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의 고백 (1)

[238호 예레미야의 말씀들 ⑧] 예레미야 7장 16절 ~ 12장 6절

2010-07-22     김근주

지난 달에 살펴본 대로, 예레미야 7장은 예레미야의 성전 설교를 담고 있다. 성전에 대한 그의 강경한 말들과 21~23절에서 볼 수 있는 제사 거부에 관한 내용들을 액면 그대로 읽으면 마치 예레미야가 성전을 중심으로 한 제사 제도 전체를 거부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구약성경 전체를 고려할 때, 예레미야가 제사와 성전 자체를 거부했다고 보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그럼에도 7장 전체의 내용이 성전과 제사 중심의 신앙에 대해 표현하고 있는 그 강한 감정은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 아무리 순화시킨다 하더라도 이 장이 담고 있는 바, 삶이 수반되지 않는 제사에 대한 강하고 격렬한 경고는 약화시킬 수 없다. 정경 전체에 대한 안목이 개별 본문이 지닌 강경함을 약화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7장부터 10장까지의 본문은 대체적으로 성전에 대한 유다의 그릇된 착각을 깨뜨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11장은 이전까지의 장들과 구별된다. 형식적으로는 새로운 단락을 시작하는 특징적인 어구(“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용적으로는 이전의 장들과 구별되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청종과 회복에 대한 신명기적인 간결한 표현들, 지난 역사를 간결하게 정리하고 있는 표현들(가령 7절)을 들 수 있다.

11장 1~17절까지의 내용은 ‘이스라엘을 건지신 하나님께서 여러 번 그들을 권하여 하나님의 명령에 청종하라고 말씀하셨으나, 그 백성들이 그에 따르지 않고 도리어 반역을 꾀하여 바알에게 분향하였도다’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을 표현하는 핵심적인 단어는 히브리말 ‘하슈켐’으로 우리말 성경에는 ‘간절히 경계하다’로 옮겨져 있다. 이 말의 원래 의미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다’이며, 새벽같이 일어나서 나귀의 어깨에 짐을 싣는 것에서 유래한 말이다(창세기 22장 3절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을 받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모리아 땅으로 출발했다). 예레미야서에서 이 단어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을 가리키는 말로 특별하게 사용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7:25; 25:4; 35:15; 44:4), “꾸준히”(26:5; 29:19) 그의 선지자들을 이스라엘에게 보내서 그 말씀을 듣게 하셨다. 마치 새벽부터 일어나 부지런히 행하는 사람처럼, 하나님께서는 새벽같이 부지런하게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그 백성에게 보내서 말씀을 가르치신 것이다. 아울러, ‘하슈켐’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의 사역을 묘사하는 데에도 쓰인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선지자들은 “새벽부터 부지런히”(7:13), “끊임없이”(11:7; 32:33; 35:14)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가르쳤으며, 예레미야 역시 하나님의 보내심을 따라 요시야 13년부터 여호야김 4년까지 “꾸준히”, 말하자면 “새벽같이 일어나서 부지런히” 말씀을 가르쳤다(25:3). 이 23년의 세월 동안 소득 없어 보이는 일을 위해 조롱과 박해를 견디며, 처절한 낙담과 절망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예레미야는 자신의 사역을 감당한 것이다(피터슨: 133~143).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행하심이 예레미야 자신의 꾸준한 사역을 통해 반영되고 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반응에 있어서, 예레미야와 그 백성은 천양지차이다. 그런 점에서 예레미야서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에서 뺄 수 없는 것은 바로 예레미야 자신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고 사역하는지를 보여 주는 산 증거이다. 다른 예언서들과는 달리, 그의 개인적인 삶에 대해 예레미야서가 자세히 전하고 있다는 점은 포로기 혹은 포로 후기 유대 공동체에 있어서 그의 삶과 순종이 모범으로 제시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요셉의 삶이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모범이 되듯, 예레미야는 고난에 가득 찬 현실 속에서 어떻게 여호와를 경외하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모범이다. 예레미야처럼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으나 순종치 않았고, 계속해서 그들에게 파송되는 예언자들의 말에 도무지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였다. 그 말씀과 명령을 따라 살아가는 길이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으나, 그는 믿음으로 걸어갔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이 되었다. 예레미야서에서 이처럼 하나님께 순종한 사람들의 모형으로 레갑 족속(35장)을 들 수 있지만, 예레미야 본인이야말로 가장 큰 예이다. 예레미야서에 다른 예언서와는 달리 전기적인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정경 자체에서 이미 우리에게 예레미야 개인의 삶에 대해 숙고하도록 지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예레미야는 긴 세월에 걸쳐 자신의 사명을 한결같이 감당하였다. 그리고 이 사역의 기간은 한결같은 고난과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이미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부르실 때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다는 점은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의 비난과 공격 속에 살아가야 할 예레미야의 삶을 충분히 암시하고 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도우시되, 곤경으로부터 건져 내시는 것이 아니라, 예레미야를 놋성벽처럼 단단하게 하셔서 곤경과 모욕을 견디어 내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함께하시는 삶을 살지만 끊임없는 곤경과 고난 가운데 살아가야 하는 예언자, 그가 예레미야였다. 그렇지만 그 역시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이었기에, 그의 다문 입술을 뚫고 하나님을 향한 처절한 기도와 부르짖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레미야서는 “예레미야의 고백”이라 불리는 이 내용들을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있는 다른 내용들과 함께 묶어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예레미야의) 고백들은 유다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예언자가 말하고 있는 것들이지만, 기록된 형태 안에 담긴 하나님 말씀의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예언자의 선포와 예언자의 인격이 함께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증언하고 있다”(Stulman: 119).

