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호 특집-한 창조론자의 '회심'을 옹호하며] 창조와 진화에 대한 세 가지 견해!

2008-03-17     이종연

▲ 왼쪽부터 정모세, 이종연, 김병규, 이원석, 정지영 ⓒ복음과상황 신철민
<창조와 진화에 대한 세 가지 견해>, 재미있고 감성을 자극하는, 은혜롭기까지한 수많은 책을 뒤로한 채 이 책을 선뜻 집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이렇게 ‘창조와 진화’는 우리에게 어려운 주제요 깊게 생각해 본 적이 드문 이야기일 것이다. 대부분 그리스도인에게 익숙한 젊은지구 창조론 외에도 복음주의 안에 다양한 견해가 있음을 소개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이 <창조와 진화에 대한 세 가지 견해>(IVP)이다. 이 책을 중심으로 김병규, 이원석, 정모세, 정지영 네 명의 편집위원들이 창조와 진화, 창조론 내부 논쟁을 살펴보았다.


정모세 / 교회에서 창조과학과 관련한 자료와 책을 계속 접했다. 흥미로웠기에 과학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신과학’류의 책들도 뒤적거렸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도 책장에 있어서 몇 번 읽었다. 그러던 중 과학과 신앙,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해 기초적인 관점을 가질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책이 IVP에서 나온 <신앙의 눈으로 본 생물학>이었다. 이 책을 통해 신앙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창조과학, 특히 젊은지구 창조론 외에 다른 이론들이 충분히 더 나은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창조와 진화에 대한 세 가지 견해>(창조와 진화…)의 장점은 여러 견해를 상대적으로 충분히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젊은지구 창조론, 오랜지구 창조론, 능력으로 충만한 창조론(유신론적 진화론)을 대표할 수 있는 각 사람들이 자기주장을 밝히고 서로가 서로에 대해 논평하고 책 전반을 편집한 모어랜드가 방향을 잡아주고 있다. 이 책은 한국교회의 일방향적 추세(젊은지구 창조론)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무척 필요한 책이다. 다른 대안과 주장뿐 아니라, 젊은지구 창조론이 실제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고, 전체 스펙트럼 속에서 어느 정도 위치와 유효성을 갖고 있는지도 잘 알려주고 있다.

김병규 / 기존에 기독교가 이야기했던 과학은 기독교와 과학의 관계 설정이 아니라, 창세기를 어떻게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반론을 펼칠까였다. 헨리 모리스와 존 위트콤의 <창세기 대홍수>가 1961년에 출판된 걸 생각하면 이전 논의는 젊은지구 창조론의 1세기였다고 볼 수 있다. 즉 모두가 젊은지구 창조론을 받아들여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창조와 진화…>는 복음주의권에서 포용할 수 있는 다양한 견해를 논증·논평하고 간결하게 정리해준 책으로서 의미가 있다. 

이원석 / <창조와 진화…>는 유신론적 진화론을 잘 소개하기 위해 더 많은 지면을 배분하고 있다. 그럼에도 논평자들의 글이 잘 보여주듯이 유신론적 진화론의 입장을 쉽게 이해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고, 이신론으로 오해하기 쉽다. 물론 논평자들의 반응은 미국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통해 한국의 상황도 충분히 읽을 수 있다고 본다.

유신론적 진화론의 입장을 좀 더 충실하게 반영하는 저작으로는 존 호트의 <과학과 종교, 상생의 길을 가다>(코기토)의 3장을 보라. 그는 갈등, 분리, 접촉, 지지의 네 가지 유형론을 통해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정리하는데, 3장에서 진화의 문제를 다룬다.

커밍 아웃?

정모세 / 아직까지도 한국의 상황에서 이 주제에 관해 자신이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 밝히는 게 부담스러울 수 있다. 자신이 유신론적 진화론자라고 밝힌다면 한국 교계에서는 갑작스런 ‘커밍아웃’처럼 느낄 수도 있다.

▲ 정지영 편집위원. "정보가 많으면 사람들의 입장이 다양화되고 그것을 근거로 대화와 소통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이런 과정이 여러 가지 원인들로 인해 생략되거나 통제되었다." ⓒ복음과상황 신철민
정지영 / 나에게는 이와 관련해서 고민조차 존재하지 않았었다. 교회에서 철저하게 젊은지구 창조론을 배웠다. 크로마뇽인, 네안데르탈인은 나에게 원숭이였던 것이다. 그렇게 교조적으로 자랐다. 젊은지구 창조론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에 서 있을 근거라도 있지만 나는 치열하게 고민할 만한 계기가 없었다.

