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의 책과 새 언약 ② – 나의 사랑하는 아들 에브라임

[244호 예레미야의 말씀들 ⑭]예레미야 30~31장

2011-01-26     김근주

30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대상이 “이스라엘과 유다” 혹은 “야곱”, “이스라엘”로 표현되고 있는 데 비해, 31장에서는 “이스라엘”과 “야곱”은 동일하게 쓰이지만 여기에 더하여 “에브라임”과 “라헬”, “사마리아”와 같은 이름이 쓰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에브라임이나 사마리아, 라헬 같은 이름은 31장 말씀의 대상이 북왕국 이스라엘임을 제시하고 있다. 예레미야가 사역할 당시(주전 7세기 말~6세기 초)에 이미 북왕국은 앗수르에게 멸망(주전 721년)당한 지 오래라는 점에서, 31장은 이미 멸망당한 백성들을 향해 선포된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여전히 “이스라엘과 유다”라든지 “시온” 같은 이름들이 쓰이는 것을 보면, 31장이 북왕국만이 아니라 남북 이스라엘 모두를 향해 선포된 말씀인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북왕국에 대한 말씀들에 이어 유다에 관한 말씀인 23~26절이 26절의 다음과 같은 구절로 마무리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내가 깨어 보니 내 잠이 달았더라.”
 
이전에 나온 모든 말씀들을 예레미야가 잠든 사이 그에게 알리신 환상으로 제시하고 있는 이 구절은 북왕국에 대한 일련의 말씀들을 유다에 관한 말씀으로 결론내리면서, 북왕국을 향한 말씀과 남왕국을 향한 말씀을 서로 묶어주는 틀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북왕국의 말씀은 그저 북왕국만을 향한 것이 아니며, 남왕국 유다에도 동일하게 해당될 수 있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달리 추론해 보면, 원래 북왕국을 향해 선포된 말씀이었는데 남왕국 유다의 백성에게도 해당하도록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논리적으로 당연하게도, 26절 다음에 나오는 27절 이하의 본문들을 이루는 두 말씀 덩어리들에는 모두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이라는 표현이 들어 있어서(27, 31절) 온 이스라엘을 그 대상으로 삼고 있다.

여호와의 복

31장은 출애굽에 관한 기억으로 시작한다.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얻었다는 2절의 말씀은 출애굽과 광야 시절을 염두에 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출애굽과 광야를 통해 그 백성을 인도하셨듯이, 앞으로 다가올 회복의 날에도 그렇게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것이다. “내가 이스라엘 모든 종족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는 1절의 말씀은 전형적인 언약 어구이며 이 역시 출애굽 때와 연관된다(출 19:5). 이에 대해서는 이미 30장을 다루면서 살펴보았다. 출애굽 언약의 회복은 사마리아산에 다시 세워질 포도원에 대한 말씀으로 이어진다(31:5). 그래서 이 첫 단락은 31장의 중심 주제가 북왕국의 회복임을 보여 준다.

7~14절은 하나님이 행하실 일에 대한 찬양이다. 예레미야서의 첫머리부터 북편에서부터 임할 재앙에 대해 예고되었거니와,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을 북편에서부터 인도해 내시며 땅 끝에서 모으신다. 이들은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로 불리며 이들 가운데에는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할 것이다. 이들은 한 사회 내에서 가장 연약한 이들을 대표한다. 구약성경은 곧잘 그 사회의 가장 취약한 집단들을 열거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의 온전함과 광범위함을 표현하곤 한다. 여기에는 고아, 과부, 나그네 같은 사회적 집단이 있는가 하면, 본문처럼 맹인이나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언급되기도 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시 돌리시는 그 날은 이렇듯 한 공동체 내의 모든 연약한 구성원들에게까지 미치는 구원과 회복의 날이다. 그 날에 이들도 소외되지 않을 것이며 함께 큰 무리를 이루어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14절, 직역하면 “여호와의 좋은 것”)을 채우실 것이다. 참된 복은 이렇게 가장 연약한 이들에게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가로 판정 난다.
 
