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된 개척 교회를 사임한 어느 목회자 이야기
[278호 커버스토리] 너머서교회 안해용 전 담임목사 인터뷰
안해용 목사(46)는 2013년 11월 24일 주일예배를 끝으로 너머서교회 담임목사직을 사임했다. 지난 2010년 이맘때 ‘복상이 주목한 젊은 그리스도인’(목회 및 교회개혁 분야)으로도 선정된 안 목사는 2007년 너머서교회를 개척했고, 여러 개혁적인 시도로 교계 언론은 물론 일반 언론으로부터도 많은 주목을 받았다. 평신도 중심의 교회 운영, 건물 없는 교회로 정착 등 개혁적이고도 건강한 공동체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년 4월, 그는 돌연 사임 의사를 밝혔고, 7개월 뒤인 11월에 사임했다.
몸담은 곳(조직/공동체)의 안정된 직책을 그만두고 떠난다는 건 누구에게나 어려운 결정일 것이다. 그래서 ‘사직’을 주제로 한 인터뷰가 여러 차례 무산되었을 때, 열아홉 살 때부터 목회를 시작한 안 목사에게 ‘목회자의 사직(사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건 예기치 못한 수확이었다. 인터뷰는 지난 12월 5일 서울 합정동의 어느 카페에서 있었다. 사임 후 열하루가 지난 때였다. 그는 너머서교회를 여전히 ‘우리 교회’라고 지칭했다.
- 얼마 전 담임목사직을 ‘사직’하셨는데, 목사보다 ‘인간’ 안해용으로서의 자기 소개를 해달라.
나는 사람에 대한 애정이 많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죽음을 어린 나이에 받아들이게 되었다. 특히 초등학교 때 돌아가신 어머니의 빈자리가 컸다. 7살 때 버림을 받았던 어머니도 할아버지 집에서 식모살이하며 컸기에 사람을 그리워하는 성향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세 번째 부인이었다. 엘리트였던 아버지와 갈등이 많았고 그런 때마다 나를 데리고 교회에 가서 기도했다. 혼자 가지 않으시고 꼭 내 손을 붙잡고 가셨다. 어머니가 눈물의 기도로 현실을 이겨나갔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청소년기를 시골에서 부모님 없이 쓸쓸하게 자랐다. 어머니가 그러했듯 내 마음의 빈자리를 채워준 것도 교회였다. 하나님이 나의 어머니이자 아버지였고, 예배당이 부모님 품이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목사가 되기로 꿈 꾸었고,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때부터 꿈은 단 하나, 목사였다.
- 목회의 시작이 궁금하다.
부산장신대와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25세 때 시골 교회 전임사역자로 갔다. 한계를 많이 느꼈다. 집집마다 심방하면서 돌보는데,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딱 두 가지였다. “기도하십시오.” “성경 읽으십시오.” 이 말만으로 해결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만으로 문제 해결이 안 되니까 딜레마에 빠졌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들을 어떻게 성육신으로 도우실지 고민했으나, 결국 답을 찾지 못했다. 전임사역을 바로 접고 수능시험을 준비해서 가톨릭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다. 그분들에게 대안적인 삶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 첫 번째 사직이었는데, 이후의 삶은 어떻게 꾸려갔나? 가정도 있었을 텐데….
결혼한 상태였다. 낮에는 철강공장에서 노동을 하고, 야간대학교에 가서 공부했다. 가장이니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했다. 주일에는 교회에서 사역했다. 부천에서 살 때인데 서울 면목동에 있는 교회까지 1시간 30분이 걸렸다. 이렇게 4년의 세월을 보냈는데, 돌이켜 보면 큰 도움이 되는 시기였다. 특히 철강공장의 하루는 욕으로 시작해서 욕으로 끝나는 곳이다. 줄곧 ‘전도사님’ 소리만 듣다가 종일 욕을 듣고 있으려니 처음엔 적응이 안 되었다. 6개월 정도 지난 후에야 그 욕이 ‘위험한 일이니 다치지 않게 조심하라’는 메시지로 들렸다. 4년 동안 정말 행복했다. 노동자들의 삶, 아니 한 인간의 삶(들)을 진실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면서 첫 전임 목회의 딜레마에 대한 답은 얻었나?