이제 나는 젊은지구 창조론을 지지하지 않는다. 솔직히 하워드 반 틸의 유신론적 진화론에 굉장히 깊은 매력을 느낀다. 하나님이 스스로 당신을 제한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반 틸이 주장할 때 하나님의 자기 비우심이라는 진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 같아 큰 매력을 느낀다. 그러나 신학으로 견지하고 있는 입장에서 보자면 이신론적인 위험성은 여전히 반 틸의 입장에 거리를 두면서 전통적인 창조론자로 남게 하기도 한다. 나름대로 더 공부를 하긴 했지만, 여전히 과학이 신학을 정리하지 않고 내 신학이 과학을 정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병규 / 과학적 탐구의 결과로 어떤 확고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렵다. 한국의 창조과학 수준도 아직 그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기존 신앙적인 입장을 교조적이라고만 말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신앙은 모든 것이 증명되고 입증된 상태에서 쌓아 올려지는 게 아니다. 신앙은 근본적으로 신앙고백적일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렇게 본다면 교조적이라는 건 그 신앙고백이 고백으로서의 힘을 잃고 합리적 근거 대신 일방적 주장만 하게 되는 근본주의적 편협성을 띠는 경우에 해당하는 거라고 스스로 변호하고 싶은 생각도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아직 젊은지구 창조론 어디엔가 머물러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해석상의 문제에 대해서는 열린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 이전의 동식물의 죽음의 문제와 같은 성경 해석에 있어서는 주저함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정모세 / 한때는 창조과학회가 주장하는 내용을 따르는 것이 복음주의자라는 정체성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고 생각했었다. 대진화를 거부하고 소진화까지만 인정하는 게 한계라는 분위기에서 자랐다. 현재는 젊은지구 창조론은 반대하고 있고, 오랜지구 창조론과 유신론적 진화론 사이 어디쯤으로 내 입장이 분류될 수 있을 것 같다. 과학적 근거가 이런 변화의 결정적 이유는 아니다. 신앙적 입장에서 성경을 자세히 살펴볼 때, 즉 성경을 성경신학적으로 이해하면 할수록 젊은지구 창조론의 성경해석의 ‘일차원적’ 단순성을 느끼게 됐고, 성경은 더 많은 선택안을 열어놓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창세기 1장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온 세상 만물의 주님, 왕이시라는 것이지, ‘어떻게’ 창조가 일어났는지에는 별 관심이 없다. 이런 확신 속에서 다른 과학적 설명들이 방법론에 정직한 한 그것들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입장을 가질 수 있었다.

이원석 / 창조론은 문자 그대로 ‘론’이고 ‘론’은 해석이기 때문에 각각의 입장 모두 해석이라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러 신학과 과학의 만남의 조합인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우리 모두는 자신의 해석을 절대화 시킬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그렇다면 심지어 젊은지구 창조론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입장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젊은지구 창조론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기본적으로 모세 위원과 비슷한 입장이다. 아담의 창조에 대해서 대단히 다양한 입장이 있는데 이를 어떻게 해석할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아마 영원히 알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창조가 공동으로 작용한 것을 본다면 어느 하나의 입장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다. 창조론이 가진 진리의 측면과 유신론적 진화론의 측면 모두 갖고 있다. 하나님의 자기 제한, 십자가로 대표되는 케노시스, 하나님이 인간에게 맡기심을 주목하는 것을 유신론적 진화론에서 배워야 할 바라고 본다.

정지영 / 이렇게 이야기하면 젊은지구 창조론은 ‘초등’스럽고 덜 떨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다윈주의가 창조론을 비판할 때 젊은지구 창조론이 일말의 과학적 근거를 제공했고 이를 통해 내 신앙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굉장히 부족하고 지성적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회의론이나 다윈주의, 자연주의에 빠지고 나서 한참 후에 회개를 해서 탕자처럼 돌아오는 것보다는 그때 그 신앙을 지켜 세월을 잃어버리지 않은 게 나았다는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도 하게 된다.

