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는 ‘이단’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까?
[250호 발행인 논단]
한국교회 주류 교단들이 이단과 한창 싸우고 있다. 교계 신문의 단골 메뉴 중 하나는 이단들의 발호 동향 보고와 분석이다. 통일교, 신천지, JMS, 엘리야복음선교회, 구원파, 영생교 등 한국교회 안팎에서는 늘 이단 논쟁과 시비가 있어 왔다. 이단을 식별하고 대처하기 위한 교단들의 노력도 비상하다. 그러나 이단들은 창궐하고 있고 대학 청년들에게 파고드는 이단들도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그들은 기독교의 탈을 쓰고 있으나 실은 기독교신앙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세력들이다. 이들은 하나님나라운동 도상에서 극복해야 할 존재들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단들이 발호해 장악하는 영역들이 한국교회 안팎에서 너무 쉽게 발견된다는 점에서 정통교회 자체의 자발적인 개혁과 영적 정화 작업이 이단 박멸보다 더 우선적인 과제라는 의견도 만만찮다. 이 글에서는 구약성경이 말하는 이단 중 한국교회의 영적 정화를 우회적으로 촉구하는 이단들의 입장을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교회 영적 현주소를 드러내는 성경 내 이단들의 활약상을 통해 바른 교훈 안에서 행하고 실천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이단들을 살펴봄으로써 어떻게 하면 이런 이단적인 가르침에 빠지지 않고 정통적인 성경신앙을 견지할 수 있는지를 숙고할 것이다.
I. 구약성경이 말하는 이단
구약성경은 ‘이단(異端, heresy)’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나 그것과 유사한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다른 신들(엘로힘 아헤림)”(출 20:3), “새긴 우상들(페셀, 터무나)”(출 20:4), “거짓 예언자들(한너비임[한니뻐임] 퀘쉐르)” 등 일탈된 영적 지도자들에 의하여 주어진 “허탄한 것과 거짓된 점괘(샤붸, 퀘셈 콰잡)”(겔 13:6; 신 13,18장; 렘 23:9~40; 겔 13:1~16,17~23), 그리고 “하나님을 입술로 공경하나 행위로 부인하는 불순종 행위”(사 29:9~14)가 ‘이단’과 의미상의 동등어 혹은 유사 용어들이다. 구약성경이 말하는 ‘이단’은 유일하신 야훼 하나님에 대한 배타적 충성을 가로채거나 흐트러뜨리는 영적 가르침이다. 이 중에서 가장 심각하고 중대한 이단은 이스라엘에게 다른 신들을 예배하라고 가르치는 이단으로 이는 1계명에 도전하는 이단이다. 다음으로 치명적인 이단은 야훼를 이교도적인 방법으로 예배하라고 가르치는 이단이다. 새긴 형상을 야훼 하나님과 동일시하여 예배하게 만드는 이단이다. 셋째,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 나라의 대의명분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허탄한 묵시를 남발하는 이단이다. 이와 유사하지만 약간 다른 이단도 있는데 그것은 스스로 하나님께 속아서 거짓 예언자가 된 자들의 영적 지침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심판 예언을 완화시키는 예언자로서 예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에 저항하는 불신앙자, 불순종자도 심각한 이단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멸망을 초래한 배교죄를 범한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이단자로 단죄될 수 있을 것이다.
