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세계관운동, 삶으로 응답한 밴쿠버의 한국인

[279호 편들고 싶은 사람] 설립 15주년 맞은 VIEW(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설립자 양승훈 교수

2014-01-24     이강일

▲ 사진제공: VIEW

한 분야의 명망 있는 학자가 20년 넘게 확신하고 전파하던 생각을 바꾸기가 과연 흔한 일일까? 얼굴이 붉게 달아오를 수치를 어떻게 견디며, 왜 그랬냐며 차갑게 돌아설 동료들은 또 어떻게 볼 것인가? 그런데 그 일을 실제로 한 이가 있다. 2008년 3월 복음과상황 특집 “한 창조론자의 회심을 옹호하며”에서 자신을 ‘프라이드를 탄 돈키호테’라고 불렀던 양승훈 교수다. 그가 원장으로 섬기는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에서 1년간 공부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그 1년 동안 그의 삶을 가까이에서 보면서 배운 소명자의 헌신, 학자적 양심, 농부의 인내를 독자들과 긴밀히 나누고 싶었다. 이 인터뷰는 작년 여름 서울에서 진행되었으며, 그 후로도 이메일을 주고 받으며 보완한 것이다.

어떤 일을 해오셨는지 소개해달라.
경북대 사범대 물리교육과에서 14년 동안 일하면서 물리학, 과학사, 과학교육을 가르쳤다. 캐나다에 온 1997년부터는 기독교세계관, 창조론,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과학사 및 과학철학, 기독교적 환경관을 가르쳐 왔다. 가르치는 과목은 다양했지만, 주된 연구는 역시 창조론에 집중되어 있다. 나는 30년 이상 줄곧 창조의 과학적 연구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지난 15년간 밴쿠버에 소재한 트리니티웨스턴 대학교(TWU, Trinity Western Univ.)의 ACTS 세미너리 산하 VIEW(Vancouver Institute for Evangelical Worldview)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그리고 성경해석학 팀티칭에 참여하면서 창조론의 성경해석학적 측면에 관심이 많아졌다. 그러면서 창조과학의 문제가 과학의 문제이기 이전에 치우친 성경관의 문제임을 알게 되었다. 아무튼 캐나다에 간 이후에는 창조론 연구와 박물관 탐사, 집필 등의 일을 계속해오고 있다.

때늦은 질문이지만 약 10년 전, 복음과상황에서 종래의 기독교세계관운동을 비판한 적이 있다. 이제라도 한 말씀 부탁드린다.
당시 한국에서 기독교세계관운동 1세대에 속했던 분들 중에는 답변한 분들이 없었던 것으로 안다. 아마도 다들 논쟁이 핵심에서 비껴나는 듯해서 언급하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기독교세계관은 학문적 연구 주제일 수 있지만, 세계관운동은 학문 운동이나 신학운동이기 이전에 ‘’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삶을 말씀의 기초 위에 세우고, 말씀을 삶 구석구석에 적용하자는 운동 말이다. 거기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렇게 하는 데 있어 신칼빈주의와 같은 특정한 신학적 틀로 세계관의 기둥을 세우는 것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세계관운동은 화란 개혁주의 외에 들고 나온 신학 전통이 없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나는 기독교세계관을 넓게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록 화란 개혁주의자들이 제시하는 ‘창조-타락-구속’의 틀이 아니더라도 말씀을 우리 삶 전반에 균형 있게 적용할 수 있는 또 다른 틀이 있다면 그것 역시 원리적으로 기독교세계관운동의 틀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아직 그런 틀을 보지 못했지만….

