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호 메시아 예수의 복음 ①]새 출애굽의 소식

마가복음 1장 1~15절

2009-01-21     복음과상황

제목(1절)

마가복음의 제목은 본래 ‘마가복음’이 아니다. 그것은 후대 사람들이 붙인 것이며, 이 책의 본래 제목은 마가복음 1:1에 담겨 있다. 마가복음 1:1은 정관사 없이 명사로 시작하고 동사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러한 구문은 책 제목에 쓰인다(예를 들어 요한계시록 1:1). 마가복음은 단락 제목에 제목을 다는 곳이 없으므로, 마가복음 1:1은 서두의 제목이 아니라 책 제목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제목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입문'이다. 이것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번역한 것은 잘못이다. 우선 ‘하나님의 아들’은 필사자들이 후대에 추가한 것이므로 빼야 한다(졸저, <마가복음의 원문을 찾아서>[용인: 웨스트민스터출판부, 2006], 21~29 참조). 또한 ‘시작’은 헬라어 ‘아르케’를 번역한 것인데, 이것은 ‘더 심화된 이해를 위한 기초,’ 즉 ‘입문’(introduction)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BDAG, 138 참조). 그런데, 이 두 가지 뜻 중에서 ‘입문’이라는 뜻이 더 적합하다. 왜냐하면, ‘시작’은 책의 제목으로서는 어색하며 ‘입문’이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의 제목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입문’이다.
 
마가복음의 제목은 마가복음이 어떠한 책인지 알려준다. 이것은 예수에 관한 책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로 소개하는 책이며, 예수와 관련된 메시지(복음)를 전달하는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은 이러한 메시지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기초 단계를 위한 책이다. 즉 입문서이다. 우리는 복음서를 연구할 때에도, 마가복음을 통해서 입문해야 한다. 마가복음을 모르고 예수의 복음을 이해하려고 하면 기초가 약하며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마가복음을 잘 깨달은 사람은 다른 복음서들을 잘 이해할 수 있는 튼튼한 기초를 얻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부터 읽으며 복음서에 입문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이것은 입문서와 중급 서적을 건너 띄고 고급 단계부터 시작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새 출애굽의 징조 (2~8절)

마가복음은 제목에 이어 구약성경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인용된 구절은 출애굽기 23:20, 말라기 3:1, 이사야 40:3을 결합한 것이다. 이러한 복합 인용은 쿰란 문헌이나 신약성서에 종종 나타난다. 마가복음은 3~4절에 복합되어 인용된 구절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서 이사야를 언급한다. 이사야 40:3은 광야에서 한 소리가 외친다고 묘사하므로 광야에서 등장하여 세례를 준 요한을 볼 때 연상되는 본문이다. 마가복음은 이 구약의 본문이 세례 요한에게서 성취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복합 인용된 여러 구약 본문들을 ‘선지자 이사야의 글’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이사야 40:3은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고 하는데, 이것은 40:1에서 이어지는 기쁜 소식으로부터 이어지는 말씀이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이사야 40:1~2).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죄를 지은 결과 바벨론에서 포로로 잡혀가 노역을 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 벌을 다 받아 그 죄가 사함 받았고 노역의 때가 끝났다. 이제 바벨론에서 유대 땅으로 돌아갈 수 있다. 바벨론과 유대 땅 사이에는 광야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데리고 유대 땅으로 가실 때, 이 광야를 통과하신다. 그래서 이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해야 한다.
 
마가복음은 이사야를 배경으로 세례 요한의 사역을 해석한다. 요한이 광야에서 세례를 주며 죄 사함을 받기 위한 회개를 선포한 것은 이사야 40:3이 말하는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는 사역이다. 이사야 40:1~3에 의하면 이것은 바벨론에서의 포로생활의 때가 끝이 났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행하는 것이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는 사역이라면 이것은 곧 새 출애굽이 가까이 온 징조이다.
 
