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은 60점, 아직도 초보”
[282호 편들고 싶은 사람] 이 시대 어느 ‘아버지’의 자전적 이야기
인생에는 전문가가 없다. 누구나 처음, 단 한 번 살다갈 뿐이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겪은 70대 김영돌 아버님 인생 이야기는 낮은 목소리에 실려 나왔다.
“평범하게 살아왔다”는 얘기가 아무 고난과 역경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평범한 인생길 위에서 폭풍우와 거친 풍랑을 만나 좌초할 위기를 헤쳐 오늘에 이른 ‘아버지’는, 아버지의 ‘삶’은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 오늘도 출퇴근길에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 길을 걷다가 마주치는 숱한 ‘아버지’들은 그 깊디 깊은 주름 속에 어떤 인생 이야기를 감추고 있을까?
특별하진 않을 것 같으나 결코 지나쳐선 안 될 우리 시대 ‘아버지’의 자전적 이야기를 듣는 것은, ‘전문가 없는 인생’의 작은 이정표 하나를 만나는 일이다. 그래서다. 10대 초반에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칡뿌리와 소나무껍질로 연명하던 시절을 지나 아버지가 되고, 가난한 시대에 2남2녀의 어버이 노릇을 충실히 감당하며 살아온 이 시대 어느 아버지의 74년 세월을 이 지면에 담고자 한 것은.
처음엔 적이 긴장하신 듯 보였으나, 말문이 열리자 이내 그간의 세월을 유수같이 쏟아내셨다. 한 번 들은 숫자는 지금도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한 아내의 남편이자 어버이로 살아오신 그의 인생 이야기는 여느 인터뷰와 달리 자전적 구술 형태로 풀어 전한다. 그래야 아버님의 삶 이야기가 조금이나마 더 가감없이 전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글쎄,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하나…. 오래된 옛날이야기를 하자니, 젊은이들 보는 잡지에 폐가 되지나 않을지 모르겠네.
내가 41년생이야. 칠십 넘게 살아오면서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 탓에 고생을 많이 했어. 어릴 적부터 친구가 부탁을 하면 거절을 못했어. 타고난 거지. 수중에 돈이 없어도 누가 돈 좀 빌려달라 하면 빚을 내서라도 빌려줄 정도였어. 그러니 어땠겠어? 집사람 고생을 참 많이 시켰지….
지금까지 살면서 다른 사람과 싸워본 적이 없어. 다른 사람에게 싫은 소리 할 줄도 모르고 또 내가 긍정적인 성격이라 그런 것도 있고. 싸움이라곤 부부싸움 외에는 한 적이 없어. 다른 사람과는 싸운 적이 없으면서 부부싸움을 했다니까 이상한가? 허허, 그게 다 내가 남의 부탁을 거절 못한 탓이지 뭐겠어. 큰 사기를 당해서 집도 날리고 집사람 고생을 많이 시켰거든….
열한 살이던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비참하고 힘든 시기였어. 1951년도였는데, 그해 3월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4월에는 세 살짜리 남동생이 죽었어. 그리고 5월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거야. 자그마치 석 달 안에 가족을 셋이나 잃었으니 말해 뭐해. 인생 최대의 위기였지. 그때가 한국전쟁 나고 1년이 채 안 될 때였는데,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 2위였어.
초등학교는 어찌어찌 졸업했는데, 중학교는 당연히 못 갔지. 당시는 중학교가 의무교육도 아니었고, 돈이 없으니 별 수 있나. 지금 서울역 노숙인들이 그 시절의 우리보다 더 낫다고 보면 될 거야. 내 고향이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인데, 거기가 가장 못사는 지역이었어. 산에 가서 땔감 마련하고, 칡뿌리 캐고 소나무껍질 벗겨 먹으면서 근근이 연명해나갔지. 요새는 웰빙식품이라면서 그게 건강식품이 되었더구만, 그 시절 우리한텐 그게 주식(主食)이었어.
