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귀숭배론과 천사숭배론의 허구

[278호 김회권 교수의 어거스틴 강독 11]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자연신학 논박

2013-12-31     김회권

아우구스티누스는 8권에서 마귀들이 악한 영이기 때문에 중재자로서의 마귀 숭배를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9권은 마귀들 중에도 어떤 마귀들은 선하고, 또 어떤 마귀들은 악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견해를 소개한다. 저자는 여기서 영원한 지복(至福)을 부여하는 직무는 그 어떤 마귀에게도 속해 있지 않으며,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속해 있음을 확실히 밝힌다.
 
1장. 논의의 현주소 및 앞으로 다루어질 문제
1장은 첫째, 신들 가운데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있다는 견해를 소개한다.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은 “신들”이라는 이름 아래 마귀들도 포함시키며,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신들을 마귀(다이몬)라고 부르기도 한다. 둘째, 어떤 신도 사악하지 않고 선하며 또 선하다고 불리는 사람들보다 훨씬 우수하다고 주장(플라톤주의자들의 견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스스로 마귀들의 행동에 혼란을 느낀다. 그들이 선하다고 주장하는 신들에 의해서는 어떤 무례한 일도 행해질 수 없다고 생각해 신들과 마귀들이 차이가 있다고 가정하고, 무례한 일들의 원인을 마귀들에게만 귀속시킨다. 동시에 그들은 어떠한 신도 인간들과 직접 교제할 수 없기 때문에 이들 마귀들이 기도를 가지고 올라가며 선물을 가지고 돌아오는 중재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저자는 8권에서 기술한 것처럼 스스로 악한 영들이 어떻게 인간들보다 신들에 더 가까이 있고 더 우호적이며 선한 인간들과 선한 신들 사이를 중재할 수 있는지 묻고, 그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함을 다시 확증한다. 9권은 “수많은 신들에 대한 숭배행위가 미래의 삶에서 지복을 얻는 데 어떤 도움이 있는가?”라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든다.

2장. 마귀들 가운데 인간의 혼을 참된 지복의 상태에 이를 수 있도록 보호해주는 어떤 선한 영들이 있는가?
사람들은 흔히 어떤 마귀들은 악하며 또 어떤 마귀들은 선하다고 믿고 있다. 선한 신들에 의해 우리가 용납되며 죽음 이후에 그들과 영원히 살아가기 위해 중재자인 선한 마귀들과 교제를 두텁게 해야 한다는 생각인데, 이를 경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악한 영들의 올가미에 빠져들게 되어, 이성적이며 지성적인 인간의 혼을 지복으로 이끄는 참된 하나님에게서 벗어나 방황하게 될 것이다.
 
악령들과 정념들(3-8장)

3장. 아풀레이우스는 마귀들에게 덕이 있다고는 말하지 않지만, 그들에게 이성이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3세기의 대표적인 신플라톤주의자인 아풀레이우스는 마귀들이 비참한 상태에 있다는 증거를 감출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이성적인 존재라고 믿는 마귀들의 정신이 비이성적인 격정에 저항하기 위한 덕목으로 고취되어 있기는커녕, 어찌 된 일인지 난폭한 감정에 요동되어 어리석은 인간들의 정신과 동일한 수준에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결국은 아풀레이우스가 어쩔 수 없이 인정하듯이 마귀들은 현명한 사람들보다 더 열등하며, 사악함에 서 오래되었으며, 형벌로는 교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오히려 사악한 인간들보다 더 악하다고 할 수 있다. 아풀레이우스가 말하듯, 그들의 정신은 격정적이며 타락한 감정에 저항할 수 있는 진리나 덕성을 지니지 못한 채 격동에 흔들리는 바다이기 때문이다.

마귀는 인간보다 더 불안정한 존재이기에 경배할 수 없다. 우리의 경험도 마귀의 이런 활동을 어느 정도 시사한다. 마귀가 우리를 지배하면 격정에 시달린다. 마음씨 좋은 사람보다 마귀 같은 인간들과 같이 있을 때 우리 안에 동면(冬眠)중이던 야수적 성향의 분출을 느끼지 않던가? 마귀는 진리의 말씀을 들을 때 겸손하게 순복하기보다는 갈릴리 가버나움의 더러운 귀신 들린 자처럼 소리를 지르며 저항한다. “도대체 하나님의 말씀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이런 저항이 속에서 분출한다면 마귀에게 점령당한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