세례 요한은 왜 회개를 새 출애굽을 위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라 여겼을까? 구약 레위기 26장에 그 단서가 있다. 레위기 26:38, 43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멸망의 원인이 죄 이다. 그런데, 레위기 26:40~42에 의하면 회개는 회복을 가져오기 때문에 회개야말로 임박한 새 출애굽을 위한 가장 적절한 준비임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나를 거스른 잘못으로 자기의 죄악과 그들의 조상의 죄악을 자복하고 또 그들이 내게 대항하므로 나도 그들에게 대항하여 내가 그들을 그들의 원수들의 땅으로 끌어갔음을 깨닫고 그 할례 받지 아니한 그들의 마음이 낮아져서 그들의 죄악의 형벌을 기쁘게 받으면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기억하고 그 땅을 기억하리라(레위기 26:40~42).

죄를 깨닫고 겸손히 벌을 받으면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한다고 하신다. 이 언약은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영원히 주겠다는 약속이다.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창세기 17:8). 하나님께서 잠시 그의 백성이 타국에 포로로 잡혀가게 하셔도 그들이 회개하면 이 약속을 기억하고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 그 땅을 영원한 기업으로 가지게 하신다.
 
당시 유대인들은 비록 가나안 땅에 살고 있었으나 로마에게 주권을 빼앗겼다. 그들에게 광야에서 베푸는 세례 요한의 회개의 세례는 이스라엘의 주권 회복을 위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는 행위로 여겨졌을 것이다. 많은 유대인들이 세례 요한을 따라 광야로 나아갔다. 모세를 따라 광야로 나간 그들의 조상들처럼 그렇게 자유의 길을 찾아 나아갔다. 광야는 첫 번 째 출애굽의 추억이 서린 곳이었다. 그 곳에서 이제 새 출애굽이 시작되고 있었다.
 
6절은 세례 요한의 복장을 묘사한다.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이러한 묘사는 구약성경에 묘사된 엘리야를 연상시킨다.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열왕기하 1:8). 그리하여 세례 요한의 정체가 엘리야와 관련이 있음을 암시한다. 말라기 4:5은 종말에 엘리야가 올 것을 예언한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마가복음 1:6은 세례 요한의 복장 묘사를 통하여 세례 요한이 바로 말라기 4:5이 묘사하는 엘리야임을 암시한다. 이제 종말 직전에 등장하는 그 엘리야가 등장했다. 이것은 종말이 곧 다가온다는 징조이다.
 
세례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이 어떤 분인지 자신과 비교하여 묘사한다.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7절). 신발 끈을 푸는 일은 노예가 하는 일 중에서도 가장 비천한 일에 속하였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가 그 앞에서 종노릇도 할 수 없으리만큼 위대한 분이 오신다. 그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8절).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일은 새 출애굽 때 발생하는 현상이다.

내가 그들을 만민 중에서 돌아오게 하고 적국 중에서 모아 내어 많은 민족이 보는 데에서 그들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함을 나타낼 때라 전에는 내가 그들이 사로잡혀 여러 나라에 이르게 하였거니와 후에는 내가 그들을 모아 고국 땅으로 돌아오게 하고 그 한 사람도 이방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내가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인 줄을 알리라 내가 다시는 내 얼굴을 그들에게 가리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내 영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쏟았음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에스겔 39:27~29).

성령으로 세례를 베푼다는 것은 새 출애굽을 행한다는 뜻과 다름없다. 이제 세례 요한 뒤에 한 분이 오신다. 그 분은 새 출애굽을 행하실 것이다. 그 분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성령을 받을 것이며 새 출애굽이 발생할 것이다. 세례 요한은 그 분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분이 누구인지는 마가복음 문맥이 분명히 암시한다. 그 분은 예수이다. 곧 이어 예수께서 등장하시기 때문이다(9절).

예수의 정체(9~11절)

예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이것은 물 속에 잠겼다가 나오는 침례였음이 분명하다. “물에서 올라오실새”(10절)라는 표현은 물 속에 잠겼었음을 전제한 것이다. 예수께서 받으신 세례는 내용상 침례였다. 그렇다면 침례를 반대하기보다는 권장하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인들의 마땅한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이 부족한 지역에서는 침례를 행할 수 없겠지만 물이 충분한 지역에서는 가급적 침례를 행해야 할 것이다.
 
하늘이 갈라지면서 성령이 내려오고 하늘에서부터 소리가 났다. 따라서 이 소리는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였다(11절). 이 말씀은 예수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다. 이 짧은 말씀에 예수의 정체에 관한 정보가 담겨있다.
 