사회복지학 공부는 나에게 ‘복음’과 같았다. 특히 1학년 때 배우는 필수과목 ‘인간행동과 사회 환경’은 내가 만났던 교인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게 기질이나 성향, 마음뿐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환경이라는 단순한 사실이 내 가치관의 전환을 가져왔다. 나를 비롯한 교인들이 왜 쉽게 변화되지 않았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었다. 졸업학점이 4.0이었다. 신학대학에서도 받아보지 못했던 성적을 받았다.(웃음)
- 이후 목회활동에 변화가 있었는지?
후에 5년 정도 중형 규모의 교회에서 부목사로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회사의 직원인지 목회자인지 혼란스러웠다. 결혼 10주년을 맞아 안식년을 갖기로 결단하고, 가족들과 함께 인도 오로빌 공동체를 방문했다. 전 세계 35개국에서 온 1,600여 명이 함께 사는 공동체였다. 두 달 정도 머물렀을 때 인도에 쓰나미가 와서 5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자기 교인들이 죽는 걸 직접 목격한 목사님과 함께 치유 사역을 하며 지냈다.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결심했다. 사람을 도구화하지 않고, 프로그램화하지 않는 목회를 하며 살자고. 본디 나는 야망이 있고 목적 지향적인 사람이다. 오로빌 공동체를 경험치 못했다면, 지금도 대형 교회만을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인도에서의 시간이 없었다면, 너머서교회도 없었을 것이다.
- 한국에 돌아와서 바로 너머서교회를 개척한 것인가?
아니다. 돌아와서 일산에 있는 300여 명 규모 교회에서 부목사로 있었다. 가족적 교회 모습을 배우고 싶었다. 그렇게 2~3년 지났을 때였나, 목회자와 교인 사이의 갈등으로 약 150명 정도 교인이 교회를 떠났다.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 교회가 왜 이럴까, 고민하면서 나도 나오게 되었다.
- 두 번째 사직이다. 교회의 갈등 상황을 지켜보다가 나오게 된 경우인데….
목회는 현실이라는 자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목회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계속해야 할지 고민이 되더라. 그런데 교회에서 나온 교인 중 일부가 나에게 와서 자기들을 ‘돌봐 달라’고 했다. 처음엔 무슨 소리인 줄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자신들과 함께 교회를 만들자는 뜻이었다. 그런데 분명 이런 방식으로 교회를 하게 되면 내가 교인들을 끌고 나왔다거나 갈등의 주범인 것처럼 소문이 날 것이기에 고민을 참 많이 했다. 그때 자다가 꿈을 꿨다. 어떤 시골에 더러운 웅덩이가 보였다. 너무 더러운 물이었다. 이 물을 깨끗하게 하려고 바가지로 물을 퍼내는데 아무리 퍼내도 깨끗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실망하고 있는데 구석에 조그마한 샘물이 올라오는 게 보였다. 속으로 저 작은 물줄기로 어느 세월에 이 물이 깨끗해지나 좌절하고 있는데, 어느새 깨끗한 물로 변하더라. 큰 깨우침을 준 꿈이었다. 난 뭔가 거대담론과 멋지고 큰 교회를 통해 한국교회가 건강하게 되리라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작은 샘물이었다. 그날로 나에게 요청하셨던 분들과 의기투합해 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교회 개척을 반대하던 아내도 꿈 이야기를 하니 “한번 해보라”고 하더라. 너머서교회의 시작이었다.
- 너머서교회는 일반 언론에서도 주목을 받을 만큼 모범적인 교회 모습을 보여줬다. 그 시작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
사실 마음만 있었지, 답이 없더라. 교인들은 빨리하자고 하는데 한 달 정도 기도하며 책을 봤다. ‘평신도 교회’ 관련 책은 거의 다 읽었다. 교인들과 함께 세워가는 교회였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게 꿈에서 봤던 맑은 샘물이며 건강한 교회의 출발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13주 동안 공부했다. 로버트 뱅크스와 하워드 스나이더, 그리고 송인규 교수의 책을 주로 읽었다. 평신도 신학, 평신도 교회, 교회 운영의 민주화 등에 관한 공부였다. 공부가 끝나고는 함께 교회 정관을 만들었다. 민주적 교회운영의 기틀을 마련한 뒤 공공기관을 빌려 예배를 시작했다. 2007년 12월 첫째주부터 가정에서 예배를 시작했고, 2008년 3월 29일까지 준비모임을 갖다가 하루 뒤인 30일에 창립했다. 어떤 철학이 있어서 개척했다기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 너머서교회에서의 목회는 어땠나? ‘개척’이었기에 새로운 경험이었을 것 같다. 지금의 너머서교회가 있기까지의 이야기를 기억나는 대로 꺼내본다면?