▲ 정모세 편집위원. "이 책의 젊은지구 창조론자들은 성경을 역사적인 진리로 보기 위해서 젊은지구 창조론을 주장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지지하는 주장이 과학적 데이터에 의하면 불리하다는 것을 자인한다." ⓒ복음과상황 신철민
정모세 / 과학적 연구, 과학적 시도로서의 젊은지구 창조론의 정당성은 인정한다. 특히 이 책에 나오는 입장은 자기 자신의 장점과 약점에 대해 분명히 인식하면서, 자신의 과학적 탐구를 수행해 나가고 있다. 이는 전체 논의 자체를 풍성하게 한다. 이들은 젊은지구 창조론자로서의 자신의 탐구는 분명히 현재 과학의 성과에 비추어보면 여러 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한다. 다만 자신의 신앙의 일관성을 위해 연구를 해나가고 있고, 없는 증거를 사용하거나 논리적 비약을 이용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과학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밝힌다. 이 책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책에 나오는 입장이 사실상 단순하게 세 가지가 아니라는 점이다. 각각 “나는 어느 의견에 가깝지만 그래도 내 생각은 이렇게 다르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즉, 이 주제에 관한 기독교 내의 스펙트럼이 넓고 다양한 것을 예증한다. 신앙 양심의 선택안을 늘려줬다는 점에서 이 책은 우리의 숨통을 트여주고 있다.

다시(?) 풍성해져야 할 논의

정지영 / <뉴스앤조이>에 이진오 위원이 ‘창조론, 내부 논쟁 시작되다’라는 기사를 썼다.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이슈화하려고 과장한 것은 아닌가 한다. 다른 이론을 제기하면 기존의 사람들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하다. 양승훈 교수가 얘기했더니 즉각적으로 반발했다고 하는데 그건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원석 / 양승훈 교수의 입장 전환이 우리 논의의 발단이 되었다. 그의 태도가 한국교회에서 굉장히 용기 있는 태도로 인정되고 있다. 그만큼 한국교회가 경직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서 젊은지구 창조론 말고는 논의된 게 없다는 점이 아쉽다.

창조와 진화에 대해 입장을 개진하려는 이들은 이에 대한 역사적 전망을 갖출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서 마크 놀의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엠마오)을 추천하고 싶다. 창조과학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젊은지구 창조론의 시작은 제7일안식일예수재림교였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창조과학을 만들었는데 이런 (역사적) 배경은 잘 모른 채 절대적인 의견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정모세 / 정확히 젊은지구 창조론이 그때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 창조론은 예전부터 있었지만 그 생각을 과학에 근거해서 젊은지구 창조론이 과학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한 게 그때가 아닌가?

이원석 / 우리가 창조과학이라 명명하는 입장 자체는 한국교회에서의 역사가 2,30년일 뿐이다. 미국에서의 역사도 100년밖에 안 되고 대중화된 건 50년을 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에게 허용된 논의의 구도는, 기껏해야 젊은지구 창조론과 오랜지구 창조론뿐이다. 유신론적 진화론은 논의조차 될 수 없었던 게 우리의 슬픈 현실이다.

정지영 / 양승훈 교수가 회개라는 표현을 쓴 것은 창조과학회 사람들에게 도전을 주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고 본다. 그는 이미 2003년 전후로 젊은지구 창조론의 일부를 수정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자신의 입장은 갖고 있었지만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하길 원했고, 과학자, 신학자라는 정체성을 가진 자신의 지적, 신앙적 탐구 결과 2003년 결국 젊은지구 창조론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고 공공연하게 알렸다. 그것이 왜 2006년, 2007년 새로운 것인 양 소개되는 것인지에 대해서 의문이지만 어쨌든 그동안 대부분의 한국교회 신자들이 이런 부분에 대해 관심이 없었던 것은 분명하다.

양 교수의 회개와 그로 인해 불거진 전통적인 창조론자들의 반발은 70년대 후반 반 틸이 전통적인 창조론을 지지해온 칼빈대학교 교수들로부터도 배척받았던 양상과 비슷하게 보인다. 이는 우리의 논의가 그 만큼 시대에 많이 뒤쳐져 있다는 것뿐 아니라 지식의 획일성이 강조된 구조 안에 있었던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창조와 진화에 대한 우리의 입장과 자세를 곱씹을 수 있고, 논의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요소를 제공해 준다.

