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대 새 의무’를 새로운 방식으로

[264호 연중기획 87년형 복음주의여, 안녕] 87년형 복음주의 3세대 운동가 황병구 본부장 인터뷰

2012-10-26     김은석

자신이 관여하는 단체로 언급한 곳만 15개다. 아마 더 있을 것이다. 재단법인 한빛누리 황병구 본부장. 20여 년간 다양한 이력으로 운동 판을 뛰어다닌 그야말로 87년형 복음주의운동을 논하며 가장 먼저 만나야 했던 3세대 핵심 운동가지만, <복음과상황>의 편집위원장이라는 이유로 미루었다. 9월 21일 오후 정정훈 편집위원이 혜화동의 한 한옥 카페에서 그를 인터뷰했다. 편집위원이 편집위원장을 인터뷰하는 민망한 상황이긴 했지만, 운동가 황병구의 삶의 궤적과 편집위원장이 아닌 운동가로서 견지하는 복음주의운동에 대한 평가와 전망을 집요하게 물었다. 후배들에게 “진지하고 우울한 건 우리가 안고 갈 테니 새로운 방식으로 ‘새 시대 새 의무’를 붙잡으라”는 복음주의 ‘르네상스맨’ 황병구의 복음주의운동 이야기를 들어보자.

 

   
▲ 황병구 본부장 ⓒ복음과상황 이종연

복음주의운동단체 활동가들 사이에서 황 본부장의 별명이 ‘복음주의운동 본부장’이다. 실제로 여러 복음주의운동단체에 관여하고 있다. 어떤 단체에서 어떤 직함으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나?

다 이야기 하려니 민망하다.(웃음) 일단 한빛누리 재단의 실무 책임자다. 본부장인데, 작년부터 등기이사가 되어서 상임이사 역할도 겸하고 있다. 그밖에 <복음과상황>(복상) 편집위원장, 성서한국 이사, 선교한국 협동조직위원, 한국로잔위원회 중앙위원, 죠이선교회(죠이) 이사, 대한민국교육봉사단 이사, 아름다운배움 이사,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감사, 교회개혁실천연대 집행위원, 그리고 청어람아카데미, 교회재정건강성운동, 기독교학교교육연구소,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희망정치시민연합, 평화누리의 일도 운영과 기획위원 차원에서 돕고 있다. 나들목교회(김형국 목사) 협력사역자이기도 하다. 이상에서 발생하는 일들이 내 일정을 지배한다.

죠이 캠퍼스 총무 리더를 하고, 서울대기독인연합(서기연)을 이끌었을 뿐 아니라 뜨인돌 노래운동을 주도한 뮤지션이자 연출가였고 <많은물소리> 편집인이기도 하다. 선교한국대회 메인 무대 연출을 했고 기독교 방송국 CTS 프로듀서로 일하기도 했다. 한편으론 복상 편집위원으로 장기간 활동해 왔다. 전공 분야를 보면 원래 전자공학으로 석사까지 했지만 엔지니어의 길을 가지 않고 유학하여 MBA 학위를 하고 귀국한 경영컨설턴트이다. 가히 복음주의운동의 르네상스맨(Renaissance man)이라고 할 만한 커리어를 가지고 있다. 여러 분야의 운동 가운데 가장 즐거웠던 것은 무엇이었나.

남이 하지 않는 일을 할 때 가장 즐거웠다. 감정적으로 기쁜 일보다 의미 있고 충만했던 기억이 더 소중하다. 사실 전자공학을 그만두게 된 것은 그 일을 나보다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 길로 계속 갔더라면 지금쯤 인공위성 나로호 띄우는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길로 평생 갈 사람이 많아 보였다. 다른 선택지가 있다면 그 길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 정정훈 편집위원 ⓒ복음과상황 이종연

대학생으로 복음주의운동을 시작해 현재는 3세대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고 있다. 대학생 시절 황 본부장은 죠이라는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선교단체에서 활동을 했는데 어떤 계기로 사회참여적 복음주의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나.