4장. 격정에 대한 소요학파와 스토아주의자들의 견해
격정에 대한 소요학파(아리스토텔레스학파)와 스토아주의자들의 견해를 논박한다. 플라톤주의자들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은 현자들조차 (자신들에게 법을 부과하는 이성에 의해 조절되며 통제된다고 할지라도) 격정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필요한 범위 내에서 제한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현자에게 격정이 찾아올 수 있으나 그는 그것을 억제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스토아주의자들은 현자가 격정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는 견해를 보인다. 스토아주의자 키케로는 《최고선과 최고악에 대하여》(De Finibus)에서 현자는 격정에 휘둘리지 않는다고 본다. 그는 스토아철학자들은 격정을 다스릴 수 있다고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소요학파나 스토아주의자들이 실제에서보다 언어에서 차이를 낼 뿐 두 학파 모두 참된 철학적 현자들은 격정의 지배에서 자유롭다고 주장한다고 보았다(451쪽). 그는 《아티카의 밤》을 쓴 아울루스 겔리우스(Aulus Gellius)가 한 스토아주의 철학자와 여행한 경험을 진술하면서, 폭풍우에 요동하던 배 안에서 그 철학자가 얼마나 격정(두려움과 공포)에 시달렸는가를 익살스럽게 인용함으로써 격정에 시달리지 않는다는 철학자들의 주장의 허구성을 들춘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베르길리우스가 격정에 휘둘리지 않는 정신의 초연성을 이상화한 인물로 로마의 건설자 아이네아스를 찬양하는 시구를 인용한다. “그는 눈물에 의해서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아무리 애달픈 말이라도 동정적으로 듣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스토아철학자들의 이상화된 덕성의 구현이다.
 
5장. 그리스도인들의 영혼을 공격하는 격정은 그들을 악으로 빠지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덕성을 훈련한다
성경의 가르침은 하나님이 정신을 다스리고 도와줄 수 있도록 정신 자체를 하나님께로 복종시키며 격정을 절제하고 억제하고 또 그것을 의롭게 사용하게끔 만든다. 저자는 악한 사람의 행동을 고쳐주기 위해 분노하며,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위안을 주기 위해 슬퍼하며, 위험에 처한 사람을 건져내는 과정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배가 전복당하는 상황에서 동료를 구하려다가 두려움과 동정심 등 격정에 휘둘린 것이 멸시받을 일인지 물으면서, 오히려 명예로운 일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전체적으로 저자는 동정심에 대한 이 스토아적인 멸시를 비판적으로 본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본성을 잃는 의미의 격정에 휘둘리지 않으면서도 악에 대한 거룩한 분노와 가련한 영혼에 대한 동정심을 느끼신다. 악령이나 마귀는 격정에 시달릴지 몰라도 오히려 동정심이나 정당한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경험하는 상당수의 음악, 영화, 애니메이션은 악령 친화적 환경을 조성하는 데 이바지한다. 하드코어 스릴러 영화는 두려움을 자극하지만, 의분과 동정심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한다. 실제 악령은 종교나 정치나 혹은 기업 행위 등 겉으로 볼 때는 정상적인 활동을 매개로 해 인간 영혼을 지배하려고 애쓴다. 영적 장풍과 같은 힘을 발휘하는 사람 중 악한 사람이 많고, 이미 악령에 사로잡혀 온 지 오래된 자일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이 사회의 책임 있는 공적 역할을 맡으면, 사회가 어떻게 되겠는가? 그는 사람들에게 선해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도록 영향을 끼칠 것이며, 기어코 사람들을 악하게 만들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하는 존재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마귀적 격정에 사로잡힌 자들은 자신이 상상할 수 없는 악행에 동참하는 존재다. 이런 마귀적 격정의 파도를 다스리는 능력은 성령밖에 없다. 바리새인들과 마귀는 눈물이 없었지만 예수와 시인들은 눈물이 있었다. 동정심, 의분, 두려움은 격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사람들에게 지극히 정상적인 성령의 활동 증거다.  

6장. 아풀레이우스에 따르면, 신들과 인간들 사이를 중재한다고 가정되는 마귀들을 격동시키는 격정에 관하여
플라톤주의자의 견해에 따르면, 신들과 인간들을 중재한다고 여겨지는 마귀들은 스스로를 이성적인 존재가 되게 하며 실제로 어떤 덕성과 지혜를 겸비하여 혼의 하층 부분을 지시하고 통제함으로써 과격한 감정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영혼의 상층 부분, 즉 마음을 지녔다. 그러나 플라톤주의자들이나 소요학파 공히 마귀들도 격정에 의하여 동요된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귀들의 마음은 두려움과 분노와 정욕 및 이와 유사한 온갖 감정에 종속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저자는 그런 마귀가 욕정과 격정에 시달리는 인간을 위해 신과 인간의 교섭을 중재할 수 있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라고 논박한다.

