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281호 편들고 싶은 사람] 대안을 만드는 ‘장돌뱅이’ 운동가 이진오 목사
이진오 더함공동체교회 목사(44)는 한국교회의 굵직굵직한 문제가 터질 때마다 깊이 개입한다. 때로는 ‘해결사’로 때로는 ‘첨병’으로, 역할을 가리지 않고 뛰어든다. 늘 버거운 싸움판임에도 십중팔구는 이긴다. 비결을 묻자 그는 “나를 다 던지면 된다”고 했다. 긴 싸움이 될 사랑의교회, 조용기 목사, 전병욱 목사 관련 사태에도 그는 전부를 던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하나도 힘들지 않다”던 그는 오히려 “우리 안에 있는 사람들로 인해 힘들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누구보다 많이 한국교회의 치명적 범죄와 싸워온 덕(?)인지 스스로 근본적인 대안도 만들어가고 있었다. 인터뷰는 3월 11일 오후 2시, 인천 주안동에 있는 더함공동체교회에서 진행했다.
사랑의교회(오정현 목사), 조용기 목사, 전병욱 목사 등 굵직한 ‘사태’(비리, 횡령, 성범죄 등)를 해결하기 위해 최전선에서 뛰고 있다. 힘들지 않나?
어제도 누가 나한테 같은 질문을 했다. 힘들지 않으냐고. 그런데 솔직히 하나도 안 힘들다. 핍박받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냥 나 혼자 계속 덤비는 수준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귀찮고 독한 모기 한 마리 윙윙 거리는 정도일 뿐이다.
협박하거나 뇌물 가져오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10여 년 전에 어떤 사람이 ‘우리(조용기) 목사님 존경하는 거 모르느냐’면서 협박했었다. 몸 다칠 것은 두렵지 않은데, 생각이 두려워지기도 한다. 이런 협박으로 포기하면 얼마나 쪽팔릴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올 게 왔구나 싶어서 오히려 차분해진다. 3억 원을 가져온 순복음교회 목사가 있었다. “찢을까요, 가져가실래요?” 했더니 가져가시더라.
꽤 오랫동안 이어오는 끈질긴 싸움이다. 사안별로 중간 정리를 해본다면? 최근 실형을 선고받은 조용기 목사 건부터 짚어달라.
조용기 목사는 끝까지 자기 문제를 덮으려고 하겠지만, 현재 130억 원을 배임하고 35억 원을 조세포탈 한 게 밝혀졌다. 밝혀지지 않은 배임 혹은 횡령 금액이 1,000억 원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 전체 10분의 1 정도만 밝혀진 가운데 5년형을 받았다. 여의도순복음교회 교역자 규칙에 따르면 기소만 되어도 목사는 설교를 못하는데, 조 목사는 실형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설교한다. 조용기 목사 사건은 이제 시작이다. 설령 법으로 무죄 판결 난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계속 문제는 드러날 것이다.
오늘은 그들 이야기보다는 목사님 이야기가 더 듣고 싶다. 복상에 기고한 글 중 스스로 ‘장돌뱅이 돈키호테’로 소개한 것을 보았다.
실제로 그렇다. 나는 특정한 ‘계보’가 없다. 지금 40대 기독교 활동가 대부분은 복음주의 운동 진영이든 에큐메니컬 진영이든 나름의 계보가 있다. 그런데 나는 갑자기 나타난 유형이다. 복청(복음주의청년연합회)이나 복청학련(복음주의청년학생연합회), 경실련 기청협(경제정의실천을위한시민연합 기독청년학생협의회) 인맥도 아니고, 그렇다고 학복협(학원복음화협의회)과 연결된 대학 기독인연합(기연) 출신도 아니다. 이렇게 복음주의 운동에는 나름의 기본 계보가 있는데, 나는 어디도 속하지 않고 갑자기 나타났다. 나는 장돌뱅이 같은 사람이다. 거리로 막 나가는 스타일. 사람들이 보기엔 ‘이상한 애’ 하나 나타난 거다. 대체로 기독교 운동은 점잖게 하는데, 자꾸 ‘사고’를 치니까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쪽 바닥 사람들이 나 별로 안 좋아한다.(웃음)
‘싸움꾼’처럼 느껴진다.
