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호 특집-한 창조과학자의 ‘회심’을 옹호하며]창조론 vs. 진화론 논쟁에 낀 복음주의
인류역사에서 오랫동안 과학과 종교 사이의 관계는 어려운 수수께끼였다. 중세에는 교회가 세상에 지적으로 군림하면서 과학이 교회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과학적 진리가 교회의 신학적 검열을 받아야 했으므로 객관적 진리를 제대로 밝힐 수 없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재판이 대표적 예가 될 것이다. 하지만 과학혁명이후 둘 사이의 관계는 극적으로 역전되었다. 신대륙의 발견, 만유인력법칙, 다윈의 진화론 등을 통해 과학은 종교의 감시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독자적 권위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종교의 역할은 자꾸만 축소되었다. 종교적 명제와 과학적 발견이 충돌할 때, 세상은 더 이상 종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종교마저 자신의 진리를 보장받기 위해 과학의 눈치를 살피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런 역사를 배경으로 미국 복음주의와 과학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특별히 창조와 진화의 관계에 주목할 때, 우리는 왜곡된 역사,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한 관계, 그리고 그 속에 담겨진 수많은 신학적 논제들을 만나게 된다. 심각한 적대감과 치열한 전투의 현장으로 기억되어 온 그 역사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하고, 무엇을 기억해야 하며, 또 무엇을 반성하고 고민해야 할까? 그 복잡하고 거칠었던 기억, 그러나 반복해서 다시 꺼내 볼 수밖에 없는 앨범 속으로 살며시 들어가 보자.
복음주의 신학과 과학은 어떤 길을 함께 걸어 왔는가?
미국 복음주의 내에서 신학과 과학의 관계에 대해서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이 공존해 왔다. 한쪽은 신학을 과학의 여왕으로 규정하고, 과학 혹은 과학적 방법이 신학의 진리를 입증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으며 양자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반면, 다른 쪽에서는 과학과 신학은 기본 전제와 출발점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물과 기름처럼 융화될 수 없다고 그 관계를 부정했다. 이런 긴장 관계는 미국이 건국된 17세기부터 지속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미국 복음주의 내에서 과학과 신학, 혹은 이성과 믿음의 공존을 인정하는 입장이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은 미국에서 복음주의와 계몽주의 간의 관계를 연구한 역사가 헨리 메이(Henry May)에 의해 보다 분명하게 설명되었다. 그에 따르면, 미국에는 4가지 종류의 계몽주의가 존재했다. 첫 번째 유형은 뉴턴과 로크가 주도한 “온건한 계몽주의”로서, 질서, 균형, 그리고 종교적 타협의 이상을 추구했다. 둘째 유형은 “회의적 계몽주의”로서, 볼테르가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셋째는 루소로 대표되는 “혁명적 계몽주의”로서,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려고 했다. 마지막 범주에 속하는 것은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에서 기원한 “교훈적 계몽주의”였다. 이것은 회의주의와 혁명에는 반대했으나, 과학, 합리성, 그리고 기독교 전통에 대한 18세기의 헌신을 계승하려 했다. 메이에 따르면, 복음주의는 이 4가지 계몽주의 가운데 “온건한 계몽주의”와 “교훈적 계몽주의”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즉, 미국 복음주의는 온건하고 교훈적인 계몽주의 영향 하에 합리성과 과학적 사고를 적극 수용함으로써, 기독교와 과학 간의 상보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양자 간의 긴밀한 관계는 19세기 복음주의 교회 내에서 빈번하게 발견된다. 예를 들면, 부흥사인 찰스 피니는 부흥을 일으키는 것과 곡물을 생산하는 것 모두 과학적이라고 주장했으며, 프린스턴 신학교의 벤자민 워필드 교수는 참된 과학이 결국 참된 종교를 증진시킬 것이라고 확신했다. 침례교도로서 19세기 초반에 미국 대학의 대표적 교과서를 집필했던 프란시스 웨이랜드(Francis Wayland)는 윤리학이 물리학처럼 과학이라고 주장했고, 이성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보충하기 위해,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뿐만 아니라 1854년에 루이스 그린(Lewis W. Green)은 “자연과학의 신학”이 “성경의 신학”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고 주장하며, 양자 모두 우리에게 현명하고, 자애롭고, 정돈된 우주의 통치자에 대해 말해준다고 설파했다.
