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영 신학을 고발한다

<바벨탑에 갇힌 복음> 행크 해네그래프 지음, 새물결플러스 펴냄

2010-06-25     김선일

▲ <바벨탑에 갇힌 복음> 행크 해네그래프 지음, 새물결플러스 펴냄, 3만 원
추천은 일종의 보증을 의미할 것이다. 한국이 자랑하는 대형 교회의 목사, 기독교 대학의 총장, 언론인, 정치인까지 자신들의 이름을 걸고 추천하는 책이라면 품질 보증은 확실하다고 하겠다. 소설가 마크 트웨인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당신이 모르는 사실이 당신을 곤경에 빠트리는 게 아니다. 당신이 곤경에 빠지는 순간은, 당신은 확신하지만 그 확신이 사실이 아닌 순간이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기독교 신앙이라고 확신했던 신념이 기독교와 무관하다고 드러난다면? 당신이 존경하는 이들이 열렬히 추천한 책이 이단적이라고 한다면, 곤경에 빠지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바벨탑에 갇힌 복음>은 몹시도 불편한 책이다. 이 책은 <긍정의 힘>을 쓴 조엘 오스틴, <긍정적인 생각이 주는 기쁨>을 쓴 조이스 마이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인기 있는 베스트셀러 저자들을 향해 ‘기독교 내 이단’에 가깝다는 혐의를 거침없이 부여한다.

이단적인 사상, 계속 믿을 것인가

저자 행크 해네그래프는 미국에서 교회 안팎의 ‘이단들’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기독교 연구소(CRI: Christian Research Institute) 소장이다. 사실 이단 규명이나 이단적 가르침의 폭로는 새로울 것도 없고, 생산적이지도 않은 작업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은 기독교 울타리 밖의 공인된 이단들이 아니라, 정통 기독교 진영의 일부라고 자처하는 이단적 가르침들을 분별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띤다. 저자는 책의 앞부분에서 한 신학자의 말을 빌려 이단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린다.

“이단이란 그리스도 혹은 성경을 지지한다고 하지만, 1)부수적인 계시, 2)근본적인 신조를 부차적인 문제로 돌림으로써 기독교의 중심 메시지를 왜곡하는 모든 종교 운동이다”(46쪽).

기독교 내부의 이단성 판별은 그리스도의 신성이나 삼위일체, 또는 성경의 유일 무오함과 같은 본질적 신앙 고백의 수용 여부에서 그치지 않는다. 더욱 심각하게 스며든 이단성은 위의 정의에서 제시된 것처럼 교묘한 ‘위치 바꿈’에 있다. 즉, 성경에서 설정하는 신앙의 의제가 아닌 세속적‧문화적 욕망에서 비롯된 의제에 성경 구절들을 보완 장치로 전락시키는 방식이다. 이러한 정의에 입각해서 저자는 오늘 미국을 중심으로 활성화되어 가는 소위 ‘믿음 운동’의 핵심 인물들인 케네스 해긴, 케네스 코플랜드, 베니 힌, 토드 벤틀리, 조엘 오스틴, 조이스 마이어, T. D. 제이크스 등의 주장들을 치열하게 파헤친다. ‘믿음 운동’에서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에 대한 처절한 수용이 아니라, 인간의 잠재력에 관한 믿음이다. 특히 자신의 (물질적) 열망을 긍정적 언어로 표현하는 믿음의 습관을 숙달하면 소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조엘 오스틴은 젊은 시절 좁은 집에서 ‘찌들어’ 살던 부부였지만, 아내 빅토리아가 대저택을 소유할 것이라는 믿음과 승리의 언어를 사용했고 자신도 따라했기에 꿈이 이루어지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역에서 은사 운동 내지는 때로 신사도 운동이라는 외피를 입긴 했지만, 사실상 이단적인 번영 신학이자 신사고 운동일 뿐이라는 것이 저자의 단호한 평가다. (신사고 운동을 대변하는, 한국에도 베스트셀러가 된 <시크릿>은 ‘생각은 물질로 변한다’는 신념을 전파하며, 믿음을 정신활동의 가장 강렬한 형태로 본다: 55~56쪽). 더욱 심각한 사실은 우리의 전적 신앙 대상인 하나님과 예수님마저도 이 긍정주의 신사고 운동이 활약하는 무대의 법칙에 종속되는 신세로 전락한다는 점이다.

믿음 운동가들의 문제는 황당무계한 신비 체험담(하나님의 키가 188~190센티미터라는 코플랜드의 주장: 69쪽)이나 도덕적 수준을 의심케 하는 각종 공갈과 위협(베니 힌은 TV에 나와 자신의 비판자들에게 성령의 기관총을 갈겨 주고 싶다고 했다: 67쪽), 또는 근거 없는 공상적 성경 해석(조이스 마이어는 예수님이 지옥에서 고난을 당한 뒤 거듭나셨다고 주장한다: 95쪽)에 그치지 않는다. 이들이 육신이 되신 말씀보다 입으로 하는 사람의 말이 더 강력하다(114쪽)는 세속적 의제를 추종한 결과, 더욱 심각한 교리의 왜곡들로 이어진다.

