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재상 선생님께

[235호 청년당 선생님 어디 계십니까]

2010-04-28     이일영

선생님 안녕하세요. 선생님을 꽤 오래 전 마지막으로 뵈었습니다. 자주 연락을 드려야 했는데 죄송한 마음이 앞섭니다. 오랜만에 편지로나마 인사드립니다. 법조계에서 일하시는 분들에 대한 고정관념이랄까요, 일분일초를 다투며 바쁘게 일하실 것 같아 연락드리기가 조심스러웠다는 변명을 덧붙여 봅니다.

종종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사모님과의 결혼 소식을 비롯한 굵직한 근황들을 교회 선배들이 말해 주더군요. 자기 일처럼 소식을 줄줄이 꿰고 있는 선배들에게서 선생님을 향한 존경과 애정을 보게 됩니다. 저도 선생님께서 삶으로 증거하셨던 성품과 믿음에 대한 동경을 항상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마음이 편지를 쓰게 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제자의 삶을 바꾸어 놓은 선생님의 섬김을 이 편지로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제 감사한 마음이 선생님께 전달되면 좋겠습니다.
 
주일학교 고3반 제자로 선생님을 만났던 제가 벌써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습니다. 전공과 선교단체 활동, 관계 맺은 사람들…. 대학 4년의 시간이 제게 남겨준 유산들은 형언할 수 없이 소중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선생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아직도 생각할 때마다 아찔합니다. 입시 결과를 떠나 아무런 인생의 꿈도 희망도 없이, 그리고 하나님 없이 꾸려갔을 불 보듯 뻔한 제 인생이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수능에서 기대보다 낮은 점수를 받은 후 ‘공부를 왜 해야 하나’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제 안에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해야 한다는 압박을 주는 사람은 많았어도 왜 공부가 꼭 필요한 것인지 인격적으로, 진지하게 설명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재수를 요구하셨지만 저는 공부를 더 해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고 자신도 없었습니다. 학창시절까지는 그럭저럭 학교가 시키는 대로 버텨 왔지만, 재수를 생각하니 그저 도망가고 싶은 마음만 생겼습니다. 방향도 목표도 없으니 공부하는 방법도 모를 수밖에요. 그때는 인생의 ‘꿈’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깊은 좌절에 빠져 있는 저를 보고, 선생님이 건네셨던 말씀이 귓가에 생생합니다.
“방법을 모르겠으면, 나랑 같이 살면서 공부해 보자. 모든 시간을 같이 지내는 거야. 공부의 방향을 잡는 데 큰 도움이 될 거다.”

선생님도 기억나시죠? 이후 두 달 동안 함께한 생활말입니다. 선생님과 저, 그리고 H(주일학교 같은 반 또 다른 재수생 친구) 셋이서 잠자던 남자 냄새 물씬 풍기던 좁은 자취방, 선생님을 가운데 두고 H와 양 쪽에 앉아서 공부하던 독서실, 매일 새벽마다 쏟아지는 졸음을 참아가며 예배했던 교회, 하루 세끼를 전부 해결했던 고시 식당 등 선생님의 생활에 동참하는 것은 불편한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는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S대 법기독모임에 저희를 데려가셔서 관념적으로만 알고 있던 대학생활에 대한 간접적인 체험도 시켜 주셨지요. 우물 안 개구리였던 저희는 더 큰 세상을 보았고 신선한 자극이 되었습니다.

공부에 대한 자신감도 큰 자산이 되었지만 선생님의 삶에서 드러나는 신앙의 모습은 더 큰 자극이었습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라는 아모스서의 구절을 늘 말씀하시며 신앙인의 정의로운 사회참여에 대한 고민을 놓지 않으셨지요. 선생님의 책상에 놓여 있던 성경책, 주일 하루는 온전히 봉사하겠다는 하나님과의 약속, 약자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부조리에 대한 의분. 이 모든 것들은 함께 생활하던 그 두 달 동안 남김없이 드러난, 선생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한 선생님의 삶은 그 모습 그대로 제가 추구하는 삶의 가치, 신앙의 지향이 되었습니다. 저도 선교단체 리더와 주일학교 선생님이 되어 후배와 아이들을 대하고 있습니다. 그때 선생님이 계셨던 바로 그 자리에서, 제가 받았던 사랑을 동일하게 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참 어렵다는 것을 삶으로 배우며 알아가는 중입니다. 어려움을 느낄수록 그 두 달의 선생님의 섬김이 정말 큰 희생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러러볼수록 높아만 간다는 ‘스승의 노래’ 가사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감사한 마음이 더욱 깊어지는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후 선생님께서는 사법시험에 합격하셨습니다. 최근에는 인권사무국 사무관을 거쳐 검사에 임용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 어른들은 선생님을 기억할 때, 세상적 출세에 주목하며 대단하다는 칭찬을 늘어놓곤 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오히려 세상의 가치관과 쉽게 타협하지 않고 더 낮은 곳에서 이름도 빛도 없이 기쁘게 섬기시던 선생님의 모습을 잊지 못합니다. 말씀과 기도가 바탕이 된 인내와 성실한 삶의 자세는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의 삶을 투명하게 제자와 공유하는 공동체적 희생의 삶까지 배울 수 있었으니까요.

선생님. 이 편지가 인쇄되면 <복음과상황> 5월호를 들고, H와 함께 선생님을 찾아뵙고 싶습니다. 선생님의 합격 이후의 삶이 더욱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으로서 법조계에서 분투하고 계실 선생님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대학 생활의 모범이 되어 주셨던 스승님께서 학부 졸업을 앞둔 제자에게 이번에는 어떤 도전을 주실지 진심으로 기대됩니다. 손꼽아 그날을 기다리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십시오.
늘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제자 이일영 올림.

이일영 청년기자, 한양대 사회학과, hykal21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