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 성도여, 헤쳐 모이자?

[233호 특집 좌담 교회의 희망, 제자들의 반란]

2010-02-24     이종연

사람들이 교회를 가는 이유가 ‘이해 관계 때문’이라고 한다. 맘에 드는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 인맥 쌓아서 사업 키우려고, 부동산 정보를 얻기 위해…. 그런가 하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교회가 세상과 같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교회에서도 인정받고, 돈(헌금)만 많이 내면 좋아하니까…. 정작 ‘리얼 제자’가 되고 싶은 이들은 갈 곳이 없어 방황하고 있다.

교회의 본질을 고민하고, 흩어진 제자들을 섬길 방도를 찾는 이들이 모였다. 교회의 권위가 나락으로 떨어진 원인을 분석하고 제자들의 역할, 대안적 모델이 무엇인지 머리를 맞댔다. 최근 2100억짜리 교회 건축으로 논란이 된 사랑의교회 문제에 대해서도 눈감을 수 없었다. 좌담에는 김용민(시사평론가), 성석환(안양대학교 기독교문화학과 교수), 양희송(청어람아카데미 대표기획자), 정정훈(연구집단 카이로스 연구원) 씨가 함께했다. 교회 문제로 오래 씨름해 온 고상환(교회개혁실천연대 집행위원) 씨가 사회를 맡았으며 좌담은 2월 5일 <복음과상황> 세미나실에서 진행했다.

▲ 교회의 본질을 고민하고, 흩어진 제자들을 섬길 방도를 찾는 이들이 모였다. 교회의 권위가 나락으로 떨어진 원인을 분석하고 제자들의 역할, 대안적 모델이 무엇인지 머리를 맞댔다. 왼쪽부터 양희송, 성석환, 고상환, 정정훈, 김용민. ⓒ복음과상황 이종연
고상환 / 최근 진중권 씨는 점점 무신론자가 되고 있다는 말을 했다. 오늘 우리 현실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의구심이 든다는 고백이었다. 목사의 아들이기도 한 그의 발언은 교회를 떠나는 지식인의 고민을 드러낸다. 교회를 떠나는 그리스도인, 교회에 안 나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늘어나고 있는 현실의 한 단면이지 않을까. 주위에서 이런 분들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 있다면 그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양희송 / <복음과상황>에서도 같이 활동했던 동덕여대 장대익 교수 같은 이는 학자로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질문을 허술하게 다루는 기독교권의 분위기 때문에 큰 좌절감을 느낀 것 같다. 그처럼 많은 이들이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대화 한번 제대로 못하고 조용히 교회를 빠져나가는 현상이 보편화되고 있는 듯하다. 교회에 위기의식이 없다.

김용민 / 교회의 요구와 대중의 요구가 다르다는 데 원인이 있다. 대중은 안식과 위안을 얻고 싶어하지만 교회는 열정과 비전을 강조하고, 대중은 교회가 물질로부터 초연해지길 바라지만 교회는 신도 수․헌금․교회 크기 등에 천착한다. 외환 위기 이후 무한경쟁 시대가 오면서 신뢰의 위기가 왔고 우리 사회는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내가 소모품에 불과하다는 회의가 찾아들 때, 교회가 대안이 되면 좋겠는데 교회는 물질만 지향하고 있다. 게다가 경제 성장 시기에 교회도 부흥을 경험했고 최근에는 이명박 정권과 결탁까지 하니 교회도 기득권 세력으로 인식되고 있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는 것이다.

성석환 /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이 주류는 아니다. 오히려 교인들 중 교회 건축을 95%가 지지하지 않는가. 지성인들이 왜 교회에 남아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현상이 그렇기 때문에 분석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불안정한 생활, 힘든 삶으로 심리적 안정을 주는 무언가를 찾다가 그 답을 교회에서 찾는 건 아닐까.