당시 비판은 기독교세계관운동이 너무 원론만 반복해오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일리가 있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한국 기독교 지성의 역사가 일천함을 인정해야 한다. 한국에서 기독교세계관운동이 시작된 게 1980년 무렵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운동을 촉발시킨 책들은 거의 대부분 서론에 해당하는 번역서들이었다. 90년대 이후에야 기독교세계관 분야에서 한국인의 저술이 나오기 시작했다. 따라서 10여 년 전에 한국의 세계관운동이 원론에 머문다고 비판한 것은 성급한 태도라고 본다.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원론이 없이 실천이라는 열매는 존재할 수 없다. 물론 여전히 원론적인 연구가 부족하지만 2천 년대 들어와서는 세계관운동이 조금씩 삶의 영역으로, 실천의 문제로 확산되고 있다. 한 예로 근래에는 기독교 학교나 대안학교 등을 중심으로 교육 분야에서 기독교세계관운동의 적용이 담긴 성과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정치나 경제 분야는 아직 미진하지만, 문화나 사회 분야에서는 세계관적 실천들이 나름 싹을 틔우고 있다고 본다.

▲ ⓒ복음과상황 오지은

초창기 기독교세계관운동 상황으로 돌아가 보면, 교수님은 80년대 한국의 기독교세계관운동이 어떻게 시작됐는지를 아는 세대에 속한다. 초기에 어떻게 관련 운동들이 시작되었나?
나는 대학 다닐 때 SFC 활동을 했고, 고신측 교회를 다녔다. 세계관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진 것은 1978년에 홍릉에 소재한 한국과학원(카이스트 전신) 물리학과에 입학한 이후였다. 내가 세계관에 관심을 갖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은 미국인 문서선교사 원이삼(Wesley Wentworth) 박사님이었다. 원 선교사님이 소개하신 반 리센(Hendrik van Riessen)의 《과학에 대한 기독교적 조망》이라는 영문 소책자를 읽은 게 내가 기독교적 학문과 세계관에 눈을 뜨게 하는 방아쇠 역할을 했다. 그 후 송인규 교수님의 《죄 많은 이 세상으로 충분한가?》라는 소책자를 비롯, 사이어(James Sire), 미들턴(Richard Middleton), 왈쉬(Brian Walsh), 월터스(Al Wolters), 쉐퍼(Francis Schaeffer) 등의 북미주 학자들의 책을 접하게 되었고, 오창희, 양성만, 김헌수, 황영철 형제 등과 더불어 연구회를 시작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를 전후하여 한국에서 창조과학운동도 시작되었는데 창조과학도 기독교적 관점의 학문이라고 생각해서 적극 참여했다. 창조과학은 1980년 8월에 열린 세계복음화 대성회의 분과 집회에 초청을 받은 미국 창조과학자들(Henry Morris, Duane Gish, Charles Thaxton 등)의 시리즈 세미나를 통해 소개되었다. 그 집회를 계기로 한국에 창조과학 모임을 결성하기 위한 준비모임이 시작되었고, 81년 1월 김영길 박사(한동대 전 총장)의 주도로 한국창조과학회가 창립되었다. 나는 창조과학의 선명성에 매료되어 창조과학회의 준비모임부터 시작하여 창립총회와 이후의 이어지는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이어 1981년 3월에는 한국과학원 교회를 중심으로 기독교대학설립동역회(기대설)가 학생들의 기도모임으로 시작되었고, 1984년에는 몇몇 대학원 학생들을 중심으로 기독교학문연구회(기학연)가 시작되었다. 처음엔 기학연 모임에도 참여했지만 지리적으로 대구에 있었고, 기대설 활동과 병행하는 것도 어려워서 기학연 활동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진 못했다. 기대설과 기학연은 둘 다 기독교세계관운동을 위해 시작되었지만 기대설은 대학을 만드는 일에, 기학연은 세계관 연구를 하는 일에 열심을 냈다. 나는 1983년부터 경북대 교수로 부임했고, 대구를 거점으로 기대설 사역과 더불어 창조과학회 대구경북 지부를 창립하여 창조과학 사역을 펼쳐나갔다.