평소에 인간은 고체 상태로 있지만, 격정에 휘둘리면 액체 모드로 언제든 전환될 수 있다. 아마도 스토아학파는 오욕칠정에 시달리는 기회 자체가 없었던 듯하다. 하나님의 영에 이끌림 받는 성도의 영은 액체 상태의 감수성을 유지하지만, 격정으로부터는 보호받는 상태다. 이것을 ‘성령 충만’이라고 부른다. 고체와 액체 상태가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고체 상태였을지라도, 슬픈 사람을 만나 같이 있어주면 액체(눈물)로 전환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가?

7장. 플라톤주의자들은 시인들에 의하여 신들이 아닌 마귀들이 종속되어 있는 당파심 때문에 신들이 심란해 있다고 설명됨으로써 시인들이 신들을 모욕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아풀레이우스에 따르면, 시인들은 신들과 마귀들을 혼동하도록 조장했다. 시인들이 마귀들에게 신들의 이름을 부여하며 시적인 파격을 이용하여 그들을 아주 변덕스럽게 개개인에 대한 동맹자나 원수로 할당했다는 것이다. 비너스나 마르스가 마치 트로이인들의 동맹자이자 그리스인들의 대적자였던 것처럼, 어떤 마귀들도 자신들이 싫어하는 자들과 싸웠다는 식의 허구적인 이야기들을 지어냈다는 것이다. 결국 플라톤주의자 아풀레이우스는 신들과 마귀들을 구분함으로써 신들의 명예를 보존하려는 셈이다.

8장. 아풀레이우스는 천상에 거하는 신들과 공중을 차지하는 마귀들과 지상에 거주하는 인간들을 각각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아풀레이우스가 정의하는 마귀(다이몬)는 본성은 생물체이며, 혼은 감정에 종속되어 있으며, 마음은 이성적이며, 육체는 공기와 같으며, 지속성에 있어서는 영원하다. 한편 인간은 이성과 언어의 능력을 갖추고, 혼은 불멸하며, 신체는 가멸적(반드시 소멸하는)이며, 성격은 마귀와 다르지만 유사한 잘못을 범하며, 용기는 단호하며, 희망은 집요하다. 아풀레이우스는 마귀들이 신체가 항구적이라는 단 한 가지 항목에서만 선하며, 혼에 관해서는 신이 아닌 인간과 유사하다고 확언한다. 이는 인간이 도달하는 지혜를 소유한다는 점에서가 아닌, 정복하기를 좋아하는 격렬한 감정을 소유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1) 여기서 아풀레이우스가 격렬한 정복 욕망을 마귀의 본질로 본 점은 인상적이다. 마귀는 섬기는 것을 너무 싫어하는 존재다. 결코 굴복과 복종을 모른다. 히틀러나 모택동 류의 인간들 안에는 마귀적 권력의지가 격렬하게 작동했다. 하나님께 경배하는 일은 우리 안의 마귀적 권력욕과 정복 의지를 결박하는 엑소시즘인 셈이다.

영적 중개자들로서의 악령들(9-13장)

9장. 인간은 마귀들의 중재로 신들로부터 우정을 확보할 수 있는가?
마귀들은 혼에서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결함을 가졌으면서, 더 열등한 부분인 육체에서만 신을 닮은 존재이다. 살루스티우스는 “우리에게 있어서 혼은 지배하며 육체는 복종하게끔 되어있다… 우리는 전자를 신들과, 후자를 짐승들과 공유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상대적으로 마귀는 종의 위치에 있는 ‘육체’로는 신들과, 주인인 혼에 있어서는 불쌍한 인간들과 연결되어 있다. 만약 마귀들이 지상의 생물체처럼 죽음으로 혼과 육체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신들처럼 영원하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은 곧 영원한 형벌의 사슬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가멸적 존재인 인간은 다행이다. 죽음이 오히려 필요하다. 인간의 혼은 죽음을 통해서만 갱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10장. 플로티노스에 따르면, 가멸적인 육체를 가진 인간은 영원한 육체를 가진 마귀들보다 덜 비참하다
마귀들은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비참한 혼을 가지고 있으므로 비슷하게 불행할 뿐 아니라, 육체에 영원토록 얽매여 있기에 더욱 더 처참한 형편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플로티노스는 마귀들이 지혜와 경건에 있어서 어느 정도 진보함으로써 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지 않고, 그들이 영원히 마귀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11장. 인간의 혼은 육체로부터 풀려났을 때 다이몬이 된다고 하는 플라톤주의자들의 견해 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혼은 육체로부터 풀려났을 때 다이몬이 된다고 하는 플라톤주의자들의 견해를 논박한다.2) 아풀레이우스는 인간의 혼이 다이몬이므로 선행을 한 경우에는 사후에 라레스(Lares, 수호신)가 되며, 악행을 한 경우에는 레무레스(Lemures, 악령) 혹은 라르바이(Larvae, 악령)가 되며, 어느 경우에 속하는지 명확하지 않을 경우에는 마네스(Manes, 사자[死者]의 혼)가 된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축복받은 자들이 선한 혼, 즉 선한 다이몬들이기 때문에 그리스어로 유다이모네스라고 호칭한다 말함으로써 인간들의 혼이 다이몬이라는 자신의 견해를 확증하고 있다.
 