정정훈 / 나도 왜 사람들이 교회에 오는지 궁금하다. 이는 정치학자들의 오래된 질문이기도 하다. ‘왜 대중은 억압을 욕망할까’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여전히 소수의 전횡에 휘둘리면서도 많은 평신도 대중이 대형 교회에 남아있는 상황에 대해 질문해 보아야 한다. 하지만 인구센서스와 종교 인구를 살펴보면 더 이상 한국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할 것 같지는 않다. 추세는 감소로 돌아섰다. 그런 맥락에서 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은지 먼저 질문해야 하지 않을까. 내 경험에 따르면, 교회의 불합리성보다는 교회에서 받는 상처 때문에 떠나는 사람들이 더 많다. 가령, 교회 고등부에서 우상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라고 배웠지만 대학에 떨어진 재수생을 교회는 별로 환영하지 않는 분위기다. 그래서 상처받은 재수생들은 교회보다는 교회 밖 인간관계에서 위로를 받게 되고 그러다 교회에 발길을 돌리게 되는 식이다. 이런 과정은 취업과 결혼을 통과하면서도 나타난다. 교회가 소중한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과 교회에서 실제로 소중하게 여기는 것 사이의 괴리가 결국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게 아닐까.

성석환 / 전에 사학법 개정에 반대하는 특정 교단의 목회자들이 머리를 깎고 반대 시위를 한 적이 있다. 이에 <중앙일보> 논설위원이 ‘나도 사학법 개정에 반대한다. 그래도 당신들은 성직자 아닌가. 하늘의 방식으로 반대하는 걸 보여 달라’고 썼다. 참 대답하기 민망한 말이다.

▲ 고상환 (교회개혁실천연대 집행위원). "교회 문제를 놓고 8년 동안 씨름했는데 교회 안에서 싸우고 교회가 분립되면 그 교회 문제가 새로 만들어지는 교회에 고스란히 옮겨 오게 된다. 그래서 오히려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헤쳐 모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복음과상황 김은석
고상환 / 한편에서는 교회 프로그램, 설교 등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쉽게 교회를 옮겨 다니는 세태를 지적하고, 비판과 냉소보다 교회 안에서 분투할 것을 강조하기도 한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보러 교회 가는 거 아니냐며 교회를 떠나는 이들을 비판하기도 하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정정훈 /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면 혼자 예배하면 된다. 교회는 다른 사람들, 즉 형제 자매된 그리스도인 때문에도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교회에서 형제 자매 때문에 항상 고통스럽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교회가 기쁨의 공간이 아니라 슬프고 우울한 공간이라면 그건 너무 비극이다. 세상에서는 고난을 당하더라도 교회에서는 위로를 받고 기쁨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오늘날 생각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주일날 오히려 더 고통스럽다. 주일에 교회에서 고난을 경험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고난일까. 하나님나라의 풍성한 교제를 맛보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투쟁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본말의 전도다. 교회를 다녀야 하는 일차적 이유가 개혁을 위한 투쟁이라면 그것은 옳지 않다. 그땐 교회를 떠나야 한다.

양희송 / 백종국 교수는 이를 ‘매개의 변증법’으로 설명했다. 매개자가 둘 사이의 매개 역할을 충실하게 하지 않고, 스스로의 편의를 위해 과도한 위상과 역할을 만들어 주객을 전도시킨다는 의미다. 교회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매개하는 중간자 역할 아닌가? 그런데 교회가 매개 역할은 제대로 안하고, 교회 조직과 구조를 자기충족(self serving)하고 있다. 교회가 하나님과 사람을 매개하는 교회 자체의 역할에 충실하다면 교인들은 힘들어도 감내한다. 하지만 그걸 빙자해서 ‘교회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요구한다고 느끼면? 계속 속아 줄 만큼 성도들이 어리석지는 않다. 교회가 모든 것을 다 감당하려고 하기 보다는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핵심 기능만 우선적으로 수행하면 된다고 본다. 다른 부분은 사회단체나 선교단체 등이 분담하는 것이 가능하다. 나는 교회가 최소한 목회적 기능(pastoral care)은 제대로 해야 한다고 본다. 건축한다고, 목회를 팽개치는 것은 어마어마한 주객전도다.

