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식 교수 “신학은 진화론과 만나야 합니다”

[276호 커버스토리] 《예수와 다윈의 동행》 저자 신재식 교수 인터뷰

2013-10-29     옥명호

 

▲ ⓒ복음과상황 오지은

신재식 교수(52·조직신학)는 종교와 과학의 대화, 특히 ‘기독교와 진화론의 공존’을 모색하는 대표적인 신학자다.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원을 거쳐 미국 드루 대학교에서 신학 석사와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 템플턴 재단으로부터 ‘과학과 종교 교육과정 프로그램’(Science and Religion Coursework Program) 수상자로 선발되었으며, 미국 국무성 초청 풀브라이트 방문 교수(2004)를 지냈다. 현재 호남신학대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면서, 생태신학 및 종교(기독교)와 과학의 관계 등에도 관심을 쏟고 있다. 과학사상연구회를 통해 학제 간의 대화를 이끌고 있는 그는, 21세기 과학의 시대에 과학적 성과를 받아들이지 않는 종교는 현대 사회에서 소통력과 설 자리를 잃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한국 지식 사회와 독서계에 학제 간 대화의 전범을 제시한 책으로 평가받으며 화제가 된 전작 《종교 전쟁》에 이어, 몇 달 전 《예수와 다윈의 동행》(이상 사이언스북스)을 출간했다. 신작 《예수와 다윈의 동행》에서는 《종교 전쟁》에서 펼쳤던 주장과 통찰을 다듬고, 그 주장과 통찰의 역사적, 구체적 근거들을 한데 엮으며, 진화론을 받아들인 신학, 즉 진화 신학을 펼쳐 보인다. 이 글은 신 교수와의 이메일 인터뷰를 정리한 것이다.

 

   
 

얼마 전 《예수와 다윈의 동행》을 출간하셨는데, 어떤 반응이 있었는지요?
두 가지 반응이 있었어요. 꼭 필요한 좋은 책이 나왔다는 호응과, 이런 주제의 책을 내도 괜찮으냐는 우려였는데요. 신학 교수가 ‘진화’라는 주제를 다룬 데 대한 후폭풍이 있지 않을까 하고 염려해주시는 거였지요. 물론 대다수는 호의적인 반응이었습니다. 전화나 이메일, 심지어 편지를 통해 아주 공감한다는 피드백을 보내주셨지요. 뜻밖에도 목회자들 상당수가 꼭 필요한 책이 나왔다고 격려해주시더군요. 주변 교수님들도 대부분 교육에 필요한 책이라며 적극 소개하고 수업에서 다루겠다고들 하셨고요. 한겨레신문에 자세한 서평이 실린 덕인지, 그 뒤로 여러 매체에서 서평이나 인터뷰 기사가 나가서 비교적 많이 알려진 것 같습니다.

