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꿈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뜁니다."
[277호 편들고 싶은 사람] 평화활동가, 그리고 송강호의 동반자 조정래
10월 24일 제주교도소에 수감중인 평화활동가 송강호 박사(55)를 찾았다. 그의 아내이자 동료인 평화활동가 조정래 씨(56)와 함께. 자동 시스템이 허락하는 12분의 짧은 면회 시간 동안 지켜본 둘의 관계는 그야말로 친구이자, 동반자였다.(오전 10시 이전에 면회하면 2분의 시간을 더 준다.) 군더더기 없이 진솔하면서도 강직한 글을 만나며 상상해온 대쪽 같은 이미지와는 달리 송강호 박사는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지닌 꿈꾸는 소년 같았다. 면회실 가림막을 사이에 두고 자리한 조정래 씨도 고단한 여정의 찌듦보다는 소년의 꿈과 삶을 공유하는 ‘또 다른 소년’의 모습이었다. 정해진 시간이 다 되어 목소리가 차단되자, 두 사람은 팔로 큼지막한 하트를 그리며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늦가을의 단풍이 흐드러진 11월 11일, 양평 샘터에 머물고 있는 조정래 씨를 찾아갔다. 12분 안에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속 시원하게 풀어낼 시공간을 내어주고 싶었다. 그들이 공유하는 꿈에 한발 더 다가가 느끼고 싶었다. 전쟁 없는 평화의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활동가이자 공동체 ‘개척자들’의 살림을 꾸려가는 그녀는, 남편과 더불어 자녀교육의 시행착오를 경험하는 평범한 어머니이기도 했다.
제주도에서 상주한다고 들었는데, 그동안 줄곧 남편인 송강호 박사와 함께 활동해 온건가.
남편은 2011년부터 제주도민이 되었고, 나는 작년 3월 말에야 제주도로 가게 되었다. 그 사람 생일이 4월 1일이라 축하도 해주고 며칠 지낼 겸 제주도로 가게 되었다. 때마침 강정 문제로 다른 단체들도 행사가 있었는데 남편이 그들을 구럼비로 안내하다가, 하필 생일날 체포되어 연행되었다. 그때 이후 제주도에서 지내고 있고, 회의나 다른 일이 있으면 나온다. 수감 전에도 남편이랑은 잘 동행하지 못했다. 9월 말에 출소한 남편이 10월 초부터는 강정평화행진을 시작으로,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는 밀양이나 평택 같은 도시들을 다녔고, 나도 부분적으로 참여했다. 10월 말쯤에는 춘천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자취하고 있는 아들에게서 ‘SOS’가 와서 9개월 정도를 함께 지냈다.
‘개척자들’ 내에서 부부들이 보통 그렇게 떨어져서 활동을 하나.
남편 경우가 더 유난한 것 같고, 나도 거기에 반죽을 맞추는 편이다. 멤버 중에 한 명을 말레이시아에 파송하기로 결정한 적이 있었는데 가족이 같이 가기를 요청한 아내 의견을 존중해서 함께 보내기도 했다. 나는 원래 그렇게 할 생각을 잘 못하기도 하고, 그럴 상황도 못되었다. 시부모님을 모시는데 아들이 험난하게 밖으로 다니는 상황에 며느리인 나까지 돌아다니면 가정이 너무 불안정해질 것 같아 동행하지 못했다.
송강호 박사 책에 보면 젊어서부터 아내와 함께 공동체를 꿈꾸었다고 하더라. 빼놓고는 현재의 삶을 남편을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다.
남편이랑은 신학부 2학년 때 만났다. 나는 기독교교육 전공이었고 남편은 신학과였는데 나 때문에 전과를 했다. 7년을 연애할 때 공통 관심사도 지금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공동체에 대한 꿈을 많이 나눴으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남편은 쉴 새 없이 꿈을 꾸는 사람이었고 그 점이 매력으로 다가왔다. 연애 중에 군입대를 했는데 그의 꿈이 변치 않길 바랐다. 터무니없는 그 꿈이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이 마구 두근거리고, 일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 함께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20대 초반부터 이런 공동체의 삶, 혹은 평화활동가의 삶을 꿈꾼 것인가.
