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로 혁명을 꿈꾸다

[276호 편들고 싶은 사람] 혁명기도원 여정훈 원장과 북아현동 철거민 이선형·박선희 부부

2013-10-29     이범진

▲ ⓒ복음과상황 오지은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강제 철거 현장(뉴타운 1-3구역)에는 매주 수요일마다 예배가 드려진다. 철거 694일째였던 지난 10월 2일 오후 6시 50분쯤 현장을 방문했다. 몇몇 사람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농성장 부근으로 모여들었다. 길가의 한구석이 금세 예배당 모습을 갖췄다. 공사 자재와 박스 따위가 의자로 바뀌었고, 탁자에 흰 천을 씌우자 제법 거룩한 분위기가 흘렀다. 촛불 3개가 어둠을 밝혔고, 약 10여 명의 사람들이 촛불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앉았다.

예배가 끝나자 곱창 파티가 벌어졌다. 요리사는 철거된 지역에서 곱창 장사를 하던 이선형 (50)?박선희(49) 부부다. 함께 어울려 식사하고 흩어진 시간은 밤 10시. 사계절이 두 바퀴를 도는 동안 매주 예배가 드려졌으나, 부당하게 터전을 빼앗긴 철거민의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시간은 이들의 편이 아닌 듯했다. 결국 공사는 진행될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보상금은커녕 공사를 방해했다는 이유로 13억8천만 원의 소송까지 당했다.

이들 편에 서서 예배를 이끌어온 사람은 혁명기도원 여정훈 원장(29)이다. 예배 다음날인 10월 3일 서울 대학로의 어느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2년 동안 매주 수요일 북아현동 철거 현장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있다. 특별히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나?
지금 돌아보면 많은 게 우연이었다. 일부러 북아현동에서 시작해야지, 하고 시작한 게 아니었다. 2011년 노동절 전야제가 끝난 후 고대의 찬송 시와 말씀을 읽던 경험이 여기까지 이끌었다. 안병무 박사님의 《갈릴래아의 예수》를 읽으면서 우리가 믿는 믿음이 현장에서 어떤 영향력이 있는지 실험해보고 싶었다. 예수가 투쟁 현장에 있었던 분이듯, 현장에서 기독교적 의례들을 반복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고 싶었다. 신앙인으로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일이었다.

어떤 ‘현장 순례’의 과정을 거쳐 북아현동에 이르렀나?
명동3구역 재개발지구 ‘카페 마리’ 투쟁에 합류한 일이 시작이었다. 2011년 명동의 ‘카페 마리’에 용역이 급습했다는 말을 듣고 현장 집회에 참석했다. 그때 경찰들이 불법 집회라며 해산시켰다. 그러자 사회를 보던 분이 집회가 아닌 예배로 바꾸겠다고 했다. 마침 그때 내가 기타를 갖고 있어서 찬양 인도를 했다. 이후 시간이 될 때마다 현장 근처 향린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다음에는 중구 청계천로에 있는 여성가족부 건물 앞에서 농성하는 분과 기도회를 시작했다. 그분은 사내하청노동자로 성폭력 피해 사실을 회사에 보고했다가 오히려 부당하게 해직된 집사님이었다. 집사님이 말하길, ‘카페 마리’를 위해선 향린교회가, 재능교육 피해자들을 위해선 재능대책위가 나서서 예배를 드려주었는데 많이 부러웠다고 하더라. 그분과 연대하는 분들이 우리가 기도회를 해주길 바랐다. 정기적인 수요 기도회(예배)는 그때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말, 그 집사님이 복직되면서 해결됐다. 그다음 현장을 찾다가 여기 북아현동으로 오게 됐다.

여기 말고 다른 현장에도 가나?
반값등록금 관련 부흥회, ‘최저임금 만원 완전초집중대회’ 등에 참가하기도 했다. 시간당 최저임금(현행 최저임금은 4,860원) 1만 원을 요구하는 집회였다.

혁명기도원 여정훈 원장 ▲ ⓒ복음과상황 오지은

주로 사회 이슈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같다.
삶과 직결된 이슈들이다. 최저임금 이슈는 특히 더 그렇다. 실제로 내가 현재 최저임금을 받으며 생활한다. 그런데 살 수가 없다. 지금은 부모님 집에서 함께 살기에 그나마 인간다운 삶이 가능하지만, 월세를 내야 한다면 살 수 없을 것 같다. 

