넝마주이들과 새로운 꿈을 꾸다
[267호 편들고 싶은 사람] 강제 철거된 ‘넝마공동체’ 이옥단 부대표
대치동과 개포동 사이를 가로지르는 양재천 위에 영동5교가 있다. 부촌(富村)을 이어주는 다리 밑에는 헌옷과 폐품을 수거하며 사는 넝마주이들의 아지트가 있었다. 윤팔병과 문영삼, 송경상 등이 부랑아와 출소자 20여 명과 함께 자활 공동체를 표방하며 1986년에 시작한 ‘넝마공동체’는 1987년 그곳에 터를 잡아 27년간 노숙자, 출소자, 도시 빈민 등 오갈 데 없는 이들을 누구나 받아주었다. 다른 넝마주이 집단과 달리 이곳에서는 왕초의 착취가 없었고 누구나 일한 만큼 벌 수 있었다. 열심히 모은 헌옷 수백 벌을 외국인 노동자나 북한 주민들을 위해 내놓기도 했다. 그렇게 나눔의 정신과 민주적 운영을 추구했던 이곳을 거친 넝마주이의 수가 3000명이 넘는다. 차츰 사회적으로 단체의 공익성이 알려졌고, 설립자 윤팔병 선생은 ‘아름다운 가게’ 공동대표를 역임(2004~2010)하기도 했다.
민주화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희년사회 등 21개 단체로 조직된 토지주택공공성네트워크는 서울시 인권위원회에 강남구가 넝마공동체를 강제 철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인권 침해에 대해 조사를 신청했다. 12월 28일 서울시 인권위원회는 인권 침해가 인정된다며 강남구가 넝마공동체에 사과 및 재발 방지를 약속하라고 권고했다. 또한 임시 거처 마련과 항구적인 주거 대책도 강구할 필요가 있다고도 덧붙였다.
추운 새벽 내복 차림으로 쫓겨나 찜질방이나 경찰서 민원실, 교회나 지역 청소년보호센터 등을 전전하고 있는 넝마공동체 회원 20여 명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모든 사람을 빚진 자의 마음으로 대한다”는 윤팔병 선생의 나눔 정신에 감명을 받은 이옥단 부대표(55)도 그 중 한 사람이다. 12월 27일 서울 대치동 ◯◯아파트 앞에서 이옥단 부대표를 만났다. 신연희 강남구청장의 자택이 있는 아파트 앞에서, 이 부대표는 20여 명의 넝마공동체 회원들과 함께 연일 집회를 열고 강제 철거 과정의 인권 침해에 대한 사과와 자신들의 주거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었다.
같이 집회하는 분들 대부분이 나이를 드셔서 조금만 추우면 손발도 얼고 몸이 굳는다. 구청장이 출퇴근하는 시간인 새벽이나 저녁에 나와서 하면 집회 효과가 더 클 텐데, 어쩔 수없이 따듯한 시간에 나와서 편하게 알리는 작업만 하고 있다. 중간에 못 견디고 들어가는 분들도 생긴다. 어제부터 강남구청 앞에서 1인 시위도 시작했는데 노인들이라 잘 하실 수 있을지 걱정이다. 우리를 담당하는 구청 직원이 너무 무자비하게 군다.
강제 철거로 힘들어져서 이탈한 회원들은 없나.
함께하다가 못 견디고 나간 분들도 있다. 하지만 당장 돈이 급해서 일하러 다니느라 시위에 못 올뿐 관계를 끊지 않은 분들이 많다. 계속 오가면서 먹을 것도 사다 준다.
넝마공동체를 어떻게 알게 되었나.
결혼하고 집안일만 하다가 2001년부터 바깥일을 시작했다. 여성 속옷 방문 판매를 했는데 같이 일하던 사람을 통해서 왕초(윤팔병)를 알게 됐다. 일평생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살아오신 분이더라. 그 후로 힘든 일을 겪으면 영동5교 밑에 와서 머물다 가기도 했다. 같이 일하던 언니가 있어서 자연스럽게 꾸준히 오가게 되었고 사정이 많이 어려워지면서부터는 더 자주 오게 됐다. 처음엔 넝마공동체라는 이름도 몰랐다. 그냥 다리 밑에서 어려운 사람들이 지내는 곳으로만 알았다. 살러 오면 어떨까 싶다가도,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고 있어서 쉽게 결정을 못했다. 지금은 아이들이 다 커서 (넝마공동체에 들어오기로) 단호하게 결정했다.