성석환 / 교회에 너무 많은 걸 기대하지 말라는 건 회중에게 어려운 얘기다. 한 상가에 교회가 두세 개씩 있는 상황에서 그런 요구는 쉽지 않다. 교회를 매개로 보는 시각은 어쩌면 교회를 기능적인 제도로 접근하려는 관점일 수 있다. 교회가 본래 무엇인지 근본적인 고민을 해야 한다. 우리는 제도적이고 형식적인 측면만 강조되고 교회의 본질적인 거룩함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개신교가 종교개혁을 통해 기독교에 유의미한 기여를 했지만 이후 제도화된 ‘개교회 주의’가 종교개혁의 본의를 희석시켰다. 지금은 아무리 좋은 걸 하려고 해도 개교회 주의에 휩싸여 경쟁을 하게 된다. 이렇게 기능적인 측면만 강조되고 시장 논리로 경쟁하는 상황에서 진정한 개혁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양희송 / 교회 관련 논의를 ‘시장 모델(market model)’로 보면 논의는 끝나지 않는다. 경쟁이니 독점이니 하는 것을 당연히 전제하는 논리에서는 그 논리에 따라가다 다 망하기 전에는 절대 뭐가 잘못인지 모를 거다. 나는 우리 논의가 ‘생태계 모델(eco-system model)’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아는 시장 논리는 누가 더 효율적으로, 많은 수익을 내느냐가 지표이고, 시장의 독점적 승자를 비판하는 것은 패자들의 질투와 구시렁거림으로 치부한다. 반면 생태계 모델에는 공룡도 있고, 미생물도 있고, 저 나름의 존재 가치와 역할이 있다. 공룡만 살아남는 생태계를 좋은 생태계라고 하지 않는다. 그런 상황이면 곧 공룡도 멸종한다. 생태계는 때로 교란되기도 하고, 다시 동적 균형을 찾아가기도 한다. 물론, 심각하게 왜곡되면 ‘종의 멸절’도 발생한다. 교회 간의 관계를 잠재적 경쟁자로만 보지 않고 공생, 혹은 상생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정정훈 / 대안적 패러다임을 제시한다고 현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실을 냉정하게 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교회가 시장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그중에서도 현재 한국교회는 신자유주의 모델에 가깝다. 1970~1980년대만 해도 한국교회 성장 모델은 개발 독재 시절의 자본주의 모델과 닮았었다. 1990년대에 뜬 강남의 대형 교회는 포스트 포드주의적 자본주의 즉, 다품종 소량 생산 모델과 유사하다. 소비자의 필요에 따라 세분화된 상품을 기업이 제공하듯 교회도 교인들의 세분화된 요구에 따라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결국 이런 모델을 따르는 교회만 살아남을 것이다. 마치 기업형 슈퍼마켓(SSM)이 동네 슈퍼마켓을 모두 망하게 하듯 대형 교회가 지역의 소규모 교회들을 문 닫게 할 것이다. 교회의 양극화다.

김용민 / 교회만큼 경쟁의 원리가 왜곡된 곳이 있을까. 가령 설교를 잘하는 A 목사가 있는 교회에 B 교인이 가는 게 아니다. 차라리 그건 좋은 의미의 경쟁일 수 있다. 그런데 설교에 엄청난 하자가 있음에도 사람들은 교회에 계속 나간다. 왜 그럴까. 나는 ‘부조 문화’가 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낸 부조를 회수해야 하는데 교회를 옮기면 그게 어렵다. 그게 한국교회 경쟁력이다. 교회를 옮기지 말고 그 안에서 분투하라고 말하는 목사는 자기 교회에 대한 자신감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노무현·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탄이고 하나님이 그들을 없앴다고 말하는 교회에서 어떻게 분투를 하겠나. 그런 교회에서는 절대 주체성을 발휘할 수가 없다.

고상환 / 나도 2000명 이상 출석하는 교회에서 정말 부조를 많이 했다. 그동안 부조 받을 일이 없었기 때문에 교회를 옮기게 되면 그게 참 딜레마다. (웃음) 교회를 옮기는 다른 원인 중에는 직분을 얻기 위한 경우가 있다. 중대형 교회에서 장로나 안수 집사 등을 노리고 약진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다보면 사회에서는 명예퇴직을 하지만 교회에서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도 한다. 사람들 심리가 묘비에 ‘집사 아무개’보다는 ‘장로 아무래’라고 써 주길 바라는 것이다.