“예레미야의 고백”으로 분류되는 본문들은 다섯 개이다: 11:18~12:6; 15:10~21; 17:14~18; 18:18~23; 20:7~18. 이 “고백”들이 20장을 끝으로 더 이상 없다는 것도 25장까지를 하나의 덩어리로 보는 것을 뒷받침한다. 25장까지가 예레미야서 형성의 가장 초기 형태였을 것이다. 26장에 성전 설교가 다시금 나온다는 점도 이를 지지한다”(알베르츠: 403~406).

1. 예레미야의 첫 번째 고백: 11:18~12:6

예레미야의 첫 번째 고백은 “여호와께서 내게 알게 하셨으므로 내가 그것을 알았나이다”로 시작한다. 여호와께서 그로 알게 하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레미야를 대적하는 아나돗 사람들의 음모였다. 아나돗 사람이라면 예레미야의 고향 사람들인데 왜 예레미야를 대적하는 것일까? 11장 21절은 이들이 예레미야에게 요구하는 바를 간결하게 보여 주고 있다: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전한 예언, 그것이 아나돗 사람들로 하여금 예레미야를 죽여야겠다고 작정하게 한 원인이었다. 그리고 11장이 놓여 있는 문맥은 7장부터 11장에 이르는 예레미야의 심판 말씀을 그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전한 예언으로 보게 한다. 결국,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고 있는 멸망 예언들, 그들의 죄악을 폭로하며 그 죄의 결과로 그들에게 멸망과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예언, 그것이 아나돗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고 마침내 예레미야를 죽여야 한다고까지 행동하게 한 원인이었던 것이다.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의 행동을 “반역”이라고 표현하는 예레미야의 선포는 당시 사회의 뿌리를 뒤흔드는 말이 아닐 수 없으며,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부정하지 않는 이상, 이 말을 들은 이들은 예레미야를 제거해야겠다고 나서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한편, 아나돗 사람들이라고 하여 공개적으로 여호와를 버리고 불신하는 이들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점도 생각해 볼 만하다. 예레미야서에서 반복되는 내용들 중의 하나는 겉으로는 여호와를 섬긴다고 하지만 실상은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에 대한 예레미야의 고발이라고 할 수 있다. 입술로는 여호와를 말하고 죄 용서도 말하고 진노가 떠났다는 식의 은혜로운 표현도 하지만, 예레미야의 선포 앞에서 그들의 신앙이 거짓되었다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예레미야는 가식과 위선을 들추는 존재이다. 아나돗 사람들 역시 자신들의 입으로 예레미야를 향해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라고 말하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예레미야의 선포와 삶은 겉으로 혹은 종교적으로 여호와를 섬기는 이들이 사실은 여호와를 떠난 자임을 폭로한다.

