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을 ‘다시’ 생각함, 21세기 여성 현실로부터

[259호 커버스토리]

2012-04-30     백소영

청교도적 가치관과 영성을 세상에 전파하는 것이 선교적 사명이라는 한 목회자가 공식 석상에서 이런 말을 했다.

“왜 애를 낳지 않느냐. 젊은 애들의 극단적인 이기주의 때문이다. 자기 재미를 위해, 애를 낳으면 골반이 흐트러진다며 안 낳는다. 우리가 내년 4월에 기독교 정당을 만들어서 헌법을 개조해 아이 5명을 안 낳으면 감방에 보내는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 두려운 4월을 맞았다. 5월 호에 실릴 원고이니 <복음과상황> 5월 호를 손에 받아 볼 즈음이면 저 무시무시한 헌법 개조가 가능한 일인지 이미 결과가 나와 있을 터이다. 특정 정당의 승패와 별도로, 그런 ‘특단의 조치’가 과연 가능할까 실효성을 묻는 질문과 별도로, 오늘날 여성들이 처한 자아분열적 현실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목회자의 말이 참으로 가슴 아팠다. 목회자의 본분이 무엇인가? 성도들의 아픔을 공감해 주고 받은 상처를 보듬어 살피는 치유의 사람들이 목회자인데…. 요즘 ‘젊은 애’들이 왜 아이를 낳지 않을까? 요즘 ‘젊은 부부’들은 왜 툭하면 이혼을 할까? 아니 요즘 ‘젊은 애’들은 아예 결혼이라는 선택지를 접고 ‘비혼’을 선언하는 걸까? 과연 이 목사님의 말대로 극단적인 이기주의 때문일까?

제도란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합의한 같이 살기의 방식’이다. 그 합의가 민주적으로 이루어졌든, 독재자의 강압으로 이루어졌든, 소수 엘리트의 전략으로 진행되었든, 일단 제도화되면 그 힘이 참으로 무서운 거다. 이미 확립된 특정 제도에서 태어나 자란 후세대들은 그 제도가 부여한 ‘같이 살기의 방식’을 ‘당연’으로 여기며 자신의 삶과 가치관, 그리고 꾸는 꿈까지도 그에 맞추어 정하기 때문이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미혼 여성들에게 장래 꿈이 무엇이냐 물어보면 많은 수가 ‘현모양처’라 떳떳하게 대답했다. 어진 아내, 슬기로운 엄마가 되는 것! 그것이 여성의 이상적 모습이라고 가르쳐 온 유교 문화의 오랜 ‘문화적 관성’은 조선이 사라진 지 반백년이 넘은 시점에도 여전히 힘을 가졌었다. 요즘에도 아주 드문 대답은 아니다. 보수적인 가치관을 가진 가정에서 자란 여학생들 중에는 교수 연구실에 찾아와 면담을 하며 궁극적 꿈은 ‘현모양처’라고 조신하게 말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나 이 ‘예쁜’ 꿈은 그녀들이 처한 오늘날의 또 다른 제도 즉 ‘현대 관료제’와는 상충된다. 관료제, 뷰로크라시(bureaucracy)! 신분제는 물론 성차별도 법적으로 금하는 현대를 살며 이제 ‘책상’(‘뷰로’란 사무용 책상을 뜻한다)을 차지한 관료는 반드시 남성일 필요가 없게 되었다. 어느 책에선가 나는 책상을 차지한 관료를 ‘탈성적 전문가 개인’이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다. 성별을 벗어 버린, 전문 기능을 가진, 개인으로서의 관료! 관료라 말했다고 공무원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관료제적 기관 안에서 기능하는 모든 개인을 의미한다. 특정 업무를 전문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개인, 그 일을 위해 일정 기간의 전문 교육을 받은 개인, 그리고 취직한 후에도 더 잘 기능하고 더 새롭게 기능하기 위해서 자신의 업무 역량을 끊임없이 업데이트하는 개인, 물론 그 일이 유일한 생계 수단인 임금노동자 개인. 그가 현대 관료제 사회의 전형적인 직업인이다.

그래서…. 그런 개인이면 족한 거다. 그 관료가 남성인지 여성인지는 ‘원칙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아무 상관이 없다. 실제로 1954년 공교육이 남녀 모두에게 적용‧실시된 이후 대한민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도 여성들의 교육 참여가 월등했던 나라이다. “똑똑한 여자는 호랑이도 안 물어간다”면서 여성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았던 전통사회는 가고, 대부분의 여성들은 남성들과 더불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뿐인가? 생활 형편이 되거나 남다른 안목을 가진 부모님들은 대학교도 보내셨다. 물론 80년대 드라마 ‘아들과 딸’처럼 형편상 한 아이에게 몰아주어야 하는 상황에서는 ‘아들이니까 대학 가라’ ‘딸이니까 시집 가라’는 전통적인 문화적 선택이 지배적이기는 했다. 그러나 최종 학력이 고등학교이든 대학교이든, 근대화된 우리나라에서 성실하고 열심히 공부한 여성들은 자아, 개인, 나 되기, 일, 직장, 꿈이라는 단어들을 자신의 것으로 갖게 되었다.

