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계급장' 떼고 벙커에 들어가다

[278호 편들고 싶은 사람] 벙커원교회 운영위원 하석범 목사

2013-12-30     이범진

▲ ⓒ복음과상황 이범진
대형교회에서 탄탄대로(?)를 달리던 하석범 목사(46). 지금은 벙커원교회에서 ‘목사 아닌 목사’ ‘평신도 목사’ ‘조슈아 하’로 불린다. 벙커원교회는 1년 6개월여 전에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나꼼수)의 김용민 피디가 서울 종로구 대학로의 벙커원카페 지하에서 250여 명의 성도와 창립예배를 드리면서 시작되었다. 헌금, 직분, 등록(관리)이 없는 삼무(三無) 교회로 시작해 지금까지 크고 작은 ‘실험’을 거듭하고 있다.

그전까지만 해도 선교 사역에 몸담아온 하 목사는 “벙커원교회의 독특한 창립 스토리와 스스로 몰려드는 성도들에 끌렸고, 이를 연구하기 위해 잠행했다가 3개월 만에 목사임이 발각되어 오히려 연구 대상이 되었다.” 지금은 성도들의 요청에 따라 세례식을 집례할 정도로 깊이 발을 담그고 있다.

인터뷰 이틀 전, 벙커원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마침 대타 설교자로 나선 하석범 목사는 “내 삶이 곧 나의 메시지”(My life is my message)라는 간디의 말을 인용하며, 말이 아닌 삶으로 진리를 실험해 가자고 했다. 그는 그동안 어떻게 진리를 실험하며 여기까지 왔을까? 지난 12월 10일 인터뷰를 통해 일관되게 나온 그의 메시지는 놀랍게도 ‘선교’였다. 선교의 말들이 현기증을 일으키며 떠돌아다니는 요즈음, 그의 삶은 선교의 좌표를 찾도록 도와주는 방향 지시등으로 다가왔다.

- 지난 주일 벙커원교회에 갔다. 사람들이 “평신도 목사”라고 부르더라.
벙커원교회에서 ‘목사 아닌 목사’로, 목회 아닌 목회를 하고 있다. ‘평신도 목사’라는 표현을 공공연하게 쓰는 건 아니다. 주로 닉네임(조슈아 하)을 쓰는데, 위아래 구분이 없어서 좋다.

- 벙커원교회에 오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내 신앙의 배경은 보수 신앙이다. 5대째 장로교 집안이다. 신대원 때부터 지금까지, 사실상 ‘청년’과 ‘선교’만 생각하며 걸어왔다. 특별히 인도 선교를 두고 기도하면서 준비를 했었다. 선교 제안이 있었고, 결정하기 전에 인도로 배낭여행을 가서 직접 돌아봤다. 물론 그전에도 수차례 다녀오긴 했지만, 중요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 간 것이었다. 인도 선교의 소명을 묻고자 떠났던 여행에서 별다른 응답이나 사인이 없어 제안을 거절했다. 사실 그때 이후로 ‘멘붕’이었다. 선교 외에는 아무 준비가 없었기에 거절 이후 몰려오는 공허함이 참 힘들었다. 십몇 년을 인도를 품고 기도해왔는데…. 여러 개혁적이라 알려진 교회를 돌아다니며 내 신학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다가 벙커원교회를 알게 되어 선교적 차원에서 연구하려고 왔다. 그러다가 목사라는 것이 알려져서 이렇게 ‘깊이’ 발을 담그게 되었다.