원래 기질이 그렇다. 어렸을 때부터 골목대장이었다. 자전거를 120대까지 훔쳐봤다. 더 훔쳤는데 이후로는 세지 않았다. 군대에서는 군종도 했는데 ‘폭군’이 별명이었다. 폭력 군종이란 뜻이다. 베드로 성정에 바울 같은 기질인 것 같다. 하나님 안 믿었으면 깡패 아니면, 정치인이 되었을 것이다.
계보가 없다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건가?
인천전문대에서 1년 공부하다가 1년 휴학하고 2년 동안 CCC(한국대학생선교회)에서 활동했다(나중 결혼할 때 고 김준곤 목사가 주례했다). 그러다가 1990년에 군 입대했고, 말뚝을 박아 1996년 10월에 중사로 제대(6년 복무)했다. 제대하기 1년 전부터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선교학과에 다녔다. 군복 입고 야간으로 다니다가 97년도에는 학생회장이 되었고, 24개 대학의 학생들을 모아 기독교대학총학생회연합(기대총련)을 만들면서 갑자기 나타난 ‘장돌뱅이’가 되었다.
내가 기대총련 초대 의장이었을 때가 98년도였다. 당시 기연 출신이 대학 총학생회장이 된 경우가 있었는데 명지대, 서울여대, 아주대 등이다. 기연 임원 출신들이 연합하자고 외치기만 하지 실제로는 활동하는 게 없으니까, 후배들이 총학 (진출) 운동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복상은 이런 현상을 ‘패권주의적 사고방식’이라고 엄청 비판했었다. 그때 나는 명지대 총학생회장이던 이은창을 만나러 갔다. 알고 보니 CCC 1년 후배더라. 직접 만나 보니 정말 좋은 친구들이었다. 1대 1로 합치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조직이 있고, 그쪽은 정신이 있으니 합치자는 거였다. 이후에 신문도 같이 만들자 해서 나온 게 <새벽이슬>이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멋진 친구들이었는데, 지도해주려는 단체가 없었다. 기윤실에 찾아가서 지도를 부탁했는데, 다들 거리를 두더라. 신문 만들어서 2만 부씩 전국에 뿌리고 그랬다. 교회 세습 비판하는 광고도 크게 찍어서 뿌렸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
한번은 단체 간 연합으로 세습 반대 시위를 준비한 적이 있었다. 시위 하루 전날 20여 명의 청년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왔다. 기윤실 대학생위원회는 그런 시위에 동의한 적이 없으니 플래카드에서 명단을 빼달라는 거였다. 이미 플래카드가 다 준비된 상황이라 임시방편으로 종이를 붙여서 ‘기윤실 대학생위원회’를 가렸는데, 시위 당일에 하필이면 비가 많이 와서 붙였던 종이가 떨어져서, 결국 기윤실 이름이 드러난 채 언론에 시위 사진이 나갔다. 기윤실 안에서 논쟁이 되었다. 개교회 문제에 개입하는 게 정당하느냐는 거였다. 그리고 기윤실이 개교회 문제에 개입했다는 이유로 어느 유명한 목사는 기윤실에서 사퇴하기도 했다. 이는 더 이상 한국교회의 심각한 문제들을 기윤실에서 감당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생긴 사건이었고, 나중에 교회개혁실천연대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박득훈, 지강유철 등과 함께 초대 교회개혁실천연대5인 기획위원 중 한 명이 되었다. ‘교회개혁실천연대’라는 이름도 내가 제안했다.
기윤실의 한계를 느꼈는데 어쩌다가 기윤실 사무처장으로 일하게 되었나?
기윤실로 오라는 제의가 두 번 왔었는데 다 거절했다. 왜냐하면 기윤실의 한계를 내 눈으로 목격했기 때문이다. 시대적 사명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당시 기윤실 권장희 총무가 세 번째 찾아와 눈물을 보이시더라. 그분에겐 평생을 다 바친 소중한 단체라는 느낌이 밀려왔다. 권 총무가 말하길, 기윤실은 사회적 활동을 하는 방향으로 청년들에게 더 다가가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쪽으로 일할 사람이 없어서 나에게 부탁하러 왔다는 거였다. 마음이 움직였다. 그 선배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나를 움직여 기윤실로 가게 되었다.