평소에는 어떻게 지내나?
기독교환경운동연대에서 간사로 일한다. 그러면서 틈틈이 대학원(성공회대)에서 신약학 공부를 하며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요즘 가장 재미있게 생각하는 일은 매주 목요일마다 진행하는 전통적 예배에 대한 세미나다. 예배의 역사와 전통,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문서와 책을 강독한다. 읽을수록 현대 교회가 좋은 전통들을 버린 것 같아 안타깝고, 예배와 기독교 정체성은 결코 분리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시위 현장에서 그런 전통적인 부흥회, 기도회를 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혁명기도원은 어떤 곳인가?  
나도 잘 모르겠다. 별로 하는 일이 없는 것 같다. 지금 북아현동에서 정기적으로 수요예배를 인도하는 것 말고는 하는 일이 없다. 여러 군데 이름을 걸고 있기는 하지만, 상근자가 있는 것도 아니다. 몇몇 사람들과 함께 시작했으나 멤버십 형태도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왜 하필이면 ‘기도원’인가?
수도원과 비교했을 때, 기도원은 공간이 더 중요해지는 느낌이다. 열린 공간을 만들어주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지 기도할 수 있게 하자는 의미에서다. 제주도 한라산에 가면, 수십 년 전 여성 두 분이 육지에서 건너와 세운 기도원이 있다. 이곳을 방문했을 때 영감을 많이 받았다. 기도원 원장님은 자신이 설교하지 않고 새로 온 사람에게 설교를 맡겼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환대와 신뢰, 열린 정신이었다. 수도원의 경우 내부인과 외부인이 뚜렷하게 구분되지만, 기도원은 그 경계가 흐릿하다. 누구나 올 수 있다.

“현장에 가면 놀라운 일치감을 느낄 수 있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목소리가 성경을 통해 선포되고, 기도하는 중에 그 고통이 어루만져진다”

게다가 왜 ‘혁명’인가?
사실은 당시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게 유행이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예수님께서 하려고 했던 것도 혁명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 이름을 바꾸지 않고 있다. ‘내란음모 혐의’ 논란으로 흉흉한 이때 누군가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시비를 걸어도 “이건 영적인 혁명을 말한다”고 대꾸하면 그만이다. 언젠가 혁명이라는 단어와 나라는 사람이 어울릴 날을 기다리는 의미도 있고, 바꾸기도 귀찮아서 그냥 두고 있다. 

 

▲ ⓒ복음과상황 오지은

얼핏 느끼기에는 ‘혁명’ ‘투쟁’ 등의 단어와 기도가 잘 어울리지 않는다.
현장에 가면 놀라운 일치감을 느낄 수 있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목소리가 성경을 통해 선포되고, 기도하는 중에 그 고통이 어루만져진다. 우리 기도원 모임에는 감리교, 장로교, 오순절, 성공회, 천주교 등 다양한 배경이 다양한 신앙인들이 참여한다. 현장에서 기도하면서 모두 하나가 된다. 나는 에너지가 적은 사람이다. 앞에 나서서 싸우는 게 힘들다. 그러나 기도는 할 수 있다. 예배는 드릴 수 있다. 

‘에너지가 적다’는 말을 했다. ‘기도원 원장’으로서 기도를 통해 에너지를 채우나?
그렇다. 초대교회로부터 유래한 성무기도를 한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도다. 이렇게 되면 하루를 아침기도, 낮기도, 저녁기도, 밤기도 등의 사이클로 구심점을 잡아 생활할 수 있다. 말의 기도가 아니라 삶의 기도로 삶을 꾸릴 수 있다. 이것이 나를 매일매일 기독교인 되게 한다. 기도를 하면서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새로고침’(reset) 한다. 전통 형식을 갖춘 기도를 하니 참 좋다. 이미 2천 년 동안 이어져 온 기도에 참여함으로 이전 세대와 다음 세대와도 함께 드리는 기도가 된다. 우주적 기독교로서의 연대감이랄까? 이 성무기도의 유래와 의미는 《시간전례》(가톨릭대학교출판부), 《중단 없는 기도》(IVP) 등에 잘 나와 있다.