▲ 성석환 (안양대학교 기독교문화학과 교수). "현대인들은 어느 정도 ‘거리감을 주는 소속감(distant belongingness)’을 원하기 때문에 대형 교회일수록 잘못된 걸 보고도 참는 사람이 많다." ⓒ복음과상황 김은석
성석환 / 현대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소속감이다. 복잡하고 파편화된 사회에서 현대인들은 어딘가에 소속되어야 존재론적 안정감을 느낀다. 그래서 자신의 교회에 불합리한 측면이 있어도 참고 견디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특히 어느 정도 ‘거리감을 주는 소속감(distant belongingness)’을 원하기 때문에 대형 교회일수록 잘못된 걸 보고도 참는 사람이 많다. 특히 교회 밖에서는 비판적인 지식인들조차 교회에서 만큼은 소속감을 느끼고 싶어 하기 때문에 신학적 사유나 성찰 없이 교회가 펴는 논리에 스스로를 설득시키는 것이다. 최근 벌어진 강남 대형 교회의 건축 문제에서도 비슷한 양상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교회에 남기 위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런 심리가 거대한 구조를 살아남게 하는 동인이다.

양희송 / 정확한 지적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질문이 남는다. 적당한 거리감을 주면서 편의도 제공해 주는 게 기독교가 세상에 줄 수 있는 ‘바로 그 가치’라고 정당화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그렇게 보면, 바로 이어 제기되는 질문이 ‘believing without belonging’ 즉, ‘믿기는 하지만 그런 방식의 신앙생활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현상이다. 한국교회의 그런 일상적인 현상을 그대로 인정할 것이 아니라, 거기에 저항하는 이들의 몸짓을 격려하고 주목해야 하는 게 아닐까. 

성석환 / 대안적 교회를 만드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매우 의미 있는 도전들이지만 때로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기 보다는 갈등 구조가 심화되기도 한다. 대형 교회의 제도에 반기를 들고 나오면서도 제도를 개혁하고 수정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 또한 같은 메커니즘으로 교회를 운영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양희송 / 아직 뚜렷한 모델이 없는 건 맞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 등에서도 다양한 실험들이 일어나고 있다. 미국에서 새롭게 조명받고 있는 ‘도시 수도공동체 운동’(new monastic movement)이나 ‘이머징 처치’(emerging church)들은 우리가 흔히 세속을 등지는 선택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메노나이트 같은 그룹들의 실험을 참고한다. 또 영국에서 1960년대에 유행한 가정교회 운동(house church movement)같은 경우도 참고할 수 있다. 이 시기 영국에서는 존 스토트나 로이드 존스 등의 교회에서도 성령을 체험하고 방언이 터지는 성령 운동이 일어났는데,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성령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많았다. 이때 결국 교회 밖으로 내쳐진 사람들이 ‘가정교회 운동’이란 걸 했다. 당연히 리더의 독재적 권력이나, 신학적 건강성 등이 문제를 많이 일으켰다. 하지만 지금 영국 복음주의 운동에는 ‘가정교회 운동’의 후예들 중 건강하게 살아남은 모델이 진출해 있다. 한국에서도 이런 대안적 운동이 자리 잡으려면 한 세대는 갈 것이다. 캠퍼스 선교단체들도 처음에는 ‘이단’ 소리 들으며 자리를 잡는 데 한 세대 이상 걸리지 않았나. 방향이 틀리지 않다면 애정을 갖고 지켜봐 줄 필요가 있다.

고상환 / 건축 얘기가 나왔는데, 강남의 사랑의교회는 제자 훈련을 비롯해서 여러 교육 프로그램을 많이 하는 교회로 알려져 있다. 그런 교회에서조차 교회 건축에 절대 찬성하는 게 현실이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니면 문제의식을 갖고 행동해야 한다고 보는가

정정훈 / 사랑의교회 건축 문제가 이례적인 상황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나는 사랑의교회의 그와 같은 결정은 그 교회를 움직여 온 논리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본다. 교회를 신학적 성찰 대상으로만 볼 때, 대형 교회의 중요한 특성을 놓칠 수 있다. 사회학적으로 보면 강남의 대형 교회는 계급 재생산의 공간이다. 강남에서는 ‘스펙 좋은 배우자를 만나려면 소망교회나 광림교회를 다녀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사랑의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강남의 대형 교회는 동질적 계급에 속한 이들이 이해관계의 연대를 맺는 인맥 공동체이기도 한 것이다. 사랑의교회가 2100억짜리 교회를 건축하는 것은 그들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것이다. 사랑의교회를 움직이는 것은 제자 훈련의 논리가 아니라 바로 이해관계의 논리라고 생각한다.