예배장소가 가장 문제였다. 고양시에 있는 모든 학교에 공문을 다 보냈는데 거절당했다. 아는 분을 통해 어느 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을 만나 교회 개척의 뜻을 말씀드렸다. 천주교 신자셨는데 흔쾌히 수락해주셨다. 학교 음악실이었는데, 음향시설, 의자 등 최신 설비가 마련되어 예배당으로 손색이 없었다. 2년 정도 사용하다가 교장선생님이 바뀌면서 이번엔 초등학교 강당을 빌려 쓰게 되었다. 옮기는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교회 원칙 중 하나가 기관을 설립하지 않고 이미 지역사회에서 잘 운영되는 기관을 지원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역아동센터나 여성 쉼터 같은 곳을 지원했다. 나중에 우리가 예배드릴 곳이 없어졌을 때 고양 여성민우회에서 “이런 교회는 사라지면 안 된다”며 장소를 구해주셨다. 지역과 함께 가는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확실하게 느낀 계기였다. 지금은 중학교 건물을 사용한다. 초등학교 건물엔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휠체어 탄 장애인들이 못 올라왔다. 주보만 받고 돌아서시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다. 회의 끝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건물로 옮기기로 했고, 지금의 중학교 건물을 쓰고 있다.
- 교회 건물이 없는 것에 대해 교인들의 불만은 없었나?
건물이 없는 교회가 무조건 좋은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개척 2~3년 후에는 건물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초등학교 건물에서 나와 갈 곳이 정해지지 않은 2~3주 기간에 교인들은 머물 곳이 없어 떠돌아다녔다. 그런데 권사님들이 “길거리에서도 예배드릴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놀랐다. 너무 감동이 돼서 눈물이 다 나더라. 없어 봐야 있음의 소중함도 알고, 없어 봐야 건물의 노예도 되지 않는다.
- 너머서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교회 창립기념 주일에는 어른부터 아이까지 너머서교회를 생각하면 무엇이 떠오르는지를 쓰게 한다. 그러면 거의 모든 교인들이 하나같이 ‘사람’이라고 쓴다. 교회 건물도, 프로그램도 아닌, 사람이 본질이다. 사람이 교회고, 우리가 교회고, 우리가 머무르는 곳이 교회다. 한 사람의 변화가 교회의 변화로 이어지는 교회다.
- 그렇게 좋은 교회를 왜 사임하게 되었나?
첫 번째로는 너머서교회를 위해서였다. 개척 5년째 되니까 ‘너머서교회=안해용’이라는 등식이 굳어지더라. 평신도 중심의 건강한 교회를 세웠는데도 목회자를 따라 리더십이 세워지는 것이다. 개혁 교회의 아이러니다. 너머서교회가 꿈꾸는 평신도 중심 교회로 정말 가려면, 안해용을 넘어서야 너머서교회다. 그래서 사임했다.
- 개인 차원에서 사임을 결정하게 된 이유도 있었나?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다. 이제 막 교회가 알려지고 사람들이 찾아오는데, 이렇게 안정적으로 가는 게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혁 교회의 한계도 보이는데 여기에 매몰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시 내 가슴을 설레게 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고민했다. 여기서 안정적으로 있으면 딸 수 있는 열매는 물론 많아지겠지만 나 자신을 위해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다. 안해용이 건강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도전 말이다.
-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지금 그만두지 않으면 3년 후, 5년 후에는 교인들과의 관계도 그렇고 나도 떠나서 갈 곳이 없을 것 같았다. 새로운 도전을 할 자신감이 사라지기 전에, 일을 저질렀다. 나로선 크나큰 모험이다.