라헬의 슬픔

15절은 라마에서 들리는 슬픔의 통곡 소리를 언급하고 있다. 라마는 예루살렘 북쪽에서 7~9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좀 더 북쪽에는 벧엘이 있다. 벧엘은 창세기 35장 16절에 보면 에브랏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며, 라마와 벧엘도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삿 4:5). 이러한 성서의 언급들은 벧엘, 라마, 에브랏을 서로 연관시키며, 에브랏은 또한 베들레헴과 연관된다. 북왕국의 조상 할머니인 라헬의 이름은 베들레헴 인근 에브랏을 거쳐 라마와 연결되었을 수 있다. 벧엘과 베들레헴을 잇는 길에 있는 에브랏 근처에서 라헬이 베냐민을 낳은 후 죽어서 장사되었다는 내용(창 35:16~20)과 사무엘의 어머니인 한나가 사는 곳 역시 라마라는 점(삼상 1:19)은 자녀로 인한 고통을 겪는 여인네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자녀 잃은 슬픔을 담고 있는 라마의 울음소리에 대한 예레미야 31장의 내용과 연관된다. 아울러 사무엘상 10장 2절은 사무엘이 거주하던 라마에서 조금 더 가면 베냐민의 지경이고 그곳에 라헬의 묘실이 있었다고 보도한다. 이러한 전승이 예레미야에게도 알려져 있었다면, 라마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라헬의 무덤이 있음을 그가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리브가의 유모가 묻힌 벧엘 인근 장소의 이름(“알론바굿”)에 “통곡(히브리말로 ‘바굿’)”이라는 말이 있다는 점(창 35:8)과 예레미야 31장 15절에 이 명사의 원래 동사형이 두 번이나 반복된다는 점(“통곡하는”, “애곡하는”)은 이 인근 지역과 ‘통곡’의 모티브가 서로 연결될 수 있는 실마리가 된다(Luker: 609). 또한 호세아서에서는 라마가 베냐민의 대표적인 성읍으로 언급되면서 북왕국의 곤경을 표현하기 위해 거론되고 있으며(5:8),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 사이 갈등의 중심에 라마가 있었던 적도 있다(왕상 15장). 이러한 점들은 라마의 곤경과 국가적인 분쟁이나 위기가 결부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라마에서 들리는 라헬의 울음은 라헬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북왕국 지파의 멸망 혹은 포로됨에 대한 눈물과 탄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특히 예레미야 40장 1절을 보면, 바벨론의 진격으로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예레미야 역시 포로로 끌려가다가 바벨론 당국자들의 호의로 라마에서 풀려난다. 라마는 유다 포로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가기 위한 중간 집결지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15절은 바벨론으로 떠나가는 동포들을 바라보면서 예언자가 느꼈을 슬픔을 반영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Arnold: 613~614). 라마에서 떠나가는 동포들을 보면서 문득 근처에 라헬의 무덤이 있음이 떠올랐던 것일까?

17절은 눈물 흘리는 라헬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로서, 흩어진 북왕국의 백성들을 자식 잃은 어미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신다는 것을 약속하고 있다.

마태복음 2장 16~18절은 헤롯의 유아 학살을 이 본문과 연관시키고 있다. 헤롯은 두 살 이하의 유아들을 죽이되 베들레헴과 그 인근의 모든 아이들을 죽였다. 이 인용에서 자녀 잃은 라헬의 눈물과 베들레헴에서 자녀를 잃은 어머니들의 눈물이 서로 연관되고 있다. 마태 기자는 예레미야서를 읽으면서 자신이 들은 끔찍한 현실의 사건에 들어맞는 구절을 발견하였으며, 무고히 자녀를 잃은 어머니들의 눈물에서 31장 15절에 있는 라헬의 눈물을 발견하였을 것이다. 마태는 그가 물려받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현실을 향한 말씀임을 깨닫고 적용하였다. 말씀은 오늘의 현실을 해석하는 도구이다. 나아가, 마태는 16~17절에 담긴 하나님의 위로와 회복에 대한 약속도 보았을 것이며, 애굽으로 가셨다가 돌아오실 예수께서 이러한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라헬의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듯이, 자녀 잃은 어머니들의 눈물도 위로하실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 에브라임

