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사.람.이 있습니다

[280호 편들고 싶은 사람] 청소노동자, '엄마'들의 이야기

2014-02-25     이범진·오지은

▲ ⓒ복음과상황

2011년 박희태 18대 국회의장이 약속했던 국회 청소노동자 ‘직접고용’이 결국 올해 1월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무산됐다. 생중계로 회의를 지켜보던 청소노동자들은 답답한 마음에 그 길로 회의장 앞에서 침묵시위를 벌였고, 현장을 찍은 사진이 온라인에서 화제였다. 늘 그래왔듯 국회는 두 진영으로 나뉘었다. 한쪽에서는 누군가 선동한 일이라며, 요즘 자주 듣는 ‘종북’ 딱지를 청소노동자들에게 붙이기도 했다. 반대쪽에서는 직접고용 무산이 대선 공약 파기임을 들어 주장을 펼쳤다. 그러는 동안 해가 바뀌고도 두 달이 흘렀다. 그런데 당사자인 청소노동자들의 형편은? 정작 사그라지는 청소노동자들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었다. 국회 청소노조 김영숙(60) 위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이 끝나는 시간, 오후 4시에 맞춰 국회 본관 내 휴게실에서 2월 7일 만나기로 했다. 

김 위원장과의 약속을 앞두고, 중앙대를 먼저 찾아갔다. 처우와 근로 환경 개선을 위해 50여 일간 파업을 이어가고 있는 곳. 약속도 잡지 않은 채 무작정 현장을 밟았다. 국회 청소노동자 사건이 그랬듯, 진영 싸움에서는 듣기 힘든 청소노동자 당사자들 말이 궁금해서였다. 올해 초 이용구 총장과 면담 후, 27일간 지속했던 천막농성은 중단한 상태였다. 학교 안에는 농성 중인 아주머니를 발견하기는커녕, 파업 흔적도 찾기 어려웠다. 본관 안내 직원, 우연히 만난 총학생회 학생에게도 물었지만 다들 아주머니들이 어디 계신지 잘 모른다고 했다. 학교가 깨끗하게 청소된 것으로 보아 이곳에 있음이 분명한데, 눈에 잘 띄질 않았다. 우연히 들어간 건물의 경비실에 들러 청소 아주머니들 있는 곳을 물었다. 한 아저씨가 자신을 한국노총의 중앙대 관리지부장이라고 소개하며 “언론에 노출된 것과 달리 중앙대 청소노동자들의 처우는 아주 좋은 편”이라고 했다. 그 분의 안내를 받아 휴게실에 계신 한 아주머니를 만났다.

갑작스런 인터뷰에 다소 놀란 듯한 아주머니는 점점 이야기를 풀어놓으셨다. 작년에 민주노총(민노)에 가입하셨다가 지금은 한국노총(한노) 소속이셨다. 올해로 예순넷이라고 했다.
“작년 8월부터였나…, 날짜는 잘 기억이 안 나. 그때 처음 민노에 가입했는데 지금은 한노에 있어. 많이 넘어왔어. 전체 100여 명 중 지금 (파업하는) 사람들 30~40명 정도밖에 안 남아 있어. 뭐 때문에 계속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어. 민노 쪽을 학교에서 노조로 받아주질 않아서 그러는 건가… 아마도 인정하고 받아달라는 건가 봐. 근데 잘 모르겠어. 민노가 들어왔든 한노가 들어왔든, 그냥 요구하는 대로 다 들어줬으니까 뭐. 민노 들어오기 전에는 7시까지 와서 5시에 소장님 실에서 사인하고 퇴근했는데 이제는 (퇴근이) 한 시간 빨라졌어. 전엔 학교 외곽의 낙엽 치우기나 눈 쓸기나 겨울에 얼음 깨는 일을 다 아줌마들이 했는데 이제 학교에서 아저씨 여섯 명을 따로 써서 한대. 원래는 경비아저씨들이랑 휴게실도 같이 썼는데 이제는 따로 휴게실이 생겼어. 어떻게 들어주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어.”