12장. 플라톤주의자들이 인간과 다이몬들의 본성을 구분하는 세 가지 상반되는 성질에 관하여
아풀레이우스가 말한 인간의 본성과 신들의 본성 사이에 있는 세 가지 상반되는 성질은 첫째, ‘신들은 장소의 숭고함과 생명의 영원함과 본성의 완전함’에 있어서 인간과 다르다. 신들의 거처가 너무나 넓은 간격으로 분리되어 있으므로 신들과 인간 사이의 직접적인 교류는 불가능하다. 둘째, 신들의 생명력은 영원하며 소진될 수 없는 반면, 인간의 생명은 덧없으며 불안정하다. 끝으로, 신의 본성이 지복 상태에서 찬양받는 반면, 인간들의 본성은 비참한 상태에 빠져 있다. 아풀레이우스는 이 세 가지 우월한 성질 때문에 인간은 신들을 찬양한다고 말한다.

13장. 마귀들은 신들처럼 지복 상태에 있지도 않고 인간처럼 비참한 상태에 있지도 않다. 이처럼 양자와 아무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신들과 인간들을 중재할 수 있겠는가?
마귀들은 신들처럼 지복 상태에 있지도 않고 인간처럼 비참한 상태에 있지도 않으며 양자와 아무런 공통점도 없기 때문에 신들과 인간들 사이를 중재할 수 없다. 플라톤주의자들이 말하듯이 선한 마귀들이 불멸적이기도 하고 복되기도 하다면, 불멸적이며 복된 신들과 가멸적이며 비참한 인간 사이에서 어떻게 중간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는가? 악한 마귀인 경우에는 감정에 격동된다는 점에서는 인간과 가깝기에 신들과 인간 사이를 중재할 수 없고, 선한 마귀의 경우 지복의 상태(유다이몬)에 있어 영원토록 복되다면 오히려 이 경우는 인간들과는 영원히 멀어지게 되고 신들과 아주 가까워진다. 이 경우에도 마귀들은 신과 인간 사이를 중재할 수 없다. 이래저래 플라톤주의자들은 마귀들이 신들과 인간 사이를 어떻게 중재할 수 있는지를 효과적으로 논증하는 데 실패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논박은 참으로 논리적이며 아름답다.

또 다른 중개자의 가능성(14-15장)