II. 구약성경 속 이단의 여러 가지 유형
1. 배타적 일편단심 예배의 시금석, 거짓 선지자 혹은 배교 유혹자(신명기 13장)
신명기 13장은 이스라엘을 배타적 야훼 예배로부터 이탈시켜 다른 신들을 섬기도록 배교를 부추길 수 있는 잠재적 유혹이 공동체 내부에서 생길 수 있음을 경고한다. 선지자/꿈꾸는 자, 친인척/친구, 온 공동체 모두 배교 방조 혹은 배교 사주의 죄를 범할 수 있다(13:1~8). 아무리 신령한 선지자나 신령한 꿈을 꾸는 자나 신탁 중개자라 할지라도 이스라엘로 하여금 야훼 예배로부터 이탈하도록 부추기면 이단자로 단죄된다. 그런데 이런 유혹하는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왜 신앙공동체인 이스라엘 안에 생기는가? 3절에 따르면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진실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 야훼를 사랑하는지를 검증하기 위함이다. 거짓 선지자들과 악한 영매들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출애굽의 하나님에 대한 일편단심의 충성심을 버림으로써 하나님이 주신 법도와 규례를 어기도록 유혹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결국 구약이 생각하는 가장 나쁜 이단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도록 조장하는 가르침이다. 이런 이단에 대한 대응 전략은 영 분별 능력을 갖고 일편단심의 야훼 예배로부터 이탈시키는 선지자나 꿈꾸는 영매(靈媒)들을 죽여 버리는 것이다. 현대적인 개념으로 말하면 교화시킬 수 없는 이단을 공동체로부터 쫓아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인상적인 사실은 이단적인 배교 유혹이 또한 형제, 배우자, 그리고 친구를 통해서 올 수도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방의 다른 족속들의 신을 섬기자고 부추기는 가장 가까운 골육지친이나 친구들도 죽여야 한다고 가르치신다(출 32:26~29과 신 33:9의 레위 지파들처럼). 배교는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소멸시키는 행동이기에 일벌백계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심지어 한 도시가 배교를 범하고 다른 도시에게 배교를 부추기면 그 배교한 성 전체를 파괴할 것이라는 선언이 추가된다. 주전 8세기의 사마리아와 주전 6세기의 예루살렘은 배교한 결과 징벌당해 참혹하게 파괴되었다. 이처럼 이단은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의 유무를 검증하는 시금석이므로 이단이 발호할 때 정통교회는 자신의 영적 생활에 말씀의 다림줄을 갖다 대어 자신이 하나님과 깊이 결속되어 있는가를 심각하게 검증하여야 한다.
2. 거짓 선지자(신명기 18:9~22; 참조. 13:1~5)
신명기 18장 9~22절은 이스라엘 인근의 토착 족속들 중에 만연한 영매술을 전적으로 부정함으로써 이스라엘이 이교도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려는 어떤 시도도 배척한다. 미래를 예측하거나 신들의 뜻을 알아내려고 시도하는 일곱 가지의 상이한 영매술들(유아 인신 희생제사 등)은 몇 가지 마술적인 방법(제비뽑기, 활을 통한 영매술, 잔 속의 찌꺼기 해석, 자연 관찰을 통한 길흉 징조 판단, 혹은 죽은 자들의 영과 상담)으로 미래의 길흉화복을 예측하려던 다양한 인간적 주도권을 대표한다. 이 긴 목록은 신적인 뜻이나 계획을 마술이나 영매술을 통해 알아내려는 모든 이교도적 방법을 부정하기 위함이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미래에 무슨 일을 행하실 것인지를 어떻게 식별하고 알아낼 수 있겠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은 모세적인 권위를 가진 정경적 예언자가 대답이라고 말한다. 모세적인 예언자가 영적 지도력의 중심에 서 있다면 이단 발호를 억제할 수 있다는 말이다. 모세적 예언자는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중개자다. “내가” 그들을 위해 예언자를 일으키며 “내가” “나의 말들을” 그의 입에 두리니, 그가 “내가 그에게 명하는 모든 것들을” 무리에게 다 고할 것이다(18절). 하지만 여기서도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두 명 이상의 예언자가 동시에 나타나 각각 자신이 모세적 예언자요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대처하여야 하는가?
이에 대한 응답으로 신명기 18장 20절은 거짓 선지자를 식별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야훼의 이름으로 “거짓되게” 예언하는 자나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예언하는 자는 거짓 선지자라는 것이다. 또한 22절은 예언의 성취 여부가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별 짓는 기준이라고 주장한다. 야훼께로부터 나온 말씀이란 현실 속에서 사건으로 나타나며 성취되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당장 현장에서 하나님의 참 예언을 식별해야 할 사람들에게는 우활(迂闊)한 처방이었다. 예언은 30~40년 후에 성취되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예언과 성취 기준을 보완하는 더 근본적인 기준이 있었는데 그것은 야훼 하나님에 대한 배타적 예배를 강조하는 모세의 가르침과 일치하는가의 여부다. 설령 어떤 예언자가 성취 여부의 기준으로 볼 때는 참 선지자로 판명 날지라도 그 예언이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백성들을 이탈시키는 것이라면 거짓 선지자라는 것이다.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은 혼란을 일으킬 것이지만 하나님 백성들의 평상적인 영적 분별력과 내적 신실성을 검증하는 훈련이 되기도 할 것이다. 기적과 표적을 일으킨다고 주장하는 도덕적 일탈자들이 맹활약하는 한국교회에 심각한 경종이 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능력에 대한 신뢰가 진리에 대한 신뢰보다 앞서는 회중은 반드시 이단적인 목사의 희생물로 전락한다.