이런 모습은 예수님에게서도 볼 수 있다. 당시에 그 누가 바리새인들이 그토록 위선자라고 드러낼 수 있었을까? 바리새인들이나 대제사장들도 스스로 여호와를 극진히 섬기는 이들이라고 자부했을 것이며, 모든 백성들도 그렇게 알고 그들을 존중하고 존경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시자, 그들의 거짓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버렸고, 그들의 경건이 사실은 거짓이었으며 욕망의 또 다른 표현이었음이 밝혀져 버린 것이다. 예수님의 선포를 듣고 자신들의 삶을 전적으로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든지, 아니면 자신들을 폭로하고 드러내는 주님을 제거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이것은 예레미야를 대적하는 아나돗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예레미야를 향한 그들의 적대감은 심히 컸으며 “나무와 열매를 함께 박멸하자”는 표현은 이를 반영하고 있다. 나아가 그들은 예레미야를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끊어 버리려고 한다. 여기서 “살아 있는 자의 땅”은 시편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아가는 이 땅에서의 신앙 공동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쓰인다(시 116:9). 즉, 이 대적들은 하나님의 명을 따라 심판을 전하는 예레미야를 자신들과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로부터 철저히 배제하고 축출하고자 한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영광스러운 공동체가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옳은 말을 하는 한 사람을 위협하고 협박하는 근거로 쓰이고 있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진리가 사라진 공동체는 더 이상 공동체일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다만 이익으로 똘똘 뭉친 패거리에 불과할 뿐이다(김근주: 8~19).

이렇게 공동체를 등에 업고 똘똘 뭉쳐 있는 이들에 비해 예레미야의 처지는 “도살당하러 가는 순한 어린 양”과 같다. 예레미야가 알 수도 볼 수도 없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이 음모들을 어떻게 당할 수 있을 것인가. 오직 여호와의 말씀만을 붙잡고 있는 예레미야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뿐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전하는 것뿐일 것이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지혜의 근본일 것이다. 흔히 이러한 상황을 대할 때마다 우리는 곧잘 ‘뱀 같은 지혜로움’을 말하곤 한다. 그러나 정작 이를 다루고 있는 마태복음의 본문을 보면(마 10:16~23), 기본적인 맥락은 환난인 것을 알 수 있다. 뱀 같은 지혜와 비둘기 같은 순결의 결과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극심한 환난이 닥쳐오게 되고, 잡혀 공회에 넘겨지게 되며 채찍질이 그들을 기다린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뱀의 지혜는 요리조리 살살 빠져 나가면서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아무하고도 원수지지 않는 그런 결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우리 주님께 그런 식의 지혜가 있었더라면 아마 주님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 대제사장들과 전혀 갈등 없이 얼마든지 평화롭게 오랜 기간 사역하실 수 있었지 않았을까. 오늘 우리의 교회는 너무 쉽게 뱀 같은 지혜를 구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비둘기의 순결은 찾아볼 수 없는, 그저 뱀일 뿐인 경우가 많다고 보인다. 예레미야 역시 그를 대적하며 죽이려 하는 이들 앞에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 같은 신세일 뿐이다. 어떻게 그가 이 위기를 막을 수 있을까. 한 군데의 음모를 막는다 해도 다른 곳에서 이루어지는 음모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만을 전하는 예레미야는 세상 앞에서 무능하고 무기력할 뿐이다. 그러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의 무력함은 바로 이 땅에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기도 하다(사 53:7). 그리고 여기에 위로가 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으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으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로 알게 하시어 그가 알게 되었으며, 알고 난 다음이라도 예레미야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하나님의 보복하심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렘 11:20). 20절에서 “원통함”으로 옮겨진 단어는 일반적으로 ‘소송’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나의 원통함”은 ‘나의 사정’ 혹은 ‘나의 경우’, ‘나의 소송’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사정을 소상히 하나님께 아뢰어 소송을 제기한 것이고, 이제 공의(“체데크”)로 재판하시는 하나님의 판결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께 자신의 사정을 아뢸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아나돗 사람들에게 유죄를 선고하시며, 예레미야를 죽이려 하던 그들의 자녀들이 도리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11:22~23).