하나님은 예수를 어떤 분이라고 하셨는가? ‘내 아들’이라고 하셨다. 즉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어떤 존재인가? 시편 2:7에 그 단서가 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이어지는 구절은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 잘 묘사한다.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시편 2:8~9)

하나님의 아들은 이방 나라들을 정복하여 땅 끝까지 이르는 이스라엘의 왕이다. 이 왕은 여호와께서 직접 세우신 왕이다(6절). 그리하여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즉 메시아, 그리스도)라고 불려진다(2절). 마가복음 14:61은 ‘하나님의 아들’과 ‘메시아’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한다.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여기서 ‘찬송 받을 이’는 하나님을 가리키므로 ‘찬송 받을 이의 아들’이란 곧 ‘하나님의 아들’이다.
 
1세기 문헌인 에스라 4서 7:28에도 ‘나의 아들 메시아’라는 표현이 등장하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메시아 칭호로 널리 쓰였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신약성서 이전에 기록된 쿰란 문헌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은 메시아를 가리키는 용어로 등장한다. 4Q246 2:1은 메시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며, 그들은 그를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 부를 것이다.

그런데, 마가복음에서는 하나님께서 예수를 ‘나의 아들’이라고 부르신다. 이것은 당시 언어 세계 속에서 이해할 때 예수는 메시아라는 선언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예수의 정체를 알려주셨다.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면 예수께서 바로 메시아다. 즉, 시편 2편에 나오는 하나님의 메시아로서 온 세상을 정복하는 왕이다.
 
하나님의 음성은 이어서 예수의 정체에 대하여 부연 설명한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이 말씀은 이사야 42:1을 배경으로 예수께서 누구인지 암시한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이사야 42:1). 여기서 하나님의 기뻐하는 자는 하나님의 종을 가리킨다. 이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영(성령)을 받은 존재이다. 마가복음 1:10은 예수께서 성령을 받았음을 묘사하므로 이사야 42:1이 마가복음 1:11의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의 배경이 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종이 어떠한 존재인지는 이사야 42:2~4이 자세히 알려준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하나님의 종은 세상에 정의를 세우는 분인데, 섬들(이방나라들)이 그 교훈을 소망할 것이다. 하나님의 종은 온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데, 파괴적 군사력이 아니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는 자비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다. 따라서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고 하실 때 하나님은 예수가 군사적 메시아가 아니라 정의와 자비의 메시아이며 유대인만을 위한 메시아가 아니라 이방인들도 위한 메시아임을 밝히신 것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종은 고난을 당하게 됨을 이사야 53장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께서 고난을 받게 될 메시아임을 암시한다. 이사야 53장은 그 고난의 이유까지 알려준다. 그 고난은 사람들의 죄악의 형벌을 대신 받는 고난이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이사야 53:4~6).

예수께서 많은 사람들의 죄를 위해 대신 고난을 당하는 메시아라는 것은 교회가 만든 신학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계시하신 바였다. 이 계시를 받은 예수는 이것을 받아들이고 당시 사람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길을 가신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람들이 상상하지도 못한 새로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며, 예수는 그 새로운 길을 순종하며 걸어가신 메시아다.

광야의 예수(12~13절)

예수께서 광야에 40일 계셨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광야에 40년 있었던 것을 연상시킨다. 출애굽 때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40년간 지낸 것처럼 예수께서는 40일간 광야에 계신다. 이러한 비교를 통해 마가복음은 예수와 함께 새 출애굽이 발생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옛 출애굽 때에나 새 출애굽 때나 광야는 모두 시험의 장소였다. 예수께서도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다(13절). 그렇지만 광야에서의 시험에 실패한 이스라엘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시험이 이기셨음이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에 암시되어 있다. 마가복음에서는 ‘에이미’ 동사가 ‘메따’와 함께 사용된 경우 “친화적으로 ~와 함께 있다”는 뜻을 가진다(3:14; 4:36; 5:18; 14:67). 그러므로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는 예수께서 들짐승과 친화적으로 함께 계셨다는 뜻이다. 이것은 아담이 야생동물과 에덴에서 친화적으로 함께 있었던 것을 연상시키며 이사야 11:6~8을 기억나게 한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아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이사야 11:6~8).

