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적 정의'가 온다

[268호 편들고 싶은 사람] 한국평화교육훈련원 이재영 원장

2013-03-04     이종연

▲  한국평화교육훈련원 이재영 원장 ⓒ복음과상황 이종연

얼마 전 종방한 <학교 2013>의 여운이 짙다. <학교 2013>은 KBS 청소년 드라마 ‘학교 시리즈 다섯 번째’ 편으로 학교 폭력, 입시제도 폐해, 학생 인권, 교사 권위, 기간제 교사 문제 등 교육 현장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결론마저 미화하지 않은 제작진의 문제의식과 높은 작품성이 시청자들의 깊은 공감을 이끌었다. 드라마를 본 교사나 학생, 학부모라면 자연스레 ‘우리 학교’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이 모든 게 우리 교육 현장의 일그러진 자화상임을 알기 때문이다.

여기서 곰곰 짚어 보아야 할 두 가지가 있다. 작년 2월 6일, 정부가 발표한 ‘학교폭력근절종합대책’이 그 첫째다. ‘학교 폭력 가해자에 대한 엄정한 처벌’을 골자로 하는 이 대책은 근본적인 학교 문화를 바꾸는 데 실패했고, 그 후로도 자살 사건이 잇따라 발생함으로써 실효성이 없다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가해자에 대한 엄정 대처가 피해자의 죽음을 막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생각해 볼 것은 560만 명을 관객을 모은 영화 <레미제라블>이다. 죄인은 벌을 받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끝까지 장발장을 추격하는 자베르가 엄벌주의를 내세운 위의 응보적 정책과 닮은꼴이라면, 주교로부터 용서를 받고 그 또한 사랑과 용서로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장발장은 여기서 소개하는 ‘회복적 정의’를 닮았다.

2001년, 우리나라 최초로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 개념을 도입해 새로운 정의 운동을 펼치고 있는 한국평화교육훈련원(KOPI : Korea Peacebuilding Institute)의 이재영 원장을 1월 30일 남양주에서 만났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진정한 의미의 정의는 무엇일까.

- 드라마 <학교 2013>에 등장하는 학교 폭력, 학내 갈등이 곧 우리 교육의 자화상인 듯했다. 작년 2월에 정부가 발표한 ‘학교폭력근절종합대책’에 따라 폭력이 발생하면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자치위)가 열리고 조치 사항을 학교생활기록부에 기록하게 하는 내용도 드라마에 나왔다. 이 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나.

범정부 차원에서 학교 폭력에 대한 대대적 대책을 세운 것은 최초였다. 알다시피 그 내용은 엄벌주의 즉, 잘못한 사람을 엄하게 처벌하는 내용을 근간으로 한다. 폭력 사태가 벌어지면 가해 학생의 학교생활기록부에 기록해서 향후 취업이나 진학에 영향을 주도록 했다. 특히 사건이 발생하면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를 의무적으로 열도록 했는데, 이는 학교폭력이 곧 범죄라고 보는 것이다. 이로써 학교폭력은 5대 폭력(조직폭력, 학교폭력, 주취폭력, 갈취폭력, 성폭력)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접근이 사법적으로는 맞을지 몰라도 교육계에겐 치욕으로 남을 것이다. 학교가 더 이상 문제 학생들을 교육 혹은 변화시킬 능력이 없으니 사법기관에 넘기라는 판단을 사회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학생들에게는 ‘한 번의 잘못이 인생을 망칠 수 있다’고 경고성 멘트를 시끄럽게 날린 꼴이다. 하지만 엄벌주의가 범죄율을 떨어트린다고 과학적 통계로 증명된 적이 있나? 우리는 계속 더 강력한 처벌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만 들어 왔다. 사형제도가 있는 나라나 없는 나라나 범죄율이 별반 다르지 않고, 강력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강력한 처벌을 가하면, 더 강력한 범죄와 더 강력한 처벌만 생길 뿐이다. 가정이나 학교에서도 아이들을 강압적으로 다루는 곳일수록 더 폭력성이 높게 나타나는 게 현실이다. 그게 인간의 죄성이고 한계 아니겠는가.

