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키운 건 8할이 아이들이다"
[269호 편들고 싶은 사람] 21년차 전업 주부 최유진
‘주부’와 ‘어머니’들의 고귀한 일상으로 말미암아 나머지 가족들은, 그들이 살아가는 이 사회는, 물질로 계산할 수 없는 편안과 평안을 얻는다. 그러나 모든 것을 돈으로 계산하는 사회는 그들의 노동과 일상을 부당하게 폄훼하고 버릇없이 무시한다. 폄훼와 무시의 발신처가 사회라고 하지만, 사회의 구성원이 바로 나 자신이고, 그래서 ‘주부’로 ‘어머니’로 규정되고 싶지 않은 사람도 나다. 이 아이러니는 무엇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을까.
그 숙제를 안고 날 풀리고 해 길어진 3월의 어느 날, 일산에서 최유진 씨(45)를 만났다. 대학 졸업 후 직장 생활을 하다 결혼해서 출산과 육아, 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는 그는 21년차 주부이자 어머니다. ‘커리어 우먼’ ‘슈퍼맘’이 되기를 바라셨던 어머니의 딸이자, 세 아이의 엄마, 대의를 위해 바깥일에 더 바쁜 착한 남편의 아내인 최유진 씨가 주부와 어머니의 평균적 일상을 산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다만 주부와 어머니로 살아가는 한 사람을 편듦으로, 우리 사회 모든 주부와 어머니를 편들고 싶었던 마음이 과욕은 아니기를.
“기억조차 나지 않는 10년의 주부병”을 앓고 나서 ‘소외’된 자들과 ‘소통’하는 꿈을 꾸게 된, ‘나를 사랑함’으로 나의 살과 피를 반복해서 내어주는 일상을 가꾸고 채색하고 있는 그의 삶을 만나며, 오시는 봄을 맞았다.
- 하루 일과를 나누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6시 정도에 일어난다. 7시까지 출근하는 남편이 나가고 나면 아이들 셋이 등교를 한다. 밥을 네 번 챙기는 셈이다. 시리얼이나 빵을 주기도 하고 못 챙기는 날도 많았는데(웃음) 요즘은 일찍 일어나서 챙겨 주는 편이다. 둘째 키우면서 몸과 마음이 다 힘들었고, 뒤늦게 본 막내가 어릴 적에는 고단해서 일찍 일어나지 못해 남편 식사를 못 챙기겠더라.
- 얘기만 들어도 피곤하다. 나는 절대 못 한다.(웃음)
다른 건 모르겠는데 세 끼 밥 꼬박꼬박 해 주는 게 정말 힘들다. 헌신적인 스타일은 아니라서 그런지 다른 주부들이 당연하게 여기고 잘 하는 걸 나는 잘 못하는 편이다. 사실 다른 엄마들 얘기 들어 봐도 다르지 않다고 하더라. 그래도 전에 비해 좀 더 잘 챙겨야지 하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철이 들고 있는 걸까.
- 그 다음 일과는?
청소, 빨래 같은 집안일을 잽싸게 한다. 30분 정도? 그러고 나면 하고 싶은 일을 한다. 책을 읽거나 피아노를 치거나, 아니면 누군가 만나러 외출한다.
- 30분 만에 집안일을 끝내는 내공이 대단해 보인다.
대충 해서 그렇다.(웃음) 주부들도 유형이 다 다르다. 집안을 쓸고 닦고 꾸미는 주부가 있는가 하면, 아이들을 잘 먹이는 데 힘을 쏟는 주부도 있다.
- 본인은 어떤 주부에 속한다고 생각하시는지?
나는 이기적인 주부다. (웃음)
- 그것도 좋다. 주부로 살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주부로 지내기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
대학 졸업 후 출판사에서 2년 반 정도 근무했다. 결혼하고 바로 임신을 해서 직장은 그만두었다. 이후로도 꾸준히 외주 편집자로 일했다.