본격적으로 함께한 건 언제부턴가.
올해 초부터다. 이제는 여기가 내 집이거니 하며 살고 있다.
자녀들은 어머니가 넝마공동체에서 일하는 걸 어떻게 생각하나.
우리 딸은 모른다. 미국으로 시집보내고 나서 통화도 잘 못한다. 여기서는 딸 생각할 겨를이 없다. 다른 일 했으면 매일 딸 생각이 났을 거다. 대학생인 아들은 외갓집에서 지내고 있다. 얼마 전 여기서 생일을 맞고 이틀 후에 아들 보러 갔더니 엄마랑 미역국 끓여 먹겠다고 미역이랑 쇠고기 사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더라. (이 부대표는 지난 6월 재미교포와 결혼한 딸 이야기를 하다 눈시울을 붉혔다.)
부대표 직함은 언제부터 가지셨나.
7월 이후다. 그 전까지 위원장이 일을 맡아서 하다가 강남구에서 우리를 쫓아내려고 압박해서 조직을 재정비했다. 많은 사람들이 윤팔병 님을 대표로 아는데 대표는 김덕자 님이다. 우리는 윤팔병 님을 ‘왕초’라고 부른다.
헌옷이나 폐품 수거 사업이 정지된 상태일 텐데, 현재 넝마공동체 운영은 어떻게 되고 있나.
원래 월 회비 1만 원씩 내면 6개월 정도 함께 먹고 살수 있다. 그렇게 지내다 떠나는 사람도 있고, 남은 사람들에게는 일할 힘이 생기면 같이 일해 보자고 권한다. 지금은 이렇게 돼서 몇 달째 일을 거의 못하고 있다. 왕초가 현금을 운영비로 많이 내놓으신다. 여기 머물렀던 사람들이 이것저것 갖다 주기도 하고 5만 원, 10만 원 후원하기도 한다.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자유로운데 공동체 결속력은 어떻게 유지되는지 궁금하다.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은 붙잡지 말라’가 왕초의 주장이자 공동체의 정신이다. 오늘 새 사람이 들어와도 똑같이 대우한다. 잘 데 없으면 같이 자고 먹을 것 없으면 같이 먹는다. 최근에 새로 들어온 사람은 없다. 오면 시위해야 하니까. 돈은 안 벌고 시위만 하는데 누가 오려고 하겠나. 상황이 정리되면 옛날에 함께한 사람들, 오가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길 바란다.
윤팔병 선생은 요즘 자주 찾아오시나.
저녁에 가끔씩 우리가 자는 곳으로 온다. “어떻게 지내냐. 돈은 있느냐” 묻고, 돈 떨어졌다고 하면 통장에 넣어 준다. 어느 날 통장 정리 한 번 하면 200만 원씩 들어와 있다. 돈 받을 적마다 마음이 아프고 감탄한다. 내 것 안 아까운 사람이 어디 있나. “자, 생활비로 써” 하면서 주는데 최하 100만 원이다. 왕초 나이가 73세다. 그 나이 되어서 돈을 그렇게 서슴없이 내놓는다는 것은 오랜 세월 그렇게 해 왔기 때문 아니겠나. 예전에는 현금으로 줬는데 얼마 전부터 내가 통장에 넣어달라고 했다. 그래야 기록으로도 남고 나도 편하니까. 강남구에서 왕초한테 변상금을 1억 넘게 물어서 집이 저당 잡혔다는데도 우리 운영비 대 주느라고 3000만 원이나 대출받았다. 왕초는 모든 사람을 ‘나는 이 사람에게 무슨 빚을 졌을까’ 하는 생각으로 대한다고 했다. 거짓말 같지만, 어려운 사람만 만나면 자기가 그 사람을 먹고 살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더라. 그래서 내가 “왕초 님은 하나님만 믿으면 짱이네” 그랬다. 왕초가 “내가 하나님은 믿지!” 그러더라. 말로만 말고 더 자세히 믿으라고 하면, 자기는 원래 무신론자라고, 많은 목사들, 믿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신뢰를 못 줬다고 했다.