- 그렇지만 가해자를 처벌 안 할 수는 없지 않나.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만이 과연 진정한 의미에서 정의가 성취되는 것인가?’라는 것이 회복적 정의가 던지는 질문이다. 회복적 정의에서는 그 처벌이 피해자를 온전하게 회복시키는 구체적인 의미가 있는지 아닌지가 중요하다. 가령, 어떤 학생이 친구를 괴롭혀서 학칙에 따라 교내봉사를 하게 됐다고 치자. 가해자가 운동장에 떨어진 휴지를 줍는 행위가 과연 피해자가 입은 정신적·물질적 피해를 회복하는 데 무슨 도움을 줄까. 이처럼 가해자 처벌이 피해자의 회복과 무관하게 이뤄진다면 그 처벌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또 그 처벌이 가해자의 반성을 가져올지도 의문이다. 그런데 오히려 피해 회복과 무관한 방식으로 처벌을 받고 있는 가해자들을 만나 이야기해 보면 다들 ‘억울하다’고 한다. 회복적 정의 입장에서 보면, 가해자 처벌도 교육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처벌 방식은 교육적이지도 않을뿐더러 자신의 행동이 무슨 해악을 끼쳤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강제적 책임만 억지로 지게 하는 식이다.

- 학교생활기록부에 기록이 남는다고 하면 가해자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을 듯하다.

지방 교육청의 경우, 전에 한두 건이던 행정소송이 최근에 엄청 늘었다고 한다. 자신에게 불이익이 올까 봐 가해자가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송으로 가면 가해자와 피해자의 갈등을 더 키울 뿐 아니라 비용과 시간도 많이 든다. 학교에서 폭력 사건이 났는데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행정소송까지 온 경우가 있었다. 원래 피해자가 요구한 합의금이 300만 원이었는데, 소송에 든 양쪽 변호사 수임료를 더하니 700만 원 가까이 들었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컸다.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그 비용이 피해자 회복을 위해서는 그 때까지 한 푼도 쓰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정부 정책의 또 다른 문제는, 기록을 남겨 취업이나 진로에도 영향을 주는 것이 일사부재리 원칙에도 어긋난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가해자가 미성년자일 경우 소년보호처분을 받았을 때 기록으로 남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치위가 열려서 학내 처벌을 받은 학생은 가해 정도로 보면 보호처분을 받은 가해자보다 죄질이 덜 나빠도 이중으로 불이익을 받게 된다. 정부가 헌법에 명시된 이 원칙을 모르고 이런 대책을 세웠다고 보지 않는다. 성난 민심을 가라앉히는 데 제일 빠른 게 엄벌정책임을 알았기에 그런 게 아닐까. 엄벌정책은 효율성이나 예방적 가치가 아닌 정치적 구호로서 정책 결정자들에게는 매우 손쉬운 처방책이다. 그러니 일방적으로 엄벌정책을 당장 시행하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처럼 굴 게 아니라 근본적인 대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 ⓒ복음과상황 이종연

- ‘회복적 정의’가 그런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있는가.

‘회복적 정의’ 개념은 실천이 앞서고 나서 이론을 정립한 독특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지금 학교 현장에서 교사들이 하는 질문을, 1974년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작은 도시 엘미라(Elmira)에서 먼저 한 사람들이 있다. 재세례파(아나뱁티스트)의 한 분파인 메노나이트교도였던 마크 얀치(Mark Yantz)와 데이브 월트(Dave Worth)가 그들이다. 그 둘은 그 지역의 보호관찰위원으로서, ‘잘못한 학생에게 벌을 주는 사법 시스템이 과연 정말로 학생들을 변화시키는가’ 하는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수십 차례 집을 턴 십대 용의자들이 사법 처벌을 받는 대신 피해자들과 직접 만나 합의를 보도록 하는 건의안을 판사에게 제안했다. 가해자들은 피해자들을 일일이 찾아가 사과하고 만족할 만한 처벌이 무엇일지 물었고, 봉사활동, 현금 배상 등으로 자신들의 행동에 책임을 졌다. 직접 찾아와 사과한 것만으로 용서한 피해자도 있었다. 그 결과 그들은 다시 마을로 돌아가 공동체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회복적 정의는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정의’가 무엇인지 근본적으로 정리한 결과물이다. 회복적 정의는 잘못을 한 사람에게 벌을 주는 ‘응보적 정의’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주변 사람과 지역 사회 등 어떤 범죄와 관련하여 영향을 받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전인적 회복을 추구한다. 뒤틀린 관계를 바로잡고, 해결 과정에 당사자들을 직접 참여시키며, 범죄로 인해 발생한 피해를 최대한 바로잡게 하는 일련의 모든 과정이 회복적 정의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 회복적 정의가 기독교에 뿌리를 둔 개념인가.

