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눈물’과 모두의 행복

[233호 환경 칼럼]

2010-02-24     유미호

 지구가 슬픔으로 가득하다. 문화방송 ‘지구의 눈물’ 다큐시리즈가 전하는 ‘북극의 눈물’에 이은 ‘아마존의 눈물’은 우리의 메말라 버린 마음을 흐른다. 북극에서는 빙하가 녹는 속도가 매년 눈에 띄게 빨라지고 있어 이누히트와 야생동물, 특히 북극곰들이 울고 있다. 먹이 사냥 후 바동거리며 잠시 숨 돌릴 얼음조각을 찾는 북극곰의 모습은 정말이지 눈물을 자아낸다. 지구에서 가장 큰 열대우림이면서 우리에게 산소를 공급해 주는 지구의 허파 아마존은 어떤가. 무분별한 개발, 채굴 산업에 사냥과 채집을 하며 살아가는 야노마미 부족은 눈물짓고, 마티스족은 부족 전체의 3분의 1이 간염으로 숨졌다. 백인들이 옮긴 전염병에 면역력이 없기 때문인데, 지금 남아있는 이들도 흐르는 눈물을 훔칠 뿐 속수무책이다.

비록 상상이긴 하지만 현실과 다를 바 없는, 영화 <아바타>도 우리 눈가를 젖어들게 한다. <아바타>에서는 토착민 ‘나비족’이 지구 인간의 욕심이 낳은 개발로 자신들의 행성 판도라가 사라져 가는 걸 지켜보며 눈물을 훔친다. 다만, 종말로 내몰린 판도라에서는 힘만 센 영웅이 아닌 ‘공존 공생’의 미덕을 심어 주고 진리를 세우는 영웅을 분장시켜 성장시킬 수 있었다는 점이 우리와 달랐다고 할까. 분장한 영웅이 새로이 지닌 힘은 다른 것이 아니다. 나비족의 삶에 녹아 있던 힘, 생태계의 균형에 귀 기울일 줄 아는 통찰력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이미 사라졌거나 녹슬어 버리고 만 힘이다. 영화 <해운대>에서 보듯 우리는 쓰나미가 내 눈 앞에 닥치고서야 겨우 감지할 만큼의 ‘에코 지능’밖에 없다.

어떻게 하면 잃어버린 그 힘을 되찾을 수 있을까? 자신의 소비와 생산 활동이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파악할 수 있는 통찰력, ‘에코 지능’을 과연 다시 지닐 수 있는 걸까?

2.26개의 지구를 소비하는 삶이 과연…

태안반도에 덮친 검은 눈물의 파도를 기억한다. 3년 전 무수한 갯벌 생명들과 어민들의 슬픈 죽음을 바라보며 1백만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달려와 헌신적으로 기적을 이뤄 낸 듯했지만, 그 곳 갯벌 밑에는 여전히 기름이 잔존해 있고, 검은 눈물의 유조선은 지금도 단일선체 모양 그대로 오가고 있다. 그래서 더 슬프고 눈물이 난다. 하지만 그렇다고 슬퍼하고만 있을 수만은 없다. 눈물이 흐르고 있는 한 곳 한 곳이 우리의 삶의 터전이자 안식처이고, 더구나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옛말에 ‘농부는 굶어 죽어도 종자는 베고 죽는다’는 말이 있다.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씨앗까지는 먹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씨앗마저 먹어 버리고 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이웃과 자연은 물론 다음 세대들의 몫까지 소비하고 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생존하고 번성하기 위해’ 지구에서 필요한 것을 빼 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겠으나, 필요가 아닌 지나친 풍요와 편리를 위한 욕망을 좇는 것이라면 문제가 다르다. 필요를 넘어 욕망을 좇아 자연을 취해 온 결과 자연의 균형은 깨졌고 수많은 생명이 사라졌다. 지금 이 순간에도 소리 없이 여러 생물종들이 사라지고 있다. 녹아내리는 얼음 때문에 북극곰과 철새는 서식지를 구하지 못하고, 사막화 현상으로 생태계가 급변하고 있다. 해수면의 수온 상승으로 바다거북이는 암컷 새끼만 낳는 위기에 처했다. 이것이 멸종의 징후라면 이미 사라진 것들도 수두룩하다.