‘수퍼우먼’이 되어야 했던 우리의 어머니들

나의 어머니 세대가 그 처음이다. 5,60년대에 현대식 학교교육과정을 남녀차별 없이 받은 첫 여성들! 학업 이후 그녀들의 선택 대부분은 ‘전업주부’이거나 ‘수퍼우먼’이었다. 알고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선택’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나라는 서구 유럽이나 미국과 비교할 때 놀랄 정도로 빠르게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이전했다. 사람들은 이를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그 원인이 유난히 근면성실했던 민족성에 있었든, 조선 시대부터 존재했던 행정관료제의 근대성에 있었든, 아니면 국가주도적 계획 발전에 있었든 그것은 이 글에서 내 관심이 아니다. 이 글의 강조점은 ‘너무나 빠르게, 급속도로’ 삶의 환경이 변했다는 사실에 있다.

일찌감치 내외법에 의거하여 양반집 아녀자들을 ‘집 안에’ 두던 문화적 습관을 그대로 가진 채, 이제는 평민 여성들조차 ‘집 안에’ 두는 것을 구성 원리로 하는 현대 가족제도를 만난 거다. 울리히 벡이라는 독일의 사회학자는 현대사회를 ‘반의 봉건화에 기반한 나머지 반의 합리화’라고 표현하였다. 현대적 시간성과 공간성을 갖는 합리적 세계 즉 학교‧직장‧관공서 등 공적 기관이 모두 집에서 멀리 떨어져 버렸다. 더 이상 작은 촌락 단위 마을에서 해결될 일들이 아니다. 도시에 집중한 공적 기관들로 출근해야 하는 관료들에게 가정이란 공간은 아침에 떠나오고 저녁에 돌아가 휴식하는 분리된 공간이 되었다. 가내수공업, 논농사 하던 당시의 삶의 조건, 그러니까 집 근처에서 일하면서 아이들도 돌보고 휴식도 취하던 통전적 삶은 사라졌다. 누군가 임금 노동을 위해 집 밖을 나서야 할 때, 누군가는 집 안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가정을 지켜야 했다. 거대한 익명성의 도시 공간에서 아이들을 낯선 사람들로부터 지키고, 미래의 직업인으로서 교육하고 돌보는 사람, 전업주부! 이는 오직 현대에 와서야 생겨난 신종 업종이다. 대한민국 여성들은 이중 겹의 문화적 요구, 즉 유교적 요구와 현대적 요구에 둘러싸여 집 안의 일을 책임지는 일을 ‘전업으로’ 떠맡게 되었다.

전업주부가 아니어도, 그것이 자아실현의 형태였든 생계를 위한 일이었든 일하는 노동 현장으로 출퇴근을 해야 하는 직장 여성들도 내 어머니 시절에는 ‘집 안의 일’을 책임지도록 기대되었다. 삶의 환경이 너무나 급속하게 변한 탓에 인식의 변화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밖에서는 남자들과 똑같이 ‘탈성적 전문가 개인’이 되어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여성들이, 집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전통적, 현대적 가족제도가 여성에게 부여한 임무 즉 가사와 육아를 책임져야 하는 거다. 그래서 둘 다 하느라 대한민국 직장 여성들은 어느덧 ‘수퍼우먼’이 되었다. 본인들이 원해서 그리 되었을까? 그저 자신들이 속한 두 공간에서 기대하는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다 보니 개발한 놀라운 ‘개인기’였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21세기 대한민국은 더 이상 ‘수퍼우먼’이 불가능한 삶의 조건이라는 점이다. 소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원리라는 ‘무한 경쟁’이 주범이다. 알고 보면 현대 관료제 안에 이미 내재하는 작동 원리이다. 더 잘 기능하고, 더 새롭게 기능하고, 더 싼 임금으로 기능하는 인력이 등장한다면 언제든지 ‘대체 가능’한 것이 바로 ‘기능’으로서의 관료다. 그리고 현대의 교육제도는 그렇게 같은 일을 더 잘, 더 새롭게, 더 싸게 기능할 수 있는 젊은 세대들을 대량생산하고 있다. 고등학교까지, 아니 어찌 보면 대학교까지도 젊은이들이 몰려가는 교육의 트랙은 거의 동일하다. 상위 10퍼센트의 삶, 많이 양보해서 20퍼센트의 삶을 위해 대한민국 젊은이들의 80, 90퍼센트가 내달린다. 운영자의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다. 어느덧 중년이 되어 느리고 뒤처진 기능인은 얼른 정리・해고하고, 보다 풍부한 후보군 중에서 뛰어난 기능인을 보다 더 저렴한 조건으로 고용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런 삶의 조건은 남자고 여자고 직장인들에게 퇴근이 불가능한 삶을 부여했다. 더 잘 기능하기 위해, 더 많이 기능하기 위해, 경쟁자나 잠재적 대체 인력에 비해 내가 더 낫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탈성적 전문가 개인’들은 계속해서 직장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가정을 돌본다고 일찍 퇴근하는 행위는 ‘나를 대체해 주세요’ 외치는 무언의 몸짓으로 읽힌다. 때문에 ‘목구멍이 포도청’이어서든, 아니면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든 직장을 지키려는 많은 엄마들은 결국 가정 일을 다른 누군가에게 ‘대체’시켜 버렸다.

