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다시 성지순례를 생각하다

[272호 커버스토리 대안성지순례를 고민한다]

2013-06-28     김동문

“성지순례, 은혜로웠습니다.” “우리 목사님 설교가 변했어요! 이제는 성경이 느껴져요.” “설교하기가 재미있어졌습니다.” “이렇게 성경이 느껴진다는 것이 이상하기만 해요.”

이런 고백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정작 성지순례를 다녀온 이들 가운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아울러 “여기는 팔레스타인 지역인데 소매치기 등에 주의를 하셔야 합니다. 말도 걸지 마시고 상대하지 마셔야 합니다”라는 안내를 받으면서 성지순례를 하다 보면, 아랍인은 왠지 거북스럽고 불편한 존재로 다가온다.

“확실히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선민 이스라엘은 다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아랍인들과는 너무 쉽게 구별됩니다”는 식의 안내 멘트도 많이 듣는다. “아랍인들이 고통당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는 식의 판단과 해설을 접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 결과, 프로그램에 따라 성지순례를 다니다보면 아랍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강화되곤 한다. 그와 달리 상대적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과 애정은 커지곤 한다. 성지순례가 ‘친이스라엘 반아랍’ 정서를 자극하는 셈이다. 물론 무턱대고 이를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기존 성지순례의 관행에는 적잖은 아쉬움을 느끼고 있다. 이 글에서는 간략하게나마 성지에 대한 필자의 이해와, 조금은 창조적인 성경 문화 체험으로서의 성지순례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고자 한다,

성지, 거룩하게 구별된 땅 아닌 ‘성경의 땅’

성지순례를 다녀왔거나 꿈꾸는 이들이 적지 않다. 왜 그렇게들 가려고 하는 것일까? 성지순례 자체가 신앙의 성장과 유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성경을 깊이 느끼고 배우려는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성경 체험 학습 프로그램’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최소한 성경을 보는 안목이 변했다는 고백이 나오는 성지순례 여행이라면 좋을 것 같다. 특히 목회자들이나 성경 학도들에게 성경의 땅 답사는 나름 의미를 안겨줄 수 있다. 그러나 성지를 방문만 한다고 그런 의미가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성지순례로 인해 성경을 보는 안목이 눈에 띄게 변했다거나, 성경 읽기가 즐거워지고 설교가 재밌고 자신 있어졌다는 경우가 많지는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유가 뭘까? 차별성이 없는, 맞춤형이 아닌 정형화된 프로그램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기념교회 방문 중심으로 굴러가는 듯한 성지순례 프로그램을 보면, 10~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다른 변화가 없다. 목회자나 신학생이 가는 성지순례 프로그램과, 일반 신도가 가는 프로그램 사이에도 양자간 차별점이나 특성이 별로 없다. 이른바 성지순례객들은 몇몇 성지(유적지)를 방문한 추억과 감동을 말하지만, 성경을 역동적으로 관찰하고 읽어낼 수 있는 역량이 커진 것은 아니다. 순례 현장에서조차 ‘체험’보다는 지식 ‘주입’이나 정보 ‘전달’ 위주로 일정이 진행된다. 그러니 여행 상품으로서 성지순례 프로그램이 지니는 변별력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성지(聖地)는 땅 자체가 거룩하게 구별된 곳이라기보다 ‘성경의 땅’이라는 점에서 성지라 규정할 수 있다. 성지는 곧 ‘성경의 무대’인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가 성지일까?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하나님이 행하신 사역의 현장이 성지이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시던 그 사역의 현장이 성지이다. 셋째, 믿음의 선진들이 말씀을 듣고 반응하고 살던 그 무대가 바로 성지이다. 이런 장소들을 편의상 ‘특정 성지’(特定聖地)로 부르고자 한다. 성경에 그 장소 이름이 한 번 이상 언급되는 곳이다. 이 ‘특정 성지’들은 이스라엘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요르단은 물론이고 레바논, 시리아, 터키, 이라크나 예멘, 이집트 등도 모두 ‘특정 성지’로 가득한 땅이다.

그러나 성지의 개념은 이보다 더 넓어져야 한다. 그러니까 넷째, 성경의 말씀이나 사건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무대도 성지이다. 광야나 강, 산과 골짜기, 들판도 성경의 무대이다. 이런 성경의 무대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이름으로 언급되지 않기에 소홀히 여겨 무심코 지나쳐버리지만, 사실상 ‘특정 성지’ 이상으로 소중하고 중요한 장소들이다. 이런 장소들을 편의상 ‘불특정 성지’(不特定聖地)로 부르고자 한다. 불특정 성지들은 이스라엘 지역보다 인근의 이집트나 요르단 등에 더 많이 퍼져 있다.

