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拘束)당한 속죄론의 구속(救贖)을 위하여

[281호 독서선집] 십자가와 구원의 문화적 이해 _ 마크 베이커?조엘 그린 지음/ 최요한 옮김/ 죠이선교회 펴냄/ 2014

2014-03-26     김기현

나는 믿음, 소망, 사랑 중에서 사랑이 언제 어디서나 최고요 제일이라고 알았다.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이 명토 박아 말하지 않는가. 그러나 존 스토트가 쓴 주석을 읽으면서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 세 가지가 항상 있는 것은 참이로되, 바울서신서마다 다르게 강조된다. 고린도교회야 치고받고 싸우는 통에 사랑을 앞세웠고, 종말론에 대한 오해로 현실을 내팽개치는 데살로니가교회에게는 소망을, 갈라디아서에서는 복음과 믿음의 본질을 심하게 왜곡하는 바람에 믿음을 가장 역설했다.

그때 나는 성서는 상당히 다양한 맥락에서 쓰였고, 텍스트는 문맥을 따라 읽어야 하며, 그러면서도 나름 일관된 관점을 지닌다는 것을 배웠다. 성서를 읽고, 설교하고 묵상하는 것은 성서 속의 다양한 세계와 오늘 우리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연결하는 일련의 행동이다. 성경의 다양성을 단 하나로 축소해서도, 무수히 이질적인 것으로 흩어도 안 된다. 그러면서도 그 다양성은 각각의 콘텍스트와의 대결 속에서 형성된 것이니만큼, 그 이야기에 충실하면서도 창의적으로 우리 이야기를 써내려가야 한다.

선교학자인 마크 베이커와 신약학자인 조엘 그린은 《십자가와 구원의 문화적 이해》에서 십자가에 나타난 속죄를 성경과 문화 또는 선교적 상황에서 일관되게 조망하는 데 성공했다. 하나님의 계시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 현장에서 일어난 사건이고, 그 사건에 대한 성찰이라는 점에서 성서는 그 자체적으로 선교적이다. 어떤 점에서 성서신학에서 선교신학이 분화된 것은 자연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이는 근대적 현상이다. 둘이 통합될 때에 성서적이면서도 현재적일 수 있다.

속죄론에 관한 일관된 3가지 주장
그들이 일관되게 주장하는 바는 세 가지다.

첫째는 속죄 이론은 실로 다양하다. 다양성을 두 가지 측면으로 살핀다. 하나는 성서이다(2~4장). 성서에는 총 다섯 가지 은유가 있다. 법정, 상업, 인간관계, 제사, 전쟁 등이다(45쪽). 그리고 복음서와 바울서신이 다르고, 베드로와 요한이 각기 다른 정황에서 십자가를 선포했다. 예컨대, 누가는 십자가를 수치로 이해하지만, 요한에게 십자가는 영광이다. 그렇기에 “교회는 한 가지 속죄론을 내세워 그것만이 올바른 이론이라고 정한 적이 없다.”(205쪽) 다른 하나는 역사이다(5~6장). 속죄론은 역사적으로도 다양한 모델이 존재한다. 초대 교부들의 승리자 그리스도 모델에서부터 안셀무스(Anselm)의 형벌 대속론과 아벨라르의 도덕감화설, 현대의 형벌 보상론 등이 그것이다. 저자들의 결론은 명료하다. 어느 한 이론을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 저자들은 저렇게 많은 이론들이 쟁론하는데, 유독 한 가지에만 집착하는 것을 숱하게 질타한다. 한 이론을 절대화하면, 성서의 다양성을 잊게 되고, 다른 맥락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한다.