아버지 돌아가신 뒤 초등학교는 겨우 졸업했는데 중학교는 다닐 방도가 없었어. 그래서 다른 아이들이 중학교 졸업할 동안, 나는 지게 지고 산에 나무하러 다니거나 칡뿌리, 소나무껍질 캐러 다니는 게 일이었어. 우리집에는 부쳐 먹을 밭 한 뙈기도 없었거든. 그러니 제 아무리 용을 써봐도 도저히 살 길이 없는 거야. 먹고 살 길이 없어서 결국 할 수 없이 어머니, 여동생, 나 셋이 대구의 고아원으로 갔지. 그게 1956년도였어.
대구 대명동에 고아원이 있었는데, 거기가 여러 학교가 모여 있는 학교촌이었거든. 학생들이 교복입고 모자 쓰고 다니는 걸 보니까, 그게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는 거야. 고아원 원장님에게 간곡히 부탁을 드렸어. 학교 가고 싶다고. 그런데 문제가 있더라고. 내 나이 또래들은 전부 고등학생이었는데, 나는 중학교를 나오지 않았으니 곧바로 고등학교를 갈 수가 없잖아. 내가 학교를 다니려면 중학교를 가는 수밖에 없었던 거야.
그런데 그때만 해도 고등학교가 일류에서 삼류까지 등급이 있었어. 삼류 고등학교는 지원자가 적어서 늘 정원 미달이었어. 어느 상업고등학교였는데, 원서 넣을 때 중학교 졸업증명서를 첨부하라는 거야. 입학도 못한 중학교 졸업증명서를 내가 무슨 수로 제출하겠나. 그래서 ‘경북 의성까지 다녀와야 하는데 거리가 너무 멀어서 나중에 내겠다’고 얼버무리고 넘어갔지. 지금이야 말도 안 되는 얘기겠지만, 그땐 그게 통하던 시절이었어.
입학시험에서 영어나 수학, 모두 처음 보는 용어와 문제들이 대부분이니까 외우는 수밖에 없었지. 그렇게 고등학교를 들어갔는데, 하도 거짓말 같아서 뺨을 꼬집어 봤어. 학교에 들어가서는 무조건 교과서를 통째로 외웠어. 내가 중학교 공부 기초가 없으니 다른 방법이 없잖아. 외워서 시험을 쳤는데, 시험 문제를 보면 교과서 몇 페이지에 나온 건지 다 보여. 3년 내내 전교 1등을 했어. 머리는 좋았던가봐. 하나님이 내게 그런 총기는 주신 게 아닌가 싶어. 참 감사한 일이지.
고등학교 졸업하기 전 서울대 경제학과에 합격을 했어. 그때는 서울대 가는 게 지금처럼 어렵지는 않았던 거 같아. 아무튼 합격은 했는데, 문제는 재정적인 뒷받침이었어. 입학금이나 생활비를 감당할 길이 없는 거라. 포기했지. 그거 포기한 게 이 나이 되도록 가슴에 많이 남아 있어. 그때 서울대를 갔으면, 오늘 인터뷰 안 했지.(웃음) 친척 중에 도와줄 만한 사람은 없었냐고? 그때는 하나같이 다 못살 때였잖아. 요즘 같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땐 이북이 우리보다 다섯 배나 더 잘살 때였으니 누구 하나 그럴 형편이 안 됐지. 그러니 못가는 게 당연한 시절이었지.
좌절과 환희의 순간
내가 형편이 안 돼서 대학을 못 가게 되니까, 내가 있던 고아원 원장님 조카이던 친한 친구도 대학 진학을 포기하더라고. 그리고 자기 등록금으로 둘이 같이 대구신학교엘 갔어. 신학교 1학기 마치고 함께 공군에 지원해서 입대했어.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어머니께는 말씀도 안 드리고 그냥 자원입대했지. 군대 가서 군복으로 갈아입고 사복은 집으로 돌려보내잖아. 그 옷을 소포로 받고서 어머니가 굉장히 놀라셨지. 갑자기 자식이 입던 옷이 오니까 죽은 줄 아셨던 거야. 친구랑 같은 날 입대하고 같은 날 제대했어.