북아현동 철거 현장에서 2년 가깝게 꾸준히 수요예배를 드리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겠다. 지치지 않고 지속하는 동력이 어디에서 오는지?
꾸준하게 해왔다는 게 꼭 칭찬받을 일은 아닌 것 같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수요예배를 빠지지 않고 간다. 우리는 현장에서 예배드릴 뿐이다.

철거민들에게는 큰 힘이 되겠다.
우리는 그분들의 수많은 필요 중 하나일 뿐이다. 현장에서 예배드리는 것 외에도 철거민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것들이 많다. 우리가 정당이나 전문 단체라면 그런 부분들까지 채워드릴 수 있을 텐데, 그렇게 못하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죄송한 마음만 커진다. 오히려 진짜로 투쟁하면서 매일 자리를 지키는 분들에게 빚진 마음이다.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등 일상적으로 해온 행위이기에 지치지 않고 지속할 수 있는 것 같다. 약자들의 편을 들어주던 많은 사회단체들이나 활동가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소진되고 패배감에 힘들어한다. 혁명기도원 방식이 새로운 모색이 될 수 있을까?
앞서 말했다시피 우리는 수많은 필요 중 하나의 모임이다. 큰일을 하지 않기에 큰 어려움을 당하지 않고 지속하는 걸 거다.(웃음) 혁명기도원의 활동 방식은 지치지 않는 방식이다. 적은 에너지로도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아현동 수요예배도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진행할 예정이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전통적인 예배 방식이나 틀을 싫어한다고 알려져 있다. 시위 현장에서는 어떤가?
개신교의 이미지가 사회적으로 좋지 않지만, 유명한 찬송가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익숙한 멜로디이기 때문에 그 찬양을 개사해 부르면 사람들이 다 따라 한다. 얼마 전에는 ‘예수 사랑하심은(날 사랑하심)’ 찬송을 개사해서 불렀다.

한 달 동안 일하고 팔십만 원 받으면,
공과금을 다 내고 남은 돈이 없도다.
최저임금 만원~ 생활임금 만원~
최저임금 만원~ 성경에 써 있네.

실제로 시위 현장에 가면 천주교에 경쟁의식을 느끼는 활동가들이 새로운 예배의 틀을 만들곤 하는데 안타까울 때가 많다. 우리 개신교 전통에서 통성기도라는 좋은 전통이 있지 않나. 우리의 틀을 거부하다 보니 다른 종교의 형식이 선망의 대상이 된 것이다. 전통 안에서 연대감을 충분히 누렸으면 좋겠다.

“특별히 위원장님은 이 투쟁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려는 일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며 세례교육을 받았고, 작년 4월 세례를 받았다”

그간 혁명이라 할 사건이 없었던 게 아니더라. 어제 곱창을 해주셨던 이선형 북아현동 철거민대책위원장이 수요예배 때 세례를 받았다고 들었다.
어제 봐서 알겠지만 철거민 중 위원장님 부부만 남아서 시위를 계속하고 있다. 함께 공사현장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이미 친한 관계가 형성되었고, 기독교를 새롭게 볼 수 있었다고 하더라. 특별히 위원장님께서는 “내가 하는 이 투쟁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려는 일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며 세례교육을 받았고, 작년 4월 세례를 받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위원장님께 직접 듣는 것이 좋겠다. 

사람들이 도와줬으면 하는 부분이 있나?
기독교환경운동연대(greenchrist.org)가 지구의 사막화 방지를 막고자 몽골에 나무를 심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보존하는 일이 곧 하나님의 선교라는 생각으로 많은 관심과 후원을 바란다. 환경, 정의, 평화는 다 연결된 문제라는 공감대가 사람들 사이에 형성되었으면 한다.

무엇보다도 북아현동 철거 현장에 자주 방문해주었으면 좋겠다. 위원장님 부부는 지금 생계를 이어가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곱창 가게가 다시 열리면 사용할 수 있는 상품권을 팔고 있다. 이 상품권을 많이 구매했으면 좋겠다.(구매문의:010-2300-9292, 이선형) 심정적인 지지는 표현도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위원장님 부부는 지금 적들에 둘러싸여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분들의 편이 되어주어야 한다. 