책을 통해 어떤 얘기를 하고 싶었고, 어떤 독자들을 염두에 두셨는지요?
강의나 설교가 그렇듯, 책도 하나의 의사소통(communication) 매체이므로 특정 질문을 전제하고 그에 대한 답을 담기 마련이지요. 이 책을 쓰기 시작할 때 전제한 두 가지 질문이 있었어요. 첫째, 종교와 과학은 어떤 관계인가? 둘째, 기독교와 진화론은 어떤 관계인가? 먼저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종교와 과학에 대해 일반적으로 ‘갈등’이나 ‘전쟁’ 관계로 바라보는 건 그릇된 이해라는 얘길 하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적인 삶의 현실에서나, 종교와 과학이 만났던 역사적 경험에서나, 둘의 기능과 역할은 원래부터 갈등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으로 공존해왔기 때문이에요.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진화론에 대해 다양한 입장을 취해왔으며 기독교 창조론은 진화론을 비롯한 현대과학을 얼마든지 수용하면서 신학 작업을 진행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책을 쓸 때 개신교 목회자들을 가장 먼저 떠올렸어요. 종교와 과학, 기독교와 진화론에 대한 내용을 가능하면 그분들에게 쉽게 설명하려 애썼지요. 다음으로, 신앙과 과학을 갈등 관계로 여기며 이로 인해 고민하는 기독교 지식인들에게 기독교 신앙은 본디 과학이나 문화와 함께 동행하는 관계라는 걸 나누고 싶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한국교회 안에는 과학을 전쟁 상대로 여기는 분위기가 강한 게 현실입니다. 무엇보다 진화론에 대한 태도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데요. 다윈에 의해 체계화된 150년 역사의 진화론을 한국교회가 유달리 불온시하거나 심지어 적대시하는 이유가 뭐라고 보십니까?
기본적으로는 한국교회 주류 신앙이, 자연과학을 거부하거나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 미국의 근본주의나 보수주의 영향 아래서 형성되었기 때문이에요. 또한 한국교회를 이끌어 온 목회자들이 자연과학이나 현대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소양을 갖출 교육의 기회도 없었고요. 이런 상황에서 1980년대부터 창조과학회를 중심으로 근본주의 창조론이 교회와 학교에서 두루 선포되었습니다. 목회자가 이런 주제에 대해 논평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심지어 암묵적으로 승인하거나 이용하는 상황에서, 평신도들은 의문이 들더라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고 다른 견해를 공개적으로 밝히기 어려웠을 겁니다. 게다가 한국 기독교인들은 진화론을 비롯한 자연과학을 수용하면 곧바로 신앙을 버려야 한다는, 이분법적인 양자택일의 사고를 주입당해 왔어요. 우리의 삶에서 기독교 신앙과 자연과학은 그 성격과 본질상 ‘선택’해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상황은 지식인층이나 젊은이들은 교회에서 멀어지게 하는 반면, 기독교를 비판하는 이들에게는 좋은 비판거리가 되는 거죠.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바뀌고 있는 시기라고 봅니다. 신학교 교과과정에도 예전보다는 자연과학을 상대적으로 많이 소개, 반영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진화론에 대해 한국교회 신자들 대다수가 배척하는 태도를 갖는지는 확인이 필요합니다. 직접 만나서 대화해 보면 창조과학의 주장에는 회의적인 반면, 자연과학이나 진화론에 열린 태도를 지닌 사람들이 상당히 많거든요. 공식적으로만 침묵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그러면 책에서 소개하신 ‘진화론적 유신론’ 혹은 ‘진화론을 수용하는 창조론’이 과연 한국교회에도 자리잡을 수 있으리라 보시는지요?
진화론적 유신론은 사실 최근에 생겨난 게 아닙니다. 《종의 기원》이 출간된 다윈 당시에 나온 것으로, 진화론을 받아들인 신학자나 기독교인의 입장을 지칭하는 것이었지요. 나중에 가서 ‘젊은 지구론’을 주장하는 창조과학측이, ‘오랜 지구론’쪽이 진화론과 타협했다면서 ‘유신론적 진화론’ 또는 ‘유신 진화론’이라고 붙인 것이지요. 다윈 당시 진화론을 수용한 기독교인 상당수가 칼뱅주의자였고, 미국에도 일찍부터 진화론을 수용한 기독교 진영이 있었어요. 오늘날 유럽과 북미의 주류 교단은 진화론을 수용하고 있으며 진화론적 유신론은 신학계의 대세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몇 년 전 《종교전쟁》을 출판하고서 교회와 대학 등 여러 곳에서 강연을 했는데, 현장 반응이 굉장히 우호적이었어요. 이런 문제로 고민하는 젊은이들이나 지식인들이 정작 교회 안에서는 공개적으로 내놓고 논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상당수가 진화론적 유신론에 대해 긍정적이고 열린 태도를 보였습니다. 기독교가 자연과학에 대해 이 정도 입장이라면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 있다고 하신 분들도 있었고요. 문제는 진화론을 비롯한 자연과학에 대한 다양한 입장이 기독교 내에 있어왔음에도, 대체로 교회 안에서는 가장 극단적인 입장만 일방적으로 선포돼 온 거죠. 적어도 세계교회가 보여주는 자연과학에 대한 다양한 태도가 지속적으로 소개된다면, 훨씬 더 열린 태도를 지닌 한국교회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미 시작된 이런 흐름은 앞으로 더 확산되고 강해질 거라고 봅니다.

책 출간 후 어느 인터뷰에서 “진화론적 창조론(진화론적 유신론), 진화론을 수용한 창조론이 기독교 신앙 전통에서 가장 적절한 설명의 틀”이라고 하셨는데요(<뉴스앤조이> 2013년 9월 5일). 어떤 과정을 거쳐 그런 관점을 갖게 되셨는지요?
모태신앙인 제가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기로 한 것은 고등학교 때였어요. 그런데 집안에서 신학대학 진학을 반대해서 당시 신학과 가장 가까운 학문이라고 생각한 종교학을 전공하기로 했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신학 공부 전에 종교학을 공부한 것이 특별한 은총이라고 생각해요. 종교학을 공부하면서 종교와 목회와 신학의 본질 등에 대해 폭넓게 고민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다양한 종교 전통과 학문을 접하면서 교파주의 전통을 넘어서는 기독교에 대해서 열린 태도를 갖는 훈련을 받았거든요.

유학 시절에는 근대 서구 역사에서의 종교와 과학과 철학을 함께 공부하면서 기독교 역사가 자연과학에 대해 얼마나 열린 태도를 취하고 밀접한 관련을 가졌는지, 그리고 기독교가 진화론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를 접할 수 있었지요. 특별히 기독교 사상사에서 기독교가 당대 최선의 지식과의 치열한 만남을 통해 어떻게 그것들을 흡수하고 소화해 왔는지를 분명하게 보게 되었습니다.