적성검사를 하면 문과와 이과가 평평하게 나왔다. 공대를 가게 된 데에는 가족사가 있다. 형님이 서울대 법대 78학번이다. 법기독학생회 활동을 하셨는데 당시 대부분이 그랬듯이 학생운동을 하셨다. 큰누님은 1980년 서울대 자연대에 차석으로 입학하셨는데 입학과 동시에 ‘서울의 봄’ 시기를 거치며 휴교 사태를 경험했다. 신앙에 회의를 품으시는 등 마음의 병을 얻으셔서 학업을 잠시 쉬셨다. 말하자면 집안의 큰아들과 큰딸이 근대사의 희생양이었던 것이다. TK 출신 경찰에 골수 여당 지지자셨던 아버지는 그런 아들딸을 이해하기 힘들어 하셨다. 결국 작은 누님과 내가 그 반작용으로 실용 학문을 해야 했다. 죠이에 들어간 것은 누님들 덕이다. 쉬는 동안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큰누님이 친구 분을 따라 고려대 죠이 모임에 가셨다가 회원이 되셨다. 작은 누님도 죠이 멤버였기 때문에 입학 전부터 죠이 선배들이 나를 알고 있었다. 대학에 갔을 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러나 출신 교회가 예장 통합 소속이어서 청년부 시절을 거치며 에큐메니컬운동을 경험했다. 노회 청년부 회장을 맡기도 했는데 운동 가요를 거기서 다 익혔다. 나는 86학번인데 86, 87년은 80년 서울의 봄 이후 캠퍼스가 가장 시끄러웠던 시절이다. 선배들이 분신해서 죽는 것을 캠퍼스와 신림동 거리에서 목격했다. 전방입소거부운동이 일어났다. 강경파도 일부 있었지만 그 시기에 죠이는 주저주저하던 분위기였다. 고민 중에 공정선거감시운동을 했던 복음주의청년학생협의회가 정동교회에서 개최한 기도회에 갔다. 그때 촛불기도회를 한 것이 그리스도인도 사회문제에 대해 액션이 가능하다는 생각의 단초가 되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평범한 대학생활을 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는 열정과 현실의 치욕감에 섞여 살던 때였는데 <그리스도인의 비전>(브라이언 왈쉬·리차드 미들톤, IVP)을 읽은 게 터닝 포인트였다. 서기연은 그런 사람들의 집합이었다. 온누리교회 대학부 회장이던 양희송, 사랑의교회 대학부 리더였던 이국운 등 각 교회와 단체 임원과 리더였던 친구들이 ‘너도 그랬니? 나도 그랬다’라는 동질감을 갖고 만난 거다. 그땐 우리가 복음주의운동을 하겠다는 생각보다 캠퍼스에서 땅에 떨어진 하나님의 명예를 되찾자는 생각이 컸다. 에큐메니컬 경험이 있던 내가 주저하던 친구들을 이끌 수밖에 없어서 앞에 자주 서게 됐다.

MBA 취득 이후 다른 일을 하려고 했다던데 결국 지금까지 복음주의운동을 계속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당시 석사과정을 마치면 5년간 석사장교를 가거나, 대기업에 병역특례로 들어갔다. 만약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나도 그렇게 갔다가 지금쯤 에티오피아의 이장규 교수님처럼 전문인으로서 선교하러 떠나가거나, 평양과기대에서 활동하는 분들과 함께했을지도 모른다. 뜨인돌은 원래 2년만 하기로 했던 한시적 운동이었다. 운동 2년 차에 군대 면제 통지를 받았다. 석박사 연계 과정 진학도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때 신앙적 부채감, 시대적 부채감이 몰려왔다. 순진한 생각이었지만, 현역 복무 기간만큼 운동을 더해 노래운동을 마무리하리라 결심했다. 뜨인돌은 ‘노래만 빼고 다 잘하는’ 동아리 성격이 강했고 멤버들 스스로 20대의 과업으로 여긴 한시적 운동이었다. 대중에게 큰 존재감을 알리진 못했다. 뜨인돌 이후 운동 판에 남은 건 나와 양희송(청어람아카데미 대표기획자)뿐이다. 수학과 출신 전성민은 신학자(웨스트민스터신대원 구약학)가 되었다. 내 이름이 결정적으로 대중에게 각인된 것은 1997년 12월 호에 복상 편집위원석에 쓴 ‘스물두 살의 작은 예수들에게’라는 글 때문이다. 고지론에 대한 반론으로 미답지론을 펼쳤는데 이후 논쟁이 일었다. 나로서는 책임질 말이 생긴 거다.