3. 거짓 예언자와 참 예언자의 갈등(예레미야 28장; 열왕기상 22:1~40)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갈등
유다 왕국의 마지막 시드기야 재위 4년째에 일어난(B.C. 594~593년) 사건을 다루는 예레미야 28장은 구약성경 이단의 또 다른 양상을 보여 준다. 이 경우는 이단이 거짓 예언자의 허탄한 묵시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 준다. 주전 597년과 586년 사이에 유다에서는 바벨론 제국의 종주권에 대한 대응을 놓고 심각한 국론 분열이 일어났다(합 1:3). “바벨론 제국의 야수적인 국제 질서에 순응할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를 놓고 예레미야와 하나냐 사이에 갈등이 벌어졌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반역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도와 상반된다고 선언하며 시드기야에게 반역에 가담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바벨론에 대한 반역이 곧장 하나님의 의도에 저항하는 셈이 된다는 요점을 각인(刻印)시켰다.
그런데 얼마 후 브온 출신의 예언자 하나냐가 완전히 상반되는 메시지를 갖고 나타났다. 그는 시드기야 왕에게 바벨론 왕의 멍에는 곧 부서질 뿐만 아니라 그 일이 2년 안에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시켰다. 하나냐는 예레미야의 목에서 나무 멍에를 벗겨 부숴 버리는 하나의 극적인 행위 예언을 가미하여 그의 메시지를 정교하게 만들고 강화시켰다. 그의 행동에 의하여 진정으로 혼란을 느낀 예레미야는 자신의 메시지에 대한 확신마저 순간적으로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지만(28:10~11) 금방 하나님으로부터 선지자 하나냐의 메시지가 거짓이며 하나님 자신은 결코 그를 통하여 말씀하신 적이 없다는 확신을 받았다(15절).
역사적으로 볼 때 결국 거짓 예언자로 판명 난 하나냐는 당시의 유다가 처한 정치적 상황에 대한 대중들의 애국적 정서를 대표한 여론 수렴형 지도자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의 영적 소통을 놓친 채 대중의 종교적 열망과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한 인물이었다. 하나님의 어전회의에서 유다를 향하여 내려진 결정을 경청하고 그것을 당시의 지배 계층과 모든 백성에게 중개하는 두려운 사역을 감수할 용기를 드러내지 못했다. 주전 8세기경에는 모세적 예언자들이었던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그리고 미가 외에 훨씬 더 많은 수의 여론 수렴형 혹은 여론 조작적 예언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미 3:7~12). 단기적으로 볼 때 그리고 현상적으로는 그들이 이스라엘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들이었다.
미가야 벤 이믈라와 시드기야의 갈등
열왕기상 22장 1~40절도 구약성경의 전형적인 이단으로 분류되는 거짓 예언자 집단의 활약을 보여 준다. 본문의 주인공 아합은 거짓말 하도록 위임받은 야훼의 영에 의하여 집단적으로 기만당한 예언자 400명의 말을 믿고 길르앗 라못으로 출정했다가 패배한다. 1~6절은 적어도 아합에게는 긍정적인 분위기에서 출발하고 경쾌하게 진행된다. 자신감 넘치는 아합은 아람에게 빼앗겼던 영토 길르앗 라못을 되찾을 의향을 피력하고 그의 옆에는 남유다에서 올라온 동맹, 여호사밧이 있다. 비록 악한 왕 아합을 도왔다고 선견자 예후에게 비난을 받았으나 여호사밧 왕이 얼마나 위대하고 선한 왕인가는 역대하의 여호사밧 부분에 잘 그려져 있다(대하 17, 19~20장). 그래서 독자들은 선한 왕 여호사밧의 지지를 얻고 전쟁을 기획하는 아합의 대의명분을 정당하다고 느끼며, 국경 도시인 길르앗 라못이 이스라엘의 영토이기 때문에 회복되어야 한다는 데 쉽게 동의하도록 유도된다. 그런데 전쟁 개시 전에 임전(臨戰) 시 신탁을 얻어내는 평상적인 관습(20:13~14, 28; 삼상 23:1~4)이 동원된다. 아람에 대한 최근 두 차례의 마지막 군사적인 작전들 때와 똑같은(20:13, 28) 메시지가 접수되었다. 신탁의 결과는 하나님의 전쟁 지지 결정이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이의를 제기한다.