예레미야의 곤경에 대해 하나님께서 명쾌하게 응답하신 것 같지만, 하나님을 향한 예레미야의 질문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불의한 이들에 대해 바로바로 심판을 선언하시는데, 왜 세상에서는 여전히 악인들이 형통하고 불의한 자들이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까?(12:1)’ 아나돗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이 선고되었지만, 여전히 예레미야는 곤경 가운데 살고 있으며, 악을 행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평안하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예레미야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순한 어린 양과 같건만,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12:1)하다. 세상에서의 형통함과 평안함으로 인해 당연히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들을 심으셨고, 그들의 뿌리가 내려 열매를 맺은 것이라고 여겼다(12:2). 사실 이 논리는 예레미야 이래 오늘날까지도 이 사회를 지배하는 논리이다. 그리고 예레미야의 이 질문은 구약의 예언자들로부터 오늘날의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제기되는 질문이기도 하다.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합 1:4)고 악인이 의인을 에워싼 현실을 살아간 하박국 역시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 데도 잠잠”하신지 부르짖는다(합 1:13). 악인의 형통에 당혹스럽지만,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생각이 예레미야에게 더 큰 괴로움이 된다. 악인의 형통과 번영으로 인해 땅이 슬퍼하고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게 되며 짐승과 새들도 죽게 되었다(12:4). 악인의 번영은 온 세상을 파괴한다. 참으로 온 세상의 피조물들이 탄식하게 된다(롬 8:19-22). 이러한 예레미야의 질문과 번민은 응보에 대한 교리적 숙고나 혹은 철학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의 내적인 깊은 부르짖음에서 나온 것인 바, 근본적으로 실존적인 것이다(Stulman: 126).

이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무엇인가?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 강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 네 형제와 아버지의 집이라도 너를 속이며 네 뒤에서 크게 외치나니 그들이 네게 좋은 말을 할지라도 너는 믿지 말지니라”(렘 12:5~6).

놀랍게도 하나님의 대답은 악인의 번성과 의인의 고난 같은 현실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대답은 오직 예레미야 자신을 향한 것이며, 그 자신의 준비에 대한 것이었다. 지금 예레미야에게 일어나고 있는 상황은 이상한 것도 특별한 것도 아니며, 앞으로 더 크고 더 어려운 상황이 닥칠 것이니 그 때에는 어찌 하려느냐고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예레미야에게 물으신다. 하나님을 따르는 자에게 고난과 환난이 극심하고, 하나님을 떠난 이들에게 형통과 평안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가 더 큰 상황에 준비되어 있는지를 물으신다. 이러한 맥락이야말로 베드로전서의 다음과 같은 말씀의 맥락일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0).

하나님은 복잡한 문제를 간결하게 답변하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예레미야로 하여금 더 큰 위협과 재난을 준비하도록 그에게 “신실함과 용기”를 촉구하신다(Stulman: 127). 왜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러한 고통이 있는지 힘겨워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단지 고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있다고 일러 주신다. 고통스러운 현실로 인해 부르짖는 예레미야를 향해 하나님께서는 더 큰 상황을 맞이하고 대처할 준비를 하도록 깨우치신다. 다음과 같은 유진 피터슨의 묵상은 숙고할 만하다.

“우리가 스스로를 최소한으로 정의하여 그 한도 내에서 안전하게 사는 것이 자신을 최대한으로 정의하면서 모험적으로 사는 것보다 쉬운 법이다. … 이 세상의 냉소주의는 새로운 삶을 향한 희열에 찬 이상에 흙탕물을 튀겨 얼룩을 만들어 놓았다” - <주와 함께 달려가리이다> 중

예레미야를 더 큰 고난의 길로 부르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을 더 큰 고난의 제자의 길로 부르시는 복을 주신다.

생각해 볼 점들

1. 하나님께서 ‘새벽부터 부지런히’ 그 백성들을 향해 예언자들을 보내시며, 보냄받은 예레미야는 ‘새벽부터 부지런히’ 그 맡겨진 사명을 한결같이 감당하였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받은 이들인가? 우리는 어떻게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가?

2.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화와 낙관에 취하여 있을 때에 홀로 심판과 재앙을 전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로 인해 예레미야는 공동체로부터 축출될 위험에 빠지기도 하였다. 오늘날의 현실에서 이러한 일들은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는지 나누어 보자.

3.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을 묻는 예레미야에게 주신 하나님의 대답은 무엇인가? 이 대답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참고 문헌

김근주. ‘공동체로 부르신 하나님’. <성서마당> 94호 (2010 여름), 8~19.
라이너 알베르츠. <포로시대의 이스라엘>. 배희숙 역, 크리스찬다이제스트, 2006.
유진 피터슨. <주와 함께 달려가리이다>. 홍병룡 역, IVP, 2003.
L. Stulman. Jeremiah. Abingdon Old Testament Commentaries. Abingdon Press, 2005.


 

김근주 님은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구약을 가르치고 있으며 강남구에 있는 푸른뜻교회를 섬기고 있다. 준행함이 없는 신학을 두려워하며 에스라의 심정으로(스 7:10)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