다고 말할 수 없다. 세계관과 세계의 관계는 상호적이고 변증법적이며 복합적이다.

II. 기독교는 세계관인가?
II-1. 기독교는 세계관이라는 주장에 대해
가. 이원론의 문제
기세는 신앙이 사회와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치기를 열망한다. 그리하여 교회와 세상, 복음과 문화, 영과 육, 성과 속, 사실과 가치 등을 하나의 통합적인 관점으로 보고자 노력한다. 그래서 기세는 통합을 깨는 이원론(dualism)을 공격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이원론은 신앙을 사유화하며, 내면화하고, 교회를 게토화하는 주범이다. 통상적으로 기세는 이원론의 근원을 그리스의 영육 이원론에서 찾는다(그리스도인의 비전, 133/완전한 진리, 146). 기세는 이렇게 주장한다. 이원론적 세계관이 신앙의 사유화, 교회의 게토화, 하나님나라의 타계화를 초래했다. 따라서 이원론을 극복하면 사유화, 게토화, 타계화를 극복할 수 있다고.

그러나 이원론에 대한 기세의 주장은 심히 단순한 분석에 기초하고 있다. 신앙의 사유화와 게토화의 원인들로는 그리스의 이원론 말고도 수없이 많은 요인들을 들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 자체도 이러한 현상들을 만들어 내는 데 한 몫을 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기세는 이원론의 영향으로 천국이 이 땅에 임한다기 보다는 죽어서 가는 세계로 여겨지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G. 로핑크는 이와는 상당히 다른 분석을 내놓고 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의 타계화는 어거스틴이 하나님나라를 로마제국으로부터 분리해 내면서 비롯되었다고 했다(산상설교는 누구에게? 278~80). 어거스틴으로부터 천국은 한편으로 죽음 이후로 멀어졌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 심령 속으로 철수해 들어간 것이다. 초대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현존의 표지로 중요하게 여겼던 ‘평화’에 대해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갈망하는 평화는 오직 개인끼리 화해할 때 마음속에서 또는 하늘나라에서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초대교회의 예배와 전도, 69)

또 기세는 기독교가 정치나 경제와 같은 세속 영역에서 물러나 종교기관으로 축소된 현상을 이원론의 탓으로 돌린다. 하지만 종교가 공적 영역에서 철수한 현상은 소위 ‘세속화(secularization)’의 현상과 연결시켜 보아야 한다. 13세기부터 시작된 세속화의 과정은 대단히 복잡한 현상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세속화의 수많은 요인들 중에는 기독교 자체가 제공한 원인들도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하비 콕스는 <세속 도시>에서 기독교 계시 자체가 세속화를 촉발하는 원인이 될 수 있음을 보였다. 또한 ‘오직 신앙으로(Sola Fide)’라는 종교개혁적 신앙주의 역시 세속화의 중요한 원인이다. 마틴 루터 이후 개신교회는 핵분열이라고 할 만큼 엄청나게 분열되었다. 이러한 교회 분열은 종교전쟁을 낳았고 결국 종교전쟁은 상호간의 신앙을 관용하기에 이른다. 신앙의 관용은 불가피하게 종교와 국가의 분리를 가져왔고 이러한 국가와 종교의 분리는 결국 신앙의 사유화, 교회의 게토화의 중요한 원인이 된다. 낸시 피어시도 이 사실을 언급하긴 하지만 그다지 중요하게 취급하지는 않았다(완전한 진리, 702~3). 결론은 신앙의 내면화, 종교의 사유화, 교회의 게토화, 하나님나라의 타계화 등의 현상은 한두 가지의 원인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책임을 이원론에게로 돌리는 것은 지나치게 사안을 단순화한 것이요 자신의 체제 유지를 위한 일종의 희생양 만들기의 결과라고 여겨진다.