이단적 사상의 결함을 알라

저자는 믿음 운동의 이단적 사상이 기독교 신앙의 표준으로부터 얼마나 결함이 있는지를 영어의 ‘결함들’을 의미하는 FLAWS의 이니셜을 빌려 설명한다(164쪽 이하). 첫째, 이들이 말하는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믿음 그 자체를 믿는 것이다(faith in faith). 그리고 언어는 믿음의 힘을 실어 나르는 그릇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 또한 이 믿음의 공식을 따르신다는 경악스러운 논리로 이어진다. 하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고백은 하지만 사실상 주권은 믿음의 언어를 구사하는 인간에게로 이양된 것이다(203~204쪽). 물론 믿음 운동가들이 성경의 이곳저곳을 들먹이며 근거를 대지만, 저자는 그러한 성경 해석의 왜곡됨과 무지함을 하나하나 폭로한다. 둘째, 이러한 믿음 운동은 결국 작은 신들(little gods)을 출현시킨다. 하나님의 입지는 좁아지고(아담이 지상의 주재권을 사단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그의 복제품인 인간이 주역으로 부상한다.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는 갑자기 시범 조교 수준으로 강등되고 사탄이 유일무이한 강력한 대적자로 인간과 맞장을 뜬다. 셋째는 말도 안 되는 속죄론(atonement atrocities)이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속죄는 단번에 이루어진 구속 사건이 아니라고 한다. 대신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사탄의 본성을 취하는 위장전술을 쓰시고 지옥에까지 끌려가셨다가 다시 신적인 존재로 환생하셨다고 주장한다. 오류가 오류를 낳고 있다. 잘못된 의제 설정이 계속해서 더 큰 구덩이를 파는 것이다.

넷째는 부와 가난(wealth & want)이고, 다섯째는 질병과 고난(sickness & suffering)인데, 이 마지막 두 개념이 사실상 믿음 운동과 번영 신학의 의제를 지정해 준 근본 층위라고 볼 수 있다. “이 세상의 문화는 신분 상승과 물질주의에 집착하고 있다. 믿음 운동 판매원들은 바로 이것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노동 없이 부를, 절제 없이 돈을 획득할 수 있다는 생각을 기대하는 경향이 더 짙어만 간다. 이들은 자기희생이 아니라 자기 확대를 암구호로 삼는다”(338쪽). 저자는 믿음 신학 설교자들이 예외 없이 노골적으로 씨앗을 심으면(다른 말로 헌금 송금) 100배의 보상 따위를 약속하는 형통 복음을 합창한다고 꼬집는다. 또한 이들은 “우리에게는 아프다는 것이 없다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에 있으면 … 하나님이 주시는 건강과 치유가 있을 것”(407쪽) 이라고 선언하며, 병의 증상들을 마귀의 잔꾀로 치부한다(410쪽). 저자는 이러한 주장이 1) 사실과 다를 뿐 아니라(실제 믿음 운동가들과 추종자들 역시 각종 병에 시달리고 희생당했다), 2) 성경이 의미하는 바와도 다름을 지적한다. 치유를 가리키는 성경의 언어 ‘라파’는 영적인 회복을 의미하는데도, 믿음 운동가들은 그리스도를 떠난 인간의 영적‧도덕적 무능력을 질병과 육신의 저주로 둔갑시켜 버렸다(419~420쪽). 게다가 인간의 모든 악을 귀신에게 책임 전가함으로 죄의 문제를 간편하게 정당화시키는 구실을 마련해 주기도 한다(426쪽). 사실 이 지점, 즉 부와 건강이라는 부수적인 쟁점이 신앙의 앞자리로 재배치됨으로써 근본적인 신조들이 멋대로 재해석되는 황당한 풍경이 펼쳐진 것이다. 

저자는 번영 신학은 영원한 것이 아닌 이 세상의 덧없는 것들에 매달리고 있기에 그 메시지는 허세를 잃어버리게 되리라고 단언하며(456), 이들이 기독교인이라면 자신이 기독교인이 아닌 게 분명할 것이라고 선을 긋는다. 이들의 가르침은 관용할 수 있는 신앙의 다양성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 특정 교리에 관한 입장의 온도 차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다른 성분을 끌고 왔다. 이들은 계시된 말씀이 아닌 세속의 유한한 욕망에서 신앙과 삶의 의제를 빌려와서는 이에 맞추어 성경을 문맥과 달리 엉터리로 해석하고, 점입가경으로 기독교의 정통 교리들을 자신들이 내세운 의제에 따라 고쳐 버린다. 이러한 행태가 서슴없이 등장할 수 있는 이유는 이들의 사설에 실낱같은 소망이라도 찾으려는 절박한 사람들이 모여드는 종교 현상 때문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다. 교계의 유력 지도자들과 굴지의 기독교 출판사 및 언론들이 실용성과 이익을 고려하고 이들의 책들을 추천하고 확대 보급해 준다는 사실이다.