▲ 벙커원교회 입구에 선 하석범 목사 ⓒ복음과상황 이범진
- 에든버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다가 불가지론 혹은 자유주의 신학에 빠졌다고 말한 적이 있다.(온라인 복음과상황 “가나안 성도가 벙커원교회로 간 까닭은” 기사 참고)
신대원 후배들 앞이라 편하게 한 얘기인데, 맥락 없이 들으면 오해할 수 있기 때문에 짚고 넘어가야겠다. 에든버러 대학교의 학문은 한 가지 색이 아니고 자유롭게 여러 비평이 이뤄지는 분위기다. 그곳에 가서야 학문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한 예로 장신대에서 공부할 때는 1차 자료들을 많이 접하지 못했었는데, 에든버러 대학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1차 자료를 접하니 어떤 신학자의 어떤 말이 어느 맥락에서 나왔는지가 파악이 되더라. 선교에 관심이 있어 인류학과 문화 이해 등 다양한 삶의 양태도 공부하고 접하게 되었는데, 역시 1차 자료를 보니까 선교의 맥락과 이해도 재조합되기 시작했다. 에든버러 대학이 종합대학이었기에 자유롭게 소통하고 공부하는 분위기였다. 신학이 종교학을 넘나들며 다양한 학문과도 자유로이 소통하는 것을 경험했다. 그 대학이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치거나 불가지론에 빠지게 하는 학교라는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자유주의 신학에 빠졌다기보다는 내 신앙과 신학을 일치시키는 방법을 배웠다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 혹시 인도 선교 제안을 거절한 일과 관련이 있나?
선교에 대한 이해가 바뀌었으니 영향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 구체적인 상황을 밝혀줄 수 있나?
조심스럽다. 파송 교회가 요구하는 선교와 예수가 바라본 선교는 형태가 달랐다. 예수는 정신과 육체를 구분하지 않으셨다. 한센병 환자를 치유하시는 대목에서 잘 드러난다. WCC로 한창 시끄러울 때 어떤 분이 그러더라. WCC는 인본주의라서 신본주의인 우리와 타협할 수 없다고. 신앙을 말하는데 어떻게 인간(인본)을 말하지 않을 수 있나? 교회가 신본과 인본을 분리하면 곤란하지 않은가? 같은 맥락이었다.

- 학부는 고신대학교를 졸업했다. ‘선교’에 대한 이해가 계속 바뀐 건가.
근본주의 신학관을 갖고 있을 때에는 일방적인 전도와 영혼 구원이 선교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복음주의 교회에서 사역하면서는 영혼 구원과 사회 구원, 혹은 통전적 구원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여전히 신앙과 신학이 일치하지 않아 만족스럽지 않았다. 나름 잘 해왔다고 생각한다. 선교 담당 목사로 일하면서 해보고 싶었던 시도들은 거의 다 해본 듯하다. 그러나 고민은 풀리지 않았다. 이것이 선교인가? 선교 현장에 들어가 보고, 유럽의 신학을 접하면서 답을 찾아갔다. 답을 찾는 출발은 언제나 예수님이다. 공관복음에 나타나 있는 예수가 출발선이었다. 역사적 예수를 해석하며 보니, 선교의 이해도 시대나 공동체마다 다 다르더라. 역사를 봐도 예수를 바라보는 시선은 제각각 다르다. ‘선교’나 ‘신앙’에 어떤 절대적인 정의가 존재한 시대는 한 번도 없음을 알았다. 마음이 편해졌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예수를 이해하고, 이해한 바에 따라 ‘하나의 선교’를 감당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 벙커원교회 사역도 그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 처음에 ‘선교지’라는 생각으로 들어갔다. 벙커원교회는 나의 신앙과 신학이 일치하도록 만들어준다. 내가 이해하는 선교를 마음껏 해볼 수 있는 곳이다. 목회자 친구들이 부러워한다. 설교의 시작을 정치와 사회 이야기로 연다. 벙커원교회의 맥락에서는 가능한 것이다.

- 정교분리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정치에 무관심한 것이 교회다운 거라고 주장한다. 
정교분리는 기득권의 말장난이다. 우리는 사실 매일매일 정치에 의해 삶이 침해받는다. 그런데 어떻게 정치와 교회가 분리되나? 예수도 죽음 자체를 놓고 보면 정치범으로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 길을 따라오라고 하지 않았나. 지금 벙커원교회 입장에서는 그리스도를 불의에 항거하는 정치적 대항자로 이해하고 선포한다.