기존 교회와는 다른 교육과 선교를 하고 싶었던 것이고, 같은 꿈을 꾸는 이들과 몸담고 실제로 공동체 생활을 경험하면서 꿈을 더 구체적으로 꾸게 되었다. 활동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될지는 생각조차 못한 일이다. 사실은 지금도 내가 활동가인지 헷갈린다. 나서서 직접 활동하기보다는 공동체 단위로 하는 일 내부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역할을 많이 맡다 보니까 그렇다. 집에서의 엄마 역할 같은? 보이지 않지만 꼭 필요한 일이다. 특별히 공동체 안에서 역할이 분담되어 있지는 않고,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느냐에 따라 감당해야 하는 일도 변한다. 한 가지 일만 하는 게 아니고 여러 일들을 겸해서 했다. 내 경우 살림에 대한 큰 책임이 있었고, 그 외 잡다한 업무들이 있었다.
“교회 안에서 아무리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자’고 백마디 말로 해봐야, 실제로 몸으로 경험할 때에야 인종도 성별도 종교도 무관한 인류애를 품게 되고 현장에 대한 눈물의 마음이 생기는 된다.”
개척자들 공동체는 어떻게 시작됐는지 궁금하다.
남편이 교회에서 청년 사역을 하면서 ‘월요 기도 모임’을 이끌고, 그 내용을 기반으로 선교탐방을 다닌 것이 개척자들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남편이 보광중앙교회에서 청년부를 맡았는데 교회 수련회 형식으로 평화캠프를 시작한 것이다. 겨울방학마다 열흘 넘는 훈련을 하고 전쟁이나 재난 현장으로 캠프를 갔는데, 1991년 필리핀의 피나투보 화산이 폭발한 현장으로 갔다. 거기서 화산재 때문에 집들이 주저앉고, 용암이 흘러서 사람이 살 수 없는 현실을 체험했다. 교회 안에서 아무리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자”고 백마디 말로 해봐야, 실제로 몸으로 경험할 때에야 인종도 성별도 종교도 무관한 인류애를 품게 되고 현장에 대한 체휼의 마음이 생기는 거다. 현장 속에서 내가 아닌 하나님이 가르치고 계심을 경험들을 통해 믿게 되었고, 그래서 교회의 청년들을 매년 데리고 떠난 것이다. 현장이 학교라는 것이 그 사람 생각이기도 하고 사실이다. 그때 청년들 중에 남은 사람이 개척자들 간사로 있고 월요일 기도모임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사단법인으로 등록하게 된 것은 2001년부터다.
경기도 양평에서 삶을 공유하게 된 때는 언제부터인가.
사실 우리 가족이 원래 양평 단층집에 살고 있었는데, 자원봉사자들이 함께 지낼 곳이 없다보니 자연스럽게 모여 살게 되었다. 1999년에 독일 유학에서 돌아와, 인도네시아와 전쟁 중인 동티모르를 놓고서 월요 기도 모임 멤버들과 그 현장에 갈 것인지를 논의했다. 기도 모임 멤버 중에는 갈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당시 남편이 강의를 나가던 영남신학대학교 학생 다섯 명이 동티모르에서 1년간 일하기를 자원했고, 이 평화캠프에 참여했던 두 명의 독일 청년도 2년을 개척자들과 함께 지냈다. 이렇게 점점 모인 활동가들이 함께 지낼 곳을 알아보다가 결국 우리집보다 조금 더 산으로 들어간 곳에 위치한 산장을 싼값에 빌려서 수도나 전기 시설 없이 지냈다. 호롱불에 의존하고, 몸을 씻는 냇가에서 물은 길어 생활했고, 고물상에서 구입한 24인용 군인 텐트도 사용했었다. 그러다가 2003년 집을 지었는데 2년 전에 원인 모를 화재로 불타서 아직 재건 중에 있다.
주로 평화교육과 평화캠프 사역을 하고 있는데, 어떤 일인가.
‘똑같은 일은 안하기’가 모토인 우리 단체는 작고 돈이 없다보니 물량 중심적 일은 하지 않는다. 전쟁을 비롯한 아픔을 경험한 곳에 건물을 지어주거나 물질적 지원을 해준다고 그곳 사람들 마음에도 평화가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남아 있는 아픔과 상처가 끊임없이 표현되고 어루만져져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하는 평화교육과 캠프의 목표이다. 인도네시아가 학살과 방화를 저지른 동티모르의 경우, 바로 앞에서 형제나 부모의 죽음을 경험한 아이들이 자라서 군인이나 경찰이 되어서 인도네시아인을 죽이고 싶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런 악순환이 반복되는 일을 끊고, 더 나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평화교육이다.
교육 내용이 어떻게되나?