- 혹시 언젠가 40대 중반의 내 모습을 그려본 적이 있다면?
막연히 마흔 넘으면 책 한 권 쓸을 줄 알았다. 돌이켜 보면 굉장히 막연한 꿈이었다. 그간 책 쓸 수 있는 형편이 안 됐지만 별 풍파 없이 살았어도 책을 쓸 수는 없었을 거다. 책은 기술이 아니라 삶인 것 같으니까. 해병대 훈련을 20년쯤 받은 듯한 지금은 책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책을 써야 할지, 뭘 더 공부해야 할지 감이 잡히고, 콘텐츠도 좀 쌓였다.
- 그래서인지 페이스북을 보니 책을 무척 좋아하시는 듯했다.
활자 중독(?) 같은 게 있다. 책을 좋아하시는 어머니 영향이 컸다. 어머니는 늘 사람은 스스로 교양을 갈고 닦아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일흔이 넘은 지금도 굉장히 많은 책을 읽으시고 주민센터에서 하는 영어회화 강좌를 6개월을 기다려서 수강하고 계실 만큼 향학열이 불타는 분이시다.
- 어머니의 기대가 컸을 것 같다.
진취적이고 자기 커리어를 쌓는 현대적인 여성, 그러면서도 육아와 내조를 잘하는 슈퍼우먼이 되기를 바라셨다.(웃음) 요즘도 가끔 “넌 왜 운전을 못하니?”라고 하신다. 딱히 운전할 필요를 못 느껴서 안 배우는 건데도 “너는 신여성이 아니다”라고 하신다. 학교 다닐 때 공부도 곧잘 했는데 왜 집안에 안주하나 싶으신 것도 같고. 어려운 형편에 대학에 입학했는데 부모님의 병환으로 도중에 중퇴해야 했던 과거가 어머니에게는 ‘한’으로 남아서 그런 듯하다. 동생이 음악 교사인데, 재수하고 음대에 가겠다고 했을 때 집에 돈이 한 푼도 없는데도 동생을 안 말리시더라.
-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면서 다시 직장 생활을 하실 생각은 안 했나.
연년생으로 첫째와 둘째를 낳고, 둘째 아이가 28개월 즈음 되었을 때 친구들과 출판사를 꾸렸었다. 그런데 한 달 만에 둘째 아이에게 자폐 성향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 서너 달 만에 그만두었다. 자폐는 24개월 전에는 잘 안 드러나서 발육이 늦다고만 생각하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잘 못한다. 어린이집 선생님이 전화로 얘기를 하시는데, 순간 ‘아, 이거구나’ 싶었다. 전에 이상하다 싶었던 일들도 떠올랐다. 아이들이 곧잘 따라하는 ‘곤지곤지’도 안 따라하고, ‘포인팅’이라고 해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봐야 하는데 보지를 못하는 거다. 자폐 성향이 있으면 음식을 이물질로 여기는 경우가 있는데 둘째도 김치나 싫어하는 걸 먹이면 토하곤 했다. 그런 중요한 지점들을 잘 몰랐기에, 큰 애랑 다르다고만 생각하고 놓친 것이다.
- 아무래도 둘째에게 손이 더 갔을 텐데, 상대적으로 첫째가 힘들어했을 듯하다.
맞다. 첫째 딸이 대학생인데 며칠 전에도 힘들다는 얘기를 해서…. “나도 막내처럼 응석부리고 싶은데 엄마, 아빠가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다”고 하더라. 지금 생각해도 안쓰러운 게…(눈물) 첫째 손을 너무 일찍 놓았다. 둘째랑 19개월 차이밖에 안 나는 아이인데…. 장애가 있는 둘째 손은 10년이 넘도록 잡고 다녔는데 큰 애는 어린이집에 보낸 이후로 손을 잡고 다닐 기회가 없었다. 늘 둘째가 우선이었고 똑똑한 첫째에게는 무엇이든 알아서 하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금도 큰딸이랑은 스킨십이 어렵다. 너무 일찍 어른스러워지길 바란 게 스트레스를 준 것 같다. 좀더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고, 평등하게 사랑해 줬어야 하는데…. 그나마 지금은 친구가 되어 가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 요즘은 남편들도 육아에 적극적인데, 그때는 남편과 육아를 분담하지는 않았나.