성석환 / 실제로 강남이나 대형 교회에서 목회자 자녀와 장로 자녀들이 결혼하는 사례는 매우 많다. 사회에서 그렇게 하면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였다고 비판받을 수 있지만 교회는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해 준다. 신앙으로 만났고 주님이 (배우자를) 보여주셨다고 하면 많은 이들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정정훈 / 그 정당성이 포인트다. 사실 대형 교회들은 사회봉사도 많이 한다. 하지만 정작 그 교회 교인들의 일상은 어떤가. 구역 예배에 모여서 이번에 어느 아파트에 투자해야 한다거나 어느 권사님 며느리가 명품 핸드백을 예물로 가져 왔다는 류의 이야기를 한다. 교회는 그런 남우세스러운 짓을 정당화해 주는 논리를 제공한다. 이렇게 속물스러운 짓을 하더라도 구원받은 의로운 자들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 교회는 사회봉사도 많이 한다’는 말로 치장을 한다.

성석환 / 강남에 있는 교회는 대체로 그렇다고 보면 된다. 개인화되고 계급화되면서 일종의 사교 집단의 면모를 보인다. 하지만 공공성이야말로 교회의 본질이다. 이 인식을 토대로 교회가 새로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보다 목회자의 설교가 바뀌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가능성이 없다. 목회자와 회중들이 1등을 꿈꾸고 전국구를 지향하는 것을 떠나, 교회가 섬겨야 할 자신들의 지역에 집중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 김용민 (시사평론가). "설교에 엄청난 하자가 있음에도 사람들은 교회에 계속 나간다. 왜 그럴까. 나는 ‘부조 문화’가 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낸 부조를 회수해야 하는데 교회를 옮기면 그게 어렵다." ⓒ복음과상황 김은석
김용민 / 교회에서 내세우는 의와 명분은 원초적 욕망을 덮기 위한 장식품에 불과하다. 나는 사랑의교회 건축 사건이 내적 의와 외적 결과물이 판이하게 다른 결과물이라고 본다. 전에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가 ‘한반도 대운하는 문명사적 소통’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소통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 한국교회 물량주의에 대한 철학적 비판에 공간이 부족하다는 동문서답을 했다. 모순에 점철되어서 그런 대답밖에 못하는 것이다. 

성석환 / 지난 연말, 용산 참사 장례 예배 때 용산 참사와 관련해서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으신 분이 설교한 것은 개인적으로 충격이었다. 아마도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스스로 옳다고 믿고 하는 행동들이기 때문에 어떤 이들에게는 진정성 있게 전달될 것이다. 본인이 분명히 옳다고 믿고 행동할 때 회중들은 옳고 그름을 떠나 그 진정성 있는 표현과 행동에 동의를 표하게 되기 때문이다.

김용민 / 교회 공공성이 파괴되는 것을 정당화하는 메시지를 공급해 주고 있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덧붙여, 현직 목사 프리미엄을 이용해 투표를 한 건 악의적인 측면이 있다. 목사의 애절한 설명에 반대표 던지는 것,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성석환 / 한편, 나는 사랑의교회 건축 문제를 두고 소위 복음주의 진영 모두가 깊이 반성하고 성찰할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한국 복음주의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 사례이며, 비록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분들이 있긴 하지만 신학적 한계와 실천적 한계를 모두 드러낸 사건이다. 그 동안 한국 복음주의의 기회주의적 행위를 방조한 책임이 모두에게 있는 것이다. 미국이나 영국의 경우 복음주의는 20세기 후반부터 사회적 책임에 대해 매우 강력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음에도 그 내용이 한국에 수입될 때는 그저 교회 성장에 필요한 프로그램으로 번역되어 들어오고 만다. 사회적 책임을 거세한 리더십, 사회 문제에 아무런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 리더십이 문제다. 이번 사랑의교회 문제는 지금 한국교회에서 복음주의라는 것이 과연 희망이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 사건이라고 본다. 