그토록 열정적으로 섬기고 활동하신 창조과학회와 2008년 무렵 결별하셨다. 어떤 계기가 있었나?
사실 창조과학에 대해 한 점 의심도 없었던 시기는 1980년부터 1986년까지였다고 할 수 있다. 1986년에 나는 한국과학재단 지원으로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박사후과정을 하고 있었다. 그때 아내가 인근 휘튼대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휘튼대학 아파트에 살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곳 교수님들과 교제할 기회가 있었는데, 놀랍게도 이분들 모두 창조과학의 주장은 성경적이지 않다고 했다. 게다가 인근에 있는 트리니티 신학교(TEDS) 교수들조차 창조과학의 주장이 성경을 잘못 해석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처음에는 그분들의 얘기를 듣고 분노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복음주의 진영의 대표적인 전문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창조과학을 비판하는 것은 뭔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 ⓒ복음과상황 오지은


그 후 1990~1992년까지 미국에서 대학원 학생으로서 과학사(위스콘신대학)와 신학(휘튼대학)을 전공하면서 창조과학의 역사적 배경과 신학적 측면을 공부할 기회가 있었다. 이 공부를 통해 창조과학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귀국해서는 물리학 교수로 학교 일에 전념하면서 그 문제를 심층적으로 연구하질 못했다. 그러다가 1997년, VIEW 사역 차 밴쿠버로 떠났고 이때부터는 창조론 공부에 어느 정도 전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창조과학이 틀린 건 분명해 보이는데, 그 대안이 없었다. 그러다가 2003년, 우연한 기회에 200여 년 전에 다중격변론을 주장했던 프랑스 창조론자 퀴비에(Georges Cuvier)가 쓴 책의 영문판을 읽게 되었다. 그 책을 읽으면서 번개처럼 어쩌면 이것이 창조과학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시 파악한 창조과학의 문제는 무엇이었나?
창조과학의 핵심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우주와 지구와 인류의 연대가 모두 6천 년이라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지표면의 지층과 화석 대부분은 지금부터 4,400여 년 전에 10개월 반 동안 지속된 노아의 홍수 때 형성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우주가 6천 년 되었다는 주장(젊은 우주론)은, 과학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성경적으로도 분명한 근거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지층과 화석이 노아의 홍수라는 일회적이고 전 지구적 격변에 의해 모두 형성되었다는 주장(단일격변설)은 초보적인 지질학 공부만 해도 전혀 말이 안 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전문적인 문헌들을 공부하면 할수록, 그리고 탐사여행을 하면 할수록 젊은 우주론과 단일격변설은 과거 천동설이나 평면지구설 수준의 주장임이 점점 더 분명해져 갔다. 이런 와중에 다중격변모델을 만나게 된 것이다. 나는 다중격변모델을 통해 이 두 가지 딜레마를 동시에 해결할 가능성을 보았고, 이 모델을 다듬기 시작했다. 퀴비에 시절에는 전무했던 천문학적 증거들을 위시하여 근래 지구과학 연구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출간한 책이 《다중격변창조론》(SFC)이다. 이 책은 노아의 홍수만으로 지구의 모든 역사를 설명하려던 기존의 단일격변설을 확장하여 다중격변설로 지구의 역사를 쓴 창조론 연구서이다.

창조과학의 문제점을 확인한 후 어떻게 하셨나?
내가 직면한 첫 번째 문제는 자책감이었다. 명색이 물리학 교수라는 사람이 조금만 진지하게 공부했다면 금방 알 수 있었던 문제를 두고 20년 이상의 세월을 보냈다는 게 너무나 부끄러웠다. 창조과학의 핵심 주장이 잘못된 것 같기는 한데 대안을 찾지 못해서 고민하는 동안 20년의 세월이 흘렀고, 그동안 창조과학과 관련된 몇 권의 책을 냈고, 1,000여 차례의 창조과학 대중강연을 한 것이다. 그중 “창조론 대강좌”는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창조과학 교과서였다. 하지만 이렇게 창조과학 활동을 활발히 했다는 게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 그래서 견디다 못해 늦었지만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뭔가 사죄의 표시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2006년 블로그에 ‘한 창조론자의 회개’이라는 글을 발표했다(복상에도 전재). 이 글은 순전히 내 자신에 대한 비판이고 책망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창조과학회를 매우 아프게 하는 글이 되어버렸다. 그 일로 젊은 시절의 정열을 불태웠던 창조과학회를 떠나게(쫓겨나게) 되었고 여러 친구들과도 교류가 끊어지게 되었다.