14장. 인간이 가멸적이면서도 참된 복을 향유할 수 있는가?
인간이 가멸적이면서도 복될 수 있는지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가멸적인 생명 속에 계속 남아있는 한 복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또 스토아주의자들은 인간이 비록 가멸적이지만 지혜를 획득함으로써 복될 수 있다(유대교와 가까워짐)고 주장한다. 전자와는 가멸성을 공유하고 후자와는 복된 상태를 공유하는 이런 지혜 있는 인간은 어째서 비참한 가멸적 존재와 복된 불멸적 존재 사이의 천부적인 중재자가 될 수 없는가? 그들은 사후에 불멸적인 존재가 되며, 복되며 불멸적인 천사들과 연합하게 만드는 중재자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저자는 왜 플라톤주의자들이 이런 적합한 인간 중재자를 제쳐놓고 마귀들의 중재 역할을 강조하느냐고 힐문하는 셈이다.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질문은 스토아주의자들의 논리적 허점을 공격한다. 지혜 있는 인간이 불멸적 존재와 가멸적 존재를 중재한다는 사상은 곧 가톨릭교회의 천사숭배, 성인숭배로 이어진다. 이런 점에서 가톨릭 신학은 여전히 플라톤철학을 닮았다. 모든 성자를 하루에 한꺼번에 기리는 것이 만성절이다. 각 성인마다 축성일을 지키는 가톨릭교회의 통속적 영성은 바로 이런 인간 중재자론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15장.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인 인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저자는 이 장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인 인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논한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이 가멸적이며 비참하다는 사실이 아주 그럴듯하고 신빙성 있다면, 필연적으로 인간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기도 한 중재자를 찾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으로써 말씀의 신성을 약화시키지 않고 육체의 연약함을 취하였다. 그렇지만 그분은 육체의 죽음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고,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했다. 그 결과 바로 그분의 중재 열매로 그분의 대속적 중재 사역을 덧입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육체의 죽음 안에 영원히 거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는 일시적인 죽임을 당하는 동시에 영원한 복을 누림으로써, 일시적인 것을 통해서 죽을 운명을 지닌 존재들과 자신을 일치시켰으며, 부활을 통해서는 그들을 죽음으로부터 영원한 상태로 인도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을 위축되게 만들 수 있는 그리스도의 죽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죽임을 당했으나 복된 중재자는 스스로 죽음을 경험했으므로 죽을 존재들을 불멸하도록 만들며(그분은 부활로써 이런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보이셨다) 그 자신이 결코 분리된 적이 없는 복을 비참한 자들에게 부여하기 위하여 중재자가 되었다(영지주의가 여기에서 나온다). 

오늘날 《하나님의 도성》 독자들이 15장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골로새서의 정통 주장, 즉 그리스도의 중보자적 충족성과 으뜸성을 파악해야 한다. 골로새서는 플라톤적 영지주의에 대한 응답이다. 본성상 신이 자기 주체성을 유지하려면 인간과 접촉하면 안 된다는 플라톤의 주장과 달리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성육신시키셨다. 이 경우 신성의 감가상각이 일어났는가?(빌 2:6-11, 케노시스 이론) 결코 아니다. 신성은 억제되고 은닉되었을 뿐 그리스도의 신성은 성육신을 통해서 손실이나 감축이 없었다. 우리 하나님은 이사야 57:15이 증언하듯이 인간과 접촉한다고 해서 그 신성(신적 위엄과 영광)이 훼손되지 않는 분이다. 결론적으로 15장은 골로새서를 공부할 때 매우 중요하다. 어쩌면 9권 전체가 골로새서의 보충 강해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간단히 말해 골로새서는 천사들보다 나은 예수님에 관한 말씀이다(466쪽). (특히 골 1:15-17, 2:15, 2:8, 2:10, 3:1)

골로새서와 요한복음 또한 중재신학을 강조한다. 요한복음의 논리도 인간인 동시에 신이어야 인간과 신 사이의 중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요한복음은 플라톤철학에 대한 응답일 수 있다. 참 하나님이면서, 참 인간인 예수만이 신과 인간 사이를 중개할 수 있다는 주장은 얼마나 감동적인가?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것이 아니다. 예수의 죽음은 인간다움을, 예수의 부활은 신다움을 보여준다. 플라톤철학에서 신들은 인간과 교섭하는 순간, 그 신성은 감소한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비통한 자와 함께 있으면서도 신성을 잃지 않는 거룩한 하나님이시다.

중재자 신은 없다 (16-18장)

16장. 천상의 신들은 지상적인 일들과 접촉하지 않으려고 하며 인간들과의 교제를 거절하고 따라서 마귀들의 중재를 요구한다고 확정 지은 플라톤주의자들은 타당한가?
플라톤주의자들이 플라톤이 말했다고 단언하는 견해, 곧 “어떠한 신도 인간들과 접촉하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플라톤 자신은 인간과의 접촉으로 신들이 결코 오염되지 않으므로 이것이 오히려 인간이 신들을 찬양하는 주된 증거라고 말했다. 마귀들의 경우에는 인간과의 접촉 때문에 오염되고 동료들과의 접촉으로 불결해진다. 따라서 마귀들은 자기들의 오염물질을 전달받은 인간을 정결하게 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들은 인간과 접촉함으로써, 인간은 마귀들을 숭배함으로써 똑같이 서로 불결해진다. 혹 인간과 접촉하고도 더럽혀지지 않는다는 것은 마귀들을 신들 위에 올려놓은 셈이 된다. 오염된 다이몬(마귀)이 신들과 인간 사이를 중재한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17장. 최고의 선에 참여함으로써 가능한 복된 생명을 얻기 위하여, 마귀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에 의한 중재를 필요로 한다
인간의 혼은 순간적이고 가변적인 것을 갈망하는 만큼 비물질적이며 불변하는 영원한 존재인 신과 덜 닮게 된다. 인간은 육체에 의해 오염될 수 없는 참된 신성과 인간의 연약함을 취하는 중보자를 원한다. 육체의 죽음으로 가멸적 인간과 연합되는 동시에 영원한 성령의 의에 의해 인간에게 진정 신적인 도움을 제공하여 인간을 정결케 하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중보자를 원한다. 성경이 말하듯 그분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딤전 2:5)이다.