고상환 / 교회에서 어떤 사안으로 투표하고 의사 결정한 결과가 사회 공공성에 역행하는 행위라면 교인의 책임은 없을까. 만약 그런 책임을 지기 싫다면 일탈이 필요한 건 아닐까. 교인으로서 의사 결정에 참여했을 때 개인이 지게 되는 도덕성 혹은 교회 내 제자들의 역할은 무엇인지 고민해 보자

양희송 / 개신교의 문제는 ‘프로테스탄트의 자식들이 그 정체성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짓’으로 와 닿는다. 개신교는 원래 거대한 시대적 조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반대한다’고 말할 수 있었기에 태동한 것 아닌가. 지금 우리를 중세 시대에 데려다 놓으면 과연 ‘프로테스탄트’ 할 수 있을까? 입으로는 개신교인데, 하는 짓은 중세 교회의 허망한 체제 옹호자들이다. 사랑의교회 건축 문제를 보면서 제일 안타까운 것은 그 교회가 소중하게 20~30년 쌓아 온 상징적 자산을 스스로 깡그리 허물었다는 점이다. 어쩌면 그동안 우리가 사랑의교회를 과대평가했거나 우리의 이상을 사랑의교회에 투사한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젠 아무리 교회를 키워도 그 규모가 그 교회의 상징적 자산과 연결되지 않을 것이다. 봐라, 통일교가 매년 수만 명씩 모이는 합동결혼식을 해도 언론은 다루지도 않는다. 엄청나게 덩치가 커져도, 여전히 인정 욕구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못 벗어나는 악순환에 고착되고 만다.

성석환 / 교회를 나가지 않고 남아 있기로 마음먹었다면, 필요한 것은 분노가 아니라 교회에 대한 또 존재에 대한 애정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짱돌을 들라고 말하는 우석훈의 제안보다는, 교회 안과 밖에서 다른 세상을 꿈꾸는 이들의 지속적인 연대가 성경적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연대가 이루어지면 당장은 외롭더라도 그 꿈은 유지될 수 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다양한 장을 만들어야 한다. 꿈을 포기하지 않도록 서로 지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 정정훈 (연구집단 카이로스 연구원). "하나님나라의 풍성한 교제를 맛보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투쟁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본말의 전도다. 교회를 다녀야 하는 일차적 이유가 개혁을 위한 투쟁이라면 그것은 옳지 않다." ⓒ복음과상황 김은석
정정훈 / 냉정한 얘기일지 모르나 한국교회가 살기 위해서는, 같은 기독교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일지라도 그들이 성경의 정신에서 이탈한다면 그들에 대한 동료 의식, 한통속 의식을 끊어야 한다.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공법과 정의를 말하면서도 유독 교회 문제에 대해서는 그들이 형제라며 옹호하는 분들이 있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을 하찮게 만드는 그들이 과연 형제일까? 루터가 과연 교황을 향해 ‘형제’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지금은 냉정한 결단, 대결의식이 필요하다.

성석환 / 거룩한 분노는 루터나 칼뱅도 가졌었다. 마땅히 가져야 할 분노, 정의감은 필요하다. 그러나 존재에 대한 애정 없이 분노한다면 다른 제도를 만들더라도 정착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정정훈 / 상대를 ‘적’이라고 하면 정서적으로 거부감이 들 수 있다. 교회의 역사에는 성경의 정신에 충실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이라 불리는 다른 사람들과 대결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늘 존재했었다. 내 생각에는 교회의 역사는 그러한 긴장의 역사이다. 다만 적과 대결할 때도 투쟁이 일차적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동지와의 기쁘고 즐거운 관계가 일차적이어야 한다. 

고상환 / 2000년대 들어 대안적 교회가 많이 형성되고 있다. 하지만 지역사회에 뿌리를 두지 않고 특정 그룹이 자신들의 성향에 맞춰 교회를 만드는 형태가 주류라는 게 아쉽다. 이를 초월하는 대안적 모델은 어떤 것일까

김용민 / 왜 어느 한 교회만 나가야 할까. 양육․친교․봉사를 위해 한 교회에 가야 한다고 하는데 그런 기능을 수행하는 센터를 만들면 안 될까. 교회 기능을 세분화할 수 있지 않을까.