당시엔 무슨 일을 했나. 복상 편집위원은 어떻게 된 건가.

CTS(기독교텔레비전) 프로듀서였다. 복상과의 인연은 두레연구원 때문이다. 두레연구원 2기로 들어가 월 29만 원씩 장학금을 받으며 격주로 세미나에 참석하고 글도 써 냈다. 복상은 김호열 전임 편집인, 선교한국운동을 함께한 한철호 편집위원과의 관계도 있었고 서재석 당시 편집부장님이 젊은 편집위원이 필요하다고 강청하셔서 동참하게 됐다. 문화 섹션에 원고를 쓰거나 필자 섭외를 담당했다.

왜 유학이었고, MBA였나.

인생 후반부에 이 바닥에서 공학이 아닌 다른 걸로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 고민했다. 한때 아내는 구호단체에서 일했는데 내부의 불합리한 구조에 속 태우며 나에게 사회복지 쪽 공부를 권유하기도 했다. 그때 한 친구가 “병구 네가 MBA를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니, 뜻 있는 일을 하려면 경영학을 해야 한다”고 얘기했다. 유학 떠나면서 농반진반으로 돌아오면 MBA 출신 사찰집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교회 행정, 사회복지, 방송국 운영 등에서 불의하고 불합리한 부분을 직간접적으로 목격했기 때문에 기여할 부분이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유학 후 돌아온 2006년은 우리 안에 전열이 무너지고 새롭게 성서한국운동이 시작된 시점이었다. 기독교사회책임이 만들어지고, 뉴라이트가 부상하고, 이명박 정권이 들어섰다. 선교한국, 부흥한국 등 관여했던 대부분의 운동은 세대교체기를 맞고 있었다. 가격 대 성능비가 괜찮은 사람들이 계속 버텨줘야 하는 상황, 품앗이 관계로 엮여 있던 터라 부탁을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 ⓒ복음과상황 이종연

그래서 한빛누리에 들어간 것인가.

 

한빛누리는 기존의 인재양성사업과 대북지원사업 사업 외의 영역에도 열려 있는 구조였다. 내가 새로 제안하는 기획을 구현할 수 있는 구조이기도 하고, 필요하면 내가 함께했던 이런 연대운동을 측면에서 지원하는 게 가능한 구조였다. 처음 한빛누리에 와서 한 일이 기존의 각개 전투식 후원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통합형 전산 프로그램을 만들어 동료 단체들을 도운 거다. 어쨌든 그렇게 이 바닥을 못 떠났다.

그렇다면 복음주의 핵심 활동가의 입장에서 복상의 연중기획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다시 말해 현재 복음주의 운동판에 대해서 복음주의 운동가 황병구의 평가가 궁금하다.

