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예수 믿는 철거민이 있었다.
[265호 편들고 싶은 사람] 용산 참사 유가족 전재숙 인터뷰
여기, 아직 잊어서는 안 되는 사건이 있다. 올해든 내년이든, 대통령이 누가 되든 해결되어야 할 사건이 남아 있다. 2009년 1월 20일에 벌어진 용산 참사다. 지난 4년 간 언론이 수많은 기사를 쏟아냈고, 책도 여러 권 출간되었으며(<여기 사람이 있다>(2009),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2009), <내가 살던 용산>(2010), <떠날 수 없는 사람들>(2012) 등), 올해 <두 개의 문>(2012)이라는 영화까지 나온 것은, 그 참사가 인간의 망각 속으로 소멸되는 걸 막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결과일 것이다. 게다가 아직도 용산 3구역을 비롯해, 북아현동, 도림동, 용강동, 합정동에서 철거민들이 ‘건물’ 이상의 ‘삶’을 빼앗긴 채 신음하고 있다.
용산 참사로 남편 이상림 씨를 잃고, 아비를 죽인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가 있는 아들을 둔 전재숙 집사(69)를 10월 25일, 서울 대한문 근처에서 만났다. 불의한 구조가 양산한 고통받는 이웃이 있음을 망각하지 않기 위해.
그런데 2009년 1월 20일, 평범하게 살던 이 가정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사건이 벌어졌다. 이른바 용.산.참.사.1)
“오늘 새벽 6시 반부터 시작된 경찰의 강제 진압 과정에서 최소한 5명이 숨진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숨진 사람 가운데는 농성을 하던 철거민 4명과 진압 작전에 투입됐던 경찰관 1명도 포함된 것으로 보입니다. 또 이 과정에서 부상을 당한 경찰과 철거민도 23명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까지 건물을 빠져 나온 철거민의 숫자가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어 사망자나 부상자가 늘어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긴박한 기자의 목소리, 불길이 치솟는 건물, 크레인을 타고 올라간 컨테이너의 특공대원들, 쉼 없이 쏟아지는 물대포, 수백 명의 시커먼 경찰들이 화면에 잡혔다. 그 저녁 다급한 마음에 찾아간 아수라장이 된 현장, 절망의 눈물지으며 달려오던 사람들…이 다시 떠오른다, 생생히.
국가는 남일당 옥상 망루에서 ‘대화를 하자’고 외치던 이들을 도심 테러리스트로 매도했다. 국가는 아버지를 잃은 슬픔으로 가득한, 자신도 다쳐 입원 치료를 받고 있던 아들을 ‘아버지를 죽인 죄인’으로 만들어 감옥에 넣어버렸다.
다시 생각해 보자. 그들은 무엇을 잘못해서 그렇게 된 것일까.
전재숙 집사의 말이다. 용산 참사로 남편을 잃었고, 5년 4개월을 선고받고 4년 째 안양교도소에 수감 중인 아들을 둔, 그 날 이후 한 번도 웃어본 적 없는 전재숙 집사. 그의 말이 이어졌다.
“재개발을 하면 쫓겨나는 건 줄 몰랐어요. 수십 년을 살던 곳에서 개발로 인해 한순간에 쫓겨나야 하는 건 줄 몰랐던 거예요. 그래서 조합에 가서 대화 좀 하자고 하면 ‘당신네들이랑 대화할 일 없다’고 하고, 문을 잠그고, 밖에 용역을 세워 두고…. 우리 앞에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길에 다니다가 투쟁하시는 분들을 보면, ‘저 사람들은 무엇 땜에 저렇게 앉아 있나’ 생각했어요. … 그분들이 누구 죽이려고 올라간 거 아니고요. 테러범 절대 아니거든요. 어느 누구도 우리 말을 들어주려고 안 하니까, 대화를 해 보자고 올라간 건데, (올라간 지) 하루도 안 지나서 특공대를 투입해서 사람을 죽이고….”