- 목사님이 바라보는 벙커원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외부에서는 교회가 맞냐고도 묻는데, 우리는 당당히 교회라고 한다. 독특한 교회일 뿐이다. 다양한 교인들이 있다. 종교 영역을 넘나들고, 비종교인도 있고, 개신교인 중 복음주의자도 있고, 보수주의자도 있고, 자유주의자도 있다.(사실 이런 용어로 신앙을 구분하는 것을 싫어한다!) 하나의 교회 안에 이런 다양한 사람들이 뒤섞여 있는 희한한 경우다. 내가 애초에 연구자로 벤치마킹하러 벙커원교회에 들어온 이유이기도 하다. 가만히 몇 달 지켜보니 한국교회 역사에서 나름 독특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교회더라. 교회가 카페를 차리는 경우는 많지만, 카페가 교회가 되는 경우로는 최초가 아닌가 한다. 이 시대에 필요한 교회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교회도, 저런 교회도 있을 수 있는데, 우린 이런 교회로 있다.

- 7~10년 동안 교회를 안 다니던 사람이 벙커원교회에는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뿐 아니다. 자기는 신을 믿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다니던 분이 1년 정도 교회를 나온 후 세례를 받았다. 내가 집례를 했다. ‘목사 아닌 목사’라지만, 내심 얼마나 감격했겠나. 이런 일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난다.

▲ 인터뷰는 서울 홍대입구역 앞 영삼성라이프카페에서 진행됐다. 회원가입만 하면 무료로 세미나실과 커피를 제공받을 수 있어 교회 소모임 때 자주 애용한다면서, 재벌엔 반대하지만 적절히 활용한다고 했다. ⓒ복음과상황 오지은

- 새로운 경험이었겠다. 한국 기독교가 사회로부터 손가락질당하고, ‘가나안 성도’도 늘어나는 요즘 추세에 딱 맞는 모델 같기도 하다.
솔직히 말하면 선교 사역을 많이 했던 터라 이런 경험은 많다. 다만 벙커원교회만의 생명이 꿈틀대는 변화를 본다. 해외 선교를 하다 보면 언어도 문화도 다른 그들에게 다가가려면 오랫동안 살아내면서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진실로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방식, 곧 ‘인카네이션’(성육신) 아닌가. 벙커원교회에서 내 나름의 인카네이션을 이루어가는 과정이 있었다. 독특한 문화나 유형에 어떻게 가슴으로 다가가 소통해야 할지 여전히 배우고 있다. 이것이 선교다. 무신론자나 타 종교인들을 비롯해 다양한 생각들을 존중하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 

- 그 경험을 바탕으로, 선교에 대해 해줄 말은 없나. 참고로 한국 기독교는 선교사 파송 인원으로 세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든다. 
벙커원교회를 비롯하여 각각 다양한 하나하나의 선교로 존중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현실이다. 한때 러시아로 한국 기독교가 선교를 많이 나갔는데, 러시아정교회 사람들을 다 개종 대상으로 여겼다. 그들은 사실 몇 천 년 뿌리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중 한 이파리일 뿐인 한국의 기독교가 뿌리한테 개종하라는 것이 얼마나 웃긴 일인가. 한국교회가 세계 역사에서, 기독교 안에서 어디에 서 있는지 좌표를 보고 겸허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선교라는 것은 언제나 파송교회, 선교사, 선교지가 삼위일체 관계로 나아가야 하는데 현실은 늘 어느 한쪽에 치우쳐 있다. 숲을 보고, 나무를 보라고 하고 싶다.

- 설교 중 벙커원교회를 ‘설국열차’에 비유하기도 했다.
교인 중 한 사람의 비유였다. 설국열차 자체를 정형화된 교회로 본다면, 그 기차 밖으로 나와 버린, 기차 밖에 존재하는 교회로 볼 수 있다.