‘싸움꾼’ 성정에 기윤실 활동이 잘 맞았나?
기윤실에 간사로 가자마자 노무현 탄핵 사건이 일어났다.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텔레비전에 나오는 탄핵 속보를 보고 엉엉 울었다. 권 총무님이 왜 우느냐고 “노무현이 그렇게 좋으냐”고 묻더라. “노무현 잘 모르고, 좋아하지도 않는데 이건 아니다”라고 답했다. 후에 손봉호 장로가 ‘오케이’하고 기윤실에서도 성명을 내기로 일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성명을 내기 전에 또 난리가 났다. 여기저기서 항의 전화가 오고. 그래도 성명을 냈다. 이후엔 긴급 기도회가 이어졌다. 오기로 했던 손 장로는 참석하지 못했다. ‘반대파’들이 항의하고 난리였다. 당시 기도회에는 서울대 교수로 있던 이사장이 참석했다. 청년 수백 명이 와서 기도하는 걸 보고는 이런 기도회라면 매주 해도 좋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나는 그 행사로 한방에 ‘좌파’로 찍혔다. 이후에는 계속 힘들었다. 새로 온 사무총장이 내가 하던 일을 다른 간사들에게 다 나눠주어서 할 일이 없었다. 나가라는 뜻이었는데 그래도 꿋꿋하게 버텼다.
해고 위기는 없었나?
이명박 전 대통령이 대선 후보였을 때 서경석 목사가 기독교NGO를 통해 정권을 창출하려고 김영삼 대통령 때 청와대 비서관 하던 사람과 주고받았던 자료가 나에게 왔다. 이것을 〈뉴스앤조이〉(이하 ‘뉴조’)에 폭로했는데, 기윤실 이사장이 폭로 기사를 문제 삼으면서 “자네가 쓴 게 맞나?” 묻더라. 기윤실 간사가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느냐고 해임안이 올라왔다고 나무라시기에 “기윤실 간사가 개인 자격으로 글 쓸 때도 위에 보고하고 글 써야 합니까? 자를 거면 자르십시오. 그러나 저는 다시 돌아옵니다. 법적으로 다 소송 걸어서 법인체 기윤실이 개인 자격으로 올린 간사의 글을 문제 삼아 해임할 수 있는지 따져보겠습니다”라고 했다. 이사장이 웃으면서 알았다고 하더라. 해임당하지 않았다.
문득 ‘기윤실 주인은 내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윤실에는 엄연히 어른들이 있고 그들이 나를 원하지 않는데도 계속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서 그만뒀다.
그만둔 뒤로는 뭘 했나?
2007년에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NGO를 하나 만들려고 했다. NCC 계열의 소장파와 복음주의 내 활동파들과 함께 제도 변혁 및 법제정 운동을 하려고 했다. 캠퍼스 안에 대학생 NGO를 만들 계획도 세우고 있었다. 선교단체가 아닌 기독교 정신이 있는 NGO를 만들고 싶었다. 이런 제안을 여러 사람들에게 했고 호응이 와서 그해 2~3월 정도에 시작하려고 했는데, 결국 못했다.
어떤 압력이나 방해가 있었나? 왜 시작하지 못했나?
혼자 기도를 하는데 ‘너는 가만히 있어~ 내가 너의 하나님 됨을 보라’ 하는 찬양이 절로 터져 나왔다. 평소 잘 부르던 찬양도 아니었다. 하나님이 나보고 가만히 있으라는 거구나 싶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NGO 설립을 포기하고 2월에 취직할 곳을 알아봤다. 몇 군데서 제안이 오고 내정도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다 어긋났다.
백수로 지냈다는 얘긴가?
애들 학교 보내고 아내 출근하면, 뒷산에 올라 하루 내내 머물렀다. 그 시절이 나에겐 에스겔이 그발 강가를 서성거리던 때와도 같다. 미래는 막막하고,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없었던 때의 그 심정…. 등산하면서 오디오 성경을 들었다. 거의 외울 정도로 여러 번을 들었다.
그 뒷산에서 응답을 받고 신대원에 가기로 결심한 건가?