이집트를 모르고 출애굽 과정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고, 모압, 암몬, 에돔과 길르앗, 데가볼리 지경을 모르고 가나안 정착 이후의 성경을 이해하기 어렵다. 아람과 앗수르, 바벨론 등을 모르고 소선지 시대를 풀이하기 힘들다. 그러나 기존 성지순례 프로그램은 여전히 이스라엘 중심이다. 성지에 대한 묵은 편견과 가나안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대한 오래된 곡해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너머의 ‘불특정 성지’로

“이제 여러분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거룩한 성지 이스라엘에 들어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성지 순례자들이런 흔하게 듣는 환영사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거룩한 땅’ 성지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성경의 무대 가운데 하나일 뿐 전부는 아니다. 가나안 땅의 한 부분이었던 이스라엘이 곧 가나안 땅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모세, 여호수아는 물론이고 선지자들을 통해 계속 말씀하시는 약속의 땅, 회복해야 할 땅은 오늘날의 이스라엘 지역만이 아니었다. 남으로는 애굽 하수(이집트), 북으로는 레바논과 헷족속의 땅(터키), 동으로는 큰 강 유브라데 하수(이라크), 서쪽으로는 대해(지중해)에 이른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창 15:18-21).

아브라함은 큰 강 유브라데 즉 오늘날의 이라크 남부 지역에서 출발하여 터키 남동부에서 시작되는 헷 족속의 땅과 레바논 지역을 지나 애굽 시내까지 이동하였다.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한 채로 밟은 땅의 경계가 당시 하나님께서 약속의 기업으로 주신 땅이었다. 모세와 여호수아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동일한 비전과 약속을 따라 움직였다.

“너희의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다 너희의 소유가 되리니 너희의 경계는 [남북으로는] 곧 [신] 광야에서부터 레바논까지와 [동서로는] 유브라데 강에서부터 서해까지라”(신 11:24)
“곧 [남북으로는] [신]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동서로는]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수 1:4, [ ]는 필자).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은 요단강 저편(서편)만이 아니었다. 오늘날의 이스라엘 지역만을 거룩한 땅, 약속의 땅으로 생각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그럼에도 성경을 읽는 이들이나 성지순례를 오가는 이들 중 다수는 현재의 이스라엘 지역만을 가나안 땅으로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가나안 땅의 범위를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다. 성경에는 가나안 땅의 경계를 말할 때 ‘단에서 브엘쉐바까지’ 혹은 다른 한편으로는 ‘가데스에서 하맛 어귀까지’로 표현하기도 한다. 또다른 표현으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서로 달라 보이는 이 표현들이 사실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가나안’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관용 표현이다. 가나안이 아주 비옥한 땅이어서 그렇게 표현한 것이 아니다. “젖”은 목축의 상징으로, “꿀”은 농경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집트의 경우 농경 중심의 문화이고, 광야 지역이 목축 중심의 환경이라면 가나안 땅은 농경도 할 수 있고 목축도 가능한 땅임을 소개하면서 사용한 관용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가나안 땅은 북으로는 오늘날의 레바논 남부 지역, 남으로는 이집트와 이스라엘 접경 지역, 동쪽으로는 요르단의 아라바 광야, 서쪽으로는 지중해에 접해 있다. 이스라엘 너머의 ‘불특정 성지’들이다.

성지순례가 단순히 성경의 무대가 되는 땅을 밟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은혜롭다”고 하는 차원에 머문다면 얼마나 아쉬울까. 성경의 무대 곳곳을 누비면서 성경을 더 깊이 느끼고 알아가는 ‘성경 체험 학습’ 여행으로 업그레이드될 수는 없을까? 그러기에 성지순례를 계획한다면 준비단계에서부터 차별화된 성지순례 프로그램을 찾아보아야 한다. 여행사에는 방문 장소를 묻기보다, 방문하는 장소가 방문하면 성경을 깨닫는 데 어떤 도움이 되는가를 물어볼 필요가 있다. 일정과 프로그램이 그 나라와 지역에서 성겨을 가장 깊이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인지, 또한 성경 혹은 성경의 배경/무대에 관해 어떤 오감(五感) 자료가 현지에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중요하다. 여행사를 선정할 때, 순례 여행 프로그램의 질을 따져보는 수고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는 성지순례 희망자들의 선이해가 그리 깊지 못하다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제대로 된 맞춤형 프로그램을 기획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컨설팅을 받아도 좋겠다.

‘성경 체험 학습’ 여행을 위한 몇 가지 제안

성지순례는 성경의 땅에서 성경을 느끼고 성경에 새롭게 눈 뜨는 체험 학습 여행이 될 수 있다. 이를 위해 몇 가지 제안을 나누고 싶다.