여러 번 사역을 거치면서 차이, 조화, 비폭력을 주제로 유치부부터 청소년까지의 9년의 커리큘럼을 갖게 되었다. 커리큘럼대로 평화교육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수없이 프로그램을 만들고 실습을 하지만 현장에서는 또 다른 반응을 늘 만난다. 피드백을 통해 지속적으로 내용을 수정해왔다. 지금도 동티모르와 인도네시아의 아체에서 상시로 평화교육이 이루어진다. 동티모르에서는 특히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두 가지 활동이 진행된다. 하나는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 정부 승인 하에 여권이 없는 사람들을 국경에서 만나게 해주는 일이고, 또 하나는 동티모르로 가고 싶어도 친인도네시아 활동 전력 때문에 돌아가지 못하는 동티모르 사람이 가족들을 상봉할 수 있도록, 더 나아가서는 귀환의 길을 열어주는 메신저 프로그램이다.
원수지간이던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 사람들의 관계가 회복되는 사건을 정말 현장에서 경험하나.
첫 평화캠프를 위해 동티모르 답사를 갔을 때 목사들 모임을 찾아갔다. 화해와 재건과 동티모르 독립을 축하하는 축제를 주제로 인도네시아 청년들을 불러서 캠프를 벌이도록 허가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그랬더니 본인도 기독교인이자 목사지만, 아직도 상처가 너무 아프고 쓰라리기에 용서해야 함을 앎에도 아직 이르다고 답했다.
그 현장에서 우리에게 가장 힘든 말은 “우리가 고통당할 때에 당신들은 어디에 있었냐”는 물음이었다. 고통당할 때 함께하지 못하면 화해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남편의 가슴 속에 박혔다. 첫 캠프 때는 인도네시아 청년들이 함께하지 못했다. 그런데 우리 캠프의 평이 좋아서인지 이듬해에 캠프를 연 소모초 마을에서는 인도네시아 청년들이 모집하여 캠프에 참석하는 것을 허가해주었다. 캠프 중 밤에 자신이 겪은 일을 고백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쉽지 않은 시도였다. 자신이 강간을 당한 일, 부모의 죽음을 본 일을 나누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그런 고통의 기억을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 같다.
상처는 표현하는 에서부터 치유가 시작된다. 오히려 그 고백의 시간이 지연될수록 회복도 미뤄지고 상처는 더 깊게 영향을 미친다. 다행히 어떤 한 사람이 자기 고백을 시작했고, 점점 자기 이야기를 나누려는 동티모르 사람들이 줄을 섰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인도네시아 청년들은 또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나. 그들 중 하나가 인도네시아 군인들을 대신해서 무릎을 꿇고 눈물로 사죄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랬더니 동티모르 사람들이 그 아이를 얼싸안고 네 잘못이 아니라며 용서를 해주더라. 그해 캠프 참가자 중에는 종교 회의론자였던 한국 자매가 있었는데, 기독교가 이렇게 현실적인 종교인줄 몰랐다며 한국에 돌아와서는 교회를 다니고 세례도 받고 헌신적으로 섬기고 있다. 개척자들 식구가 세례 날 함께 축하해주기도 했다. 그 친구는 거기서 어린이부 부장도 하더라.
다시 제주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해군기지를 막는 활동을 계속 해오고 있다.
전쟁을 경험한 다른 지역의 사례로 볼 때,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세우려는 것은 전쟁으로 가는 고도로 기획된 계획이다. 전쟁의 시작은 기지 건설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군사 기지가 생기는 곳이 보호된다고 착각하지만, 일본의 경우를 봐도 원자탄이 떨어진 곳은 더 많은 인구가 죽을 수 있는 수도 도쿄가 아닌, 군사기지가 있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였다. 전범국가로서 일본이 채무를 넘긴 오키나와도 희생된 도시다. 오키나와 사람들이 원치도 않은 기지가 생겼고, 무고한 양민들이 학살당했다. 대리전쟁을 치른 것이다. 군사기지가 생긴다는 것은 결국 자기도, 타자도 살생하게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제주도 땅에 해군기지가 들어서는 일을 막으려는 것이다.
군사기지 건설이 전쟁을 잉태한다는 목소리가 대중에게 제대로 전달되는 것 같나?
