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호 메시아 예수의 복음⑨] 유대 지역에서의 새 출애굽 표적

마가복음 6장 31~56절

2009-09-24     신현우

오병이어 표적 (31~44절)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여 명을 배불리 먹인 이야기는 단순한 기적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새 출애굽 이야기이며, 이야기의 주인공인 예수께서 새 출애굽을 가져오시는 분, 즉 메시아라는 표적이다. 오병이어 표적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현상과 다른 특이한 현상이므로 표적으로서의 가치가 있다. 마가복음은 이 표적을 새 출애굽 표적으로 묘사한다.

이 표적은 광야(한적한 곳)에서 발생하였다(32절). 광야는 출애굽한 히브리인들이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먹고 40년 동안 살아간 곳이다. 그러므로 광야는 출애굽을 연상시키는 장소다. 그곳에서 초자연적인 기적을 통해 물고기와 떡을 먹게 된 것도 출애굽한 히브리인들이 광야에서 메추라기와 만나를 먹고 살아간 것을 기억나게 한다.

이 광야로 나아온 큰 무리를 보고 예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다. 마가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 같았다고 한다(34절). 이러한 묘사도 출애굽 주제와 관련된다. 민수기 27장 16~17절은 모세를 잃은 히브리인들을 ‘목자 없는 양’이라고 묘사하기 때문이다.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하건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이 구절은 모세가 목자 역할을 하였음을 전제한다. 이제 모세가 죽고 나면 모세를 대신하여 히브리인들을 인도할 지도자가 필요하므로 모세는 하나님께 그러한 사람을 세워달라고 기도한다. 예수께서 무리를 ‘목자 없는 양’ 같이 여기셨다는 묘사는 이 기도와 관련된다. 그리하여 광야에서 무리를 가르치시고 먹이신 예수를 목자 역할을 하시는 분으로서 새로운 모세임을 암시한다.

새로운 모세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메시아와 다름없이 여겨질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솔로몬의 시편 17편 23~46절에는 메시아를 목자 이미지로 묘사한다. 따라서 마가는 당시의 독자들에게 ‘목자’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예수께서 메시아임을 암시할 수 있었다.

40절은 무리들이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았다고 한다. 이것도 출애굽을 연상시킨다. 출애굽기 18장 25절에 따르면 백부장과 오십부장이 언급된다. 따라서 출애굽 후 광야 생활 때에 히브리인들은 50명씩 100명씩 무리를 짓고 오십부장, 백부장의 관리를 받았을 것이다. 광야를 배경으로 50명씩, 100명씩 앉아 기적적인 양식을 먹는 모습은 출애굽 후의 광야 생활을 연상시켰을 것이다.

43절은 떡을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였다고 한다. 12라는 숫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연상시키는 숫자다. 12는 열두 지파를 가진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수이므로, 12를 언급할 때에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출애굽의 광야에는 열두 지파가 있었으며, 북조 이스라엘이 망한 후 유대인들은 열두 지파의 회복을 기대했다. 이러한 기대는 구약성경 여기저기에 깊이 스며있다. 이사야 11장 16절이 그 중에 한 구절이다.

“그의 남아 있는 백성 곧 앗수르에서 남은 자들을 위하여 큰 길이 있게 하시되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게 하시리라.”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기대한 새 출애굽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회복을 포함한 것이다. 이러한 기대를 가진 유대인들은 12바구니가 남은 것을 보고 새 출애굽이 발생할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마가는 그러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12라는 숫자를 언급하였을 것이다.

오병이어 기적과 유사한 기적이 구약에도 기록되어 있다. 열왕기하 4장 42~44절에는 엘리사가 보리떡 20개로 100명을 먹이고 남은 이야기를 기록한다.

“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로부터 와서 처음 만든 떡 곧 보리떡 이십 개와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지라. 그가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그 사환이 이르되 ‘내가 어찌 이것을 백 명에게 주겠나이까’ 하나 엘리사는 또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그가 그들 앞에 주었더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먹고 남았더라.”

오병이어 기적 이야기는 이 이야기를 배경으로 이해될 수 있다. 보리떡 20개로 100명을 먹이는 표적과 관련된 엘리사는 위대한 선지자였다. 그렇다면 떡 5개로 최소한 5000명(44절)을 먹인 예수는 도대체 어떤 분일까? 오병이어의 기적은 떡 1개로 최소한 1000명을 먹인 것이므로 떡 1개로 5명을 먹인 엘리사의 경우보다 200배나 놀라운 기적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선지자 엘리사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큰 인물이다. 그렇다면 메시아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오병이어 기적은 단순한 자연 기적이 아니라 예수께서 메시아이심을 증거하는 초자연적인 표적이다.