그런 생각을 못했다. 이 얘기하면 남편 흉을 봐야 하는데…(웃음). 남편은 정말 좋은 가장이자 남편이다. 결혼해서 지금까지 싸운 적이 거의 없고, 정신적으로 나를 전적으로 지지해 주는 사람이고 존경할 만한 사람이다. 그런데 딱 한 가지, 너무너무 바쁘다. 가끔 남편에게 내가 독립군 마누라 같다고 푸념할 정도다. 고등학교 교사인데 학교뿐 아니라 선교단체, 교육단체 등 여기저기에 몸담고 있고 많은 자리에 불려 다닌다. 대의를 위해 한 몸 바치는 사람은 가족을 외롭게 하는 것 같다. 지금도 그렇고 아이들 어릴 때도 얼굴 볼 새도 없이 바빴다. 남들은 같이 육아의 부담을 지자고 당당하게 요구하는데, 나는 그런 생각 자체를 못했다. 생각을 못했다기보다, 다른 사람에게 뭐든 요구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퇴근을 늦게 하거나 주말에도 출근을 하는 날이면 집에 와서 세수만 하면 지쳐서 쓰러지곤 했기에 안쓰러워서 바가지도 못 긁었다.
- 그래도 그렇지, 남편 욕 좀 하셔도 되겠다.(웃음)
사실 친구들과 출판사를 꾸리게 된 것도 아이 둘을 혼자 키우는 게 너무 힘들어서 우울증에 걸릴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집에서만 틀어박혀 있는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다. 소위 공부 잘했다고 하는 여자들은 집에서 아이들만 키우다 보면, 이러다 쓸모없는 인간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게다가 25살에 결혼해서 바로 임신, 출산을 했는데 지금 돌아봐도, 내가 아이들을 키울 준비가 안 됐었다. 성품이든 아이에 대한 지식이든 부족한 것 투성이였다. 아이들을 텔레비전 앞에 앉혀 두고 방에 들어가 혼자 울기도 하고. 우울 모드에 빠져서 애꿎은 아이들에게 잘못을 많이 했다.
- 힘드셨겠다.
솔직히 두 아이를 키운 10년이 생각이 잘 안 난다. 너무 힘들었기에 기억에서 자동 삭제가 되었달까. 일기라도 써 둘 걸 싶은데, 일기조차 쓸 수 없었다. 그래서 그때 어떻게 힘들었는지, 어떻게 극복했는지 구체으로 떠오르질 않는다. 단순하고 긍정적인 편이라 우울증 약 먹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실성한 사람처럼 살았다는 기억만 난다.
- 10년을 그렇게 살았다는 말인가.
서른다섯 살까지는 매일 내 밑바닥을 본 것 같다. 그때까지 사춘기를 앓았다고 하면 이해가 될까. 내가 누구인지, 내 성품이 어떤지 모르고 살다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나를 알아갔다. 대학까지 나온, 두 아이의 엄마지만 내가 덜떨어진 사람, 약한 사람, 온실 속 화초 같은 사람이구나 싶었고, 그간 내가 옳다고 여겼던 것을 전부 점검해야 했다. 엄마는 리더가 되어야 하는데 그 방법을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10년 간 깨닫고 또 깨달았다. 10년 간 바닥만 보노라니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그때부터 조금씩 회복이 되더라. 굉장히 힘들었지만 나의 ‘진짜 얼굴’을 마주한 시간이었다. 그 10년의 세월이 있었기에 마흔다섯이 넘은 지금에야 부모님과 정신적으로 이어져 있던 탯줄이 끊어지는 것 같다.