▲ MBC <아마존의 눈물>의 한 장면.
상황이 이럴진대, 과연 지구에서 우리의 필요를 계속 채울 수 있을까? 먹는 것과 입는 것, 사는 집과 일하는 공간, 일과 여가를 위한 모든 것을 말이다. 선뜻 그렇다고 말하기 쉽지 않다. 받은 은혜로, 땅을 통해 먹을거리를 풍성히 얻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제는 불가능해질 수도 있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아직은 제대로 분배하면 그래도 견딜 만하다고 하는 이가 있다. 문제는 우리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전통적 생활 방식과 식습관을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쌀 등 곡․채식 위주로 된 식단에 만족하지 않고, 육식 위주의 식생활을 하는 이들이 급속히 늘었다. 육류 소비가 늘면 늘수록 먹을거리를 얻지 못하는 이들도 늘 수밖에 없다는 게 큰 문제다. 육류 생산은 많은 양의 곡물 사료를 필요로 한다. 소고기 1킬로그램을 생산하기 위해서 곡물 사료 7킬로그램이 필요하고, 돼지고기 1킬로그램을 생산하기 위해서 곡물 사료 3킬로그램이 필요하다. 22명이 먹을 수 있는 곡물이, 소를 키워 먹으면 한 사람의 한 끼 식사밖에 되지 않는 게 육식이 자아내는 불평등함이고 보면 우리의 필요를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지구에서 매일 소비하는 자원과 배출하는 쓰레기를 처리하기 위해 사용하는 토지와 물의 양을 계산한 ‘생태 발자국 지수’로 보면, 그 불평등함과 지구의 지속 불가능함은 더 분명해진다. 지구가 지속 가능하려면 한 사람이 1.8헥타르 미만으로 살아야 하는데, 미국 사람은 평균적으로 9.7헥타르, 영국 사람은 5.3헥타르, 일본 사람은 4.5헥타르를 소비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 역시 4.05헥타르이어서 하나뿐인 지구를 2.26개나 소비하고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지구 자원을 누리지 못하고 있고, 지구의 재생 능력을 크게 벗어나 살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날마다 무엇인가를 사서 쓰고 버린다. 먹을 것, 입을 것, 탈 것, 살 곳은 물론 과시하기 위한 물건까지 소비하면서 마냥 행복감에 젖는다. 욕망을 채우며 느끼는 한 사람의 행복은 오히려 지구상의 다른 사람들과 살아있는 생명들의 행복을 빼앗기 마련이다.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하고, 자동차가 중심이 되며, 일회용품의 사용이 일상화된 우리의 삶은, 생활수준은 높일지 몰라도 지구를 곤경에 처하게 하고 있다. 사라져 가는 숲, 눈앞에 다가오는 물과 경작지의 부족,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 재앙의 위협, 생물 다양성의 감소, 세계 빈곤의 증가 등. 실은 우리의 삶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운 듯하지만 마음은 갈수록 공허하고 빈곤해지고 있다. 더없이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로 인해 행복한가 하는 질문에는 선뜻 답하기 어렵다.

▲ 영화 <아바타>에 등장하는 나비족.
이제라도 우리의 욕구가 과연 진정한 필요에서 나온 것인지 진지하게 묻자. 자신의 욕구가 끊임없이 이윤을 좇는 이에 의해서 부추겨진 것이라면, 올라오는 욕구를 살며시 누르고 진정 필요한 것인지 다시 묻자. 나의 행복이 누군가의 돌이킬 수 없는 희생에 근거한 것이고, 나의 소비로 인해 공기와 물과 땅이 오염되어 회복되기 어려워지며 여러 동식물이 멸종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을 알게 된다면, 다음 세대가 최소한의 필요조차도 채울 수 없는 상황이 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누구나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자전거로 출퇴근하고, 외식 대신 도시락을, 일회용 컵 대신 자기 컵을, 비닐 대신 장바구니를 가지고 다니고, 엘리베이터나 자판기를 사용하지 않고, 제철 음식을 골라 먹고, 텃밭 농사를 짓고, 나아가서는 돈 없이도 품앗이 활동을 통해 서로의 필요를 채우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지금 누리는 것을 얻기까지 겪었던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겪어야 할지라도, 조금 덜 소비하면 모두가 누릴 수 있고 지구도 그만큼 더 행복해질 수 있다. 하나의 세포가 온 몸과 연결되어 있듯 한 생명이 지구 전체와 연계되어 있음을 느끼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자.

바라기는 지금 지구가 흘리는 눈물로 인하여, 하나님과는 물론이고 살아있는 생명들 사이에 놓인 막힌 담이 헐리고,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 한 송이의 이름 모를 들꽃 속에서 우주를 보며,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 속에 영원을 담을 수 있는”(윌리엄 블레이크) 모두가 함께 소통하는 그런 날을 기대한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지구의 울음소리가 그치고 모두가 행복한 웃음꽃을 피울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유미호 님은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정책실장이자 부설 한국교회환경연구소 책임연구원이다. 연세대에서 신학(기독교윤리)을 전공했고, 1991년부터 ‘기독교환경운동연대’에서 활동하고 있다. ‘자연이 곧 나’임을 알아차려 ‘자연에게 행함이 곧 나에게 행함’이며 ‘자연을 돌봄이 나를 돌봄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때론 바쁘게 전개되는 일상이 힘겹기도 하지만 남편인 정진회 목사, 아들 석찬(중3)과 함께하는 삶과, 일을 하며 느끼는 창조주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이 커 지금도 자유롭고 행복한 시절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