제대 후 복학하려는데 여전히 아무런 뒷받침이 안 되니까, 그냥 고향 내려가자 해서 경북 의성으로 내려갔어. 그때 농사를 지으려고 남의 땅을 개간하면서 틈틈이 <수험생활>이라는 월간지를 보면서 공무원시험 준비를 했지. 시험 치는 건 자신 있었으니까, 학교 다닐 때도 시험 날이 제일 신났으니까 힘들진 않았어.
신문에 합격자 공지가 났는데 1964년 12월 30이었어. 눈을 몇 번이나 비비고 볼을 꼬집었는지, 꿈인 줄만 알았어. 아마 장관이 되었어도 그렇게 기쁘진 않았을 거야. 어렵게 어렵게 살다가 첫 취직이 되어 돈을 벌게 된 거잖아. 그것도 공무원으로. 그러니 오죽했겠어? 지금도 그때 순간이 생생해. 지금으로 치면 9급 공무원이었는데, 동네가 들썩일 정도였어. 당시만 해도 시골에서 공무원 합격자가 나오는 게 흔한 일은 아니었거든. 그게 내 인생에서 아마 가장 기뻤던 순간일 거야. 지금 돌아봐도 가장 감사한 일이고. 그때 처음으로 헐벗은 생활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공무원시험 합격 후 첫 근무지가 의성군청이었어. 그때가 1965년도였는데, 공무원 첫 월급이 4,500원이었지. 그 시절에는 그 월급으로 네다섯 식구는 먹고살 수 있었어. 요새로 치면 한 200만 원 정도 되려나? 군청에서 공무원 생활을 열심히 하던 중 어느날 은행원 모집공고를 보게 된 거야. 한국상업은행(현 우리은행)이었는데 생년월일을 따져 보니까 나한텐 마지막 시험 기회더라고. 그래서 시험을 봤는데 합격이 된 거야.
당시는 은행 직원이 되면 재산세를 5만 원 이상 내는 연대보증인이 있어야 했어. 그런데 나한테 무슨 연대보증인이 있었겠어? 그걸 친구 삼촌이 해주셨지. 교회 장로님이시던 고아원 원장님 말이야. 그분이 연대보증인이 되어 주신 덕에 은행원으로 입사해서 부산으로 발령을 받아갔지.
은행에 가니까 첫 월급으로 2만 원을 주대. 공무원 월급의 거의 다섯 배였지. 나한텐 엄청 큰 돈이었어. 은행에서 월급을 이렇게 많이 주는구나 했어. 지금도 난 부산이 좋아. 은행 근무를 처음 시작한 곳이기도 했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마음에 드는 도시였어. 사람 살기에 괜찮은 곳이구나 생각했지. 거기 살면서 은행에서 평생 못박아야겠다 마음 먹었어. 동래지점에 있다가 대신동하고 중앙동에서도 근무했어. 2년에 한 번씩 인사 이동이 있었거든.
결혼… 사기… 상경…
결혼은 스물일곱 살에 했어. 그때 우리 아내가 스물다섯 살이었지. 그때만 해도 여자는 스물한두 살이 금값일 때였는데, 요새로 치면 결혼적령기가 한참 지난 거지. 대구에서 선을 봤어. 의성 있을 때 다니던 교회 목사님 처제였는데, 사모님이 나를 눈여겨보셨던 모양이라. 선보고 나서 꼭 결혼하고 싶은 마음까지 든 건 아녔는데, 싫지는 않았어. 그런데 내가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으니까, 부산 내려가면 그 길로 멀어질까 싶었던지 처녀 집안에서 더 적극적으로 나오더라고. 부산에서 젊은 도시 아가씨들 보면 마음이 변할까봐 그랬던 것 같아. 하기사 그럴 가능성이 없지 않았지.
결혼해서 2남2녀를 뒀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게 아들 둘, 딸 둘을 낳은 거야. 1960년대 우리나라 정부 시책이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였어. 먹고 살기 힘드니까 인구 늘어나는 것을 제한하