나. 믿음의 문제
기세에 의하면 기독교는 종교라기보다는 모든 삶의 영역을 포괄하는 삶의 체계며, 세계관이다. 그러나 만일 기독교를 세계관이라고 한다면 기독교의 신앙은 일종의 세계관적 신념이 되고 만다. 회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른 세계관에서 기독교 세계관으로 세계관을 바꾼 것이다. 세계관의 전환, 혹은 세계관의 선택이 회심이다. 이것은 확실히 믿음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야기한다. 성서가 말하는 믿음이란 세계관적 신념 이상이다. 믿음이란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예컨대 기독교 신앙이란 세계가 지적 설계자에 의해 조성되었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지으시고 나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기세의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마도 맥도날드가 잘 말한 것 같다. “…그들은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며… 선하신 주님은 그저 존재하시는 것(exist) 이외에 아무 할 일도 없는 분인양 여긴다.”(Worldview, 337) 기세는 기독교 신앙의 한 가지 가능한 효과를 설명했을 뿐이며 신앙의 핵심은 도리어 간과한 듯하다.

II-2. 창조·타락·구속에 대해
가. 구조와 방향의 문제
기세의 중요한 공헌 중 하나는 성서 해석을 위해서 창조·타락·구속의 삼중적 렌즈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창조·타락·구속의 구도에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부분은 구조와 방향의 문제다. 이것은 타락과 구속을 설명하기 위한 중요한 개념적 틀이다. 기세에 의하면 방향은 타락했으나 구조는 타락하지 않았다. 타락은 창조세계의 구조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즉 타락에도 불구하고 가정, 국가, 돈, 성(性), 기술, 공학, 문화 등의 구조는 전부 선하다. 따라서 타락한 이후에라도 본성상 악한 것은 없다. 다만 방향만 잘못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성이 결여된 설명이다. 예컨대 돈이나 기술의 문제를 보자면 기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돈이나 기술은 선하다. 다만 그것의 쓰임새가 문제다.’ 이럴 경우 문제는 돈이나 기술의 용도로 축소된다. 오늘날 돈이나 기술을 이런 식으로 보는 학자들은 거의 없다. 월터 윙크는 신약성서가 창조세계와 타락한 세계를 모두 Kosmos라고 부른다고 했다(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 97~8). 이것은 타락의 범위가 구조와 방향으로 깔끔하게 나누어질 수 있다는 기세의 주장을 반박한다. Kosmos가 창조되었고, Kosmos가 타락했다. 창조세계와 타락한 세계는 혼돈된다. 단지 방향만 문제가 아니라 창조세계의 구조 깊숙이까지 악의 정사와 권세가 지배체제를 만들어 놓았다.

구조와 방향의 도식은 타락 전과 후의 불연속성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성서는 타락 전과 후가 완전히 단절되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타락 전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기세의 구조·방향 구도는 타락 전과 후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소위 문화의 이해에서 금세 드러난다. 우리는 성서에서 두 가지 문화의 기원을 보게 된다. 하나는 창세기 1~2장의 문화이고 다른 하나는 3장 이후의 문화다. 창세기 1장 28절은 흔히 문화명령이라고 불리는데 여기서 인간은 정복과 통치의 명령을 위임받는다. 또 창세기 2장에서는 결혼명령을 받는다. 이것은 타락 전의 원문화의 기원에 대한 설명이다. 반면에 창세기 3장 7절에서 인간은 범죄한 후 옷을 지어 입는다. 가인은 하나님의 보호 언약을 불신하고 스스로 도시를 건설한다. 그리고 가인의 후예들은 악기와 농기구를 개발하며, 급기야 11장에서는 정복자 니므롯의 영도 하에 바벨탑을 건축한다. 이것들은 타락 후의 문화의 기원이다. 성서에 따르면 타락 전의 원문화와 타락 후의 문화는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기세의 구조, 방향의 도식에 따르면 이러한 차이점은 무시된다. 심지어 타락한 문화적 특성을 원문화와 동일시하는 일도 적지 않다. 대로우 밀러가 서구적인 개발사업을 문화명령의 이행으로 이해하는 것은 경악할 만한 일이다(생각은.., 301).