직접적이고 공개적으로 글쓰기와 저서, 강연 등을 통해 진화론적 유신론을 설파하시는 데 따른 어려움은 없는지요?
염려하시는 분들이 있긴 한데, 아직까지 그런 일을 공식적으로 겪은 적은 없습니다. 뒷얘기 정도는 있는 것 같지만요. 4년 전 《종교전쟁》에서 무신론자인 생물철학자, 회의주의자인 종교학자 두 분과 종교와 과학에 대한 논쟁을 벌일 때, 제가 기독교 편에서 무신론이나 과학적 환원주의를 논박하는 입장이었기에 그런지도 모르겠네요. 당시 창조과학이나 지적설계에 비판적인 제 입장에 대해, 모 대학교수께서 이메일을 통해 항의와 신앙 검증을 시도한 적이 있긴 했지만요. 제가 몸담고 있는 학교는 학문적인 논의에서 이런 문제에 열려 있어서, 이전의 총장님을 비롯한 선배 교수님들은 이런 신학적 입장을 옹호해주는 일들을 해 왔고, 제가 속한 교단(예장 통합)도 상대적으로 열려 있는 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면서 세계적인 유전학자인 프랜시스 콜린스 박사가 제안한 ‘바이오로고스’라는 용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저도 콜린스 박사의 책을 흥미 있게 읽었고 실제로 수업시간에 교재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콜린스 박사는 진화론적 유신론이든 유신론적 진화론이든 특정 단어가 가진 낙인효과 때문에 새로운 용어를 제안한 거지요. 콜린스 박사의 의도와 새로운 용어가 갖는 장점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저는 여전히 ‘진화론적 유신론’이라는 용어를 선호합니다. 과학이론은 중립적이어서 ‘유신론적’ 혹은 ‘무신론적’이라는 형용사를 붙일 수는 없다고 봅니다. ‘유신론적’ 상대성이론, ‘무신론적’ 불확정성이론이라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생명세계를 설명하는 과학이론인 진화론도 마찬가지죠. 기독교인인 저는 일반적 용어로 말하면 유신론자인데, 진화론을 수용하는 기독교인의 입장을 신학적 혹은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말할 때 ‘진화론적 유신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내부 담론에서 ‘바이오로고스’라는 다분히 신학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일반적인 학문 담론 영역에서는 바이오로고스가 ‘진화론적 유신론’보다는 더 많은 부연 설명이 필요할 거라고 봅니다.

진화론의 수용이 하나님의 창조나 통치를 이해하는 것과 어떤 연관성을 가질 수 있는지요? 교수님의 학문 활동과 관련해서는 어떠한가요?
진화론은 생명세계가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협력과 경쟁, 공생과 사멸의 과정을 겪는다는 사실을 자연주의적으로 설명합니다. 진화론이 설명하는 동일한 생명세계를 두고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뜻과 활동의 맥락에서 설명하고 해석하지요. 기독교 신학은 생명세계가 생겨나고 변화하고 전개되어 가는 과정을 신학적 ‘창조론’에서 다루는데, 여기에는 기독교 역사에서 다양한 입장들이 있어요. 일반적으로 창조는 ‘최초의 창조’와 ‘계속 창조’, 그리고 ‘궁극적 창조’ 이 세 가지로 구별합니다. ‘최초의 창조’는 성서의 창세기에서 말하는 생명세계의 창조이고, ‘궁극적 창조’는 예수님의 재림과 더불어 시작되는 종말의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하며, ‘계속 창조’는 종말의 시기까지 피조세계에서 만물을 새롭게 하는 성령의 지속적 활동을 의미합니다. 진화라는 개념은 이런 신학적 주제를 정교하게 논의하는 데 상당히 많은 함축성을 던져줍니다.

일반적으로 생명세계를 보는 진화론의 핵심을 ‘경쟁’으로만 이해하는데, 이와 달리 현대의 진화생물학은 경쟁보다는 ‘협력’과 ‘공생’을 강조하지요. 이렇게 되면 신학이 설명하고자 하는 생명세계를 진화론의 시선을 통해서 좀 더 풍요롭게 이해할 수 있어요. 교회의 활동이나 신학 작업은 고립되어 있기보다 철저히 환경과의 관련성 속에서 진행되는데요. 특정 교회나 교단의 생로병사, 특정 신학과 사상의 전개 과정을 진화론적 관점이 제시하는 경쟁과 협력과 공생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면, 기존의 방식으로 읽어내지 못한 많은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살아 있는 생명체로서 교회나 신학을 이해할 때 생명세계를 설명하는 진화론적 관점을 유용하게 적용할 수 있는 거지요. 이런 관점의 신학사상사를 꼭 써보고 싶어요.