정모세 / 실제로 이 논의에 뛰어들고 진지하게 참여하는 사람들 중 교조주의적 창조론을 갖고 있는 사람은 정작 드물지 않을까 싶다. 창조론에 관한 논의가 교조주의적으로 형성되는 지점은 이 논의가 기독교 일반 대중에게로 넘어가는 지점 어디쯤이 아닐까. 사실 기독교 일반 대중이 이 주제에 별관심이 없다면, 다양한 입장이 자유롭게 존재해야 하는데, 거의 획일화되어 있다. 이는 중간에 어떤 획일화 필터를 거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정지영 / 정보가 많으면 사람들의 입장이 다양화되고 그것을 근거로 대화와 소통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이런 과정이 여러 가지 원인들로 인해 생략되거나 통제되었다. 때문에 과학과 신학의 대화에 있어서도, 창조론에 있어서도 젊은지구 창조론이 포기할 수 없는 기독교의 근본 진리인 것처럼 전달된 면이 있다.

정모세 /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결국 목회자들 때문이 아닐까? 교조주의적 창조론이 가장 흔한 이유는 결국 목회자들이 획일적으로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정지영 / 그렇다고 그 짐을 목회자에게 모두 떠넘기는 것은 과하다. 교조주의자들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전투적이라는 것이다. <창조와 진화…>에서나 한국 창조과학회의 대화는 상대 입장을 듣고 토론하는 게 아니라 내 견해만 얘기하는 수준으로 보인다. 

이원석 / 양 교수의 발언은 공정한 룰이 준수되는 경기장에서 나온 게 아니라 충격 요법을 줘서라도 공적인 발언권을 얻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한국교회에서 과학을 하는 기독교인과 한국교회 전체가 창조과학의 도입을 열렬히 환영한 이유는 선명성과 전투성에 매료되어서이다. 과학계에 몸담고 있는 기독교인, 목회자들, 평신도들 모두가 자신의 신앙 색채에 맞는 입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한국교회의 입맛에 맞지 않는 유신론적 진화론과 같은 입장은 교회 내의 논의 항목에 들어오지도 못했다. 지적설계를 포함한 오랜지구 창조론과 같은 입장은 지금에 와서야 조명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상황은 목회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투적인, 세상 앞에 말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해주는 한국교회의 총체적인 문제이며, 이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요구된다. 모호한 것을 어떻게든 명료하게 만들어버리려 한다. 모호한 것을 견딜 수 있는 역량이 우리에게는 부족하다.

이와 관련하여 일반 신자들이라면 스캇 펙의 <끝나지 않은 여행>, (열음사)을, 학자들이라면 조지 마스덴의 <기독교적 학문연구 @ 현대 학문세계>(IVP)등을 읽어보면 좋겠다. 이 책들은 전투적인 성격과 자기 입장에의 집착보다 대화할 수 있는 성격과 다른 입장에 대한 존중이 필요함을 알려준다. 나의 입장과 아주 다른 입장을 가진 이들과 대화하고, 이해하며, 그들을 관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참된 신앙이며, 바른 영성이 아니겠는가?

창조론-진화론 논쟁의 배경은?

정모세 / 창조과학이 전투적인 성격을 띠게 된 것이나 기독교인이 고민하지 않으면 자연스레 젊은지구 창조론으로 빠지게 되는 것은 사실 과거부터 지속되어온 자연주의적 세계관의 기독교 공격 때문이다. 근대화가 되고 자유주의 물결이 일어났을 때 기독교를 향한 최대 위협 중 하나는 자연주의적 세계관이었다. 그리고 그 선두주자는 진화론이었다. 그렇게 공격받은 것 때문에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다양한 견해 속에서도 창조과학 쪽으로 쏠린 건 아닐까.

이원석 / 근본주의의 창조과학 자체도 근대화의 반응으로 나왔다. 근대의 역사실증주의적 입장에 자신을 동화시킨 것은 근본주의나 자유주의 모두 매한가지다. 그리고 근본주의의 입장도 일관된 것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교회사 전체로 보면 더욱 그러하다. 어거스틴, 데이비슨, 마크 놀 등 많은 기독교 사상가들이 창세기 1장의 하루를 문자 그대로 보지 않았다. 워필드도 진화에 대해서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교회사를 보면, 오랜지구 창조론이나 유신론적 진화론 입장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한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러나 근본주의가 창조과학을 받아들이면서 우리에게 도그마가 되고 만 것이다.