‘87년형 복음주의운동이여, 안녕’ 이라고 했을 때 중의적으로 봤다. ‘Good bye!’와 ‘How are you?’ 기획 단계에서부터 ‘굳이 다뤄야 하나, 위기를 논할 만큼 우리에게 가시적 성취가 있었나’ 싶긴 했다. 경제성장 이후 경제 위기를 논하는 법인데, 우리는 제대로 성장한 적이 없었고, 어느 시점부터는 늘 침체였다. 이렇게 오래 침체하는 걸 위기라고 한다면 맞다. 그런 의미에서 ‘How are you?’라고 생각했다. 쇠락이라기보다는 지속적인 정체 측면에서 위기라고 본다. 생존을 위해 애쓰다 보니 발육 부진에 빠진 거다. 왜소한 북한의 청소년들 보는 것처럼 안쓰러움이 있다. 에큐메니컬 진영이 결국 쇠락한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될 것인가. 그렇게 되기 전에 뭔가 재활 치료를 받든지 선수를 바꾸든지 해야 한다는 위기감이 온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복상이 위기의 원인으로 짚은 것에 큰 이견은 없다. 복음주의 영성 내지 운동론을 지원할 교회의 부재를 짚은 면이 시사한 바가 크다. 그렇게 마무리하면 복상으로선 할 일을 한 셈이라고 본다. 운동론에 있어서 내 분석을 덧붙이자면, 복음주의 운동판에는 미니스트리(사역)와 비즈니스(사업), 무브먼트(운동)가 잘 구분되지 못한 채 혼재되어 있다. 운동은 한시적이다. 한시적 운동이 끝나고 나면 초연히 돌아가야 할 지점이 있다. 운동을 비즈니스화하거나 비즈니스를 사역화하면 안 된다. 운동가들이 자신의 운동을 변질시켜 버리는 경우가 있다. 예배운동이 음악 산업으로 지속되거나, 선교운동이 거대 조직으로 지속되는 순간, 변혁운동이 사이비 사회적 기업처럼 생존을 걱정하는 순간, 사실 순수한 운동은 끝나는 거다. 그걸 계속 주지하고 있었다. 내가 배운 운동론에 따르면 운동은 대중적이되 비타협적이며 한시적이어야 한다. 한기총이 해체되면 한기총해체운동이 종료되고, 세습방지법이 제정되면 세습반대운동이 종료되듯 문제가 해결되면 운동은 사라져야 한다. ‘한시적’이라는 지점에서 복상 연중기획 논지와 나와 이견이 있을 듯하다. 최근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송인수 대표도 비슷한 주장을 하셨다. 가장 좋은 길은, 목표한 일이 해결되어 더 이상 단체를 존속할 필요가 없는 경우라는 것이다. 물론 시민단체도 고용을 창출하는 하나의 일자리이니 지속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목표한 사명을 이루었으면 깨끗이 자리를 털어야지, 지속 가능성을 생각하다 자칫 더 초라한 운명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더 토의가 필요한 부분 같다.

한시적 운동이려면 운동 성격이 구체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성서한국’, ‘하나님나라’ 등을 내건 운동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갈 수밖에 없지 않나. 성서한국이나 기윤실의 경우 거의 영구적인 수준의 과제를 가지고 운동을 하는데 조직 형태는 교회도 선교단체도 아닌 NGO이다.

그건 비즈니스나 미니스트리 모델로 가야 한다. 내가 볼 때 하나님나라운동은 미니스트리다. 우리는 노래운동할 때 스스로의 한계도 느꼈고 유사하거나 업그레이드된 후속 운동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에서 의도적으로 2년마다 평가하고 5년 만에 마무리했다. 내가 느낀 딜레마는 우리가 운동의 지속과 운동가의 생존 가능성을 구분하지 못한 데 있다. 운동적 삶이란 언제든지 운동가로 차출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는 삶이다. 넥타이 부대였든 대학생이었든 민주화 의제가 나오면 당장 시청 앞으로 달려가지 않았나. 삶의 자리가 없이 직업운동가들이 많은 것은 덜 정상적이라고 본다.

그렇게 되면 운동의 전문성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나.

아까 얘기한 장기 과제를 장기 운동으로 푸는 지점을 잡는다면 그 얘기는 따로 하는 게 필요하다. 우리가 겪었던 87년 체제의 운동은 상당 부분 한시적이었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한시적인 운동 과제를 장기적 과제로 만들어 지속한 거라고 보는 건가.

의도적이지는 않았더라도 단기에 해결되지 않으면서 벌어진 거다. 혁신이나 변혁을 말할 때 ‘혁’은 변화나 갱신보다는 짧은 기간 동안의 급작스런 변화를 표현하는 거다. 우리는 그것을 변화운동 혹은 갱신운동이라고 얘기해 왔다. 우리 일상성을 자극하는 용어일 수 있지만 비즈니스와 미니스트리로 해결할 지점에 혼돈을 주는 듯하다. 운동적인 교회라 하면, 언제든 미니스트리를 하면서 특별한 시대적 과제가 주어졌을 때 인적 자원이든 물적 자원이든 동원해서 그 운동을 지원하는 교회다. SVM(학생해외선교자원운동)운동이 일어났을 때 미국교회가 영속적으로 그 운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 기획이 다시 복음주의교회를 얘기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운동가들이 다시 돌아갈 곳을 정한다는 의미가 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숨 쉬고 살 수 있는 생업, 이른바 비즈니스, 즉 ‘먹고사니즘’이 해결될 곳과 지속적 사역으로서 영적 충만함이 해결될 곳이 공존하지 않으면 운동은 그런 의미에서 지속할 수 없다고 본다.