두 번째 의견을 구하는 여호사밧의 이례적인 질문은 전쟁 집행을 지연시키며 약간의 갈등을 일으킨다(7~15절). 그래서 다른 신탁을 제시하는 예언자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가 소환된다. 미가야가 발견되어 소환되는 동안에 400명의 예언자들은 그들의 긍정적 신탁을 한층 더 열렬히 지지하고 있다. 미가야와 있게 될 나중의 갈등 상황에서 이 예언자 400명의 대변인으로 소개되는 시드기야도 백절불굴(百折不屈)의 공세성을 표현하는 상징물을 가지고 그들을 지원한다(11절). 그들의 두 번째 신탁(12b절)은 6절에 비해 한 단계 더 진전된 예언으로서 더 확실한 승리 약속이다. 여호사밧의 망설임을 제외하고는 독자들이 이 400명의 선지자를 의심하거나 그들의 예언을 깎아내릴 만한 어떤 암시도 아직까지는 주어지지 않는다.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자는 “상서로운 예언을 하라”고 경고한다(13절). 놀랍게도 미가야는 예상 밖으로 상서로운 말씀으로 예언한다(15절). 시드기야와 미가야에 의하여 이중으로 지지를 받은 아합의 전쟁 기획은 마침내 승리를 가져올 것처럼 보인다.
그때 이 전쟁 보도문의 진행을 가로막고 아합과 미가야 사이의 적대감을 강화시키며 더 나아가 아합과 하나님 사이의 적대 관계를 확정하는 제3의 갈등 상황이 도입된다(16~23절). 뭔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8절) 아합 왕이 오히려 미가야에게 또 한 번의 신탁을 요청한 것이다. 적어도 아합은 겉으로는 진실을 요구하며(16절) 상서로운 결과를 주장하는 거짓을 배척한다. 미가야는 아합의 진정한 신탁 요구를 듣고 진정한 신탁을 중개한다. 아합의 패배와 몰락 환상이다. 17절에 나오는 미가야의 환상은 왕의 죽음을 암시하는 목자(삼하 5:2; 슥 13:7)의 부재(不在)와 평화롭게 귀가하는 백성들의 대조적인 귀향 상황이다.
미가야의 두 번째 신탁에서 하나님의 천상 보좌 환상(왕상 22:19~22; 참고. 욥 1:6~12; 사 6:1~8)은 아합이 참 선지자 미가야의 말 대신 왜 거짓 예언자 400명의 말을 따르려고 하는지 근본적인 이유를 제시한다. 하나님의 천상 어전회의의 음모 때문에 아합은 거짓을 따르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 천상의 음모는 10~12절에 그려진, 아합의 지상 보좌에서 회의하는 장면을 반어법(反語法)적으로 비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미가야의 환상은 400명의 선지자들이 어떻게 거짓의 영에 기만당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이 400명의 예언자들은 의도적인 거짓 예언 예언자들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거짓말하는 영에 속임을 당하여 거짓을 말하는 예언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합을 속여서 혹은 유인해서(렘 20:7; 겔 14:9) 길르앗 라못에서 쓰러지도록 섭리하시려는 하나님의 계략 중 한 부분을 집행하도록 예정되어 있다. 결국 하나님의 계획(20절)은 성공하였다. 자신의 계략으로 이미 예언된 심판을 피해 보려던 아합의 시도는 무위로 끝났다. 아합의 변장 속임수는 그가 아람의 한 병사가 쏜 화살에 우연히 맞아 죽음으로써 실패하였다(34~36절).
22장의 가장 인상적인 신학적 쟁점은 거짓말을 통하여 이뤄지는 하나님의 이상한 일이다. 열왕기상 22장이 증거하는 이단은 일차적으로 거짓말하는 영에 의해 지배당한 거짓 예언자들의 신탁이지만, 그 거짓된 신탁을 촉발시킨 인간의 일탈이다. 즉 하나님의 말을 들을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고 그것에 복종할 수도 없는 영적 아합의 파탄이야말로 이단적 가르침을 발호시키는 임자몸인 것이다.