아주머니가 중앙대에서 일한 지는 15년 정도. 중간에 시어머니 병간호로 일을 쉬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예순 나이에 경기도 시흥에 마련한 아파트에서 남편과 재미있게 살아보려 했는데, 그마저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도 시간이 약이라셨다.
“내가 중앙대에서 일한 지가 15년 정도야. 옛날에는 새벽 5~6시에 리어카 끌고 들어가서 구루마로 봄가을에 애기들(학생들) 주점한 쓰레기 다 치우고 했어. 시어머니 아프신 바람에 그만두고 간호했는데 이젠 돌아가시고, 그다음에 아저씨(남편)도 돌아가셨어. 자식들 대학 보내느라 빚 많이 져서 집 팔아서 빚 갚고, 시어머니 모시고 남의 전셋집 살면서 아저씨랑 나랑 벌어서 빚 다 갚고 애들 다 출가시키고 인제야 둘이서 아파트 장만해서 재밌게 살려는데 5년 전에 돌아가셨어. 우리 아저씨 총각 때 두 번, 나랑 약혼하고 한 번, 월남전에 세 번을 갔다 오고 결혼했는데, 보고 싶어. 우리 아저씨. 사진보면 눈물도 나오고. 처음엔 어찌할 줄 몰라서 애먹었는데, 세월이 약이더라고.”

남편이 죽고 5년 뒤 다시 청소 일을 하신 아주머니에게는 빨간 조끼를 입고 구호를 외치는 일이 너무나도 낯설었다.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이런 시위를 내가 한다고 생각하니까 당황했어. 취향에 안 맞더라고. 아침 일하고 밥 한술 먹으면 나가서 빨간 조끼 입고, 따라서 소리(구호) 외치고 플래카드 들고 애기들 뭐 노놔줘야 되고. 그런데 민노의 요구사항을 한노에서도 똑같이 요구하더라구. 환경이 많이 나아졌어. 그냥 한노에 있는 거야. 내가 너무 힘들어서.”

개선된 처우는 임금 인상, 휴게실 개?보수, 외곽 청소 및 분리수거를 위한 별도의 인력 확충, 용역계약서의 인권침해 내용 수정, 토요근무 폐지다. 당초의 민노 요구안 중 일부였다. 용역회사는 뒤늦게 들어온 한노와만 단체협약을 맺었다. 
“내 생각은 이렇지만 다른 아줌마들 이야기 들으면 또 다르지. 다른(노조 소속) 엄마들도 여기 와. 어제는 후원일일주점 한다고 왔었어. 지난달에 파업하느라 월급을 못 받았는데 노조에서 월급을 줬지만, 다 주지는 못 하니까 주점으로 돈을 벌어야지 뭐. 원래는 학교 안에서 하려고 했는데 학교 측에서 절대 안 된다 하고, 남영동 쪽 어디서 하나 봐. 아줌마 두 분이 티켓 가져왔기에 팔아줬지. 안 가더라도 팔아주고 싶었어.”
인터뷰 말미에 성함을 묻자 아주머니는 “나는 아무 불만이 없어, 그렇게만 알아~”라고 하셨다. 

중앙대에서 나와 국회 가는 발길을 재촉했다. 전화 통화로 약속을 잡을 때, 새벽부터 출근하니 일 끝나고 집에 가자마자 ‘뻗는다’고 하신 말이 내내 마음에 남았다. 도착하니 ‘엄마’ 두 분이 이야기 들어 주러 와 고맙다고 하셨다. 김영숙 씨는 1997년도 IMF 위기 이후 남편의 건설 사업이 망하면서 노동 전선으로 뛰어들었다.

- 직접고용이 무산됐다. 특히 김태흠 새누리당 의원의 반대 발언에 속이 많이 상하셨을 것 같다.
우리가 먼저 꺼낸 이야기도 아니었고, 박희태 의장이 2011년 취임식 때 직접 얘기한 직접고용 약속이었다. 당시 국회의 다른 계약직들 200여 명 전원은 정규직화했는데, 우리는 용역업체와의 계약 상태라 위약금 문제가 있어서 2년 기다리면 해준다고 해서 그렇게 믿었다. 바보같이. 그런데 위원회 회의에서 자기 당이 말했던 직접고용인데 모르는 척하고, 약속이 무산되는 순간을 생중계로 보다가 기가 막혀서 직접 회의장 앞으로 찾아갔다. 울고불고 통곡했다. 김태흠 의원이 청소는 전문 업체에 맡긴다 어쩐다 하는데, 우리들이 전문이지 뭐 다른 전문이 있을까 봐서. 세금 낭비 이야기를 하던데, 용역 회사가 중간에서 이익 보는 게 있으니까 들어오는 거지. 용역 쓰는 일이 더 세금 낭비다. 이번 일 겪으면서 분신자살하신 분들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겠더라.