다음날인 10월 4일 북아현동 농성장으로 향했다. 여정훈 원장이 ‘편드는’ 이선형 위원장과 박선희 씨를 만나기 위해서다. 이선형 위원장이 시청 앞 1인 시위를 할 때는 박선희 씨가 농성장을 지키고, 나머지 시간엔 이 위원장이 온종일 머문다. 천막으로 만들어진 농성장은 한 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는 공간과 기초적인 생활 도구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 위원장은 여기서 먹고 잔다. 오늘로 696일째다.   

북아현동 뉴타운 1-3구역의 마지막 철거민(부부)이다. 투쟁 700일을 앞두고 있다. 여기까지 오게 된 상황, 괴롭겠지만 기억을 꺼내 본다면?
2006년 3월에 아현동에 와서 곱창 가게를 차렸다. 여기 오기 전에는 인천의 공구 전문 회사에서 10년 정도 일했다. 승진 코스를 잘 밟고 있었는데, 한계를 느껴 장어구이 체인점을 시작했다. 쉽지 않더라. 가게가 크고 장사는 잘 되는데 남는 것은 없고, 결국 빚을 많이 졌다. 그래서 온 곳이 여기다.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장어구이도 같이 하게 되면서 대박이 났다. 사실 곱창집보다 장어집으로 더 유명했다. 아내랑 열심히 일해서 빚도 갚아나가고, 형편이 좀 나아지는구나 싶었는데 재개발이 시작되었다. 제대로 된 보상도 받지 못하고 쫓겨나게 된 거다. 재개발조합은 보상금 2,400만 원을 준다고 했다. 그 돈으론 어디 가도 장사를 할 수 없다. 가게 세입자로 들어오는 데만 권리금 포함 7,000만 원이 들었다. 밖에 나앉을 순 없어서 대책위원회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결국 강제 철거를 당했고, 여기까지 왔다.

이선형 북아현동 철거민대책위원장과 천막 농성장(오른쪽) ▲ ⓒ복음과상황 이범진

모든 재개발 지역이 그렇듯, 이곳도 불법과 폭력이 난무했다고 들었다.
모든 과정이 다 반인권적이었다. 최소한의 법적 절차도 밟지 않은 철거였다. 세입자에게 약속된 보상금도 지불이 안 된 상태였고, 감정평가 역시 법적으로는 공개해야 하는데 하지 않았다. 개발조합에 몇 번이나 찾아갔는데 만나주지 않았다. 세입자들 8명을 중재해준다고 법원으로 오라고 해서 갔는데, 그 사이 건물이 철거됐다. 포클레인이 그대로 건물을 덮쳤다. 안에 아내가 있었다. 돌덩이에 깔리고 다리에 대못이 박혔다. 용역들은 그 상황에서도 안에 있는 사람들을 질질 끌어냈다. 법원에서 오는 길에 거의 실신상태로 주저앉아있는 아내를 발견했다. 그때야 응급차를 불러 병원에 갔다.

충격이 컸을 것 같다.
그때 우리 편은 아무도 없었다. 반인륜적 폭행이 벌어지고 있는데 경찰들은 보고만 있었다. 어떤 경찰은 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들이 거기 가만히 서 있음으로 폭력이 정당화되었다. 주민들은 무서워서 보고만 있었다. 아내는 아현동 40년 토박이다. 이웃들이 다 보는 데서 몸도 마음도 다 망가졌다. 재개발 허가권을 갖고 있던 구청, 최소한의 절차도 거치지 않은 철거를 허락한 법원, 모두 우리에게 등을 돌렸다.