첫째, 성경은 입체적으로 읽어야 의미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성경에 나오는 사건은 지면을 많이 차지하면 중요하고 짧게 언급되면 덜 중요한 걸까? 어떤 면에서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은 너무 잘 알려진 것일 경우가 있다.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다. 성경 시대 사람들에게 공공연했던 그것이 우리에게는 감추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윤 목사님, 사무실 맞은 편 사거리 식당에서 만나요!” “예, 조 목사님. 그러면 3시에 그곳에서 봐요.” “그렇게 해요, 여기서 가면 차로 30분 걸릴 것 같네요. 그 시간에 교통 체증이 심하잖아요.” “알았습니다. 그러면 ‘그 때 그곳에서’ 뵙겠습니다.” 이 대화에는 분명한 시간과 장소가 나오지만 그 약속 시각과 만나는 장소가 언제, 어디인지는 아는 사람만 알 수 있다. 분명히 우리말 대화임에도 불구하고 제3자가 그 장소와 시간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성경을 읽을 때도 이 같은 일이 벌어지곤 한다. 장소 이름도 시간도 나오지만 어디이고 언제인지 모를 경우가 많다. 평면으로 성경을 읽었기 때문이다.

둘째, 현지 음식과 지역 특산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지에서 먹을 수 있는 토속 음식들은 성경 시대 사람들도 즐기던 것들이다. 그 음식에 얽힌 사연이나 맛을 즐기고 확인해보기 바란다. 이를 위하여 성경에 등장하는 지역 특산물의 목록을 지역별로 작성해보고, 방문 지역에서 확인해보자. 예를 들어 ‘헤브론 포도’ 맛은 정말 좋은지, ‘레바논의 백향목’은 어떤 면에서 최고의 나무인지, ‘싯딤 나무’는 언약궤를 만들 만한 어떤 특성을 지녔는지, ‘여리고 종려나무’ 열매는 다른 지역 종려나무 열매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밀 전병’과 ‘보리떡’은 어떻게 다른지, ‘말린 무화과 뭉치’는 얼마나 무겁고 영양가가 충분했는지, ‘쥐엄 열매’는 정말 맛도 영양가도 없는지 등 방문하고 싶은 특정 장소 말고도 우리가 직접 맛봐야 할 것들이 의외로 많다.

셋째, 정보의 홍수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직간접적으로 성지순례자들을 보면서 드는 아쉬움이 있었다. ‘성경의 땅’[聖地]을 찾아왔음에도 성경을 느끼지 못하고 성경을 보면서도 성지를 떠올리지 못하는 것이다. 초신자들의 모습이 아니라 신앙 연륜이 오랜 이들에게서 그런 모습이 발견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을 그저 눈으로만 읽어왔을 뿐 시공간 속에서 호흡하지 못한 때문이다. 열심히 졸다가 차가 정지하면 일어나 내려서 사진 찍고, 그리고 또다시 졸거나 자면서 이동하고…. 그러다 어떤 현장에 도착하면 그곳에 있는 건물이나 시설에 관한 정보를 열심히 듣고 메모도 하지만, 정작 연관된 성경 본문은 떠올리지 못한다. 성지 답사는 방문 현장에 온 몸의 감각을 모아서 성경의 사건이나 메시지가 왜 그렇게 선포되었는지에 집중해야 한다. 한 장소에서 수천 년 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건축 양식의 어떠함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과 연관된 성경의 무대에서는 그 시대의 전후 상황과 형편을 이해하면 되는 일이지, 예수님 승천 이후 수백 년 뒤에 무엇이 생겼고, 무엇이 지어졌는데, 그 건축 양식이 이렇고 저렇다는 식의 ‘정보’들에 너무 몰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넷째, 성경의 땅을 ‘두 눈 뜨고’ 돌아다녀야 한다. 바쁘고 피곤한 일정이기에 성지 순례객들은 다음 방문 장소로 이동하는 차안에서는 깊은 잠에 빠져들곤 한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일지도 모르겠지만, 눈감고 지나치기에는 성경의 땅에서 눈에 담아두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차창 밖에 펼쳐지는 현장들도 성경의 무대이며 저마다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저 듣지만 말고 질문을 던지기 바란다. 현지 안내자에게 귀 기울이되 끊임없이 스스로 질문하면서 ‘왜?’ 하고 묻기를 주저하지 말고, “이곳이 바로 그곳입니다”라는 식의 설명을 들었을 때 “왜 그 장소가 이곳이어야 했나?” 하는 물음을 던져야 하는 것이다.