- 불필요한 가정일지 모르나, 혹시 아이를 낳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아이들을 키우면서 비로소 어른이 된 것 같다. 아니라면 지금도 응석받이로 살고 있지 않을까.
그런 면도 있을 거다. 그런데 내 경험으로는 사회생활을 하다가 어려움을 겪으면 피할 수 있지만 남편이나 자녀랑 부딪히면 피할 데가 없더라. 구석으로 몰리니 내 안에 있는 능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내지 않으면 암담한 현실이 타파되지 않았다. 직장 생활할 때, 자폐 성향이 있는 분과 단 둘이서 사무실에서 일한 적이 있다. 둘째를 키워 보고 나서야 사장 딸이었던 그 분에게 자폐 성향이 있었음을 알았다. 그 분은 하루 종일 혼잣말을 하거나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했다. 말을 걸어도 대답도 안 하고… 자기 세계에 갇혀 사는 사람이었다. 미쳐 버리는 줄 알았다. 누구라도 그런 사람과 일하기 힘들었겠지만 그때 나는 그 어려움을 피해 도망쳤다. 아마 다른 직장에 갔어도 어려운 일을 겪으면 회피했을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놀랍도록 강한 엄마가 되었다. 장애 아이를 둔 부모들은 무슨 일이 생겨도 별로 놀라지도 않는다. 장애아와 20년을 살아오면서 겪은 어려움, 아픔, 놀람 등을 통해 내공이 생긴 것 같다.
- 엄마들과 모임을 오랫동안 해 오고 계시던데, 어떤 모임인가. 엄마들이 이야기하는 공통된 어려움이 있다면?
아마 엄마들은 다들 그런 모임을 할 거다. 자녀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는 아무래도 엄마들도 초보라서 서로 응집이 잘 된다. 큰딸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시작한 모임은 13년째 지속되고 있다. 다들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은 분들이다. 공통의 어려움이라면 아이들은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거? (웃음) 내 욕심을 내려놓지 않으면 아이들을 절대 키울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다. 아이들은 부모 생각과 너무 다르다. 다들 어렸을 때는 내 자식이 천재인 줄 알지만 커 갈수록 마음에 안 드는 부분도 드러나고,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지 않나. 나도 아이를 나름 인격적으로, 자율적으로 키운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더라.
- 예를 든다면?
내가 너무 순종적이어서 우리 아이들만큼은 자기 주관이 뚜렷하길 바랐는데, 그만 소원이 이뤄졌다.(웃음) 주관이 뚜렷하면 매사에 부모와 충돌하게 된다. 가령, 첫째가 친구들이 다니는 교회에 가고 싶다고 해서 몇 달을 싸웠다. 아이를 존중해 주면 됐는데, 가족은 같은 교회에 다녀야 한다는 틀에 박힌 생각을 부모가 못 버려서 생긴 문제였다. 또 요즘 아이들은 초등학교 6학년 정도 되면 화장을 하고, 중학생이 되면 하이힐까지 신는다. 엄마 몰래 그렇게 하고 다니는 거 보면 깜짝깜짝 놀란다. 아이의 사고방식, 행동 패턴이 나와는 전혀 다르게 자유분방한 걸 볼 때마다 모범생으로 자란 나나 남편은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그렇지만 주관이 뚜렷하고 자기표현을 할 줄 아는 아이가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부모 마음에 안 들어도 자녀의 입을 막으면 안 된다. 그래야 아이가 자율적인 어른으로 자랄 수 있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기까지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 우리 사회에 남성주의가 강하다 보니, 자녀를 판단하는 기준도 획일적인 경향이 짙은 듯하다.