- 처우 개선하고, 근로자 전원 고용승계를 명문화해서 보장한다던데.
바뀌는 게 없다. 의원님들이 배운 사람들이고 부자들이라 그런지 우리 엄마들 처지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새 업체가 들어와도 일은 계속 한다. 그런데 1년마다 재계약을 신규로 하고 매번 처음 3개월은 수습이다. 수십 년 일해도 월급은 고정에, 수습 기간에 밉보이면 해고한다는 의미다. 국회사무처와 지금 회사 계약서에는 이미 고용승계가 명시되어있지만, 기존 회사 입사일, 퇴직금, 임금 등 기타 전반적인 근로조건이 포괄적으로 양도되지 않는다. 여기 언니들 중에 나이 63세 이상인 분들은 여기가 첫 직장이고, 다른 세상을 전혀 모른다. 월급을 올려달라고 한 적 한 번도 없었고, 윗분들 말 한마디에 숨죽이고 일하셨던 분들이다. 그런데 20~30년 넘게 국회에서만 일하고 퇴직해도 서류상 고용승계가 되지 않으니 고용보험센터에서 보험 수령도 못 한다. 이번에도 네 명이 퇴직하는데 실업급여를 탈 수가 없다. 고용이 불안하니 건의사항이 있어도, 말 한마디 못해왔다. 노조 생기기 전에는 정말 현대판 노예였다.

▲ ⓒ복음과상황 이범진
고용보험센터에서 보내온 국회 청소직 실업급여 관련 문서. 퇴직 대상자 네 명을 ‘포괄적 고용 승계’하지 않았고, 이전 회사 근무자였던 근로자들을 모두 신규채용 형식으로 받았기에 같은 장소에서 20~30년을 일해도 그에 맞는 실업급여를 탈 수 없다.


- 노조는 어떻게 생겼나.
이전 회사와 국회의 계약이 2011년에 만료됐다. 그런데 이 회사가 부도를 내고 당시 165명의 5년치 퇴직금을 안 줬다. 너무 화가 나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노조를 만들게 되었다. 이후 8개월 동안 고생해서 퇴직금을 받았다.

- 노조위원장 하면서 언론에 얼굴도 노출됐다. 어떻게 전면에서 나서시게 되었나.
무대뽀로 하는 거다.(웃음) 이런 일 하게 되리라고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어쩌다 보니 부위원장도 했고, 여기까지 왔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안 되고, 의원님들이 도와준다고 해도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 직(접)고용 무산된 날 오후에 조합원 전체가 모인 자리에서 상황을 설명하고 향후 계획에 대해 토론했다. 직고용 문제를 포기하지 않는 것으로 의견이 모였다. 그 방향으로 계속 일을 추진할 계획이다. 얼마 전에 소속인 한국노총에서 성명서도 냈다. 의원님들 중 몇몇은 개인적으로 응원해주시고 문제 해결에도 애써주신다.

- 노조에 협조하는 듯하면서, 아닌 분들도 있지 않나. 성향이 각각이니까.
그래서 힘들 때도 있지만, 같이 가는 거다. 호응해주는 사람이 더 많아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우리가 직고용 주장을 자꾸 하니까 사무처에서는 건물마다 사람을 보내서 1:1로 면담을 하기도 했다. 나이 많은 언니들한테는 직고용 되고 60세 정년 되면 잘린다고 협박 비슷하게 한 모양이다. 그러면서 월급 올려줄 테니 용역으로 계속 가자고 회유하니까 “네” 한 거다. 29퍼센트가 그렇게 답했다. 사무처에서는 직고용 전환해줄 의사가 전혀 없으니까 돈이라도 올려줘서 불만을 막으려고 했다. 관리과장이 1월 2일에 와서 처우 개선이 우선일 것 같다면서 예산이 통과 돼서 월급이 18만 원 올랐다고 말하더라. 관리과장이 우리한테 찾아온 것도 처음이다. 이전에는 기본급 104만 원 정도에, 실제 월급으로 가져가는 돈이 약 108만 원이었다.