창조과학회와 결별하신 후에 별다른 활동은 안 하셨나?
나는 공부와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가르치고 글로 쓰고 있다. 한 가지 새롭게 시작한 일을 든다면, 2007년 여름부터 창조론 오픈포럼이라는 모임을 시작해서 일 년에 두 차례 씩 모이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 내 사죄의 가장 가시적인 열매일지도 모른다. 지난 6년 동안 총 13차례 포럼을 열었고, 이제 2014년 2월 15일 대광고등학교에서 제14회 포럼을, 제15회 포럼을 평택대에서 개최하기 위해 준비중이다. 나는 조덕영 박사와 더불어 포럼에서 발표된 논문들을 편집하여 논문집으로 출간하는 일을 맡고 있는데, 지금까지 100여 편 이상의 논문들이 발표되어 논문집 혹은 지식콘텐츠 DB업체인 누리미디어를 통해 보급되고 있다. 감사하게도 작년 전반기 6개월간 누리미디어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1만 1,300명이 논문을 유료 다운 받았고, 창조신학연구소 홈페이지를 통해서는 10만 명 정도가 다운을 받았다.

▲ ⓒ복음과상황 오지은

한국창조과학회의 활동이 교회나 선교단체의 전도 집회에서 비신앙인들의 마음을 바꾸는 데 아주 효과적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도 문제가 되나.
그동안 창조과학운동이 그리스도인들의 지적 콤플렉스 해소와 전도에 일정 부분 도움이 되었음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창조과학회의 편향된 성경관과 과학관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창조과학이 주장하는 많은 부분이 과학적으로나 성경적으로 별 문제가 없지만, 핵심 주장인 젊은 우주론과 단일격변설은 명백하게 밝혀진 과학적인 사실들과 곳곳에서 충돌한다. 구원의 계시로 주어진 성경을 과학의 기초 데이터를 제공하는 교과서라고 말하면서, 대다수 주요 복음주의 신학자들의 성경 해석을 배격하는 극단적 태도도 문제다. 성경에 지구와 우주의 연대, 지층 얘기가 있는 게 아닌데….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주장을 절대화한다는 사실이다. 사도신경의 내용은 신앙고백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우주의 연대 따위는 신앙고백의 대상이 아니라 연구의 대상일 뿐이다!

만일 지질학이나 천문학 등에 대해 잘 모르는 중고생들에게 우주는 6천 년 되었고, 지구 역사에는 노아의 홍수라는 한 차례의 전 지구적 격변만이 있었다며, 이것이 성경의 내용이라고 가르친다고 생각해보자. 그 학생들이 나중 대학에 가서 지질학이나 천문학 등을 전공한다면 어떻게 될까? 세 가지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첫째는 성경을 던져버리거나, 둘째는 믿음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과학을 버리고 도피하거나, 셋째는 과학과 성경은 별개의 영역이라고 보는 이원론을 취할 것이다. 이미 지난 30여 년간 뿌린 창조과학의 후유증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래도 어떻게든 예수만 믿으면 되지 않느냐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이 나중 진실을 알았을 때 일어날 후폭풍을 생각해야 한다. 그때는 복음 변증의 길이 막힐 것이다.

여전히 한국창조과학회는 우리나라 기독교계를 선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 창조과학운동의 방법론이 학회나 논문이 아닌 대중강연이기에 다수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창조과학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창조과학자들의 순전한 열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가 아니지만, 무엇보다 편향된 신학과 성경관을 우려한다. 창조과학자들은 복음주의 진영의 주요 리더들의 견해를 배격하고 전투적인 근본주의 진영의 색깔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들은 19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이자 다윈 진화론을 가장 탁월하게 반박했던 하지(Charles Hodge), 탁월한 보수주의 장로교 신학자였던 워필드(B.B. Warfield), 20세기의 가장 탁월한 구약학자이자 고든-콘웰의 총장이었던 카이저(Walter Kaiser), 트리니티 신학교의 보수적인 구약학자 아처(Gleason Archer), 6천 년/대홍수설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타협자라고 비난한다. 그뿐 아니라 쉐퍼(Francis Schaeffer), 가장 탁월한 복음주의 신학자라는 맥그래스(Alister McGrath), 탁월한 교회사학자 마크 놀(Mark Noll), 최고의 복음주의 변증가인 가이슬러(Norman Geisler), 탁월한 작가이자 철학자인 윌라드(Dallas Willard)도 모두 성경을 믿지 않는 자들이라고 싸잡아 공격한다.