 

   
▲ ⓒ복음과상황 이종연

금년에 복음주의운동의 정체 내지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이러저러한 모색이 있었다. 올해 초 성서한국에서 개최한 성서한국 전략컨퍼런스, 청어람아카데미의 ‘복음주의의 미래’ 컨퍼런스 등에서 복음주의운동의 업그레이드 내지는 개혁을 위한 논의를 진행했다. 복음주의교회연합(복교연)이란 모임도 만들어졌다고 들었다. 실제로 어떤 개혁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지 아는가.

당장 눈에 띄는 것은 별로 없다. 개혁 작업이 체계적·전략적으로 일어나는 듯하진 않다. 삼삼오오 논의하고 있는 단계랄까. 이걸 비정상적으로 볼 것인가, 자연스럽게 볼 것인가의 문제다. 그나마 눈에 띄는 것은 교회2.0운동과 기독연구원 느헤미야가 치고 나가는 지점이다. 한편으론 성서한국 시니어 그룹이 복교연이란 이름으로 확장되고 있다. 어쨌든 종합해 보면 본질적인 교회를 리빌딩해 보자는 움직임이다. 새로운 교회 모델을 세우든 예배 방식을 만들든, 결국 그쪽으로 가고 있다. 역사적으로도 종교개혁 이후 교회론이 재구성되어 예배 예전의 새 모델이 가시적 결과물로 남지 않았나. 다만 우리가 가나안성도 얘기를 계속 하고 있지만 그들을 위한 지원 작업이 없다. 벙커원 교회 정도에서 하고 있다. 그들이 현재 개신교에 느끼는 반감이나 안타까움을 실질적인 행함으로 위로해 줄 모임이나 형식을 아무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간 이야기해 온 부분도 있지만 조만간 청어람아카데미 양희송 대표가 귀국하면 제대로 함께 머리를 맞대고 싶다.

복상 연중기획의 논의도 운동을 제대로 하려면 교회가 제대로 가야 한다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적지 않은 단체와 사람들이 이미 NGO 형태의 복음주의운동에 투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복상 연중기획팀에서는 기존의 NGO 형태의 복음주의단체를 해소하고 차라리 그 역량을 교회로 집중해야 하지 않느냐는 문제의식도 제기되었다. 현존하는 NGO 형태의 복음주의운동 구조는 어떻게 변화해야 할까?

연중기획에서 패러다임이 이동하고 있다는 걸 많이 강조했다. 전선이 바뀌고 과제도 바뀌고 적진의 형태도 바뀐 상황이라고 가정하면, 우리도 약간 교활해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우리는 운동의 순수함에 집착하는 면이 있다. 교활해지자는 것은 악해지자는 것이 아니라 하이브리드한 모델을 만들어 낼 필요가 있지 않느냐는 거다. 가령 ‘귀농·귀촌운동’이 아닌 ‘탈수도권운동’이라고, 대안학교나 홈스쿨링이 아닌 ‘진학 시기 자유선택제’ 등으로 이름 지어서 더 많은 실천을 유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후원금 모아서 상근자들이 열심히 실무를 하면 명망가들이 신원을 보증해 주고, 젊은 대중이 힘을 보태서 목소리를 내는 구조가 아닌 다른 운동 방식이 있지 않을까. 운동의 전선은 이동했는데 우리는 거기서 계속 싸우는 듯한 느낌이 든다. 상근자들의 희생 문제, 명망가들에게 의존하는 의사결정구조 등에 문제의식을 느낀다는 것은 그 구조를 인정한다는 말 아닌가. 우리는 바람직하고 완성도 있는 운동 모델을 갖고 싶어 했다. 그 미련을 내려놓고, 중구난방이더라도 다양한 케이스를 갖고 있는 목표로 바꾸면 어떨까. 운동하다가 주저앉으면 ‘그 운동에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셨다’거나 ‘기도가 부족해서 이렇게 됐다’는 식으로 반응하지 말고, ‘소멸되어도 괜찮다’는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한시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운동이 있다.