▲ ⓒ복음과상황 이범진
1월달 월급 고지서
- 계약 해지 후 새로운 용역 업체가 아직 선정되지 않았다. 월급은 어떻게 되는 건지.
직접고용 문제가 해결이 안 됐으니까 1, 2월은 계약 해지된 기존 회사의 연장 선상이었다. 그런데 사실 2월 5일에 나온 월급에 인상분(18만 원) 적용이 안 됐다. 월급 올랐다고 기사도 났었는데. 경리한테 이유를 물었더니 다음에 소급처리 해주는 거 아니겠느냐고 되묻더라. 그래서 이번엔 담당자에 물었더니 월급 인상 공지 때 새 업체 들어오면 소급적용해준다고 이미 말했다면서 말귀도 못 알아듣느냐고 면박을 주더라. 그런데 200명 중에 그 내용을 들은 사람이 전혀 없었다. 다행히 녹음파일을 갖고 있었는데 언급된 사실이 없었다. 녹음을 확인했다고 하니까 그때야 자기가 말 안 한 것 같다고 인정하더라.

- 점점 똑똑해지시나보다.(웃음) 정치인들에 대한 인식도 많이 바뀌었을 것 같다.
늘 ‘검토 중’이라고, 기다려달라는 말을 듣고는 우린 정말 검토 중인 줄 알았다. 그래서 너무 고마워했다. 그러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 최근 우리랑 면담할 때 “그때 일은 모른다”고 시침 떼던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가 알고 보니 당시 원내대표였다. 당이 바뀌었으면 말도 안 한다. 여태까지 뭣도 모르고 새누리당 찍어왔는데, 이젠 죽을 때까지 안 찍을 거다. 겪어보니 알겠다. 3년을 허송세월 보냈는데 이제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 계속 주장하다 보면 직고용이 현실화하는 날이 올 거다. 월급 오른 것도 그렇게 이뤄낸 일이다. 운영위원회가 또 열리면 이야기할 거다.

- 중앙대 쪽은 복수노조인데 단체협약이 이뤄지지 않은 쪽은 장기간 파업 중이다. 복수노조라 힘든 점도 더 있더라. 혹시 청소노동자들 사이 연대가 이뤄지고 있는지.
우리는 네 명 빼고 196명이 다 같은 조합원이라 사정이 나은데, 중앙대는 노조가 둘로 나뉘어서 더 힘들겠더라. 거기 파업 초기에 본관 총장실에 머무르고 있을 때 우리도 응원차 갔었다. 그때 중앙대(윤화자), 서울여대(이삼옥), 광운대(박순옥) 그리고 나까지 청소노동자 인터뷰(〈프레시안〉 2013.12.23 “60대 ‘빨갱이’들의 눈물겨운 007작전…왜?”)도 같이 했고, 성명서도 같이 내고 그랬다. 기자회견도 계속 있었고. 그런데도 상대는 꼼짝도 안 한다. 부당한 요구가 아니고 상식을 요구하는데도….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는 사회적으로 계속 이슈가 되어야 한다.

인터뷰 내내 옆에서 이야기를 거든 분이 있다. 다니는 교회 공동체 식구들이 알고 걱정할까 봐 이름을 밝히지 않으신 노조 사무국장님이었다. 어릴 때 평화시장에서 미싱을 돌리던 여공이었는데, 전태일 열사의 분신도 직접 보셨다. 나이 들고 눈도 침침해지면서 미싱 일을 그만두고 식당일 등을 하다가 자녀들 출가 후엔 국회에서 청소노동자를 시작했다. 다른 조건 안 보고, 한 달에 한 번 월차 내서 맘껏 심방 다닐 수 있어서 국회에 이력서를 냈다. 두 분 모두 기독교인이셨다. 노조 임원 대부분이 기독교인이라고 했다.