원래 창조과학운동은 안식교에서 출발했다. 프라이스(G. M. Price), 버딕(C. Burdick), 로쓰(Ariel Roth) 등 초기 창조과학 리더 대부분은 안식교인들이다. 또한 창조과학회가 초기에 주로 사용한 책 《Creation-Evolution Controversy》의 저자 와이송(R. Wysong)의 배경은 여호와의 증인이고, 다수의 창조과학 서적을 집필한 쿡(M. Cook)은 모르몬 교인이다. 그러던 창조과학이 모리스(H. Morris) 등을 통해 미국 근본주의 교회로 유입되었고, 다시 한국교회에 이식되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신학에서는 근본주의적이고, 지적 추구에 대해 이원론적이거나 회의적이라는 점이다. 과학적 주장을 하면서 정작 지적 추구에 회의적이라는 것이 이해가 잘 안 될지 모르나 사실이다. 이들은 주류 과학뿐 아니라 진지한 신학적 논의도 경원시한다.

그렇다면 교수님이 새롭게 생각하는 창조론은 어떤 것인가?
나는 ‘오랜 우주론’(과학적으로 밝혀진 지구와 우주의 나이를 인정하고 긴 시간에 걸쳐서 개개의 생명체들이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론)과 다중격변설이 맞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다중격변모델에서는 창조과학회가 주장하듯이 노아의 홍수와 같은 전 지구적 단일격변에 의해 지층과 화석이 모두 형성되었다는 대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오늘날 지질학의 주류 이론인 동일과정설로도 화석이나 석탄, 석유 등의 화석연료의 생성을 설명할 수 없다고 본다. 현재 일어나는 것이 과거에도 그대로 일어났다는 동일과정 가설은 너무 많은 것들을 설명하지 못한다.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격변에 의해 지층과 화석이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특히 현재 180여 개에 이르는 크고 작은 운석공들은 지구의 역사를 격변의 연속으로 보는 것이 타당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증거이다. 현재 직경 100킬로미터 넘는 운석공만도 5개, 30킬로미터 넘는 운석공도 28개에 이른다. 아마 바다에 떨어진 운석까지 생각한다면 이보다 3배 이상의 운석이 지구와 충돌했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내가 기존 창조과학과 가장 다른 점은 과학적 모델을 절대화하지 않는 것이다. 다중격변모델이 여러 모델 중 가장 맞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할 뿐이다. 더 나은 모델이 제시된다면 수정하거나 폐기해야 될 것이다. 자기 주장이 절대로 틀릴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바른 과학자의 태도가 아니다.

지적설계론이나 유신 진화론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지적설계론에 대해서는 우호적이다. 특별계시를 대치하거나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는 식의 자연신학적 한계만 조심한다면 창조과학운동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무신론자들이나 반(反)창조론자들은 지적설계를 또 하나의 창조과학일 뿐이라고 비판하지만, 내가 보기에 지적설계는 창조과학과는 달리 열려 있는 학문 패러다임이다. 그러나 유신 진화론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방법으로 생물을 창조했는지 구체적으로 말해주지 않지만, 과학적 증거는 대진화(macroevolution, 오랜 기간에 걸쳐 새로운 속[屬]?과[科]?목[目] 같은 분류학상 상위 분류군이 형성되는 진화)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본다. 여기서 우주의 진화는 다르다. 대폭발(Big Bang)이론은 무신론적 함의만 제외한다면 현재의 우주를 설명하는 하나의 작업가설로서 가치가 있다. 하나님이 대폭발의 과정을 통해 세상을 창조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다중격변모델은 지적설계와 대폭발이론 등과 부딪치지 않는다고 본다.

