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의 고백 (3)

[240호 예레미야의 말씀들] 예레미야 16장 15절~18장 23절

2010-09-29     김근주

16장은 유다 땅에 임하게 될 극심한 재앙에 관한 말씀이다. 그 재앙이 극심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결혼하지 말고 자녀도 낳지 말라고 이르신다. 사실 예레미야와 같은 하나님의 사역자라면 차마 결혼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어 상가(喪家)에도 가지 말라 하신다. 하나님이 내린 재앙이며, 모두 진멸되어 울어 주고 곡해 줄 사람도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잔칫집에도 가지 말라 명하신다. 즐거워하는 소리가 이 땅에서 사라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내용들은 모두 예언자의 상징 행위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뜻은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뿐 아니라 예언자의 삶과 행동을 통해서도 선포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예언자는 그 말만이 아니라 삶 전체가 하나님이 전하실 말씀의 도구가 되었다. 예레미야에게 명령된 이 상징 행위의 의미는 명확하다. 모두 그 땅에서 죽게 될 것이다(16:6). 그러나 이러한 예레미야의 선포에 대해 그들은 도대체 자신들의 죄가 무엇이냐고 묻는다(10절). 이러한 질문은 5장 19절에서도 볼 수 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느뇨.” 이러한 질문들은 여전히 그들이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으며, 자신들의 죄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없기에, 예레미야가 선포하는 심판의 말씀이 부당하다고 여기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들이 다른 신들을 섬겼을 수도 있지만, 그들은 여호와께도 제사를 드리고 해야 할 바를 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들의 항의에서 볼 수 있듯, 이들은 여전히 여호와를 “우리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신앙고백과 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두려운 진노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스라엘은 신앙고백이 잘못되어서 멸망당하는 민족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렇게 하나님을 부르는데도 자신들에게 심판이 임한다는 예언자의 선언에 당혹스러워 한다. 17장에서도 유다의 죄와 그로 인한 쫓겨남에 대해 선포된다. 그들이 쫓겨나는 것은 그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나고 사람을 의지한 까닭이되, 그 마음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키시며 보호하실 것이다. 여기에서 물가에 심긴 나무의 비유가 사용되었다(17:5~8).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마음의 맥락에서 예레미야의 세 번째 고백이 나온다.
 
세 번째 고백(17:14~18): 구원 간구

14절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고치시고 구원하시기를 간구하고 있다. 이 절의 짜임새에 대한 다음의 설명을 보라.
 
“예언자는 자신이 철저하게 야훼 중심으로 기도한다는 점을, 같은 뿌리의 히브리 동사를 나란히 쓰되, 먼저 야훼를 주어로 하고 자신을 목적어로 하는 능동태를 쓰고 뒤이어 자신을 주어로 하는 수동태를 쓰는 특별한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곧 야훼께서 고쳐 주셔야 내가 고침받아 나을 수 있고, 야훼께서 도와 주셔야 내가 도움 받을 수 있다는 마음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는 야훼께서 어떻게 하시는지에 따라 내 상황이 결정된다는 깨달음을 표현하는 방법이다”(박동현: 570).
 
그래서 이 절은 오직 하나님만을 자신의 찬송으로 삼은 사람, 세상에 아무런 의지할 것이 없고 기댈 것이 없으며 하나님만을 그 힘으로 삼은 사람의 모습을 보여 준다. 하나님만을 사모하고 간구하는 예레미야를 비꼬고 조롱하는 무리들의 말은 15절에서 볼 수 있다.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 있느냐? 이제 임하게 할지어다.” 이들은 예레미야가 선포한 심판의 말씀을 가지고 그를 조롱하는 이들이다. 여호와의 말씀은 예언이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기에 사람들은 비웃고 조롱한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희망과 축복은 기쁨으로 듣되, 그 반대의 재앙은 비웃고 조롱한다. 이 예언은 단지 앞날을 족집게처럼 짚어 내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주신 말씀에 근거해서 현재의 삶을 보고 임할 미래를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백성들은 오늘의 안일 속에서 다가올 재앙의 예언을 조롱하며 비웃는다.