18장. 속이기 잘하는 마귀들은 자기들의 중재로 인간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겠다고 약속하고는 그들을 진리의 길로부터 돌이키게 하려고 꾀한다
거짓되고 속이기 잘하는 중재자인 마귀들은 영이 불결하므로 종종 그들의 비참함과 사악함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공기처럼 가벼운 신체와 그들이 거주하는 장소(신들의 영역인 에테르와 인간의 영역인 땅의 중간영역인 공중 거주자)의 성질을 이용하여 우리를 빗나가게 하고 우리의 영적인 성장을 저지하기 위해 궁리한다. 마귀들이 제시하는 육적인 방법으로는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다. 우리는 육체의 상승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비육체적이거나 영적인 순종에 의해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천사들과 교제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오염의 정결을 받을 것이며 마귀들과의 접촉을 통한 오염을 피하고자 애 쓸 것이다.

거룩한 천사들(19-23장)

19장. 숭배자들 사이에서조차도 ‘다이몬’(마귀)이라는 명칭은 결코 좋은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라베오 같은 마귀숭배자들은 자기들이 다이몬이라고 부르는 존재를 다른 사람들은 천사라고 부른다고 말한다. 플라톤주의들은 선한 천사들의 존재를 부인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그들을 선한 마귀(다이몬)라고 부르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성경은, 천사들 중 일부는 선하며 일부는 악하다고 말하나 선한 마귀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단지 유사한 다른 용어가 악한 영들에게만 적용되는 바, 따라서 마귀와 천사는 다른 존재다. 심지어 이교도라고 불리는 마귀숭배자들도 학식과 교육의 정도와 상관없이 자기 노예에게 칭찬의 말로서 “너는 다이몬(악령)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또 그런 말을 저주로 간주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이몬이라는 용어 사용을 자제하고 대신 ‘천사’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편이 낫다고 본다. 
 
20장. 마귀들을 교만하게 만드는 지식의 종류에 관하여
마귀들을 교만하게 만드는 지식의 종류에 관하여 논한다. 마귀(다이몬)들은 지식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단어(다에몬)로부터 그 이름을 얻었다. 바울은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고전 8:1)라고 말한다. 지식이 사랑을 결여하면 아무 소용이 없고 단지 사람들을 우쭐하게 만들거나 공허한 망상으로 거드름을 피우도록 만든다. 마귀들은 사랑이 없는 지식을 소유하고 있고, 이로써 아주 우쭐해하거나 교만하다. 

21장. 주님이 자신을 귀신들에게 알리기를 어느 정도까지 원했는가?
귀신(다이몬)들은 징벌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두려워하면서, 그분의 의를 사랑하지는 않았다. 그분은 스스로 원했던 만큼 많이 귀신들에게 자신을 알렸고, 필요한 만큼 그렇게 알리기를 기뻐했다. 그분은 귀신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서 필요한 만큼 알려졌다. 왜냐하면 그분의 목적은 영원토록 진실하며, 영원한 그분의 왕국과 영광을 위하여 예정된 자들을 귀신들의 포악한 권세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22장. 거룩한 천사들과 마귀들의 지식의 차이
선한 천사들은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시간적이며 가변적인 일의 원리와 원인을 바라보기에 확실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반면 마귀들은 기본적인 이런 원인들을 하나님의 지혜 안에서 바라보지 않고, 단지 인간에게는 감춰진 어떤 징후들을 더 잘 안다는 이유로 인간보다 더 많이 미래에 대해 예견한다. 또 때때로 그들이 예언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의도이기도 하다. 시간적이며 가변적인 일들의 도움을 받아 시간 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변화를 추론하고 또 자신의 의지와 능력에 의해 그런 일들을 변화시키는 일, 그것은 마귀들에게 어느 정도 허락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지혜 안에 남아 있는 영원하며 불변하는 법 안에서 시간의 변화를 예견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영에 참여함으로써 모든 원인 중에 가장 오류가 없으며 가장 강력한 하나님의 의지를 아는 것, 그것은 거룩한 천사들에게 위탁된 능력이자 역할이다.
 