- 자신이 개척했고, 건강한 교회로 이끌어왔다.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나? 보통은 이런 경우 ‘내 교회’라는 생각이 강해질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교회 개척해서 꾸준히 20~30년 목회하는 분들을 존경한다. 그분들의 사역도 귀하다. 떠나지 않으면서도 자기 성찰을 깊이 잘하는 분들이 있다. 그런데 난 그럴만한 그릇이 아니었다.
- ‘평신도 중심의 교회’를 6년 동안 이끌다가 사임했다. 돌이켜 봤을 때 아쉬운 점이 있다면?
평신도가 교회 운영을 책임진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배웠다. 6년 전, 처음엔 내가 운영의 99를 맡고, 평신도가 1을 했다. 점차 비중을 늘려가고자 했지만, 일단 물리적으로 주중에 직장을 다니고 일상을 살아가고, 겨우 주일 하루 시간을 내는 평신도와 주중에 내내 교회에 있는 목회자는 에너지 투여와 속도가 다르다. 그러다 보니 고민도 다르다. 평신도 중심의 교회 운영은 사실 평신도에게 큰 짐이다. 평신도 교회의 이상이나 가치를 현실적인 일궈내는 데에는 많은 노력과 고민이 필수다. 돌아보면 내가 좀 조급했다. 평신도에게 무거운 짐을 지웠다. 반성하는 부분이다.
- 공동체와 단절되었다는 외로움은 없나?
우리는 끊임없이 멘토가 필요하다. 나를 끝까지 지지해주고, 혹시 내가 잘못되면 바로잡아줄 수 있는 멘토(친구) 말이다. 교회를 떠나더라도 나의 멘토를 만나고, 내가 멘토가 되는 그 고리를 계속 이어가려 한다. 너머서교회 마지막 설교에서 이제는 목사와 교인 사이가 아닌, 믿음의 여정을 같이 가는 관계로 계속 함께하자고 말했다.
- 그런 관계가 잘 될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교인 중 결혼 앞둔 청년들 있는데, 내가 주례를 한다. 새로운 목사님 배려한다며 일부러 나를 안 만나거나, 혹은 반대로 애써서 만나려 하거나 그러진 않았으면 좋겠다. 인위적으로 헤어짐의 틀을 만들거나 하고 싶진 않다. 지내온 시간과 추억이 있기에 가다 보면 자연스러운 믿음의 관계가 만들어질 것 같다.
- 사임 후에는 어떻게 지내고 있나?
이 시기가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과도기다.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도움도 요청하고, 고민을 이야기하면서 보낼 참이다. 보통 목사가 목회를 그만두면 위축된다. 그래서 더욱 활발하게 움직이려 한다. 그러다 보면 새로운 길에 대한 가능성도 많이 열리지 않겠나. 안해용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이번 기회에 정리해서 도움이 필요한 곳에 쓰임 받기를 기도하고 있다.
- 구체적인 계획이 있나?
일단은 무계획이다. 모든 가능성을 다 열어놓았다. 기존 교회에서도 청빙이 오면 갈 생각이다. 처음에는 기존 교회에 갈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기존 교회와 새로운 마인드를 섞어서 새로운 교회를 만들려는 마음이 생겼다. 너머서교회를 모델로, 기존 교회의 시스템을 어떻게 바꿀지 모색하는 일도 필요하다. 교인들의 헌신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방법도 찾고 싶다. 이런 길을 가면 후배들이 갈 길이 더 많아질 수 있을 것 같다. 또 다른 실험으로 협동조합이나, 기관 목사, 찾아가는 교회 등 다양한 길을 탐구 중이다.
- 최근 사직한 이들을 섭외해 이야기를 듣는 게 생각외로 어려웠다. 하나같이 “아직 정리가 안 되었다”는 대답이었다. 이유나 사연은 다르지만, 저마다 힘겨운 일이었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나도 지금 때때로 두렵다. 나오면 방법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직 못 찾고 있다. 가정도 책임져야 하는데, 과연 잘한 행동일까 두려움이 엄습한다. 그러나 “대나무가 강한 바람에도 부러지지 않는 이유는 매듭이 많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내 인생의 대나무에도 하나의 매듭이 더 생겼다고 생각한다.
진행·정리 이범진 기자 poemgene@gosc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