그건 아니다. 그 시기에 아프간 피랍 사태가 터졌다.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어머니는 기독교인이 아니셨는데, 혹시 아들이 연루된 게 아닌가 걱정해서 전화한 것이다. 그다음 주에 어머니가 교회에 나오시더니, 그다음 주에도 또 나오셔서 예배를 드렸다. 나, 아내, 어머니 셋이서 나란히 예배를 드리는데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고1 때 교회 처음 다닐 때 어머니한테 많이 혼나고, 형한테 맞았던 일들이 떠올랐다. 고3 때 예수 만나고 당연히 목사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신학교 간다고 했다가 데모하느라 공부 못해서 떨어지고…. 교회에서 집까지 어머니를 모셔다 드리면서 다음주에도 모시러 오겠다고 하니 “알겠다”고 하시더라. 만감이 교차했다. 한 달 뒤 아내에게 신대원 간다니까 “그럴 줄 알았다”고 하더라.
사랑의교회 건축 문제에도 간여했다. 계기가 있었나?
2008년 10월, 기독교 언론에 사랑의교회가 천몇백 억 원을 들여 교회를 짓겠다는 오정현 목사의 기자회견 기사를 읽었는데 비판적으로 쓴 곳이 단 한 군데도 없더라. 나는 신대원 재학중이라 조용히 있으면서 그냥 ‘비판적 글이 어딘가에 하나는 올라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계속 안 올라오더라. 그래서 11월에 “사랑의교회, 너마저”라는 글을 직접 썼다. 그런데 아무 반응도 없더라. 여러 단체들에 관련 포럼을 열자고 제안했는데 다들 못하겠다고 하고, 보통 문제가 아니라는 느낌이 왔다. 그래서 양희송, 황병구, 황영익, 나, 이렇게 넷이서 기독교 활동가 ‘개인 자격’으로 포럼을 열었다. 반응 없기는 그래도 마찬가지여서 참다가 뉴조에 올린 글이 “관계의 딜레마와 침묵의 카르텔”이었다.
“관계의 딜레마와 침묵의 카르텔”이 무엇인가? 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서 간결하게 설명해준다면?
교회개혁실천연대도 침묵하고, 뉴조도 기사 안 쓰고, 당시 복상 쪽도 사랑의교회 정도는 품고 가자고 했다더라, 교계 원로 지도자 모두 모른척한다 등등 다 실명 거론하면서 글을 썼다. 그랬더니 난리가 난 거다. 그때 구교형 목사가 사람들한테 고해성사와 같은 장문의 편지를 돌렸다. 한 달에 백만 원씩 성서한국이 사랑의교회에서 지원받고 있어서 말을 못하고 있었는데 “이래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것을 계기로 관련 사람들이 다 모였다. 4~5시간 논쟁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자료들을 제시하며 싸웠다. (자료들은 내가 만든 ‘하우사랑 사랑의교회 어떻게 된 것인가?’ 카페에 올라와 있다.) 결론적으로 이만열 장로님을 좌장으로 실명 성명서를 신문에 내기로 했다. 관계의 딜레마가 침묵을 형성하게 한다. 조용기 목사나 한기총도 그렇지만 우리도 침묵의 카르텔 측면에선 다를 바가 없다. 형님 아우 하면서 우리도 똑같이 행동한다. 그런데,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도 이제는 관계의 딜레마를 못 넘겠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계속 넘어 선 것 같다. 얼마 전 페이스북에 올린 “가끔 모든 걸 중단하고 가만히 있고 싶을 때가 있다”라는 글을 봤다. 관계의 끊어짐 때문에 힘든 것인가?
어렸을 때니까. 이제는 나도 똑같아지는 것 같다. 요즘 ‘건강한 작은교회 운동’ 관련해서 명확한 기준 없이 대충 섞여가는 분위기가 있는데, 좀 힘들다. 조용기, 전병욱, 오정현 목사 때문에 힘든 게 아니라, 내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등을 져야 할 때가 가장 힘들다. 나이가 드니까 개인 영성에서 더 내공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장돌뱅이 돌직구 스타일이라 관계의 어려움이 더 생기는 건 아닌가?