- 교회 운영 원칙이라고 할 수 있는 ‘삼무’(三無)도 열차 밖에 존재하는 교회임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것 같다. 간단하게 소개해 달라.
헌금, 직분, 등록 없는 교회다. 그러나 엄연히 따지면 다 있다. 헌금은 교회에 내지 말라는 것뿐, 다른 곳을 후원하는 형태로 내거나 교회 운영을 위해 알아서 내기도 한다. 공적인 예배 순서에만 없을 뿐이다. 직분은 운영위원 체제로 맡는다. 등록이나 관리도 소모임 운영 체제로 어느 정도 이뤄지고 있다. 다만 이런 것들이 제도화된 기성 교회에서 갈등이 많이 벌어지니까, 우리는 그러지 말자는 의미이다. 이미 우리 역사에도 ‘삼무’ 교회들이 제법 있었다.

- 공적인 예배순서에 헌금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목회자 사례비와도 직결된 사안 아닌가.
목사가 없으니 상관없다. 운영위원들도 다 자원봉사자들이다. 삼무로도 교회가 돌아간다. 다 알아서 필요한 물질로 재료로 채워진다. 보기에 따라서는 주먹구구식이라 할 수 있지만, 서서히 갖춰지지 않을까.

- 지금 목사님 이야기 하는 거다. 사례비 없이 어떻게 생활하시나?
하루는 어떤 목사님이 찾아와 함께하고 싶다고 하더라. 그러면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현실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나는 바울처럼 ‘텐트 메이커’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안타깝고 미안했다. 벙커원교회는 운명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 나도 여기서 자원봉사로 있다. 목사라도 스스로 고민하면서 해결해나가야 한다. 그러나 나는 소위 말하는 ‘강남 좌파’이다. 아내가 치과 의사이다. 다른 목회자들보다 운신의 폭이 넓은 건 사실이다.

- 갑자기 궁금해진다. 아내는 어떤 분인가?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같은 공동체에서 만나 7~8년 교제하다가 결혼했다. 굳이 분류하자면 아내는 복음주의자, 나는 자유주의자인데 서로 토닥이며 잘 사니까 사람들도 신기해한다. 서로 존중하면 가능하다.

▲ 아내 조은희 씨와 함께 (하석범 제공)
- 왜 존경(까지)하나?
늘 존경하고 있다. 힘들고 절망하고 좌절하고 어느 순간에는 내가 진짜 무신론자 아닐까 고민했던 때가 있다. 아내는 그럴 때 “하나님 안에서라면 어떤 것이든, 하나님이 이끄시면 잘될 것”이라며 내 편이 되어주었다. 원망할 법한 때에도 원망 한 번 없었다. 하나님의 마음 같은 은사가 있는 것 같다. 내가 하나님과 관계에서 어느 좌표에 있는지도 돌아볼 수 있게 해주는 사람이다.

- 아내가 목사님을 ‘원망할 법한 때’는 언제였나?
남편이 유학을 가더니, 휴학을 하고, 갑자기 귀국해서 방황하며 다니니까 원망할 수 있지 않나. 의사다보니 친구들을 만나면 사회적 레벨도 있을 텐데, 상대적으로 나는 자꾸 이상한 길로 가니까 그런 지점에서는 충분히 원망할 만한 상황이다. 사실 인도 선교도 아내가 먼저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인도 선교를 접었고, 당시는 치과 운영도 어려웠을 때였다. 이외에도 원망할 상황들이 왜 없었겠나.

- 아내는 어느 교회에 다니나?
집 앞의 교회를 다닌다. 그러나 아내는 이중교적을 두고서 나와 함께 어느 교회든 다 가줬다. 벙커원교회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그 입장에 다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교회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이웃이 되어주는 사람이다. 남편의 이웃(벙커원교회 성도)들이 자기를 필요로 하니까 이웃이 되어준다. 그러면서도 소진되지 않으니까 존경스럽다. 어떤 때는 내 아내이지만 이해가 안 될 정도로 헌신적일 때가 있다. 마석가구단지에서 외국인 근로자를 대상으로 의료봉사를 하고, 매년 해외 의료선교도 떠난다.