이처럼, 미국에서 복음주의와 과학 간의 관계는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부정적이지 않았다. 계몽주의의 영향권에서 살았던 18-19세기의 복음주의자들은 계몽주의의 긍정적 측면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자신들의 신학적 변증작업에 효과적으로 활용하였다. 그들은 과학에 대해 무지하지 않았으며, 과학 내에 담긴 부정적 요소들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합리성과 과학적 방법론의 효용성을 정확히 간파하면서, 과학과 복음주의 신학 간의 창조적․상보적 만남을 과감히 추구했다. 때로는 부흥의 도구로, 때로는 윤리학적 토대로, 때로는 성서적 변증의 도구로 과학적 방법을 다양하고 탄력적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창조론 vs. 진화론
적절한 수준의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대체로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던 복음주의와 과학은 19세기 후반에 진화론이 급속히 확산되면서 상호 불신과 대립의 투쟁관계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사실, 1859년에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된 이후, 즉각적으로 모든 복음주의자들이 진화론에 맹공을 퍼부은 것은 아니었다. 이 문제에 대한 복음주의의 반응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했다. 대체로 보수적 평신도들은 생물학적 진화론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보였으나, 보수적 엘리트들 내에서는 기독교와 진화론의 화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측과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다양한 해법을 적극적으로 제공하던 측으로 양분되었다. 그리고 초반에 진화론을 반대한 사람들 중에는 보수적 기독교인들 못지않게 진보주의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복음주의 진영 내에는 진화론에 대해 경계하고 비판하는 목소리들이 대세를 이루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먼저, 점점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생물학적 진화론과 창세기에 대한 문자적 해석을 조화시키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둘째, 진화론을 수용할 경우, 인간 존엄성의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고 우려했다. 셋째, 진화론이 목적론을 부정하면서 우연에 의한 우주를 주장하기 때문에, 무신론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런 근심과 의혹은 두 가지 흐름에 의해 더욱 극단적으로 가속화되었다. 일차적으로, 미국의 과학계에서 과학과 종교의 분리를 강력히 추구하기 시작했다. 문명의 발전을 위해서는 과학이 종교를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회학자 오귀스트 콩트의 입장이 미국 과학계에 큰 영향을 끼치면서, 과학의 영역 내에서 기독교 신앙을 축출하는 현상이 뚜렷이 나타났다. 콩트를 신봉했던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존 듀이는 종교적 편견에 대한 과학의 승리를 주창하면서, 이 시대의 분위기를 대변했다. 더 이상 학계 내에서 신앙에 근거한 발언이 설득력을 얻을 수 없었고, 지성인들이 신앙을 포기하는 것은 하나의 유행처럼 되었다. 역사학자 조지 말스덴의 말처럼, “과학에 대한 자연주의적 정의가 하나의 방법론에서 지배적인 학문적 세계관으로 빠르게 변모되었다.”
이 같은 과학의 급속한 세속화 경향 하에, 전투적 복음주의자들, 즉 근본주의자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근본주의 탄생에는 몇 가지 신학적 흐름들이 영향을 끼쳤다. 첫째,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영향이다. 미래에 대한 비관적 인식 위에 이 묵시적 종말론은 성경에 대한 문자적 해석을 해석학적 원칙으로 삼았다. 둘째, 프린스톤 신학이다. 이 신학을 통해 소위 “성서무오설”(inerrancy)이 정교한 교리로 출현하게 되었다. 셋째,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을 통해, 성경에 대한 과학적 접근 및 상식적 이해의 가능성이 열렸다. 이런 지적 흐름들이 상호융합의 과정을 거쳐 근본주의라는 전투적 복음주의가 탄생한 것이다. 결국, 이런 성경의 절대적 권위, 문자적 해석, 그리고 과학적․상식적 이해를 중심으로 한 근본주의적 성서관은 자연스럽게 창세기에 대한 문자적 해석을 부정함으로써 성서의 절대권위를 위협하는 생물학적 진화론을 단호히 거부하게 만들었다.