4. 하나님의 예언에 불순종한 예언자(열왕기상 13장)
열왕기상 13장은 또 다른 유형의 이단을 다룬다. 이 이야기에는 경악스러울 정도로 이상한 요소들이 들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핵심 줄거리는 자신을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예언을 스스로 허물어뜨리는 유다 출신 예언자의 비참한 파멸이다. 13장은 통일 이스라엘을 분열시켜 북 이스라엘 왕국의 태조가 된 여로보암 2세의 벧엘 성소에 대한 하나님의 단죄 예언이다. 유다에서 올라온 하나님의 사람은 벧엘 성소를 향한 파멸 예언을 위탁받고 벧엘로 올라가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이 벧엘을 향해 집행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 예언은 북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왕은 그에게 향응을 베풀어 그가 쏟아 낸 참혹한 심판 예언의 신적 유래 여부를 알고자 시도하였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그의 초청을 거절한다. 하나님께서 어떤 경우에도 벧엘 성소와 관련된 사람들의 향응이나 접대를 받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의 초청은 잘 거절하였으나 그는 벧엘의 한 늙은 예언자의 향응 초청에 응하고 말았다.
늙은 예언자는 유다 출신 하나님의 사람의 심판 예언이 이제 갓 개시된 벧엘 성소에 대한 예루살렘 측의 질투 어린 반발의 표현인지, 아니면 그의 협박과 위협이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한 것인지를 알아보고 싶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다에서 올라온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의 격렬한 벧엘 파멸 예언의 신적 엄혹성을 흐릴 만한 온순한 태도를 드러낸다. 벧엘에 대한 그의 심판 예언 자체를 의심스럽게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벧엘의 늙은 예언자의 집에 들어가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벧엘 예언자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 예언이 유다의 예언자를 정조준하며 쏟아졌다(13:20~22). 불길하고 비정상적인 죽음이 유다 출신의 선지자에게 닥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과연 그 유다의 예언자는 귀로에 사자를 만났고 사자는 그를 물어뜯어 죽였다. 그러나 사자는 그의 시신에 입도 대지 않았다. 사자는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먹기를 거절함으로써(13:28) 하나님의 사람도 존중치 않았던 하나님의 금지 사항을 지킨다. 사자의 이상한 행동은 이 죽음의 원인이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한다. 그 늙은 선지자는 처음 그 소식을 듣자마자(13:26), 벧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 예언이 진실임을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직접 전달했던 계시가 성취됨으로써 벧엘을 향한 유다 출신 예언자의 파멸 신탁도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13:32). 여기서 유다의 예언자가 빠진 이단은 하나님을 통해 선포된 예언을 정면으로 스스로 믿지 않는 태도였다.
III. 결론
이단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바쳐질 충성심을 가로채거나 희석시켜서 이단 교훈을 가르치는 자의 더러운 욕망 충족의 재료로 갈취하는 데 이바지하는 가르침이다. 성경에 나타나는 가장 빈번한 이단 형식은 하나님 백성들 내부로부터 나온 영적 일탈과 배교다. 그 중에서도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가시적인 현존을 가리키는 징후(정치적 안정, 군사적 승리, 경제적 번영)가 사라지는 경우에 이단이 발호했다. 다른 신들에 대한 숭배와 야훼 하나님에 대한 이교도적 예배(2계명 금지 위반)가 창궐했다. 특히 이방신들에 대한 만연한 숭배는 안전 보장, 풍요 등을 광적으로 추구할 때 극심했다. 이런 구약성경의 이단 관련 교훈을 종합해 보면 이단 발호를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야훼 하나님에 대한 일편단심의 충성과 순종임을 알 수 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경외하고 그를 즐거워하며 순종하는 생활을 하지 않는 그 텅 빈 마음이 야훼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자고 유혹하는 허탄한 묵시가들의 공격 대상이 됨을 보여 준다. 다른 신들을 섬기자고 부추기는 이단, 야훼를 이교도처럼 섬기고 예배하자고 유혹하는 이단, 파멸로 이끌 지침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이단도 치명적이지만, 구약이 가장 빈번히 단죄하는 이단적 행태(行態)는 불순종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하고 알면서도 불순종하는 태도다. 입술로는 야훼 하나님을 공경하나 마음으로는 먼 신앙 생활이 가장 큰 이단이다(사 29:13). 밖에 있는 이단을 향하여 거룩한 전쟁을 벌여야 함과 동시에 우리 안에 암약하는 이단, 정통교회와 정통 신자들 삶 속에서 암약하는 이단들의 박멸과 제거에도 늘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김회권 발행인, 숭실대 기독교학과 교수 haekwonkim@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