어떻게 매체가 다 죽고 이 지경이 되었는지 정말 암담하다. 사람들은 사실을 잘못 전하는 매체를 통해 소식을 접하니까 거짓말을 진실로 믿게 되는 것이다. 얼마 전 WCC 부산 총회에서 강정 해군기지 반대 부스를 운영하다 만난 어떤 분이 밀양 문제를 언급하면서 “정부에서 보상금을 많이 지불하면 안 된다”고 하더라. 돈 때문에 갈등이 생겼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인데, 밀양의 주민들은 얼마나 듣기 싫은 말이겠는가. 매체가 사건을 돈의 차원으로만 접근해서 이런 인식이 확산된다.
송강호 박사가 두 번째 구속됐다. 강정에서의 오랜 싸움이 지치지는 않는지.
우리가 아무리 몸 바쳐 활동한다고 해도 실은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막으려는 노력 없이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최선으로 싸우지 못했다는 후회가 남을까봐…. 코소보, 르완다, 동티모르의 상황을 지켜보며 전쟁처럼 비참한 일은 없음을 체험했다. 인류가 겪지 말아야 할 일이 전쟁이다. 비록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뛰어드는 일의 원론적인 승리는 믿지만, 현실을 생각할 때 힘들 때가 있다.
“좀 더 빨리 아이들의 편에 서서, 그 입장이 되어주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순간, 여러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도 오히려 서로만 의지할 수밖에 없었을 두 아이의 상황이 깨달아지는 날이 있었다. 나에게는 자녀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생긴 일이 회심인 것 같다.”
자녀들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궁금하다. 부모를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힘들 것 같은데.
성격에 따라서 반응도 다른데, 둘째인 딸은 어릴 때부터 벌써 개척자들 멤버로서의 정체성을 쌓으며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했었다가, 성장하면서 충분히 이해받지 못하는 과정 속에서 나와 마찰이 많았다. 오히려 어릴 때부터 반발심이 강했던 아들은 둘째보다는 빨리 회복이 되었다.
아이들의 그런 과정 속에서도 아빠는 계속 활동을 해야 했던 반면, 엄마로서 계속 지켜보는 입장이셨을 텐데.
내가 좀 더 빨리 아이들의 편에 서서, 그 입장이 되어주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원래부터 남편과 같은 꿈을 꾸던 나였고, 아빠와 아이들 사이에서 중립을 취해오면서도 대부분 아빠와 같은 목소리를 내왔다. 자라면서 둘째가 오빠를 많이 의지한 것 같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도 오히려 자기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오빠였기 때문이다. 서로를 의지할 수밖에 없었을 두 아이의 상황이 깨달아지던 날, 많이 울었다.
지금 자녀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풀어가고 있나?
작년에 9개월 정도 아들과 함께 지내면서 내가 엄마로서 무심했던 시간이 많았음을 알았다. 공동체로 살다 보니 아이들은 스스로 길을 찾아가도록 방치한 부분이 많다. 그런 과정에 마음에 상처가 나고, 외로움이 남았을 것이다. 도움을 요청한 아들의 좁은 자취방에 처음 갔는데 살림살이가 거의 없더라. 그날 저녁밥은 내놓을 게 없어서 햇반에 김말이를 반찬으로 차려줬는데 먹으면서 맛있다고 우는 아들의 모습을 봤다. 그날 이후로 점심도 매일 집에 와서 먹게 하고 김밥도 싸서 보냈다. 어느 날은 공부(의과대학 본과 3년)하다가 체력이 딸리는지 죽을 갖다달라고 요청을 해서 가져다주었다. 전에 없던 이런 시간을 보내면서 아들이 배가 좀 불러지고 회복된 것 같다. 자기 요청에 엄마가 아빠를 포함하여 만사를 제쳐두고 전적으로 달려오리라 생각을 못한 것이다. 그 기간에 둘만을 위한 밥을 하면서 나도 치유가 되고, 아들도 이전처럼 힘들어하지 않더라.
딸과는 둘만 지낸 시간이 아직 없어서 이번에 양평에 올라왔을 때 가능한 대로 함께 지내려 했다. 공동체 숙소가 불탄 이후로 딸이 근처 마을공동체에서 함께 지내고 있는데, 하루는 거기서 함께 잠을 자는데 송아지처럼 “엄마~ 엄마~” 하고 불렀다. 달리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는데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좋았다.
자녀의 상황을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된 건 상당히 큰 변화였겠다.
나에게는 자녀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생긴 일이 회심인 것 같다.
아빠와 자녀들 관계는 어땠나.