당시 같은 입장의 세입자들도 매우 힘들었겠다.
20년간 고기구이집을 운영했던 어느 사장님은 쫓겨나게 된 날 새벽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폭력적인 철거 현장을 오히려 공권력인 경찰은 지켜보기만 했다고 했다.
용산 참사 때는 솔직히 철거민들 이해 못했다. 나도 세입자로 장사하고 있었으면서도 뉴스를 보면서 용산 철거민들 무서웠다. 폭도들 같고, 공격적으로 보였다. 망루에 올라 화염병을 던지는 모습을 방송에서 보고 너무 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이런 일을 당해보니까 철거민들이 이해가 되더라. 그 방법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생존을 위해서 목숨을 걸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불상사를 만든 건 공권력의 무리한 진압이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아직도 철거민들을 폭도로 알고 있을 텐데…, 절대 아니다.

어쩌다 대책위에 위원장님 부부만 남았나.
사실상 강제 철거당하면서 대책위는 깨지고 우리 부부만 남았다. 섭섭한 부분도 많다. 떠난 분들은 만족할 만큼은 아니지만 보상을 좀 더 받고 갔다고 하더라. 전 위원장은 마이크도 안 주고 가버리고, 밀린 회비도 내지 않고 아무 말 없이 간 사람도 있다. 조합에서 나에게만 찾아온 적이 있었다. 합의하자는 내용이었다. 나는 대책위 사람들과 일괄타결이 아니면 합의하지 않겠다며 의리를 지켰는데…, 결과는 이렇다.

“내 아내는 순복음교회에 다니다가 안 다니는 상태였고, 나는 무교였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와서 기도회를 해주는 순간에 마음이 참 편해졌다. 세상의 모든 분들이 나를 지지해주는 느낌을 받았다”

‘왕따’가 된 상황, 어떻게 견뎠나?
억울했다. 내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없는데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화가 났다. 그때 혁명기도원 사람들이 와서 기도회를 해줬다. 아내는 젊을 때 순복음교회에 다니다가 안 다니는 상태였고, 나는 무교였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와서 기도회를 해주는데 마음이 참 편해졌다. 세상의 모든 분들이 나를 지지해주는 느낌을 받았다.

700일 가깝게 투쟁하며 버텨 오기까지 혁명기도원이 어느 정도 힘이 되었나?
혁명기도원 사람들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다. 그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미쳤거나, 스스로 목숨을 버렸을 것이다. 가정도 파탄났을 게 분명하다. 과장이 아니다.    

수요일마다 예배를 드리면서 어떤 내적 변화가 온 것인가?
내가 이 자리에 철거민으로 앉아 있어야만 하는 이유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런 확신이 없었다면 원망과 불신만 마음에 쌓다가 홧병으로 죽었을 것이다. 나중에 가게를 다시 시작하게 되더라도 혁명기도원분들을 따라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고 싶다.

투쟁 700일째를 맞은 이선형 박선희 부부 ▲ ⓒ복음과상황 이범진

작년 4월에 세례도 받았다고 들었다.
작년 부활절에 농성장에서 아내와 함께 세례를 받았다. 교회 안 나가던 맏사위가 교회에 같이 다니니까 장모님이 참 좋아하신다. 우연인지 혁명기도원에 장모님이 다니는 교회와 같은 교단 목사님이 계셔서 그분께 세례를 받았다. 주일마다 아현동 달동네에 사는 장모님을 모시고 여의도순복음교회에 간다. 15년 된 낡은 차로 다니지만 해드릴 수 있는 게 생기니 뿌듯하다. 

세례 후 바뀐 점이 있었나?
하나님께서 나에게 철거민의 십자가를 안겨주신 것 같았다. 잘 메고 끝까지 견뎌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다시는 강제 철거로 쫓겨나는 사람이 없도록, 내가 이 시련을 극복해서 좋은 선례로 남아야 한다는 사명감이 생겼다. 이렇게 생각하니 용역들도, 세상도 겁이 나지 않았다.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는가 보다. 내가 비록 가게도 잃고 철거민 신세지만, 혁명기도원 사람들을 얻었으니 더 행복하다. 이분들 덕분에 하나님을 믿어 다른 세계에서 훨씬 큰 사랑을 누리며 살고 있다.