“네 말은 맞지만 너는 싸가지가 없다”라는 말을 듣는다. 성서한국 이사회에 대의원으로 처음 참석했을 때의 일이다. 기타 의견 시간에 손을 들고 말했다. 오정현 목사 이름이 아직도 이사회에 있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이의를 제기했다. 징계해야 하지 않느냐 했더니 또 난리가 났다. 한 분이 ‘더 지켜보자’는 식으로 말씀하시더라. 그때 어떤 분이 ‘안건 처리는 하지 말고 성서한국 집행부가 TFT를 만들어 보는 거 어떻겠냐’고 제안했는데 싫다고 했다. 지금 당장에 안건으로 올려 표결하자는 쪽과 TFT를 만들자는 의견을 두고 투표를 했는데 내가 일방적으로 졌다. TFT 만들고 한 달쯤 지났을 때 오정현 목사의 논문 표절 문제가 드러났고 결국 이사직을 박탈했다. 그대로 두고 계속 미적거렸으면 성서한국 망신당하는 거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진오가 그때 잘했다’ 할 것 같나? 절대 아니다. 반대했던 그 분은 아직도 내 얼굴 보는 것을 불편해한다.
일반적으로 공동체에서 어떤 문제가 해결되면 해결사에게 고마워하기보다 오히려 부담스러워하는 경향이 있다. 배신감은 안 드나?
그런 거 없다. 그게 내 역할이라고 본다. 내가 그걸로 주류가 될 생각이었다면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잘 성장해서 끗발 날리고, 돈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면 서운했겠지만, 나는 아니다. 그런데 돈독했던 관계가 깨지는 건… 마음이 허전하다. 나도 괜찮은 놈인데….
이진오의 ‘역할’이란 무엇인가?
‘선을 넘는 것’이다. 최근 한기총 해체운동을 했다. 옛날부터 한기총과 국민일보는 해체해야 한다고 번번이 이야기해왔다. 최근 손봉호 장로가 언급한 이후로 다시 불이 붙었다. 한기총 해체가 기도회만으로 되겠나. 기도회도 중요하지만, 누군가는 단식도 해야 하고, 누군가는 쳐들어가야 하는데 다들 점잖다. 내가 단식하겠다고 했더니 얼굴들을 찌푸리더라. 그런 일이 내 역할이다.
어떻게 선을 넘었는지 듣고 싶다.
한기총 건물 1층에서 바로 금식기도회를 했다. 4일째 되는 날, 한기총 회장 홍재철 목사가 기자회견을 한다고 회의실에 올라가는데 신경질이 나서 막 욕을 했다. 그래도 분이 안 풀려서 기자회견 장소로 쫓아 올라가는데 다 말리더라. 밀치고 끌려 나오고 하다가 점거하려고 밀고 들어갔다. 길자연 목사는 지하 주차장에서 못 들어오고 있었다. 그때 우리 쪽 사람이 와서 중재를 시작했다. 솔직히 화가 났다. 우리가 선을 넘어야 잡혀가고, 그래야 어른 목사들이 중재하지 않겠나. 길 목사가 내 앞을 지나가는데 조용히는 못 있겠더라. “당신이 목사냐! 회개해!” 소리를 막 질렀다. 난 이렇게 끝나는 게 너무 원통하다. 하려면 제대로, 다 던지면서 똑바로 했으면 좋겠다. 우리 교회 청년들한테도 항상 말한다. 나도 중재 좀 해보게 제발, 선 좀 넘어보라고.
동료나 후배 활동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겠다.
계산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우리는 체면에 명분까지 다 차리면서 활동하려고 한다. 요즘 드라마 〈정도전〉을 보며 많은 걸 느낀다. 정도전과 이성계처럼 중심이 있어야 한다. 옳은 길을 밀고 나가는 중심이다. 반면에 정몽주나 최영은 중심은 없고 교양과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자기를 다 안 던진다. 한국 기독교에는 정몽주 같은, 오바댜 같은 인물만 많다. 그러면 엘리야는 누가 하나? 설교는 엘리야나 예레미야처럼 하면서 실제 움직임은 모두 정몽주처럼 한다. 적어도 목사로 나선, 기독 활동가로 나선 이들은 정도전처럼 목표를 위해 다 던졌으면 좋겠다. 나는 교계의 여러 치명적 문제의 책임이 평범한 성도들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몽주같이 다 던지지 않는 기독 활동가와 목사들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 하는 척만 하다가 한국교회가 이렇게 된 거다.