‘엄마’가 되는 순간 답은 사라진다

가정의 대체인력으로 선택된 사람들은 ‘친정 엄마’ 아니면 ‘보모’이다. 후자야 임금을 지불하고 고용했다지만 양육의 질과 태도가 의심스러워 많은 직장 엄마들이 전전긍긍한다. 양육비는 또 얼마나 비싼지. 웬만큼 벌어서는 보모에게 다 가져다주어야 할 판이다. 아침에 출근해서 일하는 내내 아이가 눈에 밟혀 퇴근시간 ‘발에 모터라도 단 듯’ 뛰어와 아이를 향해 손을 벌려 보지만, 내 아이는 하루 종일 저와 함께 있어 준 보모의 목을 다정하게 끌어안고 ‘누구?’ 하는 무덤덤한 시선으로 제 엄마를 본다. 하루 종일 뼈 빠지게 일해서 그 돈으로 보모의 임금을 지불하고 결국 내 아이와의 관계성마저도 건네 준 ‘탈성적 전문가 개인’의 현실이다. 그 대체 인력이 친정 엄마라면 그녀들은 또 무슨 죄인가? 그녀들 스스로가 ‘공적 교육’을 받고 ‘전업주부’의 삶을 산 첫 세대, 다시 말해 나의 능력을 세상에 표현하는 방법과 내용을 오래 배우고도 집 안의 봉건적 역할에 지치고 우울해지고 그래서 아파하던 첫 세대 아니던가? 그런데 이제 ‘탈성적 전문가 개인’인 딸의 꿈을 위해 또 다시 집안일을 ‘전적’으로 맡게 되셨다.

이런 마당이다. 현대 공교육 내내 경쟁 시스템 속에서 ‘나 되기’, ‘옆의 아이보다 더 훌륭한 전문 기능인 되기’만 배운 여성들이 ‘엄마’가 되는 선택을 하는 순간 정말이지 답이 안 나오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는 거다. 스물네 시간 풀가동을 해도 대체 가능한 직업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정에서의 관계성을 ‘대체’해 버리거나, 아니면 스무 해 가까이 쌓아 왔던 내 능력을 ‘접고’ 전업주부가 되어야 하는 상황!(물론 이는 아빠가 구조조정 당하지 않았을 때까지의 선택이다.) 더 이상 ‘수퍼’로 뛰면서 양쪽을 다 감당해 보겠다는 것은 욕심을 넘어 능력 밖의 일이 되었다. 그래서 어쩌면 내 엄마의 시절보다도 21세기 ‘전업주부’의 삶을 선택한 여성들의 의미 추구가 더 절실해졌는지도 모른다. 난 21세기 ‘전업으로 엄마’인 여성들을 ‘전문 엄마’라로 부른다. ‘전문가로서의 엄마’이다. 내 아이들과의 관계성을 대체하기 싫어 집에 있는 선택을 했을지언정 내가 현대 교육을 통해 배운 것들, 신장한 능력을 더 이상 봉건적 시스템에 가두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엄마들! 그래서 이 엄마들은 ‘엄마로서의 전문성’을 십분 발휘하며 자신의 아이들을 상위 10퍼센트, 아니 가능하다면 국제 경쟁력을 가지는 3퍼센트의 ‘1등급 엘리트’로 길러 내려고 첩보전에 가까운 정보전을 펼친다. “너는 일로 승부하니? 나는 아이로 승부한다!” 학교 다니는 내내 나보다 더 낫지도 않았던 동창이 승승장구 직업 세계에서 업적을 쌓아가는 것을 보며, 전문 엄마들은 ‘내 아이로 말해 주마!’ 칼을 갈고 있다. 그러나 정작 그녀들이 놓치는 것은 자신들이 올인하여 길러 내는 아이들 역시 결국 성공하면 되는 인간형이 ‘탈성적 전문가 개인’이라는 사실이다. 관계하고 돌보고 보살피는 능력은 배울 기회가 없이(실은 시간이 없이), 오로지 학업 성취만을 위해 내달리다 스펙 좋은 직장을 ‘득템’하고, 그 직장을 ‘지키느라’ 가정은 엄마인 자신들에게 대체시켜 버릴 ‘전문 기계들’ 말이다.