자녀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
큰아이가 아들이고 스무 살이다. 대입을 준비하는데 쉽지 않은 것 같다. 뒷바라지를 잘해줬으면 입학했을 텐데 미안한 마음뿐이다. 딸인 작은아이는 열여섯이다. 한참 사춘기 때라 걱정했는데 부모의 상황을 잘 이해해주는 것 같다. 여기 농성장에 있으면 딸 친구들이 인사를 하고 지나간다. 딸에게 참 고맙다. 아빠가 이렇게 하고 있는 게 부끄러워서 숨기거나 부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데, 친구들에게도 당당하게 말하니 고맙다. 장사할 때도 잘 돌봐주지 못했는데 지금은 더 미안한 상황이 되었다.

이틀 전 수요예배 때 “내일이라도 장사를 시작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라고 말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694일 동안 절망했는데, 다음날 희망을 본다는 것이 가능한가?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실 거라고 생각한다. 상황이 좋지는 않다. 생계 유지도 어렵고, 서울시 분쟁조정관에게 모든 걸 맡기고 개발조합과 대화를 시도했지만 결과물이 없었다. 그러나 인생 전체를 볼 때 어느 한 시점에서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결정되지는 않는다. 내일 당장 해결될 수도 있고, 더 오래 걸릴 수도 있다. 중요한 건, 하나님은 인생의 마지막 때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실 것이다. 하루하루가 고되지만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이 과정이 행복하다.  

용역이나 개발조합이 원망스럽진 않나?
용역은 사실 좀 무섭다. 다원이라는 악명 높은 용역회사 직원들을 폭행죄로 고소한 적이 있다. 바로 협박하더라. 10배, 20배로 갚아주겠다고. 해코지할까 걱정된다. 그렇다고 순응할 수는 없고.

조합은 거꾸로 나에게 소송을 걸었다. 나 때문에 2년째 공사를 못하고 있다며 13억 8천만 원 피해보상 소송을 걸었다. 당연히 조합이 졌다. 조합은 돈이 많으니까 ‘묻지마 소송’을 한다. 겁먹게 하거나 귀찮게 해서 쫓아내려는 술수다. 조합의 대응 태도는 늘 ‘얼마나 버티나 보자’이다. 내가 물러나면 조합은 또 자신감을 얻어 계속 불법을 저지를 것이다. 내가 끝까지 버텨야, 쫓겨나기로 예정된 수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조건으로 대우받을 수 있다.

그러나 용역과 조합을 원망하진 않는다. 둘 다 불쌍하다. 용역은 못된 짓 한다고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조합도 지금 와서 보면 희생양이다. 뉴타운 재개발 정책과 건설사의 감언이설에 속았다고 본다. 주민들도 개발되면 돈 많이 벌 줄 알고 끼어들고, 이렇게 한번 재개발이 결정되면 되돌리기가 힘들다. 뒤에서는 건설사가 다 조정한다. 조합은 꼼작 못한다. 원주민 조합원들은 시공이 안 되면 결국 쫓겨나게 되고, 건설사, 조합관리인, 그리고 뇌물 받은 정치인만 이익을 누린다.

투쟁하면서 전문가가 되신 것 같다.
알아야 뭔가 할 수 있겠더라. 인권 법률 단체도 사건은 많고 인력은 딸리고, 참 열악한 현실이다. 도움 주신 분들도 있지만, 많은 부분을 스스로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엔 다른 분들이 나에게 도움을 청하러 찾아온다. 재개발이 예정된 인근 마을의 세입자들이 조언을 구하러 오는데, 내 능력 안에서 도움을 줄 수 있어 기쁘다.

서울시청 앞에서 1인 시위중인 이선형 위원장 ▲ ⓒ복음과상황 이범진

10월 8일 정오, 서울시청 앞. 이선형 위원장이 매일 1인 시위를 하는 곳이다. 많은 이들이 점심을 먹기 위해 건물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통에 인파 속의 이 위원장 모습이 더욱 쓸쓸해 보였다. 다행히 오늘이 700일째 되는 날이라며 백승교회 박세환 목사가 찾아와 함께 예배를 드렸다. 박 목사와 이 위원장의 기도가 시작됐다. 취재 카메라를 잠시 내려놓고 그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였다. 불현듯 “고통의 현장에서 기도하면 고통받는 이들의 아픔이 어루만져진다”는 여정훈 원장의 말이 떠올랐다.

진행 이범진 기자 poemgene@gosc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