23장. 성경이 신들의 이름을 거룩한 천사들과 의로운 인간 모두에게 적용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이방인의 신들에게 부여하는 것은 잘못이다
시편 9:4에서 기자는 하나님을 “모든 신보다 경외할 것이여”라고 노래했지만, 뒤따라 나오는 “만방의 모든 신”이 참된 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만방의 모든 신은 명칭상으로 신이라고 지칭되지만 사실상 헛것이라고 불리고 있기 때문이다. 만방의 모든 신 안에는 사실상 마귀들이 다 포함되어 있다. 헛것으로 불리는 마귀들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에 맞서서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막 1:24)라고 부르짖으며 공포심으로 떨며 그분을 두려워했다. 시편 50:1 등이 야훼 하나님을 “신들 중에 신”이라고 했을 때, 그것을 마귀들의 주재자로 볼 것도 아니며 마귀들을 신으로 이해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모든 신 위에 크신 왕”이라는 말이 “모든 마귀들 위에 크신 왕”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없지 않은가.

결론
아우구스티누스가 내리는 마귀의 정의를 파악해야 9권의 중심 논지를 바로 이해할 수 있다. 플라톤주의자들이 말하는 마귀는 선한 천사와는 다른 존재다. 플라톤철학에서 마귀는 다이몬으로, ‘알다’라는 뜻의 ‘다에몬’이라는 동사에서 나왔다. 그러니 다이몬은 ‘아는 자’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에 나오는 다이몬은 무지를 일깨우는 공중 영들이다. “내 육신의 감옥을 벗어나면 다이몬과 하나가 된다”는 표현에서 보듯 플라톤주의자들이 말하는 마귀는 신약에서 말하는 마귀와는 다른 플라톤적 중립적 중개 영들이다. 플라톤주의자들이 말하는 마귀들과 유사한 역능을 구사하는 영적 존재는 성경에서 말하는 타락한 천사들이다(《하나님의 도성》 11권, 14권에서 더 자세히 논증).

《소크라테스의 변명》에 나오는 다이몬은 무지를 알게 하는 좋은 다이몬인 것처럼 보이나, 전반적으로 플라톤철학이 말하는 다이몬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립적, 심지어 악마적 신적 중재자로 설정된다. 9권에서 시종일관 비판받는 아풀레이우스류의 플라톤주의 철학은 천사숭배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것이 유대교와 접촉하면 영지주의적 천사숭배론으로 발전된다. 플라톤철학은 신과 인간은 절대로 직접 교섭할 수 없다는 초월주의적 신관에 기대고 있기 때문에 천사중재론이 부각될 수밖에 없다.3)

굳이 여기서 성경의 은유를 적용하자면 이 신적 중재자가 하나님으로 향하는 경배를 자기 쪽으로 끌어갈 때 마귀가 된다. 에녹서, 유다서 6절, 에스겔 28장(두로 왕), 이사야 14장(바벨론 왕) 등을 천사장 루시퍼의 타락 이야기로 읽으려는 조직신학자들의 집요한 경향이 이런 플라톤적 마귀론과 융합되어 기독교 조직신학에 슬그머니 들어왔다. 이 몇몇 외경과 성경 구절이 마귀론(마귀는 타락한 천사장)의 기초가 된다. 즉 천사장이 하나님과 보좌를 다투다가 마귀가 되었다는 것이다(존 밀턴의 《실낙원》). 하나님과 신적 대권을 다투는 자가 마귀다(마귀 이해를 돕는 성경 구절은 요한1서 3:8; 막 1:24; 눅 11:20-22; 11:24-26; 창 11:3-4).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할 것은 9권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철학의 다이몬 사상과 유대교 천사론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천사와 마귀의 차이와 공통점을 정면으로 논하기보다는 두루뭉술 넘어간다. 분명한 것은 플라톤주의자들이 말하는 마귀(다이몬)보다 성경의 마귀가 훨씬 더 개성적이고 목적론적이라는 사실이다.