오병이어 표적이 나타난 시점은 제자들이 사역을 마치고 잠시 쉬려고 사람들이 없는 광야로 간 때였다(31~32절). 너무도 바빠서 잠시 쉬려고 했지만 무리들이 몰려와서 쉴 수 없었다. 제자들은 본의 아니게 휴가를 반납하고 곧바로 사역해야 했다. 더구나 떡을 나누어주며 종들이 감당하는 식사 시중을 들어야 했다. 더구나 그들이 나누어준 떡은 자기들이 먹으려고 가져간 도시락이었다(38절). 음식 먹을 시간도 없이 바빴던(31절) 제자들은 자기들의 도시락도 휴가도 포기하였지만 불평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놀라운 표적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제자들은 충전되고 힘이 있었을 때가 아니라 힘들고 지쳤을 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었다. 많은 무리들이 사는 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지 않는 한적한 광야로 가고자 했을 때 새 출애굽의 표적을 체험할 수 있었다.
 
물 위를 걸으신 표적(45~52절)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미리 보내신 후 홀로 뭍에 남아 무리와 작별하고 기도하러 산으로 가신다. 날이 저물었을 때에 제자들이 탄 배는 이미 갈릴리 호수 한가운데 있었지만, 역풍으로 인해 힘들게 노를 저어야 했다. 밤 사경(새벽 3시~6시 사이)에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서 그들에게 오셨다.

사람이 물 위를 걷는 것은 일상적으로 경험되지 않는 특이한 현상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물 위를 걸은 주인공의 정체에 관한 중요한 표적이다. 제자들은 물 위를 걸어오는 존재가 유령이라고 여겼다(49절). 그러나 그것은 유령이 아니라 예수였다. 그렇다면 예수는 도대체 어떤 분인가? 마가복음 본문은 직접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간접적으로 충분한 암시를 준다.
 
예수께서는 지나가시지 않고 곧 배에 오르셨다(51절). 그런데 마가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오셔서 “지나가려고” 하셨다고 기록한다. 제자들에게 오셔서 (배에 오르시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려고 하셨다는 어색한 표현은 구약성서를 배경으로 하여 의도적으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문맥에 맞지 않는 이러한 어색한 표현을 사용할 이유가 없다. ‘지나가다’라는 표현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관련해서 등장하는데(출 33:19, 22; 왕상 19:11), 특히 욥기 9장 8절, 11절에서는 물 위를 걸으심과 지나가심이 하나님과 관련된다.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욥 9:8).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움직이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욥기 9:11).

물 위를 걸으며 지나가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여기 한 사람이 물 위를 걸어 지나가신다. 그분의 정체가 무엇이겠는가? 신적인 존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마가는 예수께서 “나다”라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한다. 이것은 문맥상 “유령이 아니라 나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나다’(에고 에이미, I am)라는 표현은 구약성서에서 하나님과 관련해 사용된 표현이다. ‘나다’로 번역된 헬라어 표현 ‘에고 에이미’은 구약성경 70인역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정체와 관련하여 사용하신 표현이다.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처음부터 만대를 불러내었느냐. 나 여호와라. 처음에도 나요 나중에도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에고 에이미)”(사 41: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에고 에이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사 43:10).

이처럼 ‘나다’는 표현은 구약성서 70인역에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가리킨다.
 
‘에고 에이미’는 또한 출애굽기 3장 14절에 관련된다. 여기서도 이 표현은 하나님의 이름과 관련하여 등장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신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에고 에이미)”(14절).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은 ‘스스로 있는 자’로 번역되었다. 그런데, 히브리어 본문에서 이 번역에 해당하는 단어는 ‘에흐예’이다. 이 단어를 70인역은 ‘에고 에이미’라는 헬라어로 번역하였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알려주신 이름은 ‘에흐예’다. 하나님은 그 이름 ‘에흐예’의 뜻이 히브리어로 ‘에흐예’임을 알려주셨다. 히브리어 본문에서 ‘에흐예’는 두 번 반복된다. “에흐예 아셰르 에흐예”(출 3:14). 첫 번째 ‘에흐예’는 하나님의 이름이고, 두 번째 ‘에흐예’는 이 이름을 가진 하나님에 관한 서술이다. 출애굽기 20장 2절의 용례는 이러한 해석을 지지한다. “에흐예 아셰르 에흐예”에서 ‘아셰르’ 뒤의 ‘에흐예’는 1인칭 단수 형태인데, 이와 유사한 구조로 된 문장이 출애굽기 20장 2절에서 발견된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여기서도 ‘아셰르’ 다음에 1인칭 단수 동사(‘호체티,’ 내가 인도하여 내었다)가 등장한다. 여기서 “내가 너를 인도하여 내었다”는 서술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부연설명 해준다. 1인칭 단수 동사를 쓴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신에 관하여 설명하시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도 ‘아셰르’ 뒤의 ‘에흐예’ 즉 ‘나는 계속 존재한다’는 서술은 하나님의 이름 ‘에흐예’를 설명해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출애굽기 3장 14절은 ‘나는 계속 존재하는 에흐예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근접 문맥도 이러한 해석을 지원한다. 출애굽기 3장 14절은 ‘에흐예’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용한다.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여기서 ‘스스로 있는 자’는 ‘에흐예’의 번역이다. 이것은 이름이므로 뜻으로 번역하지 말고 음역해야 한다. 즉,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에흐예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고 해야 한다.