회복적 정의 개념의 뿌리에는 성경이 말하는 ‘샬롬’의 의미가 깔려 있다. 하나님의 샬롬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이 땅에 드러나는 아주 구체적인 영역이 회복적 정의인 것이다. 샬롬을 구성하는 두 축은 평화와 정의다. 자비, 사랑, 용서가 평화에 속한다면, 진실, 진리, 공정 등이 정의에 속한다. 평화와 정의는 상호 보완 관계이면서 긴장 관계이기도 한데 갈등이 생길 때, 정의를 추구하다 보면 관계가 깨지고, 관계를 지키기 위해 정의롭지 않은 일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시민사회가 정의를, 교회가 평화(특히 내적 평화)를 추구해 왔다고 본다. 그래서 시민사회에서 평화를 이야기하면 비현실적이라는 지탄을, 교회에서 정의를 말하면 은혜롭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는 게 아닌가 싶다.

- 회복적 정의 개념을 적용해 해석할 수 있는 성경 본문이 있나.

사실 성경은 회복적 정의의 자료집이나 다름없을 만큼 회복적 정의의 가치와 개념들이 많이 들어 있다. 마침 지난주가 세계 메노나이트 교회 공동예배주일이었는데 주제가 회복적 정의였다.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의 이야기를 회복적 정의 관점에서 재해석해서 나누었다. 모세의 법에 따르면 그 여인은 죽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간음을 혼자 하지 않았을 텐데 약자인 여인만 끌려 왔고, 그 여인을 죽임으로써 나머지 사람들은 깨끗하다고 손을 씻는 걸 정당화하는 게 당시 유대의 사법 시스템이었다. 잘 알듯이 그때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셨다. 그 말씀에 누구도 반응하지 못하고 모든 사람들이 떠나자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 말씀에 회복적 정의의 패러다임이 작용했다고 본다. 그 시대의 정의 패러다임에 따르면 그 여인은 죽어야 했지만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고 하심으로써 사회적 약자를 괴롭히고 권력 유지를 위해 법을 도구화하는 당시 사법 시스템 자체가 불의하다고 선포하신 것이다. 또 그 여인은 많은 사람 앞에서 용서를 받았기에 이후에 같은 죄를 지을 수 없었을 것이다. 모세의 법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처벌을 통해 이루려 했던 정죄와 낙인을 통한 정의가 아닌 새로운 정의가 세워진 것이다.

▲ ⓒ복음과상황 이종연

처벌의 목적은 두 가지다. 과거에 대한 반응과 미래에 발생할 문제 예방이다. 죄에 대한 처벌에만 집중하면 원래 처벌을 통해 얻고자 했던 가치가 묻히기 쉽고 가해자는 반성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질 처벌과 비난을 최소화하려고 할 뿐이다. 따라서 응보적 정의의 시제가 과거라면, 회복적 정의의 시제는 미래에 있을 수밖에 없다. 나는 회복적 정의에 깔려 있는 신학을 교회가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율법이 완성되었다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 유감스럽게도, 오늘 한국교회가 ‘정의’를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교회에서 벌어진 불법한 일들을 처리하는 과정을 보면 과연 교회가 정의를 말할 자격이 있나 싶다.

물론 과거나 현재의 교회 행태를 보면 한국교회가 사회에 사죄할 부분도 있다. 그렇지만 외부에서 강요해서 하는 사죄는 오래 가지 못한다. 반성 운동 자체보다는 교회의 패러다임이 변할 때 자연스럽게 근본적인 사죄의 필요도 생겨날 거다. 이전까지 교회가 내적 평화를 강조해서 순응적인 교인들을 많이 만들었다면, 이제는 정의를 가르쳐야 한다. 주일 성수, 십일조를 안 하면 심판이 따른다고 가르치고, 술 마시고 담배 피우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식의 죄책감이 들게 만든 것은 그 바탕에 응보적 정의의 하나님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근본적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훼손하지 말라는 것이었고 그 사랑을 유지하고 싶어 하신 하나님 방식의 표현이었다. 그런데 만약 한국교회가 할 것과 하지 말 것을 강요하며 마치 (율)법을 지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인 것처럼 가르친다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근본적 동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우리가 벌을 피하기 위해 선을 행해야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오직 사랑을 통해 율법은 완성될 수 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법에 대한 이해의 핵심이다. 만약 하나님이 응보적 하나님이라면 인류는 이미 존재하지 않아야 맞지 않나. 누가 뭐라 해도 기독교인은 용서받은 사람으로서 용서하는 화해의 직분을 받은 사람들이다.