원래 부천 쪽에 있는 조그만 순복음교회를 다닌다. 그런데 교회를 한 달 이상 안 나가고 있다. 탄천운동장에서는 감금되어서 갈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난감한 부분이 있어서 안 간다. 시위에 참여하지 않는 넝마공동체 식구들 중에 우리 교회 다니는 분들이 몇몇 있다. 교회 가면 그분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물어볼 텐데, 대답하기 곤란한 면도 있다. 우리 교회 목사님은 이런 일에 앞장서지 말고 조용히 신앙생활하면서 지내면 안 되냐고 하신다. 교회 봉사도 좀 했으면 하시고…. 사실 내가 처녀 시절에 신학을 하고 전도사 사역을 잠깐 했다. 나중에 청소년 사역을 하고 싶었는데, 지금은 넝마공동체 일을 열심히 해서 여기에서 뭔가를 이루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이것도 일종의 특수 사역인 것 같다.
신학 공부는 어떻게 하신 건가.
고등학교 때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교회에 충성 봉사하는 일꾼이었다. 정규 대학 가는 걸 마다하고 신학교를 갔으니 지금 생각해도 엉뚱했던 면이 있다. 인천에 있는 장로교 총회 인준 신학교였다. 20대 초반에 전도사 사역을 잠깐 했는데 그만두면서 나이가 4,50 되면 다시 사역을 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재정적으로도 준비가 되는 듯해서 좀 더 있다가 기도원을 세우고 싶었는데 일이 잘 안 풀려서 넝마공동체로 오게 된 거다.
전도사 사역은 왜 그만두신건가.
어느 날 남자 성도님 한분이 돌아가셨다. 그때는 목회자가 돌아가신 성도님의 염을 해야 했다. 그런데 담임목사님이 나에게 “이 전도사, 여 성도가 돌아가시면 여자 전도사가 염을 해야 돼”라고 하시는 거다. 그게 너무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사모님이 직접 염을 하시는 다른 선배 목사님 교회로 옮겼다가 결혼하면서 자연스럽게 사역을 그만뒀다. 나에게는 목회보다는 봉사 쪽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어린 학생들 돌보는 게 참 좋았다. 그런데 결혼한 여 성도들이 교회에서 뭘 하기가 어렵지 않나. 지금은 사역을 그만둔 게 후회된다.
예수의 사랑과 넝마공동체의 나눔 정신
어떻게 보면 골수 기독교인이시다. 아까 넝마공동체 일을 열심히 하는 게 특수 사역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도 하셨다. 넝마공동체가 기독교 색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윤팔병 선생도 기독교인이 아닌데 여기 활동과 신앙을 어떻게 접목하시는지.
예수님의 사랑, 나눔은 절대적인 것 아닌가. 나는 왕초와 넝마공동체의 나눔 정신이 와 닿아서 머물게 됐다. 나이 들어가면서 노후의 삶을 더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일반 사람들은 7,80 되면 고독하게 살아야 하지만 우리는 함께 살지 않나. 사실 여기 들어오기 전에는, 산중에 누구든지 와서 먹고 자고 기도하고 돌아갈 수 있는 기도원을 세우는 게 노후의 꿈이었다. 그런데 건설 쪽으로 투자를 잘못해서 지금 이렇게 됐다. 내 재산은 잃었지만 넝마공동체에 와서 새로운 꿈이 보이는 것 같다. 나중에 넝마공동체가 새로 땅을 받게 되면 거기에 예쁜 예배 공간을 만들어서 넝마공동체 식구들과 함께 믿음 생활하고 소망을 품으며 살고 싶다.
그런데 최근에 우리 식구들이 교회에 대해 실망한 일이 있었다. 몇 달간 함께 지냈던 목사님이 있었는데, 탄천운동장으로 옮겼을 때 자기 마음대로 비닐하우스 한 동을 예배당으로 꾸며서 마찰을 빚다가 떠났다. 거기가 안정된 공간도 아니고, 상황도 좋지 않은 때에 자기 마음대로 그렇게 하니 사람들이 싫어한 거다. 최근에는 그분이 세곡동으로 간 사람들과 사진도 찍고 접촉하는 것 같더라. 나는 그 목사님한테 “목사님, 왜 믿음 없는 분들 입에서 ‘우리에게 교회는 필요 없다’는 말이 나오게 합니까. 목회가 하시고 싶으면 깨끗하게 나가서 하세요”라고 말했다. 지금 여기에는 기성 교회가 아니라 그저 함께 모여서 예배하고 치유받을 공간이 필요할 뿐이다. 우리 일 도와주고 있는 초대 총무 송경상 이사님도 기독교인이다. 송 이사님하고도 아직은 예배당 세우는 건 고려하지 말자고 했다.