정모세 / 한국에서 창조과학을 신봉한다고 말하는 분들이 이 책에 나오는 젊은지구 창조론자들의 글을 읽으면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의 젊은지구 창조론자들은 성경을 역사적인 진리로 보기 위해서 젊은지구 창조론을 주장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지지하는 주장이 과학적 데이터에 의하면 불리하다는 것을 자인한다. 주변에서 이렇게 솔직하게 과학적 증거상의 불리함을 이야기하는 젊은지구 창조론자를 본 적이 없다. 이 책의 논평자들도 이 책의 젊은지구 창조론자들의 솔직한 입장을 환영하고 칭찬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이 젊은지구 창조론을 가장 잘 대표하는 학자들은 아닌 것 같다.

정지영 / 이 책만 보자면 젊은지구 창조론자들을 칭찬한 건 옳은 일이다. 그것을 그대로 우리나라에 적용한다면 우리는 그 정도의 수준에 아직은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과학적 한계를 인정하지만 신앙의 눈으로 본다고 말하지 않고 창조과학이 더 과학적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 김병규 편집위원. "과학적 탐구의 결과로 어떤 확고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렵다. 한국의 창조과학 수준도 아직 그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기존 신앙적인 입장을 교조적이라고만 말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복음과상황 신철민
김병규 / 창조과학의 배경을 보면 과학적 탐구의 문제보다 성경을 변호하기 위한 목적이 우선이었다. 성경을 현대인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과학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서구 사회와 비교해 볼 때 기독교 국가도 아니고 기독교 세계관이 확고히 자리잡은 것도 아니다. 다만 기본적으로 동일한 것은 성경에 대한 신뢰이다. 우리나라에서의 창조과학, 더 크게는 과학과 기독교와의 관계에 대한 기독교적 논의는 서구사회가 기독교를 변호하기 위해 학문적으로 노력해 왔던 것만큼 논의가 활성화 되거나 학문적으로 논의될 정도로 표면에 부상한 중심 주제는 아니었다. 그렇게 볼 때 한국의 보수기독교계에서 이제야 좀 더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아닌가 한다.

이원석 / 근대화 이전, 랑케 이전의 역사 서술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사실(fact)의 여부가 아니라 진리(truth)의 여부였다. 성서의 복음서건 구약의 역사서건 과거의 객관적 재현으로 보지 않고 그걸 받는 수신자 집단이나 청중에 따라 자연스럽게 바꿀 수 있다고 보았다. 고대인들이나 중세인들이 그것을 문자적으로 보았다고 생각한 것이 자유주의의 착각이라면, 고대에도 없었을 과격한 문자주의적 해석을 성서에 가하고 있다는 것이 근본주의의 잘못이다. 즉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논의 자체가 근대에 들어서야 등장한 것이다. 스피노자가 정치적 공격의 일환으로 종교적 공격을 감행한 것이 역사비평의 시작이다. 이와 관련하여 좀 더 알고 싶다면 <문화번역과 성경읽기>(예영 커뮤니케이션)를 추천하고 싶다.

정지영 / 이원석 위원이 말한 내용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미국에서 벌어졌던 성경의 영감성과 그 권위에 대한 논쟁에서 도널드 맥킴이나 잭 로저스가 주장한 것의 창조와 진화론 버전이다. 소위 역사적 정통주의자들은 성경에 대한 무오성을 지켜왔는데 그게 아니고 성경에 대한 무오성이란 것 자체가 근본주의자, 구프린스턴 신학자들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게 그들 주장이었다.

창조과학에 관한 문제의 역사적 맥락은 있었다. 우리가 이해하는 창조과학이 철저하게 미국 근본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일반화된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창조과학의 이해에는 워필드나 찰스 핫지 등의 주장은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 그들은 다윈주의가 함의하고 있는 자연주의를 철저히 거부하되 진화론의 과학적 가능성을 수용하고자 한 학자들이였다. 

김병규 / 그런 의미에서 양 교수가 자신을 교조적이라고 말한 게 의미가 있다. 2004년 제71차 미국 정통장로교회(OPC: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총회에서 이들은 창조에 관한 내용을 보고 받았다. 기억하기로는 창세기의 하루를 24시간으로 보는 견해를 채택하되 다른 해석에 대한 가능성도 열어놓았다. 참고로 이 보고서는 OPC처럼 엄밀한 의미의 개혁주의를 추구하는 진영이 창조에 대해 갖고 있는 신학적 입장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http://opc.org/GA/CreationReport.pdf)