아이들은 다 안다. 부모가 겉으로 ‘사랑과 헌신’을 강조해도 속으로 ‘공부 못하면 넌 루저가 된다’고 생각하는 걸 말이다. 아이들은 영혼이 맑아서 눈이 날카롭다. 일단 일등을 한 다음에 사랑과 헌신을 하길 바라는 부모와 사회의 기만을 아이들도 다 안다. 사회를 향한 아이들의 냉소가 거기서 비롯하는 건 아닐까. 심지어 대학생이 됐는데도 아이들을 비인격적으로 대하는 부모를 볼 때, 그 아이가 사회인이 되어 겪을 진통을 생각하면 안타깝다. 내가 하나님과 가족에게 사랑받을 만한 존재라고 느끼지 못하거나, 존중받지 못하면 상대를 존중할 수가 없다. ‘내가 정말 쓸모 있는 인간인가’ ‘내 말이 누군가가 경청할 만한 말인가’에 대해 스스로 의심하게 되면, 사교육을 엄청 받고, 조기유학을 하고, 대단한 스펙을 쌓아도 아무런 쓸모가 없다. ‘내 안에 잠재된 능력을 끌어내서 쓰는 능력’이 가장 중요한 능력이더라. 그 능력은 ‘존중받음’과 ‘스스로를 믿는 믿음’이 바탕이 될 때 힘을 발휘한다.
- 부모의 재력으로는 채워줄 수 없는 그런 부분이 일상에서 드러나는 듯하다.
일상이야말로 소홀해지기 쉬운 장이다. 마이클 프로스트의 《일상, 하나님의 신비》를 읽다 보면, 주님이 예배당뿐 아니라 부엌에, 화장실에, 집안 곳곳에 계시고, 아이들이 성적표를 받아온 날에도 함께 계신다는 걸 알게 된다.(웃음) 오스왈드 챔버스도 《주님은 나의 최고봉》에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24시간 단조롭고 지루한 일상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존재로 계속 살려면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굉장한 통찰이다. 일상에서 깨어 있을 수 있다면 별난 데 가서 주님을 찾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이 가정이지만, 또한 은혜를 전혀 발견할 수 없는 곳도 가정일 수 있다.
- 일상의 영성을 지키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다는 데 동감한다. 그럼에도 어떻게 늘 깨어 있을 수 있을까.
기독교인이니까 ‘기도’라고 대답해야 할 것 같은데(웃음) 나는 글쓰기, 일기 쓰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이들 키우면서 너무 힘들어서 일기도 못 쓰다가 2004년부터 일기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일기도 글쓰기의 연장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걸 통해 내가 어디쯤에 서 있는지, 내 영성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 볼 수 있었다. 당연히, 독서를 통해서도 나를 들여다볼 수 있다.
주부라는 자리는 정신 차리고 살지 않으면 너무 익숙한 나머지 고인 물에 잠길 수 있는 자리다. 정체되어 버리는 것이다. 고인 물을 흐르게 하는 일이 가장 어렵다. 능동적으로 가족에게 사랑을 주고, 가족들이 우리 집에서 창조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느낄 수 있다면 그런 주부가 최고가 아닐까. 그러려면 주부 자신이 성장하고 공부해야 한다.
부모가 성장하지 않으면 자녀들에게 보여 줄 게 없다. 아이가 태어나면 젖을 물리는 것부터 시작해 성장 단계에 따라 부모의 역할도 계속 변한다. 그런데 자녀가 사춘기에 접어들면 그때부터 성장을 멈추는 부모가 태반이다. 자녀가 외계인처럼 느껴진다고도 하는데, 자녀들은 변하는데 부모들은 변하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아이들을 인간 리모컨이라고 여기는 건지 시키는 대로 안 하면 부모들은 당황하는데, 아이들을 인격 대 인격으로, 어른 대 어른으로 대하고 생각해 주어야 한다. 헨리 나우웬은 ‘아이들은 손님’이라는 표현을 썼다. 손님이 내 마음에 안 들게 행동한다고 바로 교정에 들어가지 않듯, 아이들에게도 그래야 한다. 아이들은 가장 가까운 약자다. 부모가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는, 곧 그들이 사회에서 가장 소외당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알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
- 앞서 이제는 책을 쓸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셨는데, 혹시 이런 주제로 쓰실 생각인가.