“내가 한 달에 한 번은 심방을 다녀야 해서 월차 조건만 보고 국회 들어왔어. 그런데 1년 동안 안 주더라고. 사무실 가서 따졌더니 나 들어올 때 사람이 한꺼번에 많이 들어와서 못 준다는 거야. 이후에 월차 쓸 때도 월요일과 금요일은 사용할 수 없다고 하다가 인제야 사용할 수 있게 됐어.”(박 사무국장)

기독교인으로서 노조 일에 더 책임을 느끼고 계셨다. 사무국장님은 30대 때 허리 부상으로 8개월을 꼼짝없이 침대에만 누워 있다가 꿈에서 만난 목사님 덕에 기독교인이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목사님은 여의도의 큰 교회 목사님이었다. 다시 걸을 수 있게 되고 몸도 회복된 사무국장님은 교회 일에 열심을 다했고, 심방 다닐 수 있는 직장이라 생각해 여기까지 왔다. 노조 일은 구역식구들이 말리는 일이었지만 안 믿는 사람을 위해서 일하고 싶었다. 노조 임원을 맡는 일을 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다 보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서 자원하듯 나섰다. “불의한 일을 그냥 넘기면 안 된다”고 말했다.

“국회 지하 기도처에서 수요 예배를 드리고, 시간 되는 대로 각자 기도를 한다. 지금까지는 믿는 사람들 위해서 봉사했는데 이제 믿지 않는 사람들 위해서 봉사하고 싶어. 위원장님과도 월차 때마다 같이 기도원에 가고 있고.”(박 사무국장)

“가만히 돌이켜 보면 국회에서 청소노동자들이 이렇게 일어난 적이 없었어. 교회에서 가르치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빛과 소금의 역할이 작지만 이런 일 아닌가? 그나마도 약한 자를 굽어살피는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지 싶어.”(김영숙 노조위원장)

▲ ⓒ복음과상황 오지은
후원주점

인터뷰를 마치고 밤 9시쯤, 중앙대 민노 아주머니들이 연다는 일일주점으로 향했다. ‘요구사항을 다 들어주었는데 왜 시위를 계속하는지 모르겠다’는 낮에 만난 ‘한노’ 아주머니의 의문에 답을 듣고자 했다. 일일주점은 사람들로 북적여 앉을 자리가 없었고 안주는 이미 동났다. 어렵사리 자리를 잡았을 때, 두 분의 아주머니가 우리 옆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서빙만 할 줄 알고 왔다가 갑작스레 몇 시간 동안 주방에서 안주를 만들었다고 했다. 학교 일을 마치고 이곳으로 곧장 와서 또다시 일하다가 이제 겨우 쉬는 모양이었다.
“서빙만 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준비가 하나도 안 되어 있더라고. 몸은 피곤한데 그래도 사람들이 많이 오니까 좋네. 내일 토요일이니까 오늘 고생하는 거야 뭐 고생도 아니지. 나는 청소 일한 지 2년밖에 안 돼서 잘 몰라. 이왕 시작한 거니까 같이 시작한 사람들하고 끝을 보려고 하는 거지. 많이 개선되고 있어서 참 좋아. 예전에는 엘리베이터 버튼도 팔꿈치로 누르라고 했으니까. 손가락으로 누르면 이물질 묻는다고.”

아주머니들은 많이 지쳐 있었다. 학교에서 다시 만날 약속을 잡았다. 사흘 뒤인 2월 10일 오전 10시 30분쯤, 민노 아주머니들이 계시는 휴게실을 방문했다. 중앙대 교수연구동 지하주차장 옆 창고였다.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들고 계신 아주머니들이 앉아 있었는데, 누군지도 모르는 우리를 보자마자 “앉아서 밥을 먹으라”며 안쪽 따뜻한 자리를 내주었다. 아주머니들의 일일주점 ‘무용담’을 반찬 삼아 함께 어울려 밥을 먹었다. 오후 1시경까지 아주머니들이 번갈아 오가며 이곳 창고(휴게실)에서 식사를 했다. 모든 아주머니의 식사가 끝난 후에야 윤화자(57) 민주노총 서경지부 중앙대분회 분회장님께 인터뷰를 청했다. 분회장님 역시 IMF 이후로 생계노동 전선에 뛰어드신 ‘엄마’였다. 집에 차압 딱지까지 붙었는데 아이들을 키워내야 했기에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청소 일은 중앙대가 처음이었다.