15절의 첫머리에 있는 “보라 그들이”라는 표현은 16절을 시작하는 “(그러나) 나는”이라는 표현과 대조되어 있다. 함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예레미야의 대적들의 행하는 모습과 예레미야의 행하는 모습이 이러한 서두의 표현을 통해 확연히 대비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성취되지 않았고 증거가 없다 하며 여호와의 심판의 말씀을 가벼이 여기되,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주신 ‘목자’의 직분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주님의 뒤를 따랐다. 예레미야는 스스로 “목자”로 부르고 있다. 주로 이러한 호칭은 왕을 비롯한 지도자들에게 주어지는 호칭이며, 예언자에게 이 호칭이 주어진 곳은 구약에서 이 구절뿐이다(Stulman: 173). 그가 전한 재앙의 날은 그 스스로 원한 결과가 아니었다. 그가 입술을 열어 전하였던 내용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알아 주실 것이다. 그의 모든 사역과 선포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다만 그는 그 사명에서 도망치지 아니하였기에 심판의 선포자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재앙의 날에 하나님을 자신의 피난처로 고백하는 예레미야의 기도는 18절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이들에 대한 기도로 이어진다. 자신을 괴롭히고 박해하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재앙과 심판을 내려 주시기를 구하는 이러한 기도는 흔히 ‘저주의 기도’라고 불린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신약적인 가르침을 일상에서 실천을 못하지만 여러 번 들어 귀에 익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약 본문들에서 곧잘 발견되는 ‘저주의 기도’는 꽤나 당황스러운 내용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네 번째 고백 본문에서 다룰 것이다. 여기서는 ‘저주의 기도’ 역시 ‘기도’라는 점만을 상기하면 좋겠다. 이것이 ‘기도’라는 것은 자신이 직접 원수를 갚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원수를 맡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저주의 기도’를 할 수 있는 이면에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다. 곰곰이 우리 현실을 생각하면 우리는 이런 ‘저주의 기도’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맡기기보다는 우리 스스로 직접 원수를 갚고 보복을 하고 싶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주의 기도’는 하나님께 맡김이요, 하나님에 대한 신뢰다(Brueggemann: 86~87).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이 맡기신 직분을 떠나 버린 이들과는 달리 예레미야는 자신에게 주어진 목자의 직분에 충실했고, 그로 인해 모진 고난과 핍박, 박해를 겪어야 했으며, 그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구할 뿐이었다. 그를 괴롭히는 대적들에 대해서도 예레미야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시기를 바라며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네 번째 고백(18:8~23) : 저주의 기도

18장 1~17절은 토기장이의 비유로부터 시작한다. 이 비유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멸하시기로 정하신 나라라도 돌이키면 하나님께서 그 멸망의 뜻을 돌이키신다는 것이며, 복 주시기로 정하신 백성이라도 악을 행하여 하나님의 소리에 순종하지 않으면 복의 뜻을 돌이켜 도리어 재앙을 내리신다는 것이다. 확고 불변하시고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뜻이 사람들의 순종과 불순종에 따라 바뀌는 것처럼 진술하는 이 본문은 그만큼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들이 마치 자신의 수중에 있는 것처럼 이용하거나 마음대로 적용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구원이 영원히 자신의 것인 것처럼, 하나님의 복이 영원히 우리의 것인 것처럼 말하는 이들이 있고 그것이 믿음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18장의 토기장이에 관한 말씀은 하나님께서 불순종한 이들에 대해 그 정하신 복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실 것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은 무엇인가? 뜻밖에도 “헛되다”였다(18:12). 하나님을 따르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 헛되다 말하며 자신의 고집과 오기를 바꾸지 않는다.

18절부터 예레미야의 네 번째 고백 본문이 등장한다.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헛되다 하며 고집부리는 이들을 향한 심판의 말씀이 13~17절에 선포되고, 18절은 그를 들은 이들이 예레미야를 대적하며 예레미야를 제거할 궁리를 하는 것을 전하고 있다.
 
“그들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책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어떤 말에도 주의하지 말자 하나이다.”
 