창세기 32장 27절(히브리어 성경은 28절)의 용례도 이러한 해석을 지원한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야곱은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야곱’이라고 답한 것이다. 히브리어 본문을 보면 야곱은 “나는 야곱입니다”, “내 이름은 야곱입니다”라 하지 않고 그저 ‘야곱’이라고 대답한다. 이처럼 하나님도 이름을 묻는 모세의 질문에 곧바로 이름을 답하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에흐예 아셰르 에흐예’에서 ‘아셰르’ 앞의 ‘에흐예’는 ‘나는 -이다’라는 뜻의 동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서 고유명사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인 ‘에흐예’의 뜻은 무엇일까? 그것의 뜻은 ‘아셰르’ 뒤의 히브리어 ‘에흐예’가 알려준다. ‘에흐예’는 ‘하야’ 동사의 미완료형이므로 ‘계속 존재하다’는 뜻을 가진다. 이것은 ‘스스로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데 문맥상 ‘에흐예’는 단순히 계속 존재하다는 뜻이 아니라 계속 존재하면서 행동한다는 뜻이다. 출애굽기 3장 12절은 그러한 의미를 잘 알려준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여기서 ‘있으리라’는 ‘에흐예’의 번역이다. 이때 ‘에흐예’는 단지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행동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은 문맥상 모세와 함께 존재할 뿐 아니라 모세와 함께 행동하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에흐예’는 단지 존재할 뿐 아니라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물 위를 걸어오신 예수께서 ‘에고 에이미’(나다)라고 말씀하셨을 때에는 그저 유령이 아닌 사람 예수라는 뜻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 ‘에흐예’라고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신적인 존재라는 암시를 준다. 그 예수는 하나님의 이름 ‘에흐예’의 뜻이 그러하듯이 풍랑을 만나 고생하는 제자들과 함께 계시고자 찾아오시는 분이다. 그분이 함께 계실 때 바람은 그친다(51절).

이러한 예수의 모습에 제자들은 심히 놀란다(51절). 마가는 이러한 제자들의 반응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였다고 지적한다(52절). 그 완악함은 오병이어 표적을 깨닫지 못함과 관련된다(52절). 물 위를 걷는 표적과 오병이어 표적은 모두 예수께서 신적인 분이심을 암시하는 표적이다. 오병이어 표적이 예수의 정체에 관하여 어떠한 암시를 주는 것인지 깨닫지 못하였기에 이제 예수의 정체를 드러내는 표적을 보고 당황한 것이다.

마가는 잘 깨닫지 못하는 것을 완악하다고 표현한다. 잘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마음의 완악함(경직성) 때문이다. 고정관념을 버리지 않는 경직성이 새로운 현상을 깨닫지 못하게 한다. 기존의 이론을 바꾸지 않으려는 고집 때문에 새로운 현상이 설명도, 이해도 안 되는 것이다. 제자들은 인간이 신일 수 없다는 유대인들의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예수를 바라보면 이해되지 않는 모습이 많을 수밖에 없다.

현대 독자들의 경우에도 복음서에서 예수 이야기를 읽을 때 과학주의적인 완악함을 보인다. 과학주의의 시각으로 예수의 표적들을 보면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게 되어, 오병이어의 기적이든 물 위를 걸은 표적이든 모두 부정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 하나님에게는 가능하므로 이러한 고정관념을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고 완악한 독단일 뿐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 새 출애굽의 역사를 행하셨다면 어찌 오병이어의 기적이 불가능하였겠으며, 어찌 물 위를 걷는 것이 불가능하였겠는가? 이러한 표적의 가능성을 믿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다고 말하겠는가?

치유 표적(53~56절)

예수와 제자들이 탄 배는 게네사렛에 도착한다(53절). 목적지는 본래 벳새다였는데(45절), 다른 곳에 도착하였다. 벳새다에는 8장 22절에 가서야 도착한다. 벳새다가 본래의 목적지임을 아는 독자들은 8장 22절에 이르기까지 계속 긴장을 느끼게 된다. 6장 53절에서 8장 21절까지는 이방 선교를 위한 장애물 극복과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방 지역인 벳새다에 도착하기까지 많은 장애물을 극복하고 비로소 벳새다에 도착한다. 벳새다에 도착하는 것이 얼마나 멀고 힘든 길이었는지 본문은 잘 보여준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사람들은 병자들을 데리고 온다. 병자들은 예수의 옷 술에라도 손을 대면 치유받았다. 이사야 35장 5~6절에 따르면 치유는 새 출애굽 시대가 온 표적이다.