좀 더 구체적인 생각이 궁금하다. 87년형 복음주의운동의 패러다임이 위기라면 이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황 본부장은 무엇을 하려는가. 가령 자율적이고 자발적인 과제해결형 운동을 인큐베이팅할 건가, 아니면 기존과 다른 동원 구조를 만들 것인가.

인큐베이터보다는 동반자라는 말을 좋아한다. 건방진 듯하지만 내가 경험한 나의 운동은, 정 위원이 구성한 세대론이나 인적 구성에 종속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뜨인돌도 그렇고 교회 사역도 그렇고 앞 세대와 협동하기보다 개인기로 돌파한 게 많다. 후배들이 자원의 독점이나 의사결정구조의 부담을 털고 ‘내 일을 내가 하는 것’이란 구도를 왜 만들지 못할까라는 생각이 든다. 책망으로 듣지 않길 바란다. 기존의 틀 안에서 뭘 해 보려 하고, 뭔가 가능하게 하면서 내 목소리를 가지려 하는 것은 결국 그 구조를 인정하는 거다. 괜찮은 친구들이 ‘이런 방식으로 일을 하는구나!’ 싶은 때가 왕왕 있긴 한데, 모두가 그런 방식으로 운동하고 있지는 않다. 기독운동은 아니지만 ‘아름다운 배움’이라는 자발적인 교육봉사운동을 보면서 가능성을 느꼈다. 인큐베이팅은 실패를 각오한 모험가들에게 어울리는 말이고, 기회를 찾아 ‘밀당’하는 이들과는 거리가 멀다.

 

   
▲ ⓒ복음과상황 이종연

앞으로 한국 복음주의운동의 혁신이라는 과제에 있어서 황 본부장 세대, 즉 3세대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내 느낌에 우리는 잔당처리반인 것 같다. 87년에 맞닥뜨린 시대적 필요와 교회의 아픔이 있었는데 단기간에 해결되지 않고 지지부진하게 남아 있다. 4년 전 복상 2기 출범할 때, 강빛나래 자매가 찬송가 ‘어느 민족 누구에게나’의 3절에 나오는 “새 시대는 새 의무를 우리에게 주나니”라고 한 부분에서 한 줄기 희망을 봤다. 저걸 장악하는 후배들이 있으면 우리는 퇴장해도 되겠구나 싶었다. 안타깝지만 우리 세대는 새 시대의 의무를 붙잡으면 안 된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유학 다녀와서 귀국하면 끝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과제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교회 내 권위주의, 교단 중심주의, 한기총, 교회 세습 등을 안고 우리는 논개처럼 사라져야 한다. 후배들이 그 운동을 하게 놔 둘 순 없다. 후배들은 새로운 운동을 붙잡고 치고 나갈 수 있도록 그런 의무는 우리가 지겠다는 것일 수도 있다. 안전지대에 머물겠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 세대가 해냈다고 자평할 수 있는 것은 직업영역에 일정한 연대를 이룬 거다. 법률가, 의료인, 교육자, 선교사, 예배사역자 등이 부문별 연대체를 이루었다. 우리는 말도 하고 글도 쓰고, 일도 해야 하는 1인 다역 구조에서 일했다. 발품 팔고 진을 빼야 했다. 지금은 적은 자원으로도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만들어졌다. 40대 초중반을 지나는 우리 세대는 약간 인생의 쓰라림을 경험하는 지점에 왔다. 이혼, 빈곤, 질병, 자녀 갈등 등을 처리할 정신적 에너지가 필요하다. 2,30대는 아직 그런 데 에너지를 쓸 시기는 아니지 않나. 문제 해결을 중심으로 미션을 명확히 하되, 즐거운 방식으로 운동하는 사례를 복음주의 밖에서는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우리만 진지하고 우울하다. 진지하고 우울한 건 우리 세대가 안고 가겠다는 거다.