31장 18~20절은 호세아 11장과 비슷한 생각을 담고 있다. 예레미야 31장 20절에서 그리고 호세아 11장 1절에서도 에브라임은 하나님의 아들로 나온다. 18절의 “멍에에 익숙지 못한 송아지”는 호세아 11장 4절을 연상케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들이기에 그 걸음을 가르치시고 멍에로 이끄시지만, 이스라엘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이 씌우시는 멍에는 거절하되 그들에게 떡과 물을 주는 애굽의 멍에는 달게 진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날지언정 애굽과 앗수르를 향하여는 끊임없이 구애를 보내는 것이 이스라엘의 비극이요, 그리스도인들의 비극일 수 있다. 호세아 11장에 따르면, 하나님이 주신 멍에에 익숙지 못한 이스라엘은 다른 길로 갔고,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의 줄로 인도하셨다. 또 하나님은 죄 지은 에브라임을 책망하셨다. 이것은 주전 722년의 멸망까지를 포함하여 가리키는 표현일 것이다.

에브라임의 죄로 인해 그들을 책망하신 것이지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안타까움으로 가득하다. 호세아 11장 8절은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절절이 표현하고 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아드마와 스보임은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받을 때에 같이 멸망당한 인근 성읍들이다(신 29:23). 에브라임을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은 범죄한 이들을 소돔처럼 엎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엎어 버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위 호세아 구절에서 “돌이키어”라고 옮긴 단어는 창세기 19장 25절에서 소돔을 ‘엎으신’ 것에 쓰인 단어이다. 죄인을 엎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를 엎으신 것이다. 에브라임을 향한 하나님의 절절한 마음은 예레미야 구절에서도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에브라임을 책망하실 때마다 하나님은 ‘깊이 생각하셨다’. 여기에 쓰인 히브리어 특유의 표현은 동일한 동사의 부정사 절대형을 한 번 더 씀으로써 동사의 의미를 강조하고 부각시킨다. 동일한 문법적인 사항이 이어지는 “반드시 … 불쌍히 여기리라”에도 나타난다. 참으로 깊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악과 그로 인한 책망을 살피셨으며, 이제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확실하고도 분명하게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다. 하나님의 깊이 생각하심과 반드시 긍휼히 여기심의 중간에 놓여 있는 것이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이다. 결국 하나님의 속이 뒤집어지신 것이며, 하나님의 속이 에브라임을 인하여 견딜 수 없이 끓게 되신 것이다. 호세아의 구절과 예레미야의 구절은 모두 하나님 스스로의 속을 뒤집으심으로 에브라임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죄 지은 이들이 뒤집어지고 그들이 심판을 당하는 것이 마땅하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인해 애태우시되 마침내 스스로의 속을 뒤집으심으로 에브라임을 건지신다. 그래서 이 구절들은 죄인들을 위해 그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에브라임이 심판을 받아 고난 가운데 있는 것을 보시고 그 마음이 움직이셨고, 그로 인해 에브라임을 반드시 돌이킬 것을 선언하신다. 아마도 아직 망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미 멸망한 북왕국을 향한 이러한 예언이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의아했겠지만,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를 덧붙여, 이 예언의 확실성의 근거를 하나님께 두고 있다. 에브라임의 구원의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견딜 수 없는 마음이다.

예레미야는 호세아보다 후대의 인물이다. 예레미야서에 대한 주석들은 일반적으로 예레미야가 호세아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지적한다. 예레미야 31장은 그 결정적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미 북왕국이 멸망한 것을 알고 있는 예레미야서에 에브라임을 향한 절대적인 사랑의 본문이 나온다는 것은 하나님의 에브라임 사랑이 단순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한다. 에브라임을 향한 하나님의 간절하고도 애타는 마음이 모든 죄악을 넘어서서 놀라운 구원을 선포하게 한다. 아울러 이 본문에 있는 “에브라임”은 기본적으로 북왕국을 가리키는 표현이지만, 현재의 위치에서 온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에브라임을 향한 하나님의 애타는 마음은 흩어진 유다를 향한 마음이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마음이기도 하다.
 