둘째, 속죄 신학은 저마다의 콘텍스트 속에서 형성되고 성립되었다. 예컨대, 승리자 그리스도 모델은 교회와 당대의 권력인 로마와의 긴장 국면에서 십자가를 이해한다. 십자가는 악한 세력과의 대결이고, 승리이다. 다음, 형벌 대속론은 명예와 보상을 중시하는 중세의 봉건영주 제도라는 조건에서 태동하였다. 영주와 같은 하나님은 당신의 명예를 위해 인간들에게 보상을 받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형벌 보상론은 현대의 형법 체계 하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점을 간과하면 모든 상황에 보편타당하게 적용 가능한 교리로 만들게 된다. 그렇다고 모든 이론이 다 옳다는 상대주의는 아니다. 내가 보기에 저자들은 세 가지 관점에서 평가한다. 먼저는 성경적이냐의 문제, 다음으로는 자신을 만능으로 내세우느냐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자기 시대를 비판하는 능력이다. 불가피하게 시대의 언어로 동시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지만, 그 시대의 포로가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승리자 그리스도론을 주장한 이레니우스는 당시 플라톤의 실재론에 얽매이지 않았고, 단 한 모델에 엮이지도 않았다. 반면 형벌 대속론과 보상론은 당대의 굴레에 갇힌 경우로 혹독히 비판당한다. 하나님을 자기 틀에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셋째, 오늘 우리는 성경의 속죄론에 충실하면서도 우리 시대를 위해 창조적인 해석과 적용이 요청된다. 상황화를 제대로 한 첫 사례는 일본에서 속죄를 형벌이 아닌 수치로 읽어낸 노먼 크라우스이다(7장). 서구와 달리 일본은 증거에 따라 벌을 주기보다 각자의 인간관계를 단절시켜 격리하는 것이 가장 큰 치욕이다. 속죄는 그 수치의 제거이다. 왜 예수는 죽었는가, 라는 질문은 당연히 수치로부터 회복이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그려내는 것과 달리 십자가는 고통보다는 수치를 주는 형벌이다. 그러니까 수치를 없애는 속죄 이해는 성서와 궤를 같이 하면서도 일본적 상황에서 최적화된 속죄 신학인 것이다. 다른 하나는 페미니스트의 경우다(8장). 페미니스트들은 우리의 죄에 대해 분노하고 벌주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하는 것에 강하게 반발한다. 그것이 폭력과 억압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동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해서, 다비 캐슬린 레이는 승리자 그리스도론을 재전유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마귀를 기만하고 십자가에서 내어주신 것을 비폭력적으로 해석한다. 십자가는 마귀의 권세와 전략을 역이용한 창의적인 하나님의 방식이다. 인간이 잘못에 대해 무섭게 벌주는 엄격한 하나님이 아니라 이 세상의 잘못된 폭력과 싸우시는 하나님의 계시가 십자가이다.

지금까지 이 책이 말하는 요지를 전달하는 데 치중했다. ‘서평’이라는 경로를 거쳤지만, 날것 그대로의 목소리를 잘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두 교수가 말한 것을 하나로 압축하면 족하다. 성경대로 신학과 교리를 구축하라! 예를 들어 보자. 속전이나 구속 등의 용어는 문자적으로는 누군가에게 몸값을 치렀다는 의미이다. 승리자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마귀에게, 형벌 대속론과 보상론은 성부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에게 라고 답한다. 그러나 신구약성서 어디에도 그런 개념은 없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자기희생적 사랑이지, 자기학대적 폭력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를 듣기보다, 내가 듣고자 하는 것을 거칠게 끄집어내는 것은 성서에 대한 하나의 폭력이다. 그래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생각하지 말고 보라.” 내 식으로 해석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랬더니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구속하는 십자가가 아니라, 세상으로 구속당하게 만드는 십자가가 되었던 것이다. 이 책이 그간 속박당한 속죄론을 구속하는 데 크게 일조하리라 확신한다.

김기현
한국외국어대학교를 나와 침례신학대학교에서 종교철학과 현대영미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Ph. D)를 받았다. 로고스교회 담임목사이자 로고스서원(www.logosschool.co.kr) 대표로 일하고 있으며,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요?》 《공격적 책읽기》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 《내 안의 야곱 DNA》 등 여러 권의 책을 쓰고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