교수님의 기독교세계관운동 여정에서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을 빼놓을 수 없을 텐데, VIEW를 좀 소개해달라.
VIEW(Vancouver Institute for Evangelical Worldview)는 1997년, 내가 캐나다로 이주하면서 시작됐다. 강의를 시작한 건 1999년 7월이기 때문에 올해로 15년째를 맞았다. 현재 캐나다 유일의 기독교대학인 트리니티웨스턴 대학교의 대학원 과정으로, 기독교세계관 디플로마 과정과 문학석사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어 프로그램이긴 하지만(물론 강의는 한국인 교수와 영어권 교수들이 함께 담당한다) 캐나다 정부의 인가를 받은 정규 대학원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정규 학생비자를 받아서 공부할 수 있다. VIEW 프로그램은 캐나다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종합대학 대학원 수준에서 세계관 공부를 할 수 있는 유일한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재학생은 평균 40명, 졸업생은 130여 명, 한 학기 이상 수학한 동문들까지 합치면 350여 명이다. 지난해 9월부터는 전성민 전 웨신대원 교수가 전임교수로 부임했고, VIEW는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다. 초기에는 어느 정도 시행착오가 있었으나, 이제는 커리큘럼이 안정되어 스티븐스(Paul Stevens), 월터스(Al Wolters), 러스트호벤(James Rusthoven), 홀라(Lee Hollaar) 교수 등의 영어 강의도 틀이 잡혔다. 지금까지 개발된 강의들 중 탁월한 강의들은 2014년 가을부터 Worldview Media(대표 유승훈 박사)를 통해 온라인 강의(디플로마 과정)로 보급할 예정이다. 이것은 세계관운동의 대중화, 기독교대학 교직원들을 위한 훈련, 직업별 세계관 훈련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사진제공: VIEW

학교가 해외에, 그것도 밴쿠버의 기독교 대학 안에 세워진 특별한 이유가 있나?
처음에는 VIEW와 같은 방식의 대학원 프로그램을 한국에서 시작할 수 있는지 몇몇 학교를 접촉했었다. 그러나 함께 일하는데 익숙하지 않은 문화에다 폐쇄적인 학교 구조로 인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을 생각해봤지만, 그때만 해도 비자나 고물가 등의 문제로 쉽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캐나다 밴쿠버 지역을 추천받았고, 몇몇 학교들과 접촉한 끝에 TWU와 협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VIEW를 시작하여 이만큼 자리잡기까지 개인적인 어려움이나 사연이 많았을 것 같다. 이 일을 위해 국립대 정교수직을 사임하셨는데, 처음부터 그럴 필요가 있었나?
물론 처음 구상 단계에서는 한국의 대학교에 근무하면서 여름과 겨울 방학 때만 왕복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막상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부터는 교수직을 사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이 점점 더 현실로 다가왔다. 사임 몇 달 전까지도 내가 굳이 학교를 떠나야 하는가, 정말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결국 떠나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모든 것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학교 총장님을 위시하여 많은 분들이 만류했지만, 정말 필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면 모험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1997년 10월 31일자로 사직서를 냈다. 그런데 사직을 하자마자 IMF 외환위기가 닥쳤다. 몇 주일만 미리 알았더라도 사임하지 않았을 거다.(웃음) 그러나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850원 안팎이던 달러가 불과 두어 달 후인 연말에는 무려 1,900원대로 치솟았다. 해외에 있던 유학생, 선교사들이 견디지 못하고 속속 돌아오던 그 시기에 나는 새로운 한국인 프로그램을 하겠다고 거꾸로 나가게 되었다. 그때 느낌은 마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빠져 들어가는 것 같았다. 당시 교민사회에서는 환율이 5천 원까지, 어떤 사람은 2만 원까지 올라갈 거라는 흉흉한 소문도 돌았다. 학교를 사직하고 나온 상황에서 눈앞이 캄캄하더라.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밴쿠버에 온 이후 400여 일 동안 나는 아무것도 못하고 셋집 아래위층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지냈다. 남자가 아침에 가방 들고 갈 데가 없다는 게 얼마나 비참한지 그때 알았다. 정말 새벽기도 말고는 할 일이 없더라. TWU마저도 한국 학생들이 대부분 돌아가고 있는데 지금 어떻게 새로운 프로그램을 할 수 있겠느냐면서 난색을 표했다. 한마디로 인생의 바닥이었다. 그래서 요즘도 기업인 모임에서 얘기할 기회가 있으면 그때의 참담했던 ‘실업’의 아픔을 나눈다. 기업하는 분들치고 그런 고통의 터널을 한두 번 지나지 않은 분들이 별로 없기 때문에 쉽게 공감하시더라.