북왕국 회복 예언의 의미

중요한 것은 이미 멸망당해 산지사방(散之四方)으로 흩어져 버린 북왕국이지만, 그들 역시 하나님의 회복과 구원의 경륜에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예레미야가 마주하고 있는 시대는 남왕국 유다의 멸망기 그리고 멸망 이후의 시기이기에 멸망 이후 하나님의 회복은 당연히 유다의 회복에 그 초점이 있겠지만, 31장은 이 회복의 틀 안에 북왕국 에브라임을 포함시키고 있다. 이미 사라졌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은 남왕국만이 아니라 북왕국도 포함된다. 유다야말로 다윗의 정통을 이어온 나라이지만,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은 에브라임에게도 미친다. 그런 점에서 예레미야 31장은 예언자에게 있는 ‘온 이스라엘적 관점’을 보여 준다. 그에게 있어 이스라엘은 유다만이 아니라 유다와 이스라엘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예레미야만의 것이 아니며 다른 예언자들에게도 나타난다. 예레미야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사역했던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회복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연합이었다(겔 37:15~17). 연합된 회복이야말로 에스겔이 본 바 마른 뼈가 하나님의 큰 군대로 변하는 환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예레미야 30장 1~3절, 이사야 9장 1절, 스가랴 8장 13절에서도 이러한 ‘온 이스라엘적 관점’을 볼 수 있다.

북왕국이 멸망한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역사적 사실로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앗수르에 의해 북왕국 주민의 많은 수가 다른 나라로 강제 이주해야 했으며, 북왕국 땅에 앗수르의 다른 식민지 주민들이 이주해 오기도 하였다. 그로 인해 북왕국 사마리아 지역에 살던 이들은 인종이 뒤섞였을 것이며, 신약 성경의 본문들은 이들이 ‘사마리아인’이라는 경멸적인 뉘앙스를 담은 용어로 불리는 것을 보여 준다. 이를 생각하면 북왕국에 대한 예레미야의 예언이 온전하게 성취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북왕국뿐 아니라, 남왕국 유다에 대한 예언 역시 그 완전한 의미로 성취되었다고 보기는 쉽지 않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예레미야를 비롯한 여러 예언자들이 포로들의 영광스러운 회복과 새로운 건설을 전하고 있지만, 포로 귀환 이후 유다의 현실은 예언자들의 영광스러운 이상들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사실, 포로 귀환 이후에 쓰인 여러 글들은 영광스러운 이상과 비참한 현실 사이의 간격에 대한 깨달음과 숙고의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가령, 시 85; 126; 사 56~66장; 말라기).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가르는 기준이 예언의 성취 여부라는 기준(신 18:22)은 그저 기계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장 이 기준으로 말한다면, 예레미야는 그 예언이 성취되지 못한 거짓 예언자로 분류되고 말 것이다. 구약 문서들을 형성하고 모으고 전달한 이들은 온전히 성취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의 북왕국 회복에 대한 예언을 모으고 후대에 전달하였으며 정경 안에 포함시켰다. 이것은 당장 그들의 시기에는 성취되지 않았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온전하게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과 기대가 반영된 결과이다. 어떤 예언들은 성취되지 않을 경우 거짓 예언으로 당장 폐기처분되는가 하면, 이처럼 당장 성취되지 않았지만 후대에 마침내 이루어질 날을 기대하며 훗날을 기약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생각들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알려 준다. 우선, 눈앞의 성취를 가지고 참과 거짓을 쉽게 판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당장 무엇인가를 이루었다 해서 참이고 그렇지 못했다고 해서 거짓이라면 자칫 이 세상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고 꿩 잡는 것이 매라는 식의 사고가 편만해지고 말 것이다. 구약의 사람들은 현실에서는 전혀 성취될 전망이 보이지 않지만 북왕국의 회복에 관한 말씀을 하나님이 정하신 진리로 알고 선포하고 보존하고 전달하였다. 사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아브라함의 시대로부터 물경 수백 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서야 성취된 것을 생각한다면, 눈앞의 성취와 현실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 운운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현실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하여도 하나님께서 주신 이상을 마음에 품고 선포하고 증거하였다. 이를 생각하면 오늘 우리 교회들의 목표는 너무 현실적이기만 하다.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것은 세상에서 돈 안 되고 비현실적이라고 여길 수 있는 이상들을 끝까지 품고 간직하고 확신하며 살아가는 데에 있지 않을까. 큰 꿈이라는 것은 일만 선교사 파송같이 거창해서 큰 것이 아니라,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뛰어노는 세상, 보습과 낫의 나라와 같이 도무지 이 땅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셨기에 평생에 마음에 품고 소망하며 기도하는 꿈, 그런 꿈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예레미야의 북왕국 예언에 관한 숙고가 우리에게 알려 주는 두 번째는 사라진 민족에 대한 말씀이 여전히 선포되고 있다는 점이다. 유다와 이스라엘은 거의 대부분의 시기 동안 서로 앙숙이었고 전쟁을 한 적도 여러 번 있다. 열왕기서에서 보듯, 북왕국 역사의 대부분은 하나님을 떠난 역사이며 우상숭배로 멸망한 역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와 여러 예언자들에게는 ‘온 이스라엘적 관점’이 있으며, 그들의 회복 예언은 북왕국까지 포함한 온 이스라엘의 회복을 지향하고 있다. 북왕국을 향한 하나님의 애절한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를 보노라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았지만 동족 유대인들을 향한 애끓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던 바울을 떠올리게 된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1~3).
 