성석환 / 개인적으로 그런 문제의식을 갖고 몇몇 분들과 ‘도시공동체연구소’를 세우려 하고 있다. 특히 지역사회에서 교회가 공동체를 지원하고 섬길 수 있도록 지원할 것이다. 교회가 지역과 관계없는 행사에 너무 많은 힘과 재정을 투입하는데 이제는 지역의 당면 과제와 긴밀히 관련된 일들을 지원해야 한다. 어떤 교회는 재개발로 주민들이 쫓겨나는 걸 보면서도 아파트가 들어오면 교회가 커진다는 생각에 비전 선포까지 한다. 적어도 교회라면 삶의 문제, 특별히 생태와 정의의 문제를 고민하고 역할을 찾아 감당해야 한다. 이웃이 겪고 있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모순을 해결해 줘야 한다. 어제 월드비전 스태프들과 회의를 하면서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지역의 문제를 교회의 문제로 인식하고 관‧시민 단체와 협력해야 한다. 교회 몸집 키우는 데 관심을 끊고 ‘동네 교회’가 되어야 한다. 우리 동네에 하나님나라의 아름다운 가치를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지, 동네에 어떤 고통이 있는지 찾아보아야 한다.

내가 섬기고 있는 동숭교회도 부활절을 맞아 우리가 섬겨야 할 이웃이 누구인지 조사하고 활동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 대학로에 있는 단체, 인사와 함께 동숭문화포럼을 만들 것이다. 전국구가 되려는 꿈을 버리고 지역을 책임지는 운동을 하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웬만한 비판에는 맷집이 생겨서 듣지도 않는다. 한국교회의 미래는 지역과, 현장화에 있다.

정정훈 / 지역 공동체는 매우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삶의 조건에서 지역을 새롭게 이해할 필요도 있다. 집이 없는 많은 사람들은 자주 이사할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특정 지역에 기반을 둔 공동체만을 고집하기는 어렵다. 사실 나는 어느 한 동네에 뿌리를 내리는 공동체라는 관념은 농경 시대에 만들어진 조직 모델을 고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 지구적 이주가 활발해지면서 인류학자들은 ‘상상된 지역’이라는 개념을 내놓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인도 출신의 IT 기술자가 있다고 치자. 그는 뱅갈로에서 나온 잡지를 읽고 볼리우드 영화를 본다. 또 고향 친구들과 인터넷을 통해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교류한다. 그 사람에게 동네는 캘리포니아가 전부가 아니다. 그 사람에게 동네는 자신의 상상력이 닿는 곳이다. 머릿속의 동네를 어떻게 구축하느냐가 훨씬 중요한 것이다. 동네나 지역에 대한 개념을 이렇게 바꾼다면 꼭 물리적 지역에 뿌리박지 않더라도 지역 교회를 말할 수 있다. 상상된 동네를 구축하고 그런 동네 지도를 머릿속에 넣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폰과 트위터로 대표되는 디지털 네트워크를 염두에 둔다면 더욱 말이다.

▲ 양희송 (청어람아카데미 대표기획자). "한국 상황에서 나는 ‘가나안 성도’를 주목하자고 말하고 싶다. ‘가나안’은 거꾸로 읽으면 ‘안나가’이다. 즉, 더 이상 제도권 교회에 나가지 않는 그리스도인을 일컫는다. 교회 입장에서는 신앙을 버렸다고 할지 모르나,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교회 못 나가겠다는 사람을 많이 만난다."ⓒ복음과상황 김은석
양희송 / 존 웨슬리는 순회 설교와 노방 설교자로 유명한 부흥 운동가이지만, 당시 영국 성공회가 알고 있는 예배란, 주일날 교회 나와서 예배하고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이었기에 웨슬리의 행동을 매우 불편하게 여겼다. 산업혁명기의 광부들, 공장 노동자들은 주일에도 일을 했기 때문에 웨슬리는 전형적인 교회 목회나 예배 방식에서 이들이 배제된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들을 ‘교회로 오라’고 한 것이 아니라, ‘성도가 있는 곳으로 간다’는 혁신적 발상을 한 것이다.