윤팔병 선생 의견은 어떤가.
왕초는 무신론자다. 하지만 영동5교 밑에 있을 때도 주일날이면 헌옷 고르는 공간에 둘러앉아서 예배를 드렸다. 넝마공동체 안에 교인들이 많다. 권사도 있다. 나는 넝마의 나눔 정신을 잘 살리면서 모든 이들이 넝마공동체의 주인이듯 모든 이들이 주인인 교회가 생겼으면 한다. 하지만 당장 예배당을 세우거나 교회를 시작하는 것은 덕이 되지 않을 것 같다. 나중에 공동체가 바로 섰을 때 예배 모임을 따로 만들든지, 목사님을 모셔오든지 하면 좋을 듯하다.
혹시라도 넝마공동체에 신앙 있는 분들 중 출석 교회에서 소외되거나 어려움 겪는 분은 없나.
그런 분은 별로 없는 것 같다. 큰 교회를 다녔더라면 그런 소외감 같은 걸 느낄지도 모르는데 대부분 작은 교회를 다닌다. 우리는 대부분 두꺼운 단벌 외투를 입고 다니는데 며칠 전 한 언니가 새 옷을 입고 나왔다. 교인이 몇 없는 교회를 다니는 언닌데 목사님이 자기 외투를 벗어 주셨다더라. 같이 시위하는 분들 중 반 정도는 기독교인이다. 다들 성실하고 봉사 정신이 강하다.
교회나 종교단체 쪽에서 도움을 주는 곳이 있나.
천주교빈민사목회에서 수시로 연락해서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보고 지원금도 보내 준다. 얼마 전에는 성신여자중고등학교에서 쌀을 200kg 넘게 보내 줬다. 아무래도 교회 쪽은 바라기 힘든 것 같다. 에큐메니컬운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교회가 아니라면 어렵지 않겠나. 이번 일 겪으면서 공동체 안에 우리도 여러 단체와 연대해야겠다는 생각이 커지고 있다. 공동체도 공신력 있는 자활 공동체로 거듭나야겠다는 필요를 느끼고 있다. 그래서 법인 등록도 했고 이모저모로 준비하고 있다.
법인 등록은 언제 한 건가.
10월인가, 11월인가에 했다. 왕초가 법인 대표다. 나도 법인 이사로 올라가 있다. 회원은 150명 정도. 넝마공동체를 거쳐 간 사람들이다. 삼십 년 가까이 왕초가 사비를 털어서 이끌어 왔다. 이제 결실을 좀 맺어야 할 때가 아니겠나. 왕초 연세도 있고 언제까지 왕초를 의지할 수 없고…. 이제 우리가 공동체를 잘 키워서 그분이 외롭지 않게 해야 한다. 그분이 다져놓은 걸 토대로 넝마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덕을 끼치고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는 그런 공간이 되길 바란다.
인간적으로 보면 완전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우리나라에 고령자가 많아졌고 그분들 중에 우울증으로 괴로워하는 분도 많다. 나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외로움을 느낀다. 여기 언니들 얘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슬프다. 다들 살아온 사연이 슬프다. 나도 때로는 의견이 안 맞아 답답하면 화를 내기도 하고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다. 내가 조금만 더 이해하고 더 하나님 말씀에 부합해서 살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텐데…. 어떤 때는 그만두고 싶어서 며칠 빠지기도 하는데 언니들이 연락해서 돌아오라고 한다. “네가 일을 안 하면 누가 하냐. 지금 그만두면 우리가 그동안 고생한 것 다 허사로 돌아가지 않느냐”라고 말한다. 숙소에 가서 제일 늦게 잠드는데, 잠들기 전에 곯아떨어진 언니들 보면 가슴이 아프다.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고 소외당한 사람들인데…. 때로는 언니들 때문에 화가 나고 못된 생각이 들어도, 다시 생각해 보면 내가 더 감싸줘야 한다. 넝마공동체가 앞으로 잘 안정되도록 열심히 도와서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다. 일이 잘 마무리되면 다시 교회에 돌아가서 목사님에게 “목사님이 그렇게 반대하셨지만 이제 넝마공동체가 살 땅도 받았고, 저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조금 덜 힘들어졌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 믿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라고 말하고 싶다.
진행 및 정리 김은석 기자 warmer@gosc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