이원석 / 워필드도 진화론에 대해 개방적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진화론의 이면에 놓인 자연주의적 세계관이 아닌 진화론의 작동 기제에 대한 개방성이었다. 유신론적 진화론을 ‘능력으로 충만한 창조’로 바꾼 것도 ‘진화론’이라는 명칭에서 느껴지는 자연주의적 뉘앙스를 배제하기 위해서라고 보인다. 사실 이름을 바꾼 것 자체는 좋은 선택이었다. 그러나 좀 더 명확하게 와 닿는 이름이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정지영 / 마크 놀이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에서 현대 복음주의자들의 모델로 조나단 애드워즈, 워필드, 핫지 등을 제시했다. 한국 창조과학회 사람들이 그 시대에 분명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는 있지만 기독교 과학자로서 했어야 할 일들을 외면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 이원석 편집위원. "하나님의 자기 제한, 십자가로 대표되는 케노시스, 하나님이 인간에게 맡기심을 주목하는 것을 유신론적 진화론에서 배워야 할 바라고 본다." ⓒ복음과상황 신철민
이원석 / 마지막으로 이 책에 대해 한 가지 꼭 이야기하고 싶다. <창조와 진화…>에 나오는 유신론적 진화론을 논평한 사람들 대부분은 이 주장을 이신론으로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기 제한은 십자가에만 있지 않다. 십자가가 역사 전반에 드리우고 있다고 보는 입장이 유신론적 진화론이다. 자연과 인간의 손길에 의해 진행되는 역사 이면에서 하나님이 자기 은닉의 방식으로 함께 하신다고 파악한다. 논평자들은 무력(無力)함을 통해 표현된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방치(이신론)로 오해했다. 이러한 논의를 설득력 있게 전개하는 이로 존 호트를 들 수 있다. 그의 저작 중에 <다윈 안의 신>(지식의숲)과 <신과 진화에 관한 101가지 질문>(지성사)을 통해 진화의 신학(theology of evolution)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김병규 / 학위를 막 받은 사람이 보수적인 신학교에 들어가면 자신은 자유주의자가 아니라고 입증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나라에서 능력으로 충만한 창조를 주장하려면, 자신이 이신론이 아닌 기독교적 유신론의 입장에 있다는 것, 능력으로 충만한 창조가 창조세계에서 피조물과 창조자의 작동 방식을 논하는 또 하나의 논의라는 것을 이해시킬 책임이 있지 않을까. (웃음) 어쨌든 양승훈 교수가 한국교회의 학문적 논의를 촉발시킨 계기가 되었다. 이를 통해 일반 기독교인도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는 것을 주목하자.

정리 이종연 기자 limpid@newsnjoy.co.kr
사진 신철민 기자
 

창조론 용어사전
 

젊은 지구론, 오랜 지구론, 유신론적 진화론이 어떻게 다른가요?

창조론자들은 크게 젊은 지구론, 오랜 지구론, 유신론적 진화론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입장은 모두 창조주 하나님과 성경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세부적인 창조의 방법을 다르게 이해한다는 점에서 크게 나뉜다. 

젊은 지구론자들은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우주를 창조하셨다고 믿는다. 지구 역사에서 유일한 전 지구적 격변은 노아의 홍수이며, 이로 인해 대부분의 지층과 화석이 형성되었고, 지구의 나이를 1만년 이내라고 본다. 이들은 현대 우주론의 표준 모델인 대폭발 이론이나 현대 과학이 절대 연대 측정법으로 인정하는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측정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창조과학자들이 대표적인 지지자들이다. 이들이 근거로 삼는 것은 성경의 문자적 해석이다.

오랜 지구론자들은 하나님이 자연적인 방법과 초자연적인 방법을 둘 다 사용해서 창조했다고 본다. 하나님의 창조를 전제하면서 이들은 현대의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영역은 자연적인 방법으로, 그렇지 못한 영역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창조론들 중에서 진행적 창조론이나 지적설계론, 18세기 영국에서 유행했던 자연신학적 접근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입장은 하나님이 어디까지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창조하셨고, 어디서부터 자연 법칙을 따라 창조하셨는지를 판단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문제가 있다.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하나님이 현대 과학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은 과정을 통해 자연적인 방법으로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하나님이 대폭발이라는 과학적인 법칙을 따라 우주를 창조했고, 화학진화의 과정을 통해 최초의 생명체가 출현하게 했으며, 자연선택이라는 자연의 법칙을 따라 현재와 같은 다양한 생명 세계를 창조하셨다고 본다.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의 입장은 창조주를 인정한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자연주의자들의 주장과 동일하다.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