지금도 철거민들을 보상금 더 받아내려는 이기적인 사람들로 바라보는 이들이 많다. 일견 맞는 말이다. 재개발을 하려면, 기존에 세 들어 살던 사람들, 장사하던 이들이 다른 데 가서도 살 수 있게, 장사할 수 있게 보상?보장해 주는 게 마땅하다. 그런데 수억 원을 들여 장사를 하던 이들이 받을 보상금은 가구당 2500만 원이었다. 그 상황에 누군들 ‘꿈틀’하지 않을까. 당장 잘 곳이 없어지고, 일할 곳이 없어지고, 삶을 통째로 잃어버리게 생겼는데, 건물주, 조합, 시공사, 심지어 법조차 이들을 챙겨주지 않으니 정당하게 나의 가산을 지켜야만 했던 것이다. ‘살려 달라’고 외쳐야 했던 것이다. 용산 참사를, ‘살고 싶다’는 바람으로 망루에 올랐다가 ‘죽음의 재’로 변해 내려온 사건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진짜 이기적인 사람들은 따로 있다. 용산 4구역에는 지하 7층, 지상 40층의 주상복합아파트 493가구, 6개 동이 들어올 예정이었다. 지금 4구역을 제외한 곳에는 이미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가 들어섰고, 집값은 강남을 앞지르고 있다. 용산 참사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4구역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4구역에 들어설 493가구 중 임대아파트 84가구를 제외한 409가구는 최소 50평이 넘는 대형 평수(50평도 6가구에 불과)였고 분양가만 14~44억 원에 달했다. 조합원에게는 일반 분양가보다 낮게 분양해서 최소 3억에서 11억 원까지 시세 차익을 얻을 수 있게 했다. 그들의 욕망은 이기적인 게 아닌가. 게다가 애초에 1평당 700만 원하던 땅값이 8000만 원 이상으로 뛰었고, 용역 깡패를 동원했던 철거업체가 받을 돈이 63억 원, 건설재벌인 시공사(삼성물산, 대림, 포스코)가 받을 공사비만 6000억 원이었다. 당연히 각종 의혹도 제기되었다.2) 그들의 이기적인 욕망은 집과 일터를 지키려한 이들의 욕망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 후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사람들은 이제 거의 무감하다. 올 여름 개봉한 영화 <두 개의 문>을 7만 명이 봤다고 하지만, 달라진 건 별로 없다. ‘용산 참사, 그때 그런 가슴 아픈 일이 있었지’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나마 다행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또 다시 바쁜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고, 오직 당사자인 용산 참사 유가족들은(그리고 현장에서 상해를 입은 사람들과 바로 옆 용산 3구역 철거민들, 이 땅의 모든 철거민들은) 그날 이후 계획에 없던 투사가 됐고, 재개발 전문가가 됐고, 경찰청장 이름은 물론이고 검사, 변호사들 이름도 줄줄이 외우는 시위 및 집회 전문가가 됐다.
용산 참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유가족은 경찰들의 강제 진압으로 참사가 일어났다고 하지만, 국가는 그 죄를 도리어 철거민들에게 물었다. 철거민들이 납득할 수 없는 결과는 그들을 거리로 내몰았고, 지금도 그들은 외치고 있다. 무엇을?
“다른 걸 외쳐 본 적 없어요. 진상 규명, 구속자 석방, 책임자 처벌, 그거예요. 그 사람들, 절대 불에 타서 죽은 거 아니에요. 이성수 씨, 윤용헌 씨는 망루에서 떨어졌고 4층 옥상 벽 쪽으로 가는 것까지 본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불에 탔겠느냐고요. 또 경찰이 나중에 저희 남편 유품이라고 지갑에서 나온 돈을 줬어요. 사람이 불에 타서 죽었는데 어떻게 돈만 안 타나요. 용산구청에서 보낸 공문서, 그 얇은 종이 한 장도 안 탔어요. 그런데 가족들이 시신이 어디로 갔는지 몰라서 우왕좌왕하는 틈에 몰래 시신을 한 차에 짐짝처럼 실어 가서 동의도 없이 부검을 했어요. 시신 한 구 부검하는 데 2시간 반이 걸린다는데, 다섯 분 부검을 두 시간 만에 해 버렸어요. 지문이 없어서 신원 미상으로 부검을 했대요. 우리 남편이 끼고 있던 십자가 반지도 그대로 있는데, 손이 말짱한데, 신원 미상이라니요. 그분들 맞아서 죽었지 불에 타서 죽은 거 아니에요. 진실은 어느 때고 밝혀질 거예요. 저는요. 지치려야 지칠 수도 없고, 쓰러질 수도 없어요.”
