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키운 도둑 하나…

[281호 오두막에서 만난 사람들]

2014-03-26     이재영

→ 저마다 몇 보따리가 넘는 사연을 안고 살아가는 출소자들의 자활 공동체 ‘오두막 공동체’. 이곳에는 사람과 사람의 부대낌과 함께, 하나님과 사귐이 있습니다.

▲ ⓒ정영란


오두막공동체 부산지부장(?) 김 씨
“여보세요.”
“??입니다.”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별일 없지요?”
“별일이 있으면 되겠습니까만 잘 지내는 우리도 힘들기는 마찬가진 거 아시죠? 매일 사고뭉치들만 신경 쓰지 말고 우리도 가끔 A/S 해주셔야 합니다. 괜히 아무 이유도 없이 범죄충동을 느낄 땐 정말 참기 어렵고, 때로는 너무 외로워서 죽겠습니다. 혹시 잊고 계신 것 아니겠죠?”
“그럴 리가 있습니까? 자주 연락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래도 이렇게 먼저 전화를 주시니 정말 고맙네요.”

12년 전 부산 갱생보호공단에서 만나 우리와 함께하다가 일찍이 자립하여 잘살고 있는 모범출소자 김?? 씨로부터 오랜만에 걸려온 전화입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나누다 전화를 끊고 나니 문득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습니다.

김 씨는 살인강도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감형되어 15년만에 출소하였습니다. 변변한 피붙이도 없는 사람이 15년이나 갇혀 지냈기에 모든 것이 낯설었고, 딱히 갈 만한 곳도 없던 그는 갱생보호공단에 몸을 의탁하던 중에 우리와 만났습니다. 매주 집회와 상담을 위해 그곳에 방문하던 우리의 모습이 위선적이라 여겼던지, 처음엔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었던 사람입니다. 노골적인 빈정거림이었습니다.

“우리가 무슨 창경궁의 원숭이인 줄 아나!? 과자 부스러기 몇 개 가지고 와서 사람 비참하게 만들지 말라고!”

그래도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할 일들을 마쳤고, 계속 눈을 부라리며 욕설을 퍼붓는 그에게 눈인사하며 자리를 뜨곤 했습니다. 그러기를 몇 차례, 두 달쯤 지났을 때 그가 제 아내에게 다가오더니 손을 펴보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주저주저하면서 간신히 손을 내밀었고, 그러자 그 큰 주먹을 포개어 뭔가를 올려놓았습니다.

“이게 뭐예요?”
“오늘 첫 일당에서, 내일 차비 2,000원을 빼고 드립니다. 쓰시라고 드리는 겁니다. 정말 가치 있게 돈을 쓰시는 모습에 감동해서 내 첫 수입을 바치는 겁니다.”

9만 8천 원이었습니다.

김 씨는 막상 출소하고 살길이 막막하고 엄두가 나지 않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우울증까지 왔다고 합니다.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아무 까닭도 없이 좌충우돌 부딪히며 가학과 자학을 반복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의 모습에서 진심이 느껴져 자기도 이렇게 살면 되겠다 싶어 마음을 다잡았다고 합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에서부터 한 발 나아가기로 한 거죠. 막노동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첫 수입을 고이 간직했다가 우리에게 준 것입니다. 그동안 무례했던 일에 대한 사죄와 자신의 결심을 확고히 하는 증표였습니다.

이후로 김 씨는 열심히 돈을 벌어 장애인, 알코올중독자, 전과자들이 우글거리는 영세민임대아파트 단지에 아파트 한 채를 얻어 그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뒷골목에서 본드를 흡입하는 아이들을 찾아내 아이스크림을 사주면서 타이르는 일을 비롯해 주위의 어려운 사람을 힘닿는 데까지 억척스럽게 돕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이전에 거주했던 동래산성에서 농장을 경영하면서 오두막공동체 부산지부장을 자처했습니다. 부산에 있는 출소자들을 돕고 있는 것이죠. 주변 이웃들도 얼마나 잘 섬겨주었는지 이웃들로부터 “이장님”이라는 애칭까지 생겼습니다.

비극과 참사의 불씨를 끄는 일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 그러니까 오두막공동체가 20년쯤 되어가고 있을 때 저는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범죄경력 평균 20~30년, 평균전과 15~20범에 이르는 ‘잡범’에서, 살인강도 등으로 복역하고 출소한 중범자까지, 20여 명이 함께 살다 보니 그들이 매일이다시피 일으키는 사고 뒤처리를 위해 병원 응급실과 파출소, 경찰서, 피해자 사이를 분주히 오가랴, 또 대식구가 먹고살고 병원 갈 비용을 조달하랴 눈코 뜰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힘든 나날을 보냈습니다. 게다가 뾰족하게 변화된 삶을 살아주지도 않는 식구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울화가 치밀어 참기 어려웠습니다. 끝내 저는 무기력증에 빠졌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긴 한 걸까? 왜 이렇게 어렵게만 돌아가지?’