현재 복음주의운동에 4세대의 역할이 아직 잘 드러나지 않는다거나 5세대의 형성 가능성이 어둡다는 전망도 있다. 복음주의운동 판에서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2009년 성서한국대회 때 내가 좀 우겨서 교사 시스템을 도입하자고 했다. 주강사, 선택강좌 강사 말고 100명 안팎의 복음주의운동에 발을 들여놓고 활동하는 30대 초중반의 관심자, 자원봉사자들이 대학생 후배들과 이야기할 자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처음 하는 거라서 약간의 시행착오도 있었는데, 2010년 선교한국대회 때 멘토 시스템으로 이식시켰다. 주니어 선교사, 훈련 중인 선교사, 헌신했으나 미처 파송되지 못하고 부담감을 가진 채 있던 사람들이 선교단체의 요청을 받아 대회에 참석한 청년들을 멘토링했다. 400명가량 지원했는데 평가가 아주 좋았다. 멘토들을 발굴한 10명가량의 코디네이터들은 강사급으로 성장했다. 이번 2012년 대회 때도 그만큼 참여했다. 중복된 인원들을 감안한다고 해도 약 600명 정도의 자원이 참여해서 대회에 의견을 내는 집단이 된 것이다. 대회에 참석자들을 동원하고, 대회가 끝나고도 1년 가까이 참가자들을 만나는 등 선교운동과 청년대학생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뭔가 조각구름을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발적으로 각성해 기성 조직에 들어 온 소수의 활동가들 외에도, 기회만 주어지면 그 일을 할 수 있는 인적 자원과 에너지가 존재하고 있다고 본다. 건드려 주면 반응할 숨은 청년들 말이다. 우리는 앞장서서 구호를 외치는 운동가 집단과 뒤따르는 대중으로 손쉽게 구분 짓곤 하는데 그 중간 즈음에 이런 블루오션이 있을지 모른다. 의도적으로 이들을 4세대 또는 5세대라고 일컫고 싶고, 현재 현장 실무자들에게는 이들과의 적극적 연대를 모색해 보자고 권하고 싶다. 선배 세대들에게 무언가 더 의미 있는 활동의 공간을 확보해 달라는 요청은 자칫 제한된 자원의 분배 요구처럼 들릴 수 있지만, 이들과의 새로운 만남은 실제로 판을 키우거나 새로운 운동을 촉발하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 우리 세대에는 골방 아니면 거리, 밀실 아니면 광장이었지만, 이제는 다양한 공간과 연대 방식이 가능한 시대이니, 여기저기서 소규모 활동을 통해 변화를 일구어 갈 수 있는 환경이라고 격려하고 싶다.

복음주의운동가로서 동료 복음주의활동가들에게 제안하고 싶은 게 있다면.

거듭되는 제안이지만, 지금 현존하는 조직과 운동을 ‘어서 견고하고 지속가능하게 만들자’ 또는 ‘이제 그만 접자’고 하기보다 ‘언제까지 종료하자’고 해야 한다. 어떤 운동의 라이프 사이클을 한시적으로 정하자는 거다. 그 운동에 합당한 자원을 차출해서 운동을 마친 후에 평가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극단적인 답일 수 있다. 그러나 지속 가능성이 운동 단체의 미션은 아니다. 지속 가능성으로 가려면 비즈니스나 미니스트리로 가야 한다. 너도 나도 다 지속 가능한 것을 만들자고 하면 이 판은 갑자기 레드오션이 될 거다. 송인수 대표는 운동의 종료 이후 일하던 스태프들의 진로도 크게 걱정할 것이 아니라더라. 운동의 종료가 새로운 운동을 촉발하고 성공적으로 일해 온 전문가들은 다시 환대받고, 창의성을 가지고 일해 왔던 경험은 새로운 운동에서 중용되게 한다고 하셨는데, 크게 공감한다.

황 본부장은 현 상황에서 어떤 복음주의운동을 하고 싶은가.

나는 나름대로 일관성 있는 한 사람의 인생이 되려고 노력할 거다. 한 가지 목표를 잡고 성취한다는 일관성이 아니라, 이른바 미답지가 나타나면 거기로 가고 변화의 필요가 오면 변화해야 하는 그런 일관성이다. 장래희망이 뭐냐고 계속 듣게 될 거고 그 필요에 따라 움직일 거다. 복상에도 너무 오래도록 동참한 건 아닌가 돌아보고 있다.(웃음)

진행 정정훈 편집위원 leftity@nate.com
정리 김은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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