- 자녀는?
1남 1녀다. 중2 아들, 6학년 딸이다. 이해되는 부분도 있고, 참아주기 힘든 부분도 있다. 아들이 사춘기다. 해외 의료선교 한 번씩 데려가곤 했는데 요즘은 “왜 우리는 매번 후진국만 가느냐”며 이젠 선진국 아니면 안 간다고 하더라. 남한테는 관대하면서 자식한테는 참 그러기가 힘들다. 다행이 아내가 자녀들을 잘 보듬는다.

- 교회에서의 리더십은 어떤가? 교인들로부터는 ‘목사 대우’를 받고 있나?
소모임 성격에 따라 다르다. 예닐곱 개 소모임을 연방들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벙커원교회를 ‘연방제도’ 틀로 읽으면 그림이 더 쉽게 그려질 것이다. 어떤 ‘연방’(소그룹)은 목사로 대우해주고, 어떤 연방은 평신도로 본다. 소모임 성격에 따라 다르다. 운영위원장 또는 코디네이터라고 불리기도 했다.

- 벙커원교회에서 평신도로 대우받는 느낌은 어땠나?
아무도 목사 리더십을 특별히 부여해주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나에겐 분명 선교지였다. 어느 선교지에서 선교사 왔다고 바로 목사 리더십으로 받아주나. 그냥 같이 살아가면서 사랑을 주고받고, 인격적 사귐 속에 발전하는 것 아닌가. 내가 소모임 깃발을 하나 들었는데 궁금해서 참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목사라고 내세운 적은 없지만 가깝게 지내다 보니 목사로 여겨주는 이도, 친구로 여겨주는 이도 있다. 계급장 다 떼고, 이등병으로 들어왔다가 여기까지 온 거니까 선교라고 볼 수 있지 않나.(웃음)

▲ 부활절 성찬예배에서 설교중인 하석범 목사(하석범 제공)
- 그때 만들었던 소모임은?
‘현대신학과 대안교회로서 벙커원교회 연구모임’이다. 줄여서 ‘현대연’이다.
 
- 그밖에 어떤 소모임들이 있나?
다양하다. 사진 모임, 연극 모임, 독서 모임도 있다. 어려운 이웃을 찾아가는 모임도 있고, 밥 먹으면서 대화하는 소모임도 있다. ‘보탬’이라는 소모임은 매주 대한문 앞 쌍용차 농성장에 가는 모임이다. 이 모임에 오는 분들은 종교가 다양하다. 그렇게 살다가 나중에는 ‘가족’이 된다. 일주일에 며칠을 보기도 하니까. 이런 소모임들이 연방정부의 한 주처럼 활동하면서 공통분모를 찾고 확인해가는 여정이다.

▲ 하석범 목사가 벙커원교회 부활절 성찬예식 중 세례식을 집례하고 있다.(하석범 제공)
- 그 공통분모 중에 목사님이 자주 강조해온 ‘종교 민주화’도 있나?
종교 민주화라는 용어를 누가 먼저 썼는지 모르지만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본다. 한 소모임에서는 비종교인, 불자, 기독교인 등이 함께 이야기한다. 예배에도 참여하는 그 불자가 자기 이해로 성경의 세계관과 실천적 삶을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이웃 종교의 또 다른 시선으로 성경을 보니까 아주 좋다. 비종교인도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처음엔 치열했던 토론이 정반합의 과정을 거치면서, 누구나 자기 생각을 피력할 수는 있지만 강요하지 않는 분위기가 된다. 이 과정에서 지평이 넓어지는 분들이 있다. 이른바 ‘종교 민주화’를 이루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 ‘말씀 선포’에서 ‘말씀 나눔’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견해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말인가.
그렇다. 하지만 그건 개인적인 생각이고, 벙커원교회 전체의 입장은 아니다. 보통 교회에서 설교란 수직적인 가르침이다. 설교가 예배에서 너무 많은 파워를 갖는 건 커뮤니케이션 측면에서 좋지 않다. 설교를 수평 구조로 만들 수 없을까 질문을 던졌을 때 ‘말씀 선포’가 아닌 ‘말씀 나눔’을 생각했다. 수직적인 가르침이 아닌 대화 혹은 수평적 상호소통 방식 말이다. 이 사안을 이슈로 던졌는데 공감대도 있었고, 합의점도 어느 정도 찾았다.