여기서 이러한 일이 발생하는 ‘그때’는 언제인가? 그 때는 “주께서 다시 그의 손을 펴사 그의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게 하실” 때이다(이사야 11:11). 즉,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돌아오는 새 출애굽 때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들짐승과 함께 계셨다는 묘사는 예수와 함께 새 출애굽이 발생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제 새 출애굽을 통한 이스라엘의 회복과 에덴의 회복이 예수와 함께 발생하고 있다.

예수께서 전한 하나님의 복음(14~15절)

예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복음을 마가복음은 간단하게 요약한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5절). 여기서 ‘때’는 ‘까이로스’의 번역인데, 이 단어는 결정적 순간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마가복음에서는 특정한 기간을 가리키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 10:30에는 ‘현세’란 표현이 나오는데 여기서 ‘세’는 ‘까이로스’의 번역이다. 따라서 ‘때가 찼다’는 표현이 결정적 구원의 순간이 도래했다고 해석될 필연성이 없다. 이것은 어떠한 기간이 차서 이제 남은 시간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때가 찼다’는 말은 한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는 뜻임을 누가복음 21:24의 용례를 통해 알 수 있다. 누가복음 21:24은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고 하는데, 여기서 ‘때가 차기까지’는 “이방인이 예루살렘을 지배하는 시대가 막을 내릴 때까지”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70인역 애가 4:18에서도 ‘플레로오’(꽉차다) 동사는 한 시대가 막을 내린다는 의미로 쓰였다. 마가복음 1:15도 ‘플레로오’(꽉차다) 동사를 이러한 의미로 사용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가복음 1:15에 나타난 예수의 선포는 한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는 선포이다.
 
이제 옛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 옛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이어지는 말씀이 알려준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시대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은 ‘가까이 와 있다’는 동사와 함께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막을 내리는 옛 시대는 하나님나라와 대조된 시대로서 사탄이 왕 노릇하는 시대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은 이미 왔다는 말은 아니다. 로마서 13:12에서 ‘가까이 오다’(엥기조) 동사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근접 미래를 가리키는 데 사용한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낮이 가까웠다는 말은 아직 낮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한다. 마가복음에서도 이 단어는 가까운 미래에 도래함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을 것이다. 이 복음에 대한 바른 반응은 회개와 믿음이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마가복음 1:15). 하나님나라가 오기 전 짧은 기간 동안 아직 돌이킬 기회가 있다. 돌이키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나라가 시작되는 과정에서 예수를 반대하고 죽이는 자들에게 가담하는 실수를 범하게 될 것이다. 지금 돌이키지 않으면 사탄의 나라에 속하여 살다가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반대하는 일을 하게 된다.
 

<성경공부를 위한 토론 문제>
 

1. (관찰) 세례 요한의 세례는 죄 사함을 위해 무엇을 하는 표시였나요? (4절)

2. (해석) 회개가 새 출애굽의 준비가 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레위기 26:40~42)

3. (관찰) 세례 요한의 복장은 어떠했나요? (6절)

4. (해석) 세례 요한의 복장은 세례 요한이 누구임을 암시하나요? (열왕기하 1:8; 말라기 4:5)

5. (해석)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일은 언제 발생하는 일인가요? (에스겔 39:27~29)

6. (관찰) 하늘에서 들린 음성은 예수를 누구라고 하는가요? (11절)

7. (해석) ‘하나님의 아들’이란 어떤 존재인가요? (시편 2:2, 6~9)

8. (해석)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예수님의 정체와 관련하여 무엇을 알려주는가요? (이사야 42:1~4; 이사야 53장)

9. (관찰) 예수님은 광야에서 무엇과 함께 계셨나요? (13절)

10. (해석) 예수께서 들짐승과 함께 계심은 이사야 11:6~8을 배경으로 볼 때, 어떤 의미를 가지나요?

11. (관찰) 예수께서 전하신 하나님나라 복음의 내용은 무엇인가요? (15절)

12. (해석) ‘때가 찼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누가복음 21:24; 70인역 애가 4:18)

13. (해석)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14. (관찰)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바른 반응은 무엇인가요? (15절)

15. (적용) ‘회개’란 사고방식의 전환을 포함한다. 우리가 하나님나라와 관련하여 오늘날 전환해야 하는 사고의 방식은 특별히 무엇일까요? 나는 특히 어떻게 사고방식을 바꾸어야 할까요?


신현우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교수) shin@wgst.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