밝혀야 할 진실이 있으니 그의 말대로 지칠 수가 없는 것일까. 오늘도 그는 새벽 6시에 집을 나서 안양교도소에 있는 막내아들 이충연 씨(39) 면회를 다녀왔다. 오후에는 평택에 들러 개인 일을 보고 저녁에 기자를 만나기 위해 서울 대한문까지 지하철을 타고 왔다. 전날까지도 강정?용산?쌍용 문제를 알리기 위해 전국 순례 중인 생명평화대행진에 참석했고, 내일은 용산 참사로 수감되어 3년 9개월을 감옥에서 보내고 가석방되는 김재호 씨를 맞기 위해 공주로 향할 예정이다. 역시 새벽 6시에 집을 나서야 한다. 기자회견, 연대활동을 다니다가도 일주일에 한 번은 남편이 잠들어 있는 마석 모란공원에 꼭 다녀온다. 일흔 할머니의 일정은 이렇게 빡빡하게 이어지고 있다. 식사는 챙겨 드시냐고 묻자 “잘 먹어요” 하시기에, “점심은 무얼 드셨느냐” 하니 덤덤하게 “그러고 보니 오늘 점심을 굶었네요” 하신다.
그에게는 그보다 아들과 구속자들의 안위가 중요하다.
“내일 두 사람이 가석방으로 나와요. 한 명은 공주, 한 명은 전주에 있었어요. 우리 범대위(용산참사범국민대책위원회) 식구들, 전철연(전국철거민연합) 식구들과 같이 다녀올 거예요. 가석방이 중요한 이유는요. 지금까지도 치료를 받고 있는 분들이 두 분3)이 계세요. 두 분 모두 장애인이 되셨어요. 한 분은 수술을 15번이나 했다는데 어디 성한 데가 있겠어요. 그 분들은 감옥에 가면 안 되거든요. 가석방이 돼야 치료받는 분들이 감옥에 안 갈 거 아니에요.”
실제로 그렇게 될지, 그만의 바람으로 끝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진상 규명이 되면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켜 감옥에 보내는 일이 없을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마지막 한 가지, 책임자 처벌이 중요하다. 전 집사는 인터뷰 내내 세 가지를 계속 강조했다. 진상 규명, 구속자 석방, 그리고 책임자 처벌.
“왜 김석기(용산 참사 때 강제 진압을 지휘한 전 서울지방경찰청장)는 사과를 안 하느냐는 거죠. 이번 총선 때 김석기가 경주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어요. 김석기는 살인마예요. 그래서 유가족들이 3박 4일을 쫓아다니면서 (후보) 자진 사퇴하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대요. 용산에 할 만큼 했다는 거예요. 용산 아니라 다른 데라도 그런 환경이면 또 그렇게 할 거라는 거예요. 거기(남일당) 올라간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다섯 사람을 학살했는데, 지금 거기가 뭐예요. 풀밭이고 용역 주차장이에요. 그런데 하루 만에 죽일 수밖에 없었냐는 거예요. 뭐가 그렇게 급했냐는 거예요.”
용산 참사가 있고 나서, 사람들에게 씁쓸함을 안긴 사실이 또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전재숙 집사 부부가 15년을 다닌 교회의 장로가 재개발을 추진한 조합장이었다는 점이다.
“재개발 공사를 빨리 추진하길 원하는 조합 소속 교인들과, 턱없이 모자란 보상을 받고 내몰리게 된 세입자 교인들은 서로 얼굴도 바라보기 힘들 만큼 악감정이 쌓였다. … 한 교회에서 예배하고 동네 이웃으로 지내온 이가 세입자들을 쫓아내기 위해 폭력과 폭언을 일삼는 용역 직원들을 고용하고….”4)
전재숙 집사의 남편 고 이상림 집사는 매일 새벽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칠순 잔치 때 선물로 받은 반지로 십자가 반지를 만들어 끼고 다녔으며, 틈만 나면 성경 필사를 하던 기독교인이었다. 하지만 이상림 집사가 조합장이던 이 아무개 장로를 찾아갈 때마다 그는 용역을 앞세우고 문을 걸어 잠근 채 숨어버렸다.
“큰 교회도 아니고 당연히 서로 다 알고, 같이 예배드리던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 돈이 없는 사람도 아니에요. 우리가 그 사람한테 그랬어요. ‘당신은 장로니까 거기(조합)서 나와라. 장로가 어떻게 돈에 눈이 어두워 거기에 있느냐.’ 그런데 도리어 그 장로는 만나러 가면 너희 같은 사람이랑 할 말 없다고 했어요.”
교회 또한 궁지에 내몰린 전 집사 부부와 조합장 장로 사이에서 중재를 하지도, 도움을 주지도 못했다. ‘너무 예민한 사안’이라 교회 내에서 언급할 수 없다고 한 그 교회도 재개발 구역에 포함돼 교회 부지 3000평을 보상받은 상황이었다. 힘든 티를 잘 내지 않던 전 집사 얼굴에 상심의 기억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그 날 이 후 전재숙 집사는 그 교회를 떠났다. 요즘도 가끔 길에서 교인들과 마주치지만, 다시 그 교회로 돌아갈 마음은 없다.