▲ ⓒ복음과상황 오지은
윤화자 민주노총 중앙대 분회장

-어제 일일주점에 손님이 많더라. 밤까지 일하느라 힘드셨겠다.
그렇게 많이 올 줄 몰랐다. 피곤은 했지만 손님이 많아서 기분도 좋고 재밌었다.

-노동조건이 많이 개선됐다고 들었는데, 그렇게까지 투쟁을 이어가는 이유는?
단지 몇 가지 노동 조건 때문에 투쟁하는 거 아니다. 노조와 단체협약이 체결되지 않고 있다. 그 내용을 일일이 열거하기는 힘들지만, 이미 같은 조건으로 노조와 단체협약을 맺은 용역이 있는 대학이 서울 시내에만 열 몇 개다. 고려대, 연세대, 이화여대, 홍익대, 경기대, 광운대, 동덕여대, 인덕대, 한국예술종합학교 등이다. 무리하게 더 많은 요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왜 하찮은 우리들 일을 이렇게 해결을 못 해주는지 모르겠다.

▲ ⓒ복음과상황 이범진
아주머니들이 휴게실 겸 식사 장소로 사용하는 창고(중앙대)
-왜 하찮다 표현하시나.
우리 정말 노조 하기 전에는 ‘아야’ 소리 못하고 일만 했다. 화초관리에 잡초 뽑기에… 학교 안에서 1인 3역을 소화하면서 말이다. 청소 물품도 얼마나 안 주는지 한 달에 한 번꼴로 배급하면서 아껴 쓰라고 한다. 락스를 1.5리터 페트병에 반만 채워주면서 몇 달 동안 재공급을 안 해준 적도 있다. 하루면 다 동이 날 수도 있는 양이다. 부족하면 엄마들이 자비로 사서 썼다. 일하면서 엄지 인대 늘어났던 게 도져서 깁스하고 한쪽 손으로 일하다 허리까지 삐어서 20일 동안 병원 치료 받으며 일할 때도 치료비 한 번을 못 받았다. 아프다고 하면 이제 나오지 말고 집에서 쉬라고 할까 봐 말도 못했다.

-그동안 많이 힘드셨겠다.
우리도 사람대우 좀 해달라는 거다.

-회사(TNS) 측이 한국노총과는 단체협약을 맺었다.
회사 사장이 우리 노조는 까다롭고 조건이 많아서 도장을 못 찍겠다고 하더라.

-민노가 제시한 협약 내용에는 신규인사추천권 같은 회사 경영권 관련 조항도 포함되어 있다는 보도를 봤다. 과도한 요구라는 내용이었다.
잘못 알려진 거다. 우리는 그냥 외곽 청소의 외부 인력 충원 요구를 하는 거였다. 기사에는 노조 허락이 있어야 사람을 채용할 수 있게 요구한 것처럼 잘못 나갔다. 회사에서 그렇게 소문을 냈다.

아주머니들과 함께 있던 민노 서울경인지역공공서비스지부 김진랑 조직차장이 이에 대한 부연 설명을 했다.
“보통 용역 회사는 부족한 인원을 바로 채우지 않고 시간을 버는 방식으로도 이익을 챙긴다. 이걸 방지하기 위해 적정 노동 인원을 유지할 수 있도록 7일 이내에 인원을 채우도록 하고, 채우지 못할 경우에 노조가 추천한 사람으로 채울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회사에서 이 내용을 인원 채용에 노조가 간섭한다는 식으로 왜곡해서 물고 늘어진 것이다. 그런데 한노와 회사가 맺은 단체협약 내용에는 우리가 제안했던 그 조항뿐 아니라, 직원들 인사이동을 비롯해 노조 간부에 대한 변경사항이 있을 때마다 노조와 합의한다는 조항이 있더라. 우리가 제시한 단체협약 내용보다 더 급진적인 내용임에도, 한노와는 두세 차례 협상만에 합의가 이뤄졌다.”