그 ‘고통의 터널’이 언제, 어떻게 끝났나?
내게는 앞이 보이지 않는 기가 막히는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어젠다를 따라 일하고 계셨다. 나 나름으로는 VIEW 프로그램 설립의 필요성과 한국이 1~2년 내에 외환위기를 극복할 것이라는 별 ‘근거 없는’ 주장을 하면서 TWU 관계자들을 설득했다. 학교 측으로서는 계획을 진행하는 것 자체만으로는 별 손해 볼 게 없었기에 제안서를 논의하는 작업은 계속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이 밴쿠버 공항에 랜딩한 지 만 1년이 되던 1998년 11월 3일, 마침내 TWU 수석 부총장인 새폴드(Guy Saffold) 박사와 두툼한 합의서에 서명했다. 모든 것이 멈춘 지 4백일이 되던 1999년 2월, 드디어 내가 가방을 들고 연구실에 출근할 수 있게 되었다! 두 번째 놀라운 것은 재정 문제였다. 당시 기독학술교육동역회(DEW, 현 기독교세계관동역회)에서 VIEW를 위해 3억 원 정도 모금했는데, VIEW를 시작하기에는 모자랐다. 그런데 당시 IMF 관리체제 하에서 은행예금의 연이자가 무려 25퍼센트였다(당시 재정적인 고통을 겪은 분들에게는 죄송하지만). 그래서 정상적인 경제 상황에서는 불과 5~6년 정도면 바닥 났을 기금이 무려 12년간 VIEW를 지원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VIEW가 어느 정도 재정적인 자립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세 번째 놀라운 일은 학생 모집이었다. VIEW는 한국에서 학생들을 모집해야 하는 프로그램이어서, 1998년 11월에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이듬해 7월에 첫 강의를 시작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홍보는 둘째 치고 지원과 입학허가, 학생비자를 받는 것만도 4~5개월이 걸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홍보를 할 형편은 되었겠는가. 그런데 놀랍게도 첫 학기에 무려 30명 이상의 학생들이 지원했고, 그중 26명 정도가 강의에 참여했다. 주변 사람들도 모두 기적이라고 했다.  

끝으로, 향후 기독교세계관운동은 어떻게 진행되어야 한다고 보시는지….
기독교세계관운동은 지성운동의 한 축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학문 운동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크리스천마인드운동과 가장 가깝다고 본다. 따라서 세계관운동을 지성운동에서 나아가 삶의 운동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아도 예수쟁이들은 말만 잘한다는 비난을 받는데 이제는 세계관운동을 통해 정말 삶으로 드러나는 그리스도인의 이미지를 만들어가야 한다.

10년 전 복음과상황에서 기독교세계관운동 비판을 제기할 때부터, 나는 기독교세계관운동의 초창기 세대는 다들 어디서 무얼 하실까, 늘 궁금했었다. 그분들은 어떤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인가? 무슨 답변을 들어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이제 질문을 멈추려고 한다. 양승훈 교수는 30년간 기독교세계관운동을 지속해왔다. 대면하게 된 사실 앞에서 자기 신념을 조정하는 학자적 양심을 발휘했다. 학교 설립을 위해서는 자기 경력을 잃어가면서 마음을 쏟았다. 그의 여정은 초창기 기독교세계관운동의 선배가 우리에게 주는 응답이다.

진행·정리 이강일 IVF 한국복음주의운동연구소 소장, 복음과상황 전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