물론 그녀들 잘못이 아니다. 특강을 나갔다 들은 어느 엄마의 절규처럼 “이 나라가 문제다.” 학교 폭력이 날로 심해진다고 걱정하는 어른들이 참으로 이상하다. 관계하는 법을 가르친 적 없으면서, 오로지 상대를 이기고 꼭 일등을 하라고 그리 경쟁적인 아이들로 길러 내고서, 성적이 상위권이 아니면 다 ‘잉여’요 ‘루저’인양 취급하면서, 함께 가거나 함께 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한 번도 일러준 적 없으면서, 그래놓고서 점점 이기적이고 경쟁적이고 폭력적이 되어 가는 아이들을 걱정하다니…. 안타깝게도 우리가 우여곡절 선택한 현재의 ‘제도’는 엄마도, 아빠도, 아이들도 행복하지 못한 삶의 방식이 되어 버렸다. 가정이 있다는 것은 ‘탈성적 전문가 개인’에게는 직장 상황에서 불리한 조건이 되는 현실이다. 내 아이들과 의미 있게 관계하기 위해 일찍 퇴근하면 업적 경쟁에서 밀려 곧바로 대체되고, 관계할 시간적 여유 없이 대체 가능성에 시달리며 경쟁적 삶을 살아가도록 내 아이를 길러낸 결과 역시 자신이 유보했던 무한경쟁의 삶을 내 아이들에게 부여하는 것이라면… 도대체 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겠느냐 말이다.

그래서 요즘 ‘젊은 애’들이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거다. 특별히 더 이기적이어서도 아니고, 몸매 관리 따위의 어이없는 이유는 더더욱 아니다. 자신의 능력과 꿈, 즉 ‘나 되기’의 삶도 녹록치 않은데, 우리나라 가정의 제도적 기대들이 ‘나 되기’와 너무나 상충하고 있음을 알아 버렸기 때문이다. 달랑 아이 하나 낳아 키우고 있는 나이지만, 나 역시 스무 살 때 장래 희망 물어보면 ‘현모양처요!’ 하던 사람이다. 아이를 낳기 직전까지도 ‘여섯 명’의 아이들을 키우고 싶다는 야심찬 꿈을 꾸어 본 여자다. 그런데 이게 웬걸? 하나 낳고 보니 당장 접어야 하는 것이 ‘나 되기’였다. 박사 과정 중이었건만 난 내 아이를 데리고는 도서실도, 강의실도 갈 수가 없었다. ‘나 되기’의 능력과 가능성, 그리고 꿈을 심어 준 바로 그 제도가 이를 불가능하게 하고 있는 거였다. 현모양처가 꿈이었다지만, 그것만 ‘전적으로’ 하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세상에 나의 하나님을 조리 있게 설명하는 일, 그게 나의 꿈이었고 그래서 신학자의 길을 걸었다. 나의 그 꿈도 소중했다. 난 ‘전적으로’ 신학자이기도 싫었고, ‘전적으로’ 아이 엄마이기도 싫었다. 욕심이라고? 그걸 욕심이라 부르는 제도가 지금의 현대 가족제도이고 관료제도이다. 인간에게 통전적인 삶을 살지 말라고 종용하는 제도. 일하는 아빠나 일하는 엄마는 가정을 누군가에게 대체시키고, 집안을 지키는 엄마는 어느덧 전문가 엄마가 되어 육아를 관장하며 아빠는 돈 버는 기계의 역할만 충실히 하고 계획대로 잘 짜 놓은 아이의 시간과 공간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이런 삶이 우리의 현실인데, 이 땅의 젊은이들이, 더구나 젊은 여성들이 무슨 이유에서 ‘엄마 되기’를 선택하겠느냔 말이다.