나. 최고의 세계관으로서의 기세
기세를 경합하는 세계관 중 가장 탁월한 세계관이라고 하는 믿음은 거의 모든 기세주의자들의 합의된 믿음이다. 프란시스 쉐퍼는 말하기를 “성경적 체계는 하나의 체계로서 훌륭하여 손색이 없다”고 했다(이성으로부터의 도피, 37). 제임스 사이어도 다양한 세계관들을 열거한 뒤 이렇게 결론 내리고 있다. “유신론을 제외한 다른 세계관들은 모두 심각한 결점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다.”(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 279) 낸시 피어시도 그의 묵직한 책에서 기세가 가장 완전한 세계관임을 증명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러나 기세가 최고의 세계관이라는 이러한 주장은 논리적으로 모순된다. 왜냐하면 그 모든 기세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기세 내부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기세가 아무리 ‘완전한 진리’를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주장은 결국 기독교 세계관에 기초한 기독교 내부의 진리일 뿐이다. 그리고 기세 내부의 진리는 다른 세계관의 진리일 수 없다. 세계관은 본성상 다원주의적이다(니고데모, 30). 북미인과 일본인, 딘인은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혀 다른 우주에 살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상충하는 문화와 세계관들끼리 우열을 가릴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세는 세계관들끼리 서로 비교하고 평가하는 기준들을 제시하여 세계관과 문화를 비교한다. 예컨대 미들톤과 왈쉬는 현실성, 내적 통일성, 개방성 등 3가지를, 제임스 사이어는 지적 통일성, 자료에 대한 포괄성, 설명 가능성, 주관적 만족 등 4가지를 각각 세계관의 평가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그것이 세계관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 기준이란 도대체 누구의 기준이란 말인가? 아무리 탁월하게 지적 설계자의 존재를 논증하거나 성서의 가르침을 변증한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일종의 지적인 나르시시즘에 그칠 수밖에 없다. 세계관들과 문화들을 평가 비교하는 기세의 시도는 오래된 제국주의의 자문화중심주의와 다르지 않다.

III. 기독교 세계관은 기독교 세계를 형성하는가?
앞서 기세는 믿음을 세계관적 신념으로 축소시킨다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는 기세가 하나님 나라를 기독교 사회로 축소시키는 것을 보게 된다. 신국원은 “하나님 나라는 구속의 원리가 구체적인 삶으로 드러나는 곳에 임한다”고 했다(니고데모, 154). 그렇다면 구체적인 삶의 영역이란 어떤 곳인가? 학문, 예술, 가정, 직장, 기업, 국가와 같은 곳이다. 만일 기세로 충만한 크리스천이 학문활동이나 예술활동, 경제 및 정치활동을 한다면 바로 거기에 하나님나라가 임한다는 것이다. 결국 기독교 정치, 기독교 경제, 기독교 문화로 충만한 기독교 세계는 곧 하나님 나라다. 여기서 이런 생각이 든다. 결국 기세란 국가와 종교가 분리되기 이전의 아름다운 시절(belle epoche)에 대한 향수요, 칼빈이 제네바에 구축하려고 했던 신정국가에 대한 열망이며, 로버트 벨라의 ‘시민 종교’에 대한 추구가 아닌가?