맞다. 소외와 소통에 대해 좀더 공부해서 책을 쓰고 싶다.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우다 보니, 또 아이와 소통이 부족하다 보니 자연히 소외와 소통이라는 주제에 집중하게 됐다. 하지만 이는 비단 우리 아이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에서도 모두가 자기 말만 하지 않나. 나는 소통의 기본은 ‘나의 나됨’이라고 생각한다. 어엿한 성인인데 아무도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아서 우울증을 앓는다. 그런 사람들을 ‘이상한 사람’ 취급하지 않고, 마음의 병에 걸린 이들 곁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친구가 되어 주고 싶다.
둘째를 키우다 보니, 사랑에도 빈익빈부익부가 있더라. 부족함이 있는 이들은 우리가 먼저 다가가지 않으면 사랑받을 기회가 없다. 그런 사람들은 사랑받지 못해서 더 일그러지고 작아진다. 사랑을 주면 그들도 아름다워질 수 있는데…. 내가 ‘버스 이론’이라고 이름 붙인 이론이 있다. 언젠가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데 자폐 성향이 있는 총각이 버스에 탔다. 돌출 행동을 하던 그가 내리자 버스에는 ‘저 사람이 내려서 다행이다’하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사람들은 인생이라는 버스에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만 태우려 하는구나. 예쁘고, 착하고, 능력 있는 사람만 태우고 싶어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태우고 싶은 사람만 태우는 게 사랑이 아니라, 환영받지 못하는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게 사랑 아닌가. 보통 사람들은 ‘소외’를 ‘당한다’고 하지만, 내가 누군가를 ‘소외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소외와 소통에 대한 고민은 거기에서 출발한다.
- 자녀 양육을 하면서 도움받은 책이 있다면?
2008년에 에리히 프롬이 쓴 《사랑의 기술》을 20여 년 만에 읽었다. 저자는 모성애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비유한다. 대부분의 어머니들은 자녀의 안전과 생명을 보장하는 사랑(젖)을 줄 수는 있지만 삶의 달콤함과 삶 자체에 대한 사랑(꿀)을 주는 경우는 극히 적다고 한다. 집안 살림은 좀 엉망으로 해도 내가 내 삶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게 필요하겠구나 싶었다. 좀더 이기적으로, 좀더 재밌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2년 전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있다. 클래식을 좋아해서 친구들과 콘서트도 다니고, 혼자라도 사진 찍으러, 맛있는 것 먹으러 다닌다. 내 삶에 만족할 때, 아이들에게 행복한 얼굴과 삶을 긍정하는 모습을 보여 줄 수 있고,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착하거나 간섭하지 않고 그들의 삶을 존중할 수 있다.
- 자녀를 키우면서 자녀는 부모에게 어떤 존재라고 느끼셨을지 궁금하다.
영국 시인 워즈워드의 “무지개”라는 시에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표현이 나온다.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다”라는 서정주 시인의 시구에 빗대자면 나를 키운 건 8할이 아이들이다. 개성이 강한 첫째를 통해 세상이 여러 스펙트럼과 색채로 이루어져 있음을 배운다. 장애가 있는 둘째를 통해 약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고, 막내를 보면서 아이의 직관이 어른 못지않을 수 있음을 배운다. 가족은 한 사람을 다듬어 가는 모임이자 사회로 나아가는 계단 같다.
- 마지막으로 주부, 어머니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주부의 삶, 엄마의 삶은 어릴 적 머리로만 알던 성경 말씀을 몸으로 느끼는 삶 같다. 예수님이 마지막 만찬 때 “나의 살, 나의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하셨는데, 살면 살수록 예수님 말씀처럼 엄마는 나를 나누어 주어야 하는 사람임을 자각한다.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이런 뜻이었구나 깨닫는다.
진행 정리_이종연 기자 limpid@gosc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