제발 신앙의 기본으로 돌아가라

이 책의 저자는 믿음 운동의 한심스러운 실태를 파헤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신앙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나름의 해법을 제시한다. 그는 이를 또 다른 이니셜의 조합인 ABCDE, 즉  Amen(아멘=경배)-Bible(성경)-Church(교회)-Defense(방어=교리 수호)-Essentials(핵심)로 정리한다. 저자는 보편적인 정통 신조에 대한 올곧은 헌신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 책을 끝낸다. 그러나 무사히 책의 끝 페이지를 확인하면서 안도감과 함께 아쉬움도 밀려온다. 나는 믿음 운동을 꼼꼼하고 정밀하게 진단하는 저자의 고군분투에 감사하며, 용기 있는 통렬한 비판에 경의를 표한다. 더군다나 그는 단순히 관념적 차원에서 이 운동을 접근하지 않는다. 고난의 현장을 몸소 체험하면서 심오한 영적 의미를 탐구했던 저자들(마르바 던, 제럴드 싯처, 아치 하트 등)과 마찬가지로 이 책의 저자 행크 해네그래프 또한 눈에 치명적인 상해를 입은 아들로 인해 충격과 절망의 지점까지 이르면서 고통에 관한 믿음 운동의 허위적 주장들과 씨름하는 흔적이 역력하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여기서 또 하나의 과제를 엿볼 수 있다. 믿음 운동을 추종하는 이들의 열망, 비록 그것이 물질‧건강 등과 같은 이 세상의 덧없는 소원이라 할지라도 동시에 보편적 인간이 겪는, 있는 그대로의 정황임을 유념해야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통속적 종교들이 설정하는 의제들은 목회자인 나 또한 늘 부대끼며 풀어야 하는 인생의 숙제들이며, 진지한 사역의 과제다.   

선교학자 폴 히버트는 서구 기독교가 고결한 신학적 관념에 치우침으로 인생의 중간 영역을 배제하는 우를 범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기독교 신앙이 한편으로는 우주의 본질과 인간의 운명에 관한 성경적이고 초월적인 답변을 제공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 세계와 마주할 때는 경험과학에 자리를 내주는 양극화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결국 현실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인들도 늘 떠안고 살아야 하는 삶의 질문들에 관해서는 통속적 종교의 입지만을 더 강화시켜 주는 꼴이 되고 만다. 목회의 현장에서 교인들은 계속 중간 영역의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주일 성수할 수 있는 직장을 애태우며 찾는 젊은이, 아토피 피부염으로 고생하는 아이를 일주일이 멀다 하고 병원 응급실로 데려가야 하는 엄마, 사회 경제적으로는 번듯하게 출세한 듯하지만 성인 자녀의 자폐증으로 불면에 시달리는 부모…. 이들에게 하나님의 주권·사랑·인내와 같은 고차원의 신학적 진술만을 동어 반복하기에는 내 스스로 가혹하다는 느낌이 든다. 정통 기독교 신앙이 이러한 미시적인 삶의 영역에 섬세하게 개입하지 않는 한, 믿음 신학과 같은 통속적 종교는 당분간 번창할 것이다. 물론 나는 저자가 이단적이라고 낙인찍는 믿음 운동에 눈곱만큼도 동정하지 않으련다. 그러나 믿음 운동의 가르침에 이끌리는 평범한 이들의 처지를 세심하게 공감하며 들어줘야 할 절박한 필요성은 강조하고 싶다.

교회가 사람들의 실제적 문제들을 전부 돌보는 곳은 아니지만, 일상의 삶에 대한 영적 성찰은 제공해 줘야 한다. 교리 신학의 두터운 붓으로 삶의 소소한 진리들을 그려낼 수 없다. 물질적 욕망을 질타만 할 것이 아니라, 물질을 의미 있게 사용할 수 있는 실질적 프로젝트가 필요하다. (이 점에서 교회는 착한 재테크나 함께 사는 마을 만들기와 같은 세상의 건전한 지혜를 겸손히 배울 필요가 있다.) 고통과 질병을 영적인 성숙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목회적 돌봄과 더불어 호스피스 사역을 더욱 적극적이며 체계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자기 파괴적인 경쟁 사회에서 안식의 리듬을 지키도록 교회의 주일 성수 개념도 전환되어야 한다. 생태적 삶을 창조 신앙을 반영하는 문화로 승화시킴으로써 영육 간의 조화로운 강건함을 추구해야 한다. 또한 교회는 이러한 일들을 위해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각양 은사로 서로를 세워 주는 지지 공동체(support community)로 발돋움해야 한다. 그것이 교계에서 냉대 받는다는 본서 <바벨탑에 갇힌 복음>의 정당성을 온전하게 보완해 주는 방법이다.  

김선일 님은 현재 예수소망교회 교육 목사로 사역하며,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에서 실천신학을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