전병욱 목사 성범죄 사건을 파헤칠 때, 여성 기독 활동가들이 피해자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면서 해결 방식에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었다.
의미 있는 지적이었다. 그런데 피해자들은 오히려 전병욱 목사가 코너에 몰리는 것만 봐도 힐링이 된다고 했다. 성범죄 피해자의 인권이 중요하지만, 하나의 잣대만으로 봐서는 안 된다. 정의라는 잣대도 있다. 성범죄 피해자가 고소하지 않더라도 수사기관의 인지나 제3자 고발만으로 기소가 가능해진 취지를 진지하게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그리고 여성 인권 보호 차원에서도 피해자가 사과를 받고, 전병욱은 더 망신을 당하고 치리나 처벌을 받는 데까지 가야 한다. 이번에 전병욱 관련 책이 나오는데 수익금을 성범죄 피해자들을 위해 쓰기로 했다.
여러 사태에 개입하는 동시에, ‘건강한 작은 교회’ 만들기를 직접 실천하고 있다. 다른 듯한 두 활동이지만, 밀접한 관계인 것 같다.
그렇다. 건강한 작은 교회가 많은 문제들의 근본적 대안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2009년도에 성서한국 전국대회에서 사실 의문이 많이 생겼다. 1천 명 모였다고 우리들은 대성공이라고 자축했지만, 완전 ‘게토화’되어 있다는 측면도 봤다. 한 발만 밖으로 나가도 아무도 모르는 우리끼리의 행사였다. 선교한국인 줄 알고 온 사람도 있었다. 그런 하나님 나라 운동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장을, 판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기존 운동과 단절하자는 게 아니고, 건강한 작은 교회를 많이 만들어 가면서 관계를 넓혀가자는 의미다. 돈 많고 영향력 있는 목사가 이끄는 연합 말고, 동네 작은 교회 목사들의 연합으로 구성하는 새로운 생태계를 말이다.
그래서 당시 성서한국 사무총장이던 구교형 목사를 만나러 갔다. 부천, 인천에 있는 교인들 아무도 성서한국을 모른다며 지금은 이른바 ‘하방운동’을 해야 할 때 아니냐고 했다. 목사들이 지금 중앙에서 운동할 때가 아니고 지역 교회로 자기 목회를 해야 할 때라고 제안했다. 마음이 통했다. 구 목사도 나도 지역사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더함공동체교회를 이끌고 있다. 건강한 작은 교회, 직접 시작해보니까 생각했던 것처럼 잘되던가? 활동가들이 목회에 뛰어들었다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많이 봤다.
정말 재미있다. 예배 인원이 어른 80명 정도에, 아이들까지 포함하면 120명 정도다. 담임목사가 욕심을 내려놓고 교회가 쓸데없는 데 돈 안 쓰면 충분히 공동체를 책임질 수 있다. 우리 예배처소인 ‘담쟁이숲’도 지역사회에 공공시설로 공개해 비영리단체와 주민들이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사람들이 자주 이용한다.
교회들끼리의 연대와 연합은 잘 되나?
2011년 6월에 아는 분들을 교회로 초청해서 ‘교회2.0목회자운동’을 시작했다. 건강한 작은 교회를 지향하고 새로운 목회를 하려는 이들이 모였다. 계속 모이는 중이다. 멀리 봐서 100여 개 교회의 연대를 목표로 한다. 작고 행복한 교회가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최대 300명 이하의 교회로 분립·분가해야 하고, 많은 목사들이 ‘동네 만만한(동네사람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목사’로 활동해야 한다. 이런 작은 교회들이 모여 네트워크를 형성해야 한다. 현재 개혁교회네트워크 회원교회가 13곳, 교회2.0목회자운동 회원이 40여 명이다.
교회 분립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솔직히 성장주의자다. 다만 성장하면, 분립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적잖은 교회들이 성장하면, 교회를 브랜드화해서 ‘브랜치 교회’ ‘프랜차이즈 교회’(지부교회)를 세운다. 위성교회를 여러 개 만든다. 이런 브랜드 교회가 ‘건강한 교회’라고 여기저기서 소개한다. 브랜드화를 잘한 목사들이 목회자 멘토링 교육을 하고, 연합 행사의 주도권을 행사한다. 나보고 그런 ‘프랜차이즈 교회’를 맡아서 해보라고 권한 목사도 있었다. 난 전혀 생각이 없다. 자기의 영향력 아래 위성교회를 만들 게 아니라, 자립할 수 있는 분가·분립을 도와야 한다.