남한과 북한이 평화적으로 통일될 수 있다는 기대는 우리 시대에 이르러 점점 쇠약해지고 있다. 분단으로 인해 가족이면서 평생을 다시 보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산가족이 존재하는 현실을 당연하게 여기는 우리의 현실, 이제는 그분들마저 연로하여 결국 세상을 떠나는 이 현실은 비극이다. 교회마저도 분단을 당연시하고 북한을 적대시하며, 우리 교회의 기도에서 평화적 통일을 위한 기도가 점점 사라져 버린다는 점은 안타까움을 넘어 심각한 우려를 낳는다. 바울의 마음, 예언자들의 마음을 따라 온 이스라엘적 관점을 가지는 것은 현실성 여부를 넘는 문제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의 근거로 고백하는 교회는 근본적으로 비현실적인 집단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예레미야 31장을 읽는다는 것은 북왕국의 회복에 대한 이 말씀의 진정한 성취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음을 고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4장에서 보여 주는 바,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였다는 것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은 교회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는 것 역시 예레미야를 통한 예언의 성취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모든 예언의 성취자이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한다는 것은 구약 안에 제시되고 선포된 모든 예언들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일임을 고백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그 모든 예언을 이루시는 분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모든 말씀은 사실이 되며 모든 이상은 현실이 된다. 참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의 “예(Yes)”가 되시는 분이다(고후 1:20). 

<참고문헌>

박동현. 주께서 나를 이기셨으니: 설교를 위한 예레미야서 연구. 한국성서학연구소, 1995.
P.M. Arnold, “Ramah”, Anchor Bible Dictionary 5: 613~4.
L.M. Luker, “Rachel’s Tomb”, Anchor Bible Dictionary 5: 609.

나누어 볼 것

1. 올해 우리 각자가 속한 공동체의 목표 내지 표어는 무엇인가? 그러한 목표는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어떻게 합당한가? 교회 공동체가 꿈꾸어야 할 목표와 이상의 바른 내용에 대해 논의해 보자.

2. 예레미야의 온 이스라엘적 관점은 분단된 나라에 살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지 논의해 보자.

김근주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구약학 교수 kjkim100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