성경의 마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재하는 영이 아니라 이간질하는 불결한 분리의 영이다.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마귀는 인간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인간을 지배하려는 존재다. 사람이 마귀의 시험을 받는 것은 마귀와의 의사소통적 친화성이 허락되었기 때문이다. 마귀친화적인 친족성은 마귀에게 우리 인간 영혼의 처소를 내어주는 마귀 영접이다. 마귀는 인격에 들어오자마자 인격의 자존성과 독립성을 파괴하며 장악한다. 정복하기를 좋아하는 마귀는 전적 경배를 요구하고 협박하며 우리 인격과 개성을 말살해 버린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격적 자존과 존엄, 개성을 그대로 보존해주신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면 우리는 개성적이면서 연합적인 존재가 되지만, 악령이 임하면 인격이 말살되고 만다.4)

바벨탑 축조세대는 하나님의 신적 대권에 도전하다가 몰락했다. 신적 불멸성에 도전하다가 망한 아담과 하와의 DNA가 그들에게도 유전되었다(창 3장-아담이 받은 유혹). 그들은 신적 불멸성을 얻기 위해서 열매를 탈취했다(빌 2:6-7). 빌립보서 2:6-7은 ‘탈취하다’ ‘강탈하다’라는 동사를 부각시킨다. 아담과 하와와는 달리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강탈하지’ 않고, 죽기까지 복종함으로써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 이처럼 마귀를 이기는 길은 극단적인 자기부인뿐이다. 마귀나 귀신의 문제는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영의 문제다. 영이 불결하기 때문에 도덕이 부패하는 것이다. 마귀는 거짓된 형식으로 불멸성을 추구한다.

마귀의 특징은 하나님과의 무연관성을 주장한다는 점이다. 마가복음 1:24은 마귀의 자율왕국 주장 의지를 보여준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예수와 상관없다고 거부하는 것이 마귀의 특징이다. 말씀을 들을 때 나와 상관없다고 거부하고 불순종하는 것이 마귀적인 것이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께 저항하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마귀적 무신론은 중립적?도덕적 인식론이 아니라 하나님과 상관없음을 나타내는 마귀적인 권력의지의 표상이다. 이와 달리, 진정한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 놀라고 찔리는 경험에서 비롯된다. 마가복음 1:27에 나오는, 마귀마저도 순복시키는 겸손한 하나님의 아들의 눈부신 영광과 권능을 보라.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 도다 하더라.” 마귀의 특징은 혼나면 딴 교회로 가버린다. 끝내 하나님 아들의 권위에 순복하지 않는다.

마가복음 1:21-23은 귀신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 저항하는 상황을 보여준다.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설교를 들어도 전혀 변화가 없는 유형)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정상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 복음을 듣고 감동하고 순복한다. 그러나 마귀는 두려워서 소리 지르다가 어쩔 수 없이 항복한다.

누가복음 10:17-20은 제자들에게 위임된, 귀신을 무장해제시키는 사도적 영권(靈權)을 보도한다.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우리는 어떻게 마귀를 제압할 수 있을까? 첫째, 하나님의 거룩한 자가 됨으로써 가능하다. 둘째, 하나님 말씀의 검으로 마귀를 제압할 수 있다. 셋째, 기도를 통해 공중권세 잡은 자의 비행금지 구역을 정하고, 마지막으로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령하여 물리치면 된다. 거룩한 자만이 악의 동선을 민감하게 감지한다. 말씀 충만, 성령 충만이 아니면 휘두를 수 있는 검이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김회권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서 공부했으며, ESF(한국기독대학인회)에서 회심하고 신앙 훈련을 받은 뒤 11년간 ESF 간사로 섬겼다. 장신대 신대원을 나와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성서신학석사 및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모세오경 1, 2》 《김회권 목사의 청년설교》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사도행전 1, 2》 등 다수가 있다.
 

각주)-----------------
 김종흡, 조호연의 번역본을 읽을 때는 반드시 영역본이나 다른 한국어역본을 참조하여야 한다. 이 장도 중요한 내용이나 번역은 아쉽다.
 플라톤의 대화록,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소크라테스가 펼치는 반복된 주장이 바로 이것이다.
 어떤 점에서 플라톤의 마귀론은 김기동의 마귀론과 같다. 귀신의 수는 제한적이다. 김기동은 죽어서 천당을 가지 못하는 혼들을 마귀라고 본다. 이런 귀신론은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면 가톨릭의 성자숭배 사상과도 관계가 있다.
 마귀적 존재의 또 다른 이름이 귀신이다. 귀신과 마귀는 인간을 공격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이다. 어떤 점에서는 마귀에게 공격당할 수 있는 존재론적 취약성을 가진 인간 육체의 가멸성은 오히려  감사한 일이다(인간이 귀신들의 처소가 될 수 있다는 성경 구절은 눅 11:14-26[24-26]; 마 12:22-30, 43-45; 막 3: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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