▲ 벙커원교회 주일예배 모습(하석범 제공)
- 실험적인 설교도 진행되고 있다.
벙커원교회에서도 내가 가장 진보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신학적 견해 차이가 있는 세 사람이 동시에 같은 본문으로 설교하는 실험도 했다. 평신도와 목회자가 섞이기도 하고, 부부(나와 아내)가 해보기도 했다. 반응이 좋았다.

- 명확함보다는 흐릿함을 추구하며 진리를 좇는 느낌이다. 보통 뿌리가 흔들릴 때 신앙인들은 많이 혼란스러워한다. 그래서 명확한 것을 더 좋아하는 것 같고.
그게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물음표로 시작한다. 굳이 내 신앙의 뿌리를 찾자면 장로교 통합교단이다. 내가 5대째다. 어머니는 매우 카리스마가 넘치는 분이다. 치유, 방언, 통역 다 하신다. 그런 어머니께서 어느 날 음성을 들으셨다며 신대원에 갓 들어간 나에게 영락교회에 가라고 하시더라. 물론 교역자 자리는 없었고, 그냥 새신자 교육 받고 영락교회 청년부에 소속되어 소년부 교사로 지냈다. 그러다 몇 개월 뒤에 신촌장로교회에서 교역자 제안이 와서 수락하고 교회를 떠났다. ‘이번엔 어머니가 틀렸나 보다’ 하고 그냥 넘어갔다.

신촌장로교회에서 목회를 잘하다가 수년 뒤 영락교회에서 선교 담당 목사를 뽑는다고 해서 우여곡절 끝에 지원했다. 경쟁률도 있었고, 관례상 내가 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다들 놀랐을 정도로). 면접 보러 들어갔는데, 심사하는 분이 소년부 교사 때 만났던 부서 장로님이셨다. 덕분에 나는 영락교회에서 목사로 있으면서 선교와 관련한 실험을 거의 다 해볼 수 있었다. 당시엔 인도로 보내기 위한 훈련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벙커원교회에 오기 위한 훈련이었다. 왜 나를 청년 때 영락교회에 가라고 음성을 주셨는지, 지난한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었다. 물음표를 안고 사는 게 신앙이다.

- 신앙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으신 것 같다. 음성을 듣는 등의 종교적 체험도 상당히 긍정하는 것으로 들린다.  
신사도운동이나 순복음계열로 오해할 수도 있지만, 나나 어머니가 체험하는 하나님 언어들은 뭘까? 이런 종교 체험이 가짜일까? 아니다. 인간 경험과 언어를 통해서 하나님의 실제를 알아가지 않나. ‘하나님’이라는 용어조차도 그 너머의 하나님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각 사람이 가진 세계관 인식의 틀로 하나님을 받아들인다. 주관적인, 그렇지만 진실한 종교 체험이 있다. 그래서 리처드 도킨스가 아무리 “신은 사람들이 제각각 만들어낸 신”이라 공격해도 기실 나와 무관한 말이다. 조금도 부서지지 않는 나의 하나님이 있다.

- 벙커원교회의 품도 점점 넓어질 것 같다. 운영위원 4기 모집을 앞두고 있는데, 교회 변화가 포착된 게 있나?
재밌다. 1기는 지난해 대선 맥락에서 온 사람들이다. 팟캐스트 ‘나꼼수’가 정점을 찍을 때다. 벙커원카페가 진보의 요람이 되었을 때 아닌가. 이때 많게는 250명 정도가 왔다. 자리가 없어서 계단에 앉기도 했다. 2기는 박근혜 대통령 당선 이후다. 정치적 이슈들이 하나둘 흐려지면서 130명 정도로 줄었다. 3기는 개척의 과정에서 내부 갈등도 겪고, 내 공동체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 그러고 보니 벙커원교회는 ‘나꼼수’를 빼고는 설명될 수 없는 교회다. 정확하게는 김용민 피디와 뗄 수 없는 관계인 것 같다.
김용민은 배울 점이 많은 친구다. 인간 김용민에 대해서는 여기서 사귀면서 알게 되었다. 집안 배경을 보면 굳이 힘든 길 안 가도 되는데, 그가 깃발을 꽂았기에 여기까지 왔다. 자기 발로 찾아오는 교회는 김용민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브랜드였다. 그렇다고 벙커원교회가 김용민의 교회는 아니다. 그는 여러 운영위원 중 한 명이며, 본인도 그것을 원한다. 