이때 김 씨가 해준 말이 저를 우울의 늪에서 빠져나오게 했습니다.

“잘 키운 도둑 하나 열 순경 부럽지 않습니다. 우리가 대구 지하철 참사 같은 사건을 몇 건이나 미리 막아냈는지 잘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시지 않겠습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확실하게 살인강도나 강도 상해사건 한 건 이상은 미리 예방한 게 분명합니다. 하물며 대표님은 여럿 살리셨습니다.”

그의 전력도 강도였으니 무지막지한 범죄를 일삼았던 것입니다. 게다가 들키지 않고 잡히지 않은 사건도 여러 건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 자기를 바꿔 살인을 미리 차단하였으니, 여럿 살렸다는 얘기였습니다.

예를 들어 대형화재가 나 불길에 갇힌 사람들이 살려달라고 아우성인데 아무도 그 사람들을 구해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을 때, 용감한 사람이 목숨을 걸고 불길로 들어가 사람들을 구해냈다면 그를 대단한 영웅이라고 칭송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불이 나지 않게 아주 작지만 위험한 불씨 하나를 아무도 모르게 꺼버린 사람이 사실상 자기도 모르게 더 영웅 같은 일을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 경우, 대개는 무슨 일이 일어나려 했는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만 아시는 일입니다. 비극이 발생하기 전 미리 막은 일의 가치는 하나님께서만 아십니다.

추측할 수는 있겠지요? 김 씨가 말했던 대구 지하철 참사만 해도 그렇습니다. 누군가가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고, 비난과 경멸만 보내는 사회에 대해 앙갚음하고 싶어 하는, 정신이상적 심리를 가진 그 사람의 따뜻한 말벗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그 말도 안 되는 푸념을 진정으로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그는 치솟아 오르는 울화를 누르지 못할 정도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신나(시너)통을 들고 지하철로 가지도 않았겠지요. 그는 정신적으로 강도 만난 피해자였으나 우리 중에 누구도 그의 이웃이 되어주지 못했기에 무고한 생명 300여 명이 희생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을 적용해서 깊이 묵상하면 대형사고가 될 수 있는 은밀하고 작은 원인 제거에 힘써야 할 것을 강조하신 말씀이 아닌가 합니다. 아무도 보지 않아 내세울 수 없고, 생색낼 수 없는 작은 불씨 하나 끄는 일, 깨어진 유리조각 줍기, 외로운 사람과 대화해주기 등 작은 일들에 익숙해지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큰 역사는 얼마든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배움은 “잘 키운 도둑 하나 열 순경 안 부럽다”는 말을 건넨 김 씨 덕이었습니다. 과거 우리에게 욕설을 퍼붓던 그가, 우리를 통해 살인의 불씨를 꺼트렸고, 우리 또한 그이 덕분에 자포자기의 불씨를 끌 수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함께 사는 이들이 기뻐하면 기뻐하게 되었고, 슬퍼하면 슬퍼하게 되었으며, 행복과 불행을 함께 나누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높은 마음이 아닌, 같은 마음을 갖게 된 것이고, 결국 같은 마음이 겸손한 마음이요, 가난한 마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왜 이런 일을 하세요?”
30여 년의 세월을 이들과 함께 살아오면서 깨우친 첫 번째 교훈은 우리가 누구를 도운 것이라기보다는 스스로를 돌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웃과 교회와 공동체라는, 같으면서도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그리스도의 몸은 바로 내 몸이기에, 내 몸을 돌본 것을 두고 누가 누구를 도왔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렇게 변화시키려고 했던 그들보다 오히려 우리가 변화되어 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살 수 있게 되었음을 발견한 데서 비롯된 깨달음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를 위해 우리가 먼저 변화되어야 한다는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을 하세요?”라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유가 없어요” 합니다. 우리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렇게 ‘사는’ 것일 뿐입니다. 처음부터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살다 보니 그 이유들이 다 사라져 버린 채 그냥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하니까요.

이재영
경남 합천에서 아내 최영희 권사와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태복음 10:42)는 말씀에 따라 연약한 자들과 함께 공동체를 일구며 살고 있다. 오두막공동체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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