자크 엘륄은 폭력이 발생하면 그 책임은 이 땅의 모든 기독교인에게 있다고 보았다. 기독교인이 하나님께 중보하고 애타게 화해와 평화에 매달리지 않았기 때문에 악이 생겼다고 보는 것이다. 회복적 정의도 마찬가지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가해자를 정죄함으로써 ‘나는 깨끗하다’고 할 게 아니라, 그 문제를 우리 공동체의 문제로 보고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를 돌봐야 한다. 그것이 교회의 할 일이다.

- 성경적인 개념을 바탕으로 일반 사회에서 활동하는 데 제약이 있지는 않나.

물론 종교 관련성 때문에 불필요한 오해와 편견을 사기도 한다. 하지만 교육청이나 법무부와 함께 일하다 종종 놀랄 때가 있다. 그쪽에서 만든 문서에 “메노나이트 교도들에 의해 회복적 정의(사법) 운동이 처음 시작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기독교라는 이름 때문에 회복적 정의가 사회적으로 환영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회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문제이고 우리 기독교인의 문제다. 물론 지금 우리 단체는 종교성을 띠지 않고 활동하고 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열매’라고 알리는 것보다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 이 땅에 복수와 증오를 부르는 정의가 아닌 화해와 치유의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그러나 법치주의가 강한 한국 사회, 특히 사법계에서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을 듯하다.

사법학자들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가령, 이웃집 아저씨가 미성년자를 성폭행했는데 어떻게 회복적 정의가 이루어지느냐고 묻는다. 말도 안 되는 일인 거 맞다. 하지만 회복적 정의는 이런 사건이 터졌을 때, 가해자와 피해자가 어떤 생활환경에 노출되어 있는지 보는 게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반복해서 얘기하지만 가해자만 처벌한다고 악이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악은 창궐한다. 더 중요한 것은 피해자의 회복이다. 육체적․정신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받았음에도 결국 그 상처는 혼자 혹은 그 가족이 감당해야 할 몫으로만 남는다. 이런 상황을 모른 체하면서 정의를 외치면 세상이 나아질까. 나는 아까 요한복음 8장 말씀에서 보았듯이 예수님도 당시 법학자들과 싸웠다고 본다.

- 다른 나라의 경우는 어떤가.

영국에 헐(Hull)과 리즈(Leeds)라는 두 도시가 회복적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대표적인 예다. 두 도시는 슬로 시티(Slow city)처럼 회복적 도시(Restorative city)를 추구한다. 현재 도시 전체의 사법 시스템, 학교 교육, 비즈니스 영역까지 회복적 정의의 철학을 반영하자는 운동으로 확산되고 있다. 회복적 도시 운동은 비록 시작이지만 조금씩 전세계적으로 확장되는 추세다.

- 한국에서는 한국평화교육훈련원이 이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데, 단체를 소개해 달라.

2001년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KAC)에서 개최한 회복적 정의 워크숍이 회복적 정의 운동의 시작이었다. 이후 KAC에서 평화 분과가 분리되었고, 2011년 2월에 한국평화교육훈련원(KOPI)으로 발전했다. 법원의 화해권고위원으로 활동을 하다 보니 학교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따로 모아 봤자 그들이 돌아갈 학교 생태계는 하나도 변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운동의 방향을 학교로 돌렸다. 현재 각 지역의 청소년지원센터, 교육청, 청소년 유관 기관 등과 함께 일을 하고 있다. 학교에서 활동을 하다 보면, 가정과 지역 공동체의 변화도 절실하다. 그래서 KOPI의 모토는 ‘교육과 훈련을 통한 가정, 학교, 마을의 변화’이다. 현재 KOPI에는 원장인 나를 비롯해 연구원 3명과 인턴 연구원 1명을 포함한 5명이 일하고 있다. KOPI는 동북아평화교육훈련원(NARPI: Northeast Asia Regional Peacebuilding Institute)과도 협업하고 있는데 NARPI까지 합하면 10여 명이 활동하고 있다.

▲ ⓒ복음과상황 이종연

- 작년부터 여러 단체나, 언론이 이 운동을 주목하고 있고, 그래서인지 운동에 탄력이 붙었다는 느낌이 든다.