“그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그때’는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는 때이며(사 35:10),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실 때이다(사 35:4). 즉, 포로로 잡혀간 하나님의 백성이 돌아오는 새 출애굽의 때다. 그런데, 쿰란 문헌 4Q521 1장 12절은 메시아께서 종말에 “병자들을 치유하고, 죽은 자들을 일으키”실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치유는 메시아 표적이기도 하다. 마가는 치유 이야기를 기록함으로써 예수를 통해 새 출애굽이 도래하고 있으며, 예수께서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임을 암시한다.

56절은 예수의 복장이 경건한 유대인의 복장이었음을 알려준다. ‘옷 가’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옷 술’로 번역하면 더 정확하다. 민수기 15장 38~39절은 이것을 옷에 달도록 명한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예수께서는 옷 술을 단 복장을 하고 계셨다. 즉 민수기가 명하는 복장을 하고 계셨다. 그러한 복장의 목적은 하나님의 계명을 기억하여 지키는 것이었으므로 이러한 복장을 갖추신 예수께서도 이러한 목적에 동의하셨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어기는 유대인이 아니셨고,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이셨음을 알 수 있다. 이어지는 율법 논쟁(7장 1~23절)에 앞서 이 점을 분명히 하고자 마가는 예수의 복장을 언급하였을 것이다. 메시아 예수는 율법을 폐지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메시아였다.

<성경공부를 위한 토론 문제>

오병이어 표적 (31~44절)

1. (관찰)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최소한 몇 명이 배불리 먹었나요? (44절)

2. (관찰) 이 기적이 발생한 장소는 어디인가요? (32절)

3. (해석) ‘한적한 곳’(광야)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관련하여 무엇을 연상시키나요?

4. (관찰) 마가는 광야로 나아온 무리를 무엇과 같았다고 하나요? (34절)

5. (해석) ‘목자 없는 양’은 민수기 27장 16~17절을 배경으로 보면 누구를 필요로 하는 백성인가요?

6. (관찰) 무리들은 몇 명씩 앉았나요? (40절)

7. (해석) 이렇게 무리지은 것은 무엇을 암시하나요? (출 18:25)

8. (관찰) 떡을 먹고 몇 바구니가 남았나요? (43절)

9. (해석) 이 때, 12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그렇다면, 열두 바구니가 남은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사 11:16 참조)

10. (해석) 예수님의 오병이어 기적을 열왕기하 4장 42~44절에 기록된 엘리사의 기적과 비교하면 예수님에 관하여 무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11. (관찰 및 적용) 오병이어의 기적은 제자들이 어떠할 때 발생했나요?(31~32절) 우리는 언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을까요?

물 위를 걸으신 표적(45~52절)

12. (해석) 예수께서는 물 위를 걸어오셔서 제자들을 지나가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의 정체에 관하여 어떤 암시를 주나요? (욥 9:8, 11).

13. (해석) 예수께서는 놀란 제자들에게 “나다”(에고 에이미, I am)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예수의 정체와 관련하여 어떤 암시를 주나요? (사 41:4; 43:10; 출 3:14)

14. (관찰) 제자들이 오병이어 기적을 목격하고도 물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을 보고 심히 놀란 이유는 무엇인가요? (52절)

15. (적용) 우리는 기적적인 현상에 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치유 표적(53~56절)

16. (관찰) 예수와 제자들이 탄 배는 어디에 도착하나요? (53절)

17. (관찰) 본래의 목적지는 어디였나요? (45절) 이곳에는 언제 도착하나요? (8:22)

18. (해석) 왜 벳새다에 도착하는 게 지연되었을까요? 벳새다에 도착하기까지 벌어진 사건들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나요?

19. (해석) 예수의 옷 술에라도 손을 댄 사람들은 치유를 받았습니다(56절). 이 치유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시대에 관하여 무엇을 암시하나요? (사 35:4, 5~6, 10)

20. (적용) 우리는 오늘날 치유를 어떻게 간주해야 할까요?


신현우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교수 shin@wgst.ac.kr

신현우 님은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신약학을 가르치고 있다. 공관복음서, 주석학, 원문복원학, 역사적 예수 연구가 주 연구 분야이며 최근에는 동양적 신약학을 하기 위하여 중국의 훈고학과 원문복원학(교감학)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경제 문제에 관한 성경적 해답에 관심이 많으며 성경적토지정의를위한모임(성토모) 신학분야 자문위원으로 봉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