아들과 아버지는 좀 더 오래 걸렸다. 아들에게 엄한 아버지였고 나는 아들을 두둔하는 입장이었다. 남편은 정직하지 못하거나 무책임한 행동을 할 때는 매를 들었는데 두 대로 시작한 매 수가 다음번엔 두 배씩 늘어나서 결국엔 128대를 맞아야 하는 상황까지 간 적이 있다. 중2였던 아들이 무서워서 편지를 써놓고 집을 나간 해프닝이 있었다.
감옥에서 뵌 송 박사 이미지와는 다른 모습인데.
아마 감옥에서 많이 철 들었을 거다. 옥중에서 보낸 편지글에 128대를 때린 이야기도 나오는데 지금은 후회하고 있다. 그렇지만 아빠들이 다들 그런 건지, 딸에 대한 애정은 참 남달랐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스럽고 애교도 많은 딸이었다. 교도소에 딸과 남자친구를 포함한 다섯 명이 함께 면회를 간적이 있는데, 딸아이 남자친구에게도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딸이라고 하더라.
일반적인 아버지의 모습이다. 누군가는 송 박사의 활동을 “기독교 사회 참여의 극단적인 예”라고 표현하던데, 어떻게 생각하나.
충분이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우리가 왜 극단적인 사람이 되어버렸는지…, 사실은 극단적인 일을 하는 게 아닌데 왜 이게 극단적인 것으로 여겨질까. 기독교인에게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지 않은가. 기독교인들이 그 계명을 고민은 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사문화 되어 버린 건지…. 전쟁을 두고 마치 국익을 위하는 일로 말들을 하는데 그 전쟁 통에 사람이 죽고, 아내와 남편과 아이들이 죽어간다. 그런데 그런 재앙을 그럴듯한 멋있는 말로 포장하고, 기독교인임에도 아무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그런 현실이야 말로 극단적인 예가 아닌가. 기독교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말을 많은 사람들이 고민해왔다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만 해도 벌써 해결이 되지 않았을까.
어쩌면 송 박사의 대쪽 같고 원리원칙적인 모습들을 개척자들 안에서도 힘들어 하는 이가 있을 텐데, 사모님이 품는 역할을 하셨을 것 같다.
우리 안에서도 조금 천천히 가자는 표현으로 힘든 마음을 표현하는 일이 있기도 했다. 때로는 그 사람이 꿈꾸는 것이 부담스럽고, 바로 행동하는 것이 벅찰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사람이 꿈과 비전을 이야기 할 때면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뜨거워지니 그런 내가 바보인 것 같다.(웃음)
외부인이 보면 사모님이 남편을 잘못만나서 고생한다고 여길 소지가 있는데, 이야기를 듣다 보니 천생연분인 것 같다.
같은 꿈을 꿔왔으니 맞다. 2000년도에 80명과 함께했던 첫 번째 평화캠프 일정을 공항에서 마치고 아이들과 집에 돌아오는 차안에서 아들이 “아빠는 엄마 아니었으면 택도 없었다”고 말하더라. 어릴 땐데 뭘 알고 말하는 것인지. 속으로 내가 자식들에게 인기가 있다는 생각에 몸이 고된 것이 위로가 되더라. 힘들기도 했지만 삶이 주는 만족과 보람이 있다. 신실하고 헌신적인 주변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도 복이다. 보통 교회 사역을 하는 이들은 눈치 보면서 일하고, 양심에 거리끼는 일도 해야 하는데 나에게 그런 삶은 지옥이다.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삶이 주어진다고 해도 불편해서 견디기 힘들다. 아이들과 함께 아빠에 대한 불평을 할 때 길가에 즐비한 교회 풍경을 보며 “아빠가 저렇게 많은 교회 중에 한 곳의 목회자가 아닌 것만도 얼마나 다행이냐”고 말하면 아이들도 그건 숨이 막혀서 못산다면서 동의한다.
“일반적으로 교회들이 빚지고 갚아나가는 방식을 택하는데 우리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이유야 여러 가지지만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빚 지지 않는 것이고, 원래도 빚을 내서 지을 생각이 있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살 곳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2년 전 불에 탄 집(샘터)이 완성되려면 아직도 한참인 것 같은데…, 상황은 어떤지.