진화론을 수용하지 않음으로써 생겨나는 신학적?신앙적 문제는 없는지요?
저는 신학 작업이 철저하게 질문-응답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이나 목회 현장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질문에 답하는 과정이라는 거지요. 이렇게 다양한 질문에 응답하는 과정에서 신학은 질문을 제기한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당대 최선의 지식으로 최선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사상이나 사조를 만날 때마다, 서로 대화하고 소화하면서 더 충실히 기독교 신학을 구성해 왔지요. 역사 속에서 헬레니즘을 접하면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를 경험한 기독교가 가장 최근에 맞닥뜨린 새로운 만남이 바로 현대과학이며 그 정점에 진화론이 있습니다. 이 만남을 무시하거나 피해가면, 기독교 신학을 화석화하고 기독교 신앙을 왜곡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리하여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하지 못한 채 스스로 게토화해가는 것이지요. 이런 기독교나 교회는 교리중심주의나 교회중심주의에 빠져 사회나 문화나 역사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생명세계를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는 일을 포기합니다. 이런 교회와 신학이 살아남은 적은 없습니다. 진화론은 오늘날 살아있는 신앙과 신학을 구성하기 위해 소화하고 넘어서야 하는 일종의 시금석입니다.

신을 “정신 바이러스”라고 한 리처드 도킨스, 종교를 “살인마”라고 한 크리스토퍼 히친스를 비롯하여 대니얼 데닛, 샘 해리스 등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무신론’(New Atheism) 운동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주로 진화론을 적극 수용하거나 활용하는 인물들인데요.
서구 역사에서 무신론 운동이 이렇게 공식적으로 조직화하고 체계화된 활동을 벌이는 건 거의 최초입니다. 과거의 무신론 운동이 명망가의 개인적 활동 수준이었다면, 오늘날의 무신론 운동은 거의 조직과 체계를 갖춘 집단 운동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들은 발전된 과학기술의 상징인 인터넷 SNS 등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굉장히 효율적으로 전파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의 활동에 대한 정당성 부여나 영향력을 확장하는 가장 직접적인 동력이 이들이 비판하는 기독교 자체에 있다는 것이지요. 이들은 기존 기독교나 교회의 부적절한 모습이나 행태, 비합리적인 가르침이나 신학을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정당성과 지지를 확보하는데, 주 대상은 근본주의적인 신학과 교회와 기독교인입니다. 비판의 대상이 사라진다면 자신의 존립 근거를 걱정해야 하기 때문에, 기독교 근본주의와 새로운 무신론 운동은 태생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협력적 적대 관계인 셈이죠. 기독교 근본주의나 현실 종교의 폐해가 줄어든다면, 상대적으로 그 세력 또한 줄어들 것이라고 봅니다.

‘과학과 종교의 동행’에 대한 이해가 부박한 한국 기독교 현실에 대해 학자로서 어떤 소명을 갖고 계신지요?
지난 10여 년간 한국 교회와 신학에 필요한 것이 과학에 대한 열린 태도라고 생각해서 자연과학을 신학의 1차 동행으로 삼아 공부해 왔습니다. 동시에 주변의 신학을 비롯한 인문학과 자연과학 전공자들이 10년 이상 매달 모여 종교와 과학 관련 책을 읽는 모임을 하고 있는데, ‘과학사상연구회’라고 불리는 이 모임은 앞으로도 계속할 것입니다. 이 모임에 참여하는 신학자들이 자신이 속한 학교에서 기독교와 과학에 관련된 강의와 연구를 진행하고 있지요. 이런 과정을 통해 기독교나 교회가 과학에 대해 좀더 열린 태도를 갖게 되어 언젠가 한국교회가 자연과학을 완전히 소화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럴 때 한국교회의 미래가 좀 더 희망적이지 않을지요.

또한 학자로서 전문적인 글쓰기와 더불어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글쓰기에 마음을 쏟고 있어요. 몇 년 전부터 학술논문 외의 모든 글을 구어체로 쓰기 시작한 것도 그런 시도의 일환이지요. 신학자로서 자연과학뿐 아니라, 경제·정치·문화·역사·생태 등의 분야와 지속적으로 대화하고 이를 신학 작업에 반영하는 일도 신학의 한 축이라고 여깁니다. 현재는 ‘진화과학의 종교보기’라는 주제로, 진화론을 수용한 진화생물학자, 언어학자, 인류학자, 철학자 등이 종교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쓰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이 과학혁명 이후와 계몽주의 이후의 신앙과 기독교를 고민할 수 있도록 관련 내용을 소개하고 자극하는 일을 계속해나가야겠지요.

진행 옥명호 편집장 lewisist@gosc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