그들에게 예레미야는 불필요하다. 이미 그들에게는 예레미야가 아니더라도 다른 중재자들이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제사장은 율법을, 지혜자는 삶의 지혜를,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제사장이 가르치는 토라는 예배 의식을 비롯한 종교생활에서 판단해야 할 문제가 생겼을 때에 일러 주는 지침을 가리킬 것이다(박동현: 596)(학 2:11~13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이들이 언급하는 이 사역자들은 예레미야와는 달리 모두 평화와 위로를 전하는 사역자들이었을 것이다. 나아가, 이들 역시 예레미야를 대적하는 음모에 가담했을 수도 있다. 예레미야야말로 제사장과 지혜자들, 예언자들의 최대의 대적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만 없어지면 현재의 모든 질서(status quo)가 고스란히 유지되고 사회는 평안할 것이다(Stulman: 188). 주목할 것은 예레미야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를 무시하고 무산시키기 위해 또 다른 ‘영적 권위들’이 사용되고 동원된다는 점이다. 예수님에 대한 유대 지도자들의 태도와 얼마나 비슷한가. 그리고 오늘 우리의 현실과 얼마나 비슷한가. 예레미야의 외침은 한 사회의 안정을 뿌리로부터 뒤흔든다. 그래서 그 사회는 똘똘 뭉쳐 예레미야와 같은 이들을 주변화시키고 배제하려고 한다. 예레미야가 존재하는 한, 다른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은 자신들의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을 것이고, 그들에게 있어서 예레미야를 제거하는 것은 신학적 문제라기보다는 생존의 문제였을 것이며, 이것이 예수를 제거하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상황이었을 것이다. 예언자를 치는 최고의 방법은 18절에서 보듯, 그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며 혀로 치는 것이고, 아울러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언자가 하는 말을 상대화시키고 축소시키고 성취되지 않는 것에 근거해서 조롱한다.

언제나 그렇듯 예레미야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였다.

“여호와여 나를 돌아보사 나와 더불어 다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 보옵소서”(18:19).

그들은 예레미야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말자고 모의하고,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그의 소리에 귀 기울이시기를 구한다. 예레미야에게는 하나님뿐이었다. 그를 대적하여 고발하며 비웃는 수많은 소리들에 대해 그는 다만 하나님께 아뢸 뿐인 것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진노를 그들에게서 돌이키기 위해 하나님 앞에 서서 선을 말하였으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악이었다. 백성을 위해 중보기도하였을 예레미야의 모습을 볼 수 있거니와(Stulman: 191), 도리어 예레미야의 백성들은 악으로 선을 갚고 있다.

21~23절은 그를 대적하는 자들에 대한 ‘저주의 기도’다.
 
“그러하온즉 그들의 자녀를 기근에 내어 주시며 그들을 칼의 세력에 넘기시며 그들의 아내들은 자녀를 잃고 과부가 되며 그 장정은 죽음을 당하며 그 청년은 전장에서 칼을 맞게 하시며 주께서 군대로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게 하사 그들의 집에서 부르짖음이 들리게 하옵소서. 이는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구덩이를 팠고 내 발을 빠뜨리려고 올무를 놓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죽이려 하는 계략을 주께서 다 아시오니 그 악을 사하지 마옵시며 그들의 죄를 주의 목전에서 지우지 마시고 그들을 주 앞에서 넘어지게 하시되 주께서 노하시는 때에 이같이 그들에게 행하옵소서 하니라.”
 
당사자인 대적만이 아니라 그의 자녀와 아내, 가족에까지 미치는 저주의 기도는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여기에는 죄의 결과가 가족에게까지 미친다는 사고가 전제되어 있으며, 아간에게 일어난 일(수 7장)은 그 단적인 예이다(박동현: 599). 이러한 기도는 예레미야서에만 있지 않고 시편에서도 여러 군데에서 보존되어 있다(35, 59, 69, 70, 109, 137, 140편). 이 시들 가운데 저주의 강도가 워낙 두드러진 69편과 109편 같은 경우는 교회에서 회중이 함께 읽기 어려울 정도다(앤더슨: 78). 저주의 기도 혹은 저주 시편을 정경 안에 받아들이고 있는 한, 우리는 이들을 그리스도인 이전 단계라든지, ‘덜 기독교적’인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교회에서 읽기 위한 성경 본문에서 이들을 뺀다는 것은 성경보다 우리가 더 ‘성경적’이며, 성경의 본문의 판단자가 현대의 교회라는 잘못된 교만함의 결과일 것이다. 이들 시편과 기도를 읽기에서 빼는 것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은 이 본문들의 의미에 대한 보다 깊은 숙고일 것이며, 교회에 이 본문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에 대한 묵상일 것이다.