‘브랜드 교회’는 교묘한 대형화가 아닌가 한다. 한국교회의 젊은 목회자들도 변형된 대형화를 추구하고, 그런 목사들이 연합 행사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존경을 받는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근본적으로 ‘복음주의 4인방’의 틀과 기준,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해서다. 여전히 그들의 우산 아래서 일한다. 그분들의 기준과 틀을 우리 시대에 뛰어 넘지 못하면 한국교회가 개혁될 수 없다. 그분들은 80~90년대에 이미 자기 역할을 다했다. 이제는 우리 역할이 있다. 젊은 목사들이 신학을 몰라서, 하나님 나라 원리를 몰라서 가만히 있는 게 아니다. 다 욕망 때문이다. 신학 공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욕심 때문이다. 오정현 목사가 왜 4만 명 교인으로도 부족해 10만 명을 모으려고 하겠나. 다 욕망이다. ‘포스트 복음주의 4인방’이 대안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젊은 목사들이 빨리 깨닫고, ‘설국열차’ 밖으로 나가야 한다.
한국교회 전체적으로 교인이 줄고 있다. 한국교회의 지형 변화를 어떻게 예상하나?
앞으로 큰 교회는 더 커지고, 브랜드 교회도 잘 될 것이다. 종교적으로는 한계가 왔다. 기독교 인구가 약 18퍼센트인데, 많아 잡아야 이단 합쳐서 600만 명이다. 다른 이들이 예수 몰라서 안 믿는 사회가 아니다. ‘선택적 비종교인’이 많다. 이제는 재편의 시대다. 사람들이 큰 교회에 피로감이 생겨 지쳤다. 그런데 어른들은 관계 때문에 못 빠져나간다. 그러면서 자기 자녀는 다른 교회로 보낸다. 그렇다고 작은 교회로는 또 안 간다. 작은 교회에는 ‘교황’이 한 사람씩 앉아 있는 경우가 많아서 잘못 붙들리면 큰일 난다. 탈출한 사람들이 어디로 가느냐, 브랜드 교회로 간다. 종교 서비스는 다 받으면서, 귀찮게 하지 않는 곳으로 몰리는 거다.
앞서 브랜드 교회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결국, 대안은 작은 교회들의 연합인가?
그렇다. ‘건강한 작은교회 공동브랜드’를 만들면 좋겠다. 지각 변동이 일어나는 때가 곧 올 거다. 관념적 네트워크를 넘어서 책임 있는 작은 교회 협동조합이나 법인체도 구상 중이다. 공동브랜드로 뭉친 작은 교회가 답이다. 목사가 목회를 잘해서 성장할 수도 있지만, 잘 못해서도 성장한다. 어쩌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가 성장했다면, 나눠야 한다. 그게 십자가의 은혜다. 작음이 본질이다. 작은 교회가 건강하면, 할 수 있는 일들이 무궁무진하다.
마지막 질문이다. 이번 달 커버스토리 주제가 ‘복음의 공공성인데, 하고 싶은 말이 있나?
행동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실천이 중요하다. 나는 이것을 복상을 통해서 처음 배웠다. 1997년도 때 처음 접했는데, 부천에서 열린 성서한국 대회 때였다. 무료로 가져가라고 과월호를 계단에 펼쳐 놨더라. 1호부터 가방에 가득 담아와 방학 내내 읽었다. 내 신앙이 틀리지 않고 옳았다는 이론적 근거가 수두룩했다. 복상을 만난 건 내게 요단강을 건너는 사건이었다.
진행·정리 이범진 기자 poemgene@goscon.co.kr
※ 인터뷰 열흘 뒤 이진오 목사는 ‘국민문화재단’(이사장 박종화 경동교회 목사)과 ‘국민일보’로부터 고소당했다. 그들은 1천억 원대의 배임과 횡령은 인정했으면서도, 이 목사가 주장한 세부내용 중 ‘7,500만 원 지급’ 주장이 사실(액수)과 달라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이유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