10년 넘게 이 운동을 해 왔다. 작지만 운동의 열매를 맺고 있는 듯하다. 각 지역 교육청, 학교 등에서 관심을 많이 보이고 있다. 교사 단체 중 한 곳은 올해 ‘회복적 학생생활교육’ 전담팀까지 꾸렸다. 그래서 내일 그곳에서 열리는 ‘평화로운 학교 만들기’ 간담회에 참석할 예정이다. 모레는 경기도 한 교육지원청이 주관하는 ‘회복적 정의에 기초한 평화마을공동체 만들기’라는 워크숍에서 강연을 한다. 또 다른 지역에서는 우리 연구원들의 강의를 들은 학부모들이 그 지역 학교에 ‘회복적 정의’를 주제로 교사, 학부모, 학생 모두 교육을 받게 해 달라고 먼저 요청한 일도 있다. 3년을 잡고 학급 운영, 마을 문제 등을 중심으로 시범적으로 운영해 보려고 한다. 이 외에도 몇몇 지역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상부기관부터 움직여서 상명하달식으로 공문을 돌리고, 의무적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하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는 걸 알아야 한다. 우리는 문제가 있는 곳에 가서 답을 주지 않는다. 회복적 정의의 패러다임을 소개하고 스스로 문제를 고민하고 답을 찾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을 키우는 일이 중요하다. KOPI 창립 후에 본격적으로 ‘회복적 정의 워크숍’을 시작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현재 입문 과정을 6회, 심화 과정을 2회까지 진행했다. 입문 과정을 시작으로 심화 과정, 트라우마 워크숍, 전문가 과정을 거치면, 학교나 지역 사회에 가서 교육도 하고 피해자-가해자간 회복적 대화 모임 과정에도 들어갈 수 있다. 교사, 지역 활동가, 학부모, 직장인, 목회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1회에 20~25명 정도 참여하고 있고 반응이 좋다. 관심 있는 분들은 홈페이지(www.kopi.or.kr)를 참고하면 좋겠다.

- 회복적 정의를 접하는 교사나 학생들의 반응은 어떤가.

교사들이 충격을 받으면서도 열광적으로 반응한다. 응보적 정의에 기초해 온 지금까지의 교육 패러다임을 바꿔야 하기에 충격을 받으면서도 새로운 패러다임에 공감하는 것이다. 특히 기독 교사들 중에는 모든 학생을 품지 못하고 교사가 먼저 놓아버린 학생들 얼굴이 떠올라 내적 갈등을 겪는 이들도 있다. 어쨌든 교사가 되는 과정에서 배우지 못한 생활 지도의 새로운 패러다임이기 때문에, 현실에 어떻게 적용할지는 숙제로 남는다.

- 학교에서 회복적 정의를 현실에 적용한 좋은 사례가 있다면.

회복적 정의 워크숍에 참여했던 교사가 학생들에게 회복적 반성문을 쓰게 했는데 결과가 좋았다. 기존의 반성문은 “잘못했다. 다음부터 그러지 않겠다”는 내용이 전부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해 학생은 그 순간을 모면하고 교사는 순간의 모면일지라도 학생의 각오를 받고 끝난다. 게다가 반성문은 주로 썼던 학생이 또 쓴다.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교사는 회복적 정의에 입각해, 반성문의 틀을 새롭게 구성했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왜 그런 일을 하게 되었나, 나의 행위로 누가 어떤 영향을 입었다고 생각하는가, 발생한 피해를 회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교사나 다른 학생들은 무엇을 도와주면 좋을까,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건 무엇일까” 등의 질문을 주고 반성문을 쓰라고 한 것이다. 가해 학생들의 태도는 물론이고 생각의 깊이도 달라졌다고 한다. 이렇게 질문 하나로 학생들이 달라질 수 있다. 교사가 재판관이 아닌 조정자가 될 때 이런 변화가 가능하다.

-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활동 방향과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올해는 위에서 말한 몇 가지 일들을 실험적으로 하는 데 주력하려고 한다. 또 사단법인 등록도 추진 중이다. 내년에는 회복적 정의 운동을 오랫동안 해 온 여러 기관을 교사와 활동가들과 함께 방문할 계획도 있다. 무엇보다 나는 이 운동이 교회의 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인은 가해자의 얼굴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범죄자이자 사형수였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우리 아닌가. 그런 식으로 자신이 바닥까지 내려간 신은 다른 종교에는 없다. 한국교회 청년들이 정말 중요한 자원이다. 말 잘 듣고 순응 잘하는 착한 기독교인만 키울 게 아니라 하나님의 평화와 정의를 삶의 어떤 영역에서든 이루어나갈 수 있는 이들을 키워야 한다. 교회가 이런 일을 응원하고 지지하기를 바란다.

진행 및 정리_이종연 기자 limpid@goscon.co.kr

회복적 정의 워크숍 입문 7기
일시: 2013. 3/23, 30, 4/1 (총24시간)
장소: 분당사회복지관
홈페이지: www.kopi.or.kr
페이스북: /korearj (회복적 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