현재 한국 상황에서 나는 ‘가나안 성도’를 주목하자고 말하고 싶다. ‘가나안’은 거꾸로 읽으면 ‘안나가’이다. 즉, 더 이상 제도권 교회에 나가지 않는 그리스도인을 일컫는다. 교회 입장에서는 신앙을 버렸다고 할지 모르나,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교회 못 나가겠다는 사람을 많이 만난다. 우스갯말로, 한기총 주장 1200만, 인구 조사 결과 860만 개신교 인구의 차이인 300만 명 정도가 ‘가나안 성도’ 아니겠냐고들 말한다. 한국 개신교 내에 실험의 장이 마련되려면 이런 그룹들을 향한 움직임이 있어야 할 것이다. 교회를 만드는 데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가령 건물, 목회자, 헌금 등…)을 하나씩 빼면 어떨까. 그러면 전형적인 교회는 아니지만,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가나안 예배’는 가능할 것이다. 즉, 한 달에 한번 토요일이나 주일에 어느 장소에서든 모이고 자원하는 설교자를 모셔서 설교를 듣고, 헌금은 필요한 외부에 사용하는 것이다. 이런 아이디어를 나누었더니, ‘시작하면 우리 교회도 한번 활용해 달라’는 분도 있었다. 지역 교회와 경쟁할 일도 아니다. 오히려 지역 교회가 품을 수 없는 다양한 대상이 함께 예배드리는 장이 될 수 있다. 사실 이것은 그렇게 혁신적인 생각도 아니다. 영국에서 10년 이상 된 ‘대안적 예배 운동(alternative worship movement)’ 등이 이미 도시 단위로 진행되고 있다. 미국의 이머징 처치 그룹들도 블로그와 트위터, 페이스북 등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적극 활용하면서 온라인 공간에 방대한 네트워크를 펼쳐놓고 있다. 그들의 지역단위 모임들이 미국 전역에서 열린다. 바야흐로 우리는 새로운 방식의 ‘교회 되기’를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실험을 기존 교회가 갈등과 긴장으로 받아들일 것이냐, 건강한 자극으로 인정할 것이냐는 전적으로 선택의 문제다. 신구약에서 성전 예배가 아닌 회당 중심의 예배는 언제나 B급 예배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실제로 포로기와 로마 제국 시대의 유대인들의 신앙을 붙잡아준 것은 B급 예배였던 회당 중심의 모임이었다. 예루살렘의 성전만을 유일한 신앙의 좌표로 삼아 왔던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이 성전인 것과 그 성전을 남김없이 허물 것과 삼일 만에 살아나실 것을 예언했다. 나는 우리 시대를 향한 예언적 상상력이 새롭게 발동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정정훈 / 기존의 대형 교회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인들이 대형 교회로부터 이탈해야 한다. 마치 이스라엘의 출애굽, 엑소더스처럼 말이다. 보다 근본적인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우리의 교회 개념이 변화되어야 한다. 오늘 대형 교회는 포털사이트 같다. 교회에서 원스톱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한다. 나는 특정한 물리적 장소에 모이는 교회는 최소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형 교회가 독점하고 있는 영적․지적․문화적․사회적 필요를 채우는 다양한 기능들이 분산되어야 한다. 그렇게 분산된 기능을 각 그리스도인들이 조합하여 활용할 수 있는 모델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고상환 / 적어도 부조리한 교회는 붕괴되어야 하는 게 맞다. 교회 문제를 놓고 8년 동안 씨름했는데 교회 안에서 싸우고 교회가 분립되면 그 교회 문제가 새로 만들어지는 교회에 고스란히 옮겨 오게 된다. 그래서 오히려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헤쳐 모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렇게 해야 한국교회가 경계심을 가질 것이고, 부조리한 교회를 운영하면서 생활을 영위하는 목회자들이 위기의식을 느낄 것이다.

정리 이종연 기자 limpid@goscon.co.kr
사진 김은석 기자 warmer@gosc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