그러게 참 갑갑하다.(웃음) 돈이 있으면 한 번에 다 지었을 텐데 없는 형편에 짓다보니 돈도 품도 시간도 많이 들었다. 애초에 공동체에서 회의를 할 때 빚 지지 않고 집을 짓기로 했다. 일반적으로 교회들이 빚 지고 갚아나가는 방식을 택하는데 우리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이유야 여러 가지지만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빚 지지 않는 것이고, 원래도 빚을 내서 지을 생각이 있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공사 때 필요한 비계(飛階)도 처음에는 빌려서 쓰다가, 나중에 되팔기로 하고 구매했다. 빌려서 사용하면 그 안에 집을 다 지어야 하지 않나. 우리 속도에 맞춰서 집을 짓다 보니 좀 느리다. 2층까지는 콘크리트까지 지어졌는데 지붕인 3층 다락이 아직이다. 그 사람이 출소하면 몸으로도 일하겠지만, 후배들을 위해서 여기 저기 다니면서 아쉬운 소리도 좀 하면서 진척하겠거니 하는 믿음이 있다. 아무래도 지금 인력으로는 알아서 하기 힘든 부분이 있는 것 같다.
■ 샘터 재건 후원계좌(이름 뒤에 '재건' 기재 요망)
국민은행(개척자들) 220401-04-104567
국민은행(한빛누리 개척자들) 093401-04-124532 (소득공제용)
송강호 박사께서 곧 출소할 텐데, 개척자들 내년 계획이 궁금하다.
곧 연례회의가 있다. 매번 연례회의가 우리에게는 발전적 변화를 줄 수 있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확인하는 터닝포인트였다. 남편의 부재가 3년째인데 이 기간을 겪으면서 그 사람도 개척자들을 추슬러야함을 느끼는 것 같다. 남편이 1년의 반을 계속 갇혀 있다 보니까 그 기간을 냉동인간 같다고 표현할 만큼 힘들어하는 것 같다. 부분 기억 상실도 있는 것 같고. 한편으로는 자기가 말하는 것을 개척자들 내부에서 이해해주고 따라줄지도 걱정한다. 우리 멤버들은 기다리고 있다. 개척자들은 현재 인원이나 사역에서, 강정 일 외에는 축소되고 있다. 내년에는 동티모르에 갈 사람도 없어서 걱정이다. 우리의 사역이 현지인에게 더 건강하게 전달되도록 하는 것이 목표인데 어떻게 의논이 될지 모르겠다. 인력이 딸리는 문제가 아쉽다. 사람을 뽑고, 초청도 하려면 어서 집도 지어야 할 것 같다.
많은 일이 있었던 제주도 상황이었지만, 개척자들에게 새로운 변화를 줄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네트워킹 면에서 새로운 계기가 될 수 있다. 다른 단체들과 연대하는 부분도 생겨날 것이다. ‘제주 비무장 평화의 섬’ 운동은 기지화된 섬들인 오키나와, 타이완, 필리핀, 대만, 하와이에서 기지가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을 나누고 섬들의 연대를 이끄는 것이 목표였다. 사람들은 불가능한 꿈에서 깨어나라고 말하지만, 오키나와-제주도-대만을 잇는 삼각 트라이앵글 안을 군함이나 무기를 실은 배가 지나가지 못하도록 비무장화하는 것이 꿈이다. 바다의 비무장지대가 형성되고 섬들이 비무장화 되는 길이, 핵을 더 많이 보유하는 일보다 훨씬 전쟁억제력이 있음을 믿는다. 인구가 적은 섬들은 본토에서는 찬밥이면서도 항상 착취당하는 구조 속에 있기에 정부가 아닌 섬의 주민들이 연대해서 유엔에 상정해서 국제 협약을 이끌어내야 한다.
쉽지 않은 길이겠다.
문제는 전쟁산업이 경제를 활성화한다는 믿음이다. 전쟁산업을 평화산업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미 있는 좋은 기술로 망가진 환경을 복구하는 일을 하고, 군함이나 기지를 산업용으로 전환하도록 촉구해야 한다. 적게 먹고 적게 소비해서 지구가 균형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일들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사실 새롭지도, 어렵지도 않다.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 분들이 있지 않나. 자본주의나 기계문명에 지친 사람들이 갈 공동체가 많아져야 한다. 그런 공동체가 세태에 동화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아 있어야 한다. 공동체는 그런 점에서 필요한 모델 역할을 해야 한다.
다리가 불편하신데 건강은 괜찮은건가.
집 콘크리트 2층을 올릴 때만 해도 일하는 사람 20명의 매 끼니와 찬거리 준비를 혼자 다 했다. 그 때 엄지손가락이 망가졌었는데 지금은 허리, 다리가 다 불편하다. 벌써 이러면 안 되는데 좀 걱정이 된다.
진행 오지은 기자 ohjieun317@gosc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