- 김용민 피디에 대한 세간의 오해가 있다.
내가 이해한 나꼼수는 조선시대의 탈춤과 같다.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국민들의 소리를 담아내는 탈춤 말이다. 나꼼수에서 나오는 욕설들이 문제가 되었는데 그건 탈춤의 추임새 정도로 받아들여야지, 내용의 핵심인 것처럼 오도되었다. 내가 알기로는 나꼼수의 기획도 김용민이 했다. 시대를 보는 눈이 탁월하고, 그걸 내려놓는 용기도 있는 친구다. 내가 보기엔 선각자이다. 사람들은 주류 미디어가 만들어낸 왜곡된 이미지로 김용민을 보는데, 사실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가까이서 본 입장으로는 좋은 신앙인이자 지성인이다.

- 4기를 앞둔 벙커원교회는 ‘어디로’ 갈까?
우리 안의 공통분모를 뽑아내어, 우리만의 고백이 나오고 선언이 나올 것 같다. 나는 목회자고 전문 사역자니까 머릿속에 계획이 다 들어 있어도, 강요할 수 없다. 지점과 상황에 따라서 속도를 맞춘다. 그릇된 길로 갈 수 있지만 그 과정도 다 필요하다. 한 사람의 신앙이 성숙하고 변해가는 것처럼 공동체도 그런 거니까.

- 한국교회는 ‘어디로’ 갈까?
난 희망을 갖고 있다. 기독교 안에도 있어 보고, 종교도 넘어가 보고, 볼 수 없던 부분들이 보이고 함께 연대와 협력도 하니까 희망이 생기더라. 기독교 역사에서 희망은 항상 비주류, 소수에게서 찾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짜 따르고 신실하게 공동체를 살아내려는 사람은 늘 소수였다.

▲ ⓒ복음과상황 오지은
- 스스로 한계라 느끼는 부분이 있나? ‘강남 좌파’라고 해서 그런지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편들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고….
그게 바로 한계였다. 아내가 치과 의사였기 때문에 내가 교회에서 당당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비굴한 적이 없었다. 교회, 성도, 하나님께 떳떳했다. 그런데 나중에는 그 떳떳함이 양날의 검이 되어 나를 쳤다. 교회, 성도, 하나님께 빚지며 사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에 정작 홀로 남았을 때 도움 요청을 하거나, 손을 벌리는 일이 어려웠다. 그것이 극도의 교만임을 깨달았다. 외로웠다. 위험한 지점으로까지 갔지만, 나를 확인해가는 과정이었다.

- 신앙은 물음표을 안고 사는 거라고 말했다. 아직 풀리지 않은 물음표 하나만 공개한다면?
요즘 내가 꿈꾸던 목회가 이런 것이었구나 싶어서 행복하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여전히 인도를 떠올린다. 아직도 서점에 가면 인도에 관한 책을 가장 먼저 찾는다. 처음 인도 어린아이들의 동그란 눈망울을 보고 마음을 빼앗겼던 때가 떠오른다. 왜 하나님은 그때 나에게 인도를 품게 하셨을까?

환한 대낮에 시작한 인터뷰는 어둑어둑해져서야 끝이 났다. 그는 아내의 병원에서 돕는 일이 있다며 서둘러 일어났다. 선교다운 선교를 하기 위해, 그러니까 신앙과 신학이 일치되는 선교 실험을 위해, 벙커원교회에 머물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빚지며 사는 법을 익히는 듯했다.  

진행·정리 이범진 기자 poemgene@gosc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