사람은 크게 악하지도 절대적으로 선하지도 않다. 그저 살 길을 찾아 자신을 적응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가졌다. 그 모든 경쟁을 개별화․개인화하고 관계적 자아에게 전혀 크레딧을 주지 않는 삶의 조건에서 현대의 젊은이들은 ‘살 길을 찾아’ 경쟁력 있는 개인이 되는 선택을 했을 따름이다. 이제는 남학생들조차 결혼에 회의적이라 한다. 내가 고생해서 번 돈을 왜 ‘관계할 시간도 없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바치느냐, 반문한단다. 그 역시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학원비 모자란다고 더 벌라 닦달하는 아내는 어느덧 가정의 ‘보스’가 되어 버렸다. 직장에서 직장 상사에게, 집에 가면 가정의 보스에게 늘 ‘쪼이며 사는’ 그런 생활을 남자인들 왜 선택하겠는가 말이다.

‘엄마’면서 ‘나’일 수 있으려면

이런 사회적 상황을 읽지 못하고, 혹은 쓱 눈감고서 “생육하고 번성하라!” 이러고 마는 것은 무책임이요, “헌법 개조해서 5명 낳지 않으면 감옥행을 시키자”는 말은 죄악이다. ‘아버지 학교’ ‘어머니 교실’을 운영하여 관계하는, 따듯한, 신앙의 부모 교육을 시키자 하는 것도 발상은 기특하나 순진한 생각이다. 가르친 대로 실행하다 직장에서 ‘대체’되기 딱 좋은 시절이기 때문이다. 결국 제도, 즉 같이 살기의 방식이 바뀌지 않는 한 지키기 힘든 것이 가정이다. ‘엄마가 애를 전적으로 키워라’ 하는 문화적 기대와 제도적 장치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무엇보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결코 현재의 문화적 기대와 제도적 장치에 동조하거나 순응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 그 통전적 모습은 ‘관계할 줄’ 아는 공동체적 인간성과 ‘새로운 것을 지어낼 줄 아는’ 창조적 인간성 양면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제도는 개인으로 하여금 하나님 닮아 지으려 하고, 또 지어낼 수 있는 그 창조력을 공적 세계에서 표현하고 발휘하며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고, 그러나 그 일을 ‘전적으로’ 수행하는 전문 기계의 역할이 아니라 돌보고 보듬고 기다리고 희생하는 관계의 신비를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동시에 열어 주는 제도이다.

어찌 인간이 하나만 하고 살까? 가정을 지키지 않고 직업 수행에만 몰두하는 여신도들에게 ‘불신앙’ 혹은 ‘이기적’이라고 비난하기 전에, 교회는 돌아볼 일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의 모습, 본래 지으신 인간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창조적 자아와 관계적 자아, 이 둘 중 하나만 택하라고 강요하는 지금의 제도가 하나님 나라 비전에 합당한 것인지를, ‘지금 여기’에서 교회의 사명이 개별 가정의 회복을 외칠 일인지 아니면 통합적 삶을 위한 공적 육아의 가능성을 실천하기 위해 교회의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을 사용할 방안을 고심해야 하는지를, 청년 실업 백만 시대에 고학력 전업주부들까지 다 일하러 나온다고 하면 큰일이다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이름으로 가정 회복을 저리 외쳐 주니 참으로 감사한 기관’으로 비추이며 살지, 아니면 ‘엄마이면서 나이기’를 바라는 이 땅의 현대 여성들에게 ‘관계하는 기쁨, 창조하는 기쁨’을 모두 알게 하는 중재적 기관으로 기능하며 살지를….

가정의 달 5월이다. ‘서로를 건설하는 사람들’(살전 5:11), 그것이 교회의 진정한 이름임을 기억했으면 한다.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두세 사람’(마 18:20)인 가정의 진정한 모습임을 기억했으면 한다. 이 땅의 젊은이들이 행복한 가정을 꿈꾸는 날, 그 가정을 보듬고 살피고 자라게 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여 시간을 할애하고 금전을 할애하고 능력을 할애하길 기꺼워하는 날, 생명을 낳고 기르며 신비를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를 즐거워하는 날, 그리 하면서도 직업 기회를 위해 공적 세계에서 자신의 역량을 기르고 실천할 수 있도록 교회와 사회단체들, 그리고 나아가 국가가 일정한 시간과 공간을 내어 아이들을 ‘잠시’ 길러주는 날, 이 땅의 그 어느 누구도 ‘전적으로 한 기능 되기’를 종용받지 않은 채 통전적 인간으로 그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날, 그 날이 이 땅에 도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지금, 여기 교회의 사명이라 믿는다.

백소영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인문과학원 HK연구교수) sybaik@ewh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