세 번째 고백에서도 언급했듯이, 시편 기자든 예레미야든 자신들이 당한 대적과 고통으로 인해 스스로 원수 갚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은 우리를 억울하게 한 그 사람에게 동일한 고통을 주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억울한 고통과 핍박 가운데 자신이 당한 고통이 원수에게도 임하여 그가 벌을 받기를 바란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중요하다. 분노는 불의하게 희생당한 데 대한 정당한 반응이며, 적절한 분노는 표현되어야 한다(맥칸: 171~172). 이것은 카타르시스의 효과가 있되, 단지 심리적 측면만이 아니다. 예레미야와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중 이러한 저주를 말하고 있다. 분노에 찬 정직한 기도는 기도자 스스로가 원수에게 복수하는 것을 방지한다. 그래서 저주의 기도는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음(신 32:35)을 고백하는 것이다. ‘복수하다, 원수를 갚다’에 해당하는 히브리말 ‘나캄’은 ‘구원하다’라는 기본적 의미를 담고 있다(사 61:2; 63:4). 그런 점에서 복수와 구원을 모두 포괄해 낼 수 있는 적절한 우리말은 ‘신원(伸寃)하다’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통함을 풀어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면서 사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을 심판하시는 것이며, 이러한 심판의 다른 측면은 그 백성을 향한 구원이다. 그 날에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괴롭히고 위협하던 ‘사망’을 영원히 삼켜 버릴 것이다(사 25:8). 그러므로 신원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일인 것이다. 사람들의 원수 갚는 것은 감정적이고 일면적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신원을 통해 악을 멸하시며 사망을 멸하신다. 그래서 하나님께 원수 갚을 것을 구하는 것은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는 신앙고백인 것이다(롬 12:19).

일반적으로 저주는 말의 효력을 지닌 것으로 이해된다. 말을 하면 그것이 그대로 성취되기에 말을 조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주하는 사람은 기도가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냥 저주를 말하면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데 시편의 기자들과 예레미야는 저주를 기도 중에 말한다. 그것은 저주를 자기 뜻대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편과 예레미야서의 저주는 더 이상 본래 의미의 저주가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때에 신원해 주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인 것이다. 이렇게 드는 격렬하고 복수심이 불타는 기도는 사실, 비폭력의 행위다(맥칸: 172). 아울러 하나님이 이루실 신원과 회복에 대한 기다림과 간구다.

아울러 저주의 기도가 선언하고 있는 분명한 원칙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죄악을 대적하신다는 점이다. 시편과 예레미야서에 나오는 원수는 모든 악과 죄를 행하기를 일삼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원수에 대한 저주는 죄와 악에 대한 결연함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에게 닥쳐 온 어려움을 단지 자신 내부의 문제로 돌리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 어려움은 사람의 존재를 괴롭히고 황폐화시키는 악의 세력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것은 신약에서 사단의 권세로 불린다. 저주의 기도는 인간의 삶을 황폐화시키는 사단의 세력에 대한 저주이며 싸움인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범한 이에 대한 저주는 넓게 보아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와 상통한다. 그런 점에서 사실 이러한 기도는 우리가 드리는 기도라기보다는 완전히 무죄하신 주님의 기도라고 할 수 있다(본회퍼: 102~103). 우리는 기도자에 가깝다기보다는 기도자로부터 저주를 받고 있는 죄인들에 훨씬 더 가깝다. 이것은 죄가 얼마나 심각하고 무서운 것인지를 확인시켜 주며 우리로 하여금 그 죄를 직면하도록 이끈다. 죄는 미사여구로 단장될 수 없으며 저주받는 것이고 죽어야 할 것이며 진멸되어야 할 것이다. 시편의 저주는 나의 눈앞에 있는 사람에 대한 저주라기보다는 오히려 무서운 실체인 죄에 대한 강력한 고발로 여겨질 수 있다. 그래서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이 다시금 나타난다. 나무 십자가는 저주의 상징이다(신 21:23; 갈 3:13).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가 받아야 할 저 무서운 저주를 대신 받으신 것이며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신 것이다. 저주의 기도를 드려야 할 이가 도리어 그 저주를 그 몸에 받으신 것이다.