다섯째, 현지 ‘지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은 역시 다르다. 성경 시대 지명이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으니 대단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현재 이스라엘의 지명은 이스라엘 독립(1948년) 직후에, 그동안 불리던 기존의 지명을 성경 지명으로 대대적으로 바꾼 결과이다. 같은 이름으로 불린다고 같은 장소는 아니다. 은평구 신사동(새절)도 있고 강남구 신사동도 있다. 성경의 무대에도 ‘같은 이름의 다른 장소’가 적지 않다. ‘벧세메스’ 같은 경우 고유명사로 일컫기도 했지만, 태양신전이 있는 곳이라는 본래 뜻대로 가나안 땅이든 이집트 땅이든 태양신전이 있던 곳은 다 그렇게 불렀다. 또한 시대에 따라 같은 장소인데도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뿐이 아니다. 같은 장소를 놓고도 자국민(본토인)이 부르는 이름과 다른 나라 사람들이 부르던 지명이 따로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지명이 뒤엉켜져 성경에 나타난다. 성지순례는 이런 차이들을 구별하는 땅 밟기[踏査]이다.

여섯째, 빠른 답사가 아닌 ‘바른’ 답사를 경험하는 게 중요하다. 성지를 찾은 이들 중에는 ‘이왕 온 김에 이것저것 다 보고 가자’는 바람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다. 모처럼의 기회를 선용하고자 하는 열의를 나무랄 뜻은 없지만 욕심은 욕심이다. 주마간산(走馬看山)도 정도가 있다. 체험이 없는 성지순례는 거품일 뿐이다. 바른 답사를 위해서는 지나친 욕심을 버리고 입장 바꿔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짧은 일정 중에 남들 가는 곳 다 가보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오히려 꼭 가야 할 곳을 가기 위해 남들 다 가는 곳을 포기해야 할 때가 있다. 남들 가는 곳도 다 가고 꼭 가야 할 곳도 다 간다는 욕심은 내려놓아야 한다. 이런 목표를 성취하려다가 여러 사람을 괴롭게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일곱째, 성지의 시공간 속에서 성경을 느끼도록 애써야 한다. 특정한 시공간 속에서 벌어지고 기록된 성경 말씀을 입체적으로 읽고 느끼려면 몇 가지 작은 수고가 필요하다. 그 수고 중에는 성경의 계절 이해하기, 성경 속 등장인물의 나이 고려하기, 성경 속 장소의 거리감 이해하기, 이동수단 고려하기 등이 있다. 그때 그 자리에 서서 성경의 배경과 무대를 찾으려면 성경의 특정 본문에 연관된 시대와 사건에 먼저 주목하여야 한다. 직접 관련이 없는 시대나 배경에 얽힌 이야기는 시간 여유가 있을 때 접근하도록 한다. 성지 방문은 성경의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만나는 경험이기에, 그 특정한 사건과 공간에 집중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성지순례는 타임머신을 타고 떠나는 과거로의 여행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먼저 특정 인종, 민족, 지역 주민, 종교인에 대해 쌓아온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이 예루살렘을 넘어 유대와 사마리아, ‘땅끝’ 갈릴리 그리고 그 너머까지 나아가는 삶이라는 걸 기억하면 좋겠다.

여덟째, 현지에서만 할 수 있는 여러 경험에 집중하자. 현재 그 땅에 살고 있는 이들의 삶을 체험하는 것도 유익하다. 차도 마셔보고, 현지 음식도 현지인들의 일상 속에서 접해보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하면, 현지의 치안 상황을 먼저 떠올리게 되지만 안전이 확보된 공간에서라도 현지인들과의 만남과 어우러짐은 필요하다. 이슬람 지역에서는 무슬림도 만나고 이슬람 사원도 접하면 좋을 것이다. 유대인 지역에서는 유대인 회당과 유대인의 일상 또는 종교 생활을 접해보는 것도 좋다. 이는 교과서가 아니라, 현장에서 직접 체험할 수 있는 현장 답사 여행의 특권이다.

아마도 이 글을 대하는 이들 가운데는, 필자가 강한 어조로 성지순례의 잘못된 관행을 속 시원하게 풀어낼 뿐 아니라 창조적 대안까지 제시해 주기를 기대한 독자들이 있었을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기존의 성지순례를 반대해도, 성지순례 현장의 여러 불편한 진실을 쏟아놓는다 해도, 기존 관행에 큰 변화를 줄 수 없다고 여겨 포기한 까닭이다. 말려도 갈 것이라면, 가서 조금이라도 좋은 깨달음과 체험을 얻고 오기를 바랄 뿐이다. 모처럼의 순례 여행이, 성경의 무대로 떠나는 발걸음이 온 감각을 통해 성경을 읽게 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지혜가 가득해지는 시간이면 좋겠다. 그저 땅만 밟고 오는 일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김동문
두 아들의 아빠이고, 한 아내의 남편이다. 1981년 캠퍼스에서 만난 IVF 안에서 다양한 배움과 섬김의 기회를 누렸다. 졸업한 이후 1990년 이래로 이집트를 시작으로 아랍 이슬람 지역 안팎에 살면서 아랍과 이슬람 그리고 성경을 알아가고 있다. 현재 인터서브코리아 사역자로 무슬림과 이주자에 대해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