“어느 곳에 가면 하나님이 안 계시겠어요. 저는 미련 없어요. 섭섭하고 안타깝고 그런 것도 없고요. 제가 그 교회에 목매는 사람도 아니고….”
씁쓸함을 지우기는 힘든 눈치다. 지금 그는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대형교회에 다닌다. 처음엔 작은 교회도 몇 군데 가 봤지만, 자신을 알아본 사람들이 건네는 과한 위로, 동정이 오히려 불편했다. 졸지에 남편을 잃고, 아들을 감옥에 보내고, 며느리도 고생이 말이 아니다. 일생 동안 근실히 땀 흘려 온 삶터마저 사라졌다. 이쯤 되면 울화나 억하심정, 원망이 켜켜이 쌓일 법도 하건만, 돌아오는 대답은 의외였다.
“저는 하나님 원망 안 해요. 왜 원망을 해요. 인간이 잘못해서 이렇게 된 거지, 하나님이 잘못하신 게 아니잖아요. 도리어 전에는 사람들 소중한 걸 잘 모르고 살았어요. 그런데 막상 억장이 무너지는 일을 겪고 보니,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들이 없었으면 어떻게 여기까지 왔겠나 싶어요. 오지도 못했지요. 박래군, 이강실, 조희주, 이원호 … 정말 감사한 분들이 많아요. 개신교, 천주교, 불교 전부 감사하고요. 앞에 서는 지도자들도 감사하지만 특히 평범한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 와서 앉아 있는 거 보면 그게 정말 감사해요. 내 일도 아닌 일에 누가 그렇게 오겠어요. 의사 선생님들도 늘 와서 약도 주고 침도 놔 주고요. 아프면 전화도 할 수 있고요. 또 전에는 앞만 보고 살았는데 생명평화대행진 다녀보니까 힘든 분들이 너무 많아요. 우리가 모르는 힘든 사람들이 정말 많아요. 그러니 강정에 무슨 일 있으면 세상 일 다 버리고 가야 하고요. 쌍용자동차 기자회견도 가야 하고요. 우리 기자회견도 해야 되고, 쉴 새가 없네요.”
막내아들 이충연 씨가 어머니가 자꾸만 마른다며 걱정을 했다는 말이 떠오른다. 내일도 새벽같이 공주로 내려가야 하실 텐데, 벌써 밤 9시다. 마지막으로 한국교회에 하고 싶은 얘기는 없는지 물었다. “기독교인들이 힘을 더 보태드리고 같이 해야 하는데, 늘 죄송하다”고 운을 떼며 드린 질문이었다. 대답은 솔직했다.
연말이다. 교회마다 반짝이는 트리를 달고, 캐럴을 부르고, 불우이웃돕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적당한 안락과 풍요를 누리면서 적선하듯 그들을 돕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은 아니다. 짐 월리스는 “억압받는 자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제도와 근본적인 원인들에 온몸으로 맞서는” 것이 예수그리스도가 명한 섬김이라고 했다. 웃음을 잃어버린 무력한 약자들의 편에 서서 제도를 바꿔 낼 그리스도인, 자본을 섬기는 탐욕스런 부자들의 희생양이 된 철거민들의 차갑게 식은 손발을 녹여낼 교회가 용산 참사 4주기를 앞에 둔 이들에게 절실하다.
이종연 기자 limpid@goscon.co.kr
1) 재개발 구역이었던 용산 4구역 남일당 건물에서 철거민들이 농성을 하던 중 경찰특공대를 포함해 6명이 숨진 사건이다. 농성자 20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27명이 체포됐고 그 중 8명이 4~5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지난 10월 26일 2명이 3년 9개월 만에 가석방되었다. 급박한 강제 진압 결과의 참혹함과 달리 지금 그 곳은 공터로 남아 용역들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
2) 손낙구, ‘용산참사와 부동산 먹이사슬’, http://www.redian.org/archive/23526
3) 서울 순화동 철거민 지석준 씨와 지금동 철거민 김영근 씨. 두 사람은 4년의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심한 부상으로 아직도 치료를 받고 있어 항소심이 중단된 상태다. 항소심이 개시돼 형이 확정되면 바로 수감된다.
4) 김은석, ‘교인 사망 8개월, 위로 예배도 못 하는 교회’,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8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