이러한 기독교 세계에 대한 비전은 결국 교회와 세상 사이의 근본적 구별을 철폐하게 한다. 물론 기세는 교회를 기세로 무장된 전투병력으로서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으며 전체 삶의 영역에 적용되어야 한다. 통합적 기세에 따라 성과 속, 교회와 세상의 구분은 철폐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두 가지 문제점을 낳는다. 첫째는 교회의 윤리적 기준이 하향조정된다는 것이다. 신약성서는 교회를 세상과 완전히 구별된 대안사회로 보았다. 산 위의 동네로서의 교회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윤리와 규범의 공동체였다(산상 설교는.., 215). 때문에 이혼 금령이 세상 사람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철저히 제자 공동체를 위한 규범임을 분명히 한다(위의 책, 298). 예수는 교회가 산상수훈을 문자적으로 지킬 것을 기대하셨다. 그런데 기세는 산상수훈에 대해서는 일절 침묵한다. 아마도 기세는 일찍부터 산상수훈은 지킬 수 없는 것이라고 못 박고 있는 듯하다.

예컨대 기세가 기독교 경제, 기독교 기업이 가능하다고 할 때 그는 저축을 금지하고(마6:19) 구하는 자에게 주라는 명령(눅6:30)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기세는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중요하게 말씀하신 많은 가르침과 명령을 시민윤리의 수준으로 격하시킨다. 두 번째, 기세는 교회가 지켜야 할 윤리적 기준을 비그리스도인들에게 강요하게 된다. 기독교 윤리란 시민사회 건설을 위한 윤리요, 따라서 세상 사람들도 준수해야 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기독교 윤리와 문화의 강요를 문화 변혁으로 이해한다. 기윤실 활동의 문제는 여기서 비롯된다.

실천강령에 대해

결국 세계관 변혁이 남은 과제다. 세계관 변혁은 신자에서 불신자로, 이해에서 실천으로, 개론에서 각론의 방향으로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세의 실천강령은 불가피하게 문화 전쟁을 촉발시킬 위험이 있다. 기세는 기본적으로 여타의 세계관을 적대시한다. 그리고 자주 전쟁이라는 은유로 세계관과의 관계를 설명한다. 기세 운동은 자주 다른 세계관과 맞붙어 싸우고, 변증하고, 논증하여, 상대를 설복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다른 세계관은 싸워 이겨야 할 정복 대상이 된다. 안점식의 <세계관을 분별하라>는 선교적 상황을 세계관 갈등과 투쟁의 상황으로 이해하고 있다. 대로우 밀러의 <생각은..>도 대단히 호전적이다. 더구나 기세주의자들은 기세를 가장 탁월한 세계관이라는 자문화중심주의적 확신까지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기세운동은 지적·문화적 제국주의로 변질될 우려가 높고 또 하나의 십자군 운동으로 타락할 위험도 크다. 최근 궁지에 몰린 한국교회가 자꾸만 공격적으로 전도하고, 선교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기세가 이러한 공격적 성향에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기세는 실패했다. 기세가 실패했다고 단언하는 이유는 위에서 분석한 기세의 문제점들 때문이 아니다. 기세의 실패는 이론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실천적 차원에서의 실패다. 기세는 철학이나 신학이 아니라 삶이고 실천이다. 따라서 기세는 열매와 실천으로만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런데 기세는 약속한 결과물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 물론 순수하고 신실한 기세 헌신자들을 적지 않게 만난 바 있고 몇 가지 영역에서는 눈에 띈 성과가 없었던 것도 아니라고 들었다. 그러나 문화는 변혁되지 않았고 기독교 사회는 건설되지 않았다. 필자는 이 점에서 기세주의자들이 정직하고 겸손하게 기세의 실패를 인정하게 되기를 바란다. 기세는 문화 및 사회 변혁의 모델로 그다지 실효성이 없음이 밝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기세 내부의 논리적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문화 및 사회 변혁을 위해서는 보다 새로운 모델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다. 이러한 점에서 최근 일련의 기독교 굴욕 사건들은 예언적인 의미가 크다. 그 사건들은 기세주의자들을 비롯한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변명하지 말고 회피하지 말고 지금의 상황을 정직하고 냉정하게 바라보라고 촉구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가르침과 실천이 예수의 가르침을 더하거나 빼거나 하지 않았는지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5:19)

글 신광은(침례신학대학교 PH.D.과정) calebkshi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