-총장실 점거 때문에도 안 좋게 보는 분들이 있던데.
오해가 있다. 농성을 시작한 곳이 본관 1층 로비였다. 학생들 시험기간이어서 강의동에 있을 수도, 한겨울에 60 넘은 엄마들이 밖에 있을 수도 없었다. 회사의 사장을 만나려고 2층에 갔는데, 사장은 없고 마침 총장님이 계셨다. 그랬더니 우리 일을 외면하던 학교 총무팀 쪽에서 지레 놀라서는 사장이 1층에 있으니 올려보내겠다며 총장님과는 다음에 면담 시간을 잡아 주겠다며 기다리라고 하더라. 그래서 총장실 앞에서 기다리게 된 거다. 그때가 크리스마스 전이었는데 총장님도 빠른 시일 내에 우리 일을 해결해보겠다고 나가셨고,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사장 올려보내겠다고 했던 총무팀장은 기다리고 있어도 퇴근 시간 무렵까지 소식이 없더라. 엄마들이 이렇게 왔는데 그냥 나갈 수도 없고 해서 계속 거기서 기다렸는데, 어느새 점거자들이 돼버렸다. 총장님도 아예 총장실로 출근을 안 하시고, 그 다음다음 날부터는 비서도 안 나오고, 짐도 다 빼가더라. 우리는 사람 다닐 길을 만들어 놓고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직원들도 오가면서 일 보는데 별로 지장이 없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이브에 느닷없이 업무방해죄로 경고장을 붙였다. 안 그래도 자리를 비워주려는 찰나였다. 업무방해를 하려는 의도도 없었고, 점거라는 걸 계획하지도 않았다. 차라리 우리한테 업무에 방해되니까 자리 좀 비워달라고 말을 했으면 되는데, 한마디도 없이 고소를 해버리고 경고장 붙이면서 나가달라는 거다. 오히려 학교에서 일을 더 크게 만든 거다. 경고장은 붙였지만 파업 중인데 엄동설한에 밖에 마냥 있을 수도 없고, 복도 쪽으로 피했다. 그때는 응원해주러 오신 분들까지 인원이 50명이 넘었는데 매번 짜장면만 시켜서 먹을 수 없었고, 밥까지 해먹게 된 거다. 

 

▲ ⓒ복음과상황 오지은
아주머니들이 휴게실 겸 식사 장소로 사용하는 창고(중앙대)

-지지자 중에 학생들도 있었는지.
학생들, 교수님들이 정말 많이 도와줬다. 천막 농성할 때도 와서 응원해주고. 기자들도 와서 이야기 들어 주고. 그런 도움 없었으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다. 많이 알려져서 학교 안 교수님들, 학생들과도 서로 인사하게 되고 친해졌다.

-이런 일들 겪으면서 삶이 많이 변하셨겠다.
무역업 하던 남편 사업이 IMF 때 망하면서 내가 안 해본 일이 없다. 그러면서 간이 점점 커져 지금까지 온 것 같다. 그래도 스스로 목소리를 내면서 이제는 사람 취급 좀 받는 것 같다.

이틀에 걸쳐 청소노동자 여섯 명을 만났다. 그들의 투쟁이 더 힘든 이유는 ‘대화의 상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야기 좀 들어달라고 아무리 부탁하고 외쳐도, 돌아오는 건 온기 없는 냉정한 경고장과 매서운 시선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청소노동자는 가장 미천한 ‘계급’이었다. 용역 회사의 이름이 수놓인 유니폼을 입고, 자신들을 ‘고용’하지 않은 거대한 건물 안에서 장기간 숨죽인 채 ‘사용’당하는 이들이었다.

영국 민간 싱크탱크인 신경제재단(New Economic Foundation)은 노동자들의 ‘사회적 가치’ 연구에서, 소득이 50만~1천만 파운드나 되는 거물급 투자 은행가는 경제 가치 1파운드를 생산할 때마다 사회적 가치 7파운드를 파괴하지만, 청소부의 월급 1파운드는 10파운드 이상의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는 결과를 지난 2011년에 발표했다. 늦은 감이 있지만, 공평과 정의를 위해 스스로 분투 중인 ‘엄마’들, 모든 청소노동자를 편든다. 그들이 누릴 마땅한 권리와 인격을 되찾을 때까지.

진행·정리 이범진·오지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