저주의 기도가 보여 주는 세 번째 원칙은 가난하고 약한 자의 편에 서시는 하나님이다. 이렇게 강하게 저주의 기도를 하고 있지만, 실제로 재앙의 날 가운데 있는 것은 예언자 자신이지(17절), 원수가 아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도뿐이다. 그래서 이 기도는 단지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모든 억압받고 핍박받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로서, 정의의 회복을 위한 기도이기도 하다. 힘 있고 강한 자들은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실제로 악을 행하고 대적하지만, 예레미야와 시편 기자는 연약하고 가난한 이들이기에 다만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구할 뿐이다. 그래서 원수에 대한 강력한 저주 기도를 드리는 109편의 기자는 마지막에서 큰 소리로 선언한다.

“내가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많은 사람 중에서 찬송하리니 그가 궁핍한 자의 오른쪽에 서사 그의 영혼을 심판하려 하는 자들에게서 구원하실 것임이로다”(시 109:30~31).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오른편에 서신다. 이 기도가 드려지기 위해서는 예레미야의 억압과 수욕이 공감되어야 한다. 그가 겪는 고난이 느껴질 때에 그의 기도를 알게 된다. 그런 점에서 억압받는 자들의 억압과 수욕에 동참할 때, 이 기도를 드릴 수 있다. 그러므로 저주 시편은 억압받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통해 이해 가능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저주의 기도가 오늘 우리의 교회에서 쓰이지 않는 것은 우리의 고난과 그로 인한 우리의 분노가 이에 미치지 못하는 데에도 원인이 있을 것이다. 저주의 기도는 고난받는 자의 기도다. 과연 우리 주위에 누가 이러한 큰 고난에 처해 있는지 안다면, 이 기도는 그들을 위한 우리의 기도가 될 것이다. 근본적으로 저주 기도는 약자의 기도다. 세상에서 힘을 갖지 못하고 눌린 이들의 기도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기도문들을 이방인에 대한 배제와 거부에 사용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마 5:43~48).

예레미야의 이 기도는 예언자 자신의 처지와 연관된 고백이면서 동시에 고난 중에 있는 하나님 백성들을 위한 고백이기도 하다. 개인적 기도이지만, 이스라엘의 예배 중에 이러한 고백문이 쓰였을 수 있다. 시편의 탄식시들과 함께 이러한 고백들은 주로 바벨론 포로 이후 경건한 유대인들의 탄식과 호소를 대변하고 있다(Stulman: 173). 그의 기도의 내용은 사실상 유다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으로 선포된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는 점에서(16:4; 21:7,9; 27:8,13), 불의를 행하는 자들에게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Stulman: 191).

 

참고 문헌.
박동현, <예레미야 I>, 대한기독교서회창립100주년기념성서주석, 대한기독교서회, 2006.
버나드 앤더슨, <시편의 깊은 세계>, 대한기독교서회, 1997.
본회퍼, <본회퍼의 시편 명상>, 열린서원, 2004.
J. 클린튼 맥칸, 김영일 옮김, <새로운 시편 여행>, 은성, 2000.
W. Brueggemann, The Message of the Psalms, A Theological Commentary, Augsburg, 1984.
L. Stulman. Jeremiah. Nashville: AbingdonPress, 2005.

생각해 볼 점

시편 109편을 읽어 보자.
이 시편에 등장하는 가난한 자의 특징들을 열거해 보자.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의 오른편에 서신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편파성’은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김근주 님은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구약을 가르치고 있으며, 서울 강남구에 있는 푸른뜻교회를 섬기고 있다. 준행함이 없는 신학을 두려워하며 에스라의 심정으로(스 7:10)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