결국, 이런 극단적 대결국면은 1925년 테네시주 데이튼에서 벌어진 ‘스코프스 재판’을 통해 절정에 달하였다. 진화론자들과 창조론자들 간의 치열한 결투였던 이 재판에서 창조론자들은 몰락하고, 이후 진화론자들이 미국 공교육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몰락한 창조론자들은 1960년대에 창조과학 운동을 통해 부활하기 시작했고, 1970년 이후 근본주의자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급상승하면서 미국의 정계와 교육계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신학의 자리
이제 결론적으로, 과학과 종교, 창조와 진화 간의 이처럼 복잡한 관계를 염두에 두면서, 복음주의 신학이 설 자리,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감당할 사명에 대해 몇 가지 언급하고자 한다. 먼저, 신학자들은 미국 복음주의 내에 창조와 진화에 대한 다양한 입장들이 공존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현재 복음주의 내에는 창조과학회의 입장, 즉 성경에 대한 문자적 해석을 근거로, 성경의 창조기록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려는 노력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복음주의 내의 유일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진화론의 출현이후 지금까지 창조와 진화를 조화시키려는 노력들이 소위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에 의해 줄기차게 지속되었고, 적지 않은 수의 복음주의자들이 이런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왔다. 또 복음주의 창조론자들 내에도 창조과학운동과는 달리, 보다 유연한 성서해석에 근거하여, 지구의 나이를 훨씬 많게 계산하는 그룹이 있으며, 창조주에 대해서도 전통적 개념의 신적 존재로 신앙하는 진영과 “지적 설계자”라는 보다 추상적 개념을 옹호하는 진영 등, 그 범위가 매우 다양하다. 이런 면에서 창조와 진화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배제한 채, 특정한 입장만을 일방적으로 추종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따라서 이런 다양한 입장들에 대한 신학자들의 폭넓은 연구와 소개가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둘째, 신학자들은 전통적으로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이 과학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과학의 자연주의적 세계관을 비판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18세기 이후 계몽주의 영향 하에 자신의 정신문화를 형성해 왔다. 복음주의도 그런 영향 하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해 온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복음주의자들은 과학의 귀납법과 합리적 사고방식을 적극 수용하며, 자신들의 부흥운동과 신학적 변증작업에 활용했었다. 따라서 부흥운동과 과학이 본질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사이는 아니다. 다만 진화론으로 대표되는 과학적 세계관이 전통적 성서해석을 부정하고, 무신론적 세계관을 과도하게 신봉하기 때문이다. 그런 세계관이 기독교적 세계관과 상충될 뿐 아니라, 그것의 부정적인 윤리적․사회적 파장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학자들은 이 같은 과학과 종교, 진화와 창조 간의 복잡한 관계를 정확히 파악함으로써 과학과 종교 간의 적절한 관계를 탐색하고, 과학의 자연주의적 세계관이 지닌 한계와 위험을 면밀히 검토/분석함으로써, 과학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 권위 있는 조언자 역할을 충실히 감당해야 할 것이다.
셋째, 신학자들은 창조론이 본질을 상실한 채 정치․경제적으로 악용되는 것에 대해 비판적 감시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미국 복음주의의 경우, 창조론이 근본주의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창조론자들은 근본주의적 반(反) 낙태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 제기된 복음주의 내부의 자기반성에 의하면, 창조론자들이 태아의 생명에 대해 과민반응을 보이는 반면, 정작 환경문제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소극적․부정적 입장을 고집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적 모순에 빠져 있다고 한다. 사실, 근본주의자들은 처음부터 자본주의의 절대적 옹호자들이었고, 현재에도 상당수의 근본주의적 기관들 및 연구단체들이 대기업들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다. 그런데 미국의 기업들 대부분이 환경운동이나 환경관련 법규와 심각한 갈등 속에 있으므로, 이들과 정치적․이념적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창조론자들이 현실적으로 그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으며, 그 결과 환경문제에 침묵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태아의 생명에 관심을 갖는 것과 동일한 논리와 이유에서, 자연을 하나님의 창조물로 간주하며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환경문제에 관심을 가져야함에도 불구하고, 경제 및 정치와의 미묘한 그러나 끈끈한 이해관계 때문에, 자신들의 주장과 모순되는 상황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창조론이 정치 및 경제와 맺고 있는 교묘한 유착관계를 파헤치면서, 창조론이 자신들의 본래적 사명에 충실할 수 있도록 예언자적 기능을 용감하게 수행해야 한다.
끝으로, 신학자들은 진화론의 다양한 차원들을 인식하고, 그것의 부정적 혹은 긍정적 적용 가능성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신학자들이 생물학적 진화론만큼, 혹은 그것보다 더 깊이 사회적 진화론에 대해 학문적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1925년도 스코프스 재판에서 창조론 측을 변호했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이 진화론을 반대했던 이유는 진화론이 지닌 사회적 함의에 대해 깊이 우려했기 때문이다. 물론 보수적 장로교인으로서 그가 생물학적 진화론을 쉽게 용납할 수 없었지만, 민주당의 대표적 지도자였던 그가 진화론에 담긴 사회적․경제적 차원의 부정적 가능성도 결코 간과할 수 없었었던 것이다. 생물학적 진화론에 근거한 우생학은 제국주의적 통치이념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고, 적자생존의 법칙이 경제학에 무비판적으로 적용될 때, 무자비한 자본주의의 정글법칙으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진화론의 다양한 차원과 가능성을 날카롭게 포착하여, 긍정적 측면성은 지속적으로 발굴해서 탄력적으로 현실에 적용하되, 부정적 가능성에 대해서는 현명하고 단호하게 대처하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 따라서 현재 복음주의 신학에서 진화와 창조의 문제는 단순한 지적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라, 복음주의 신학이 보다 책임 있고 실천적인 학문으로 성숙하기 위해 반드시 씨름해야 할 버거운 그러나 가치 있는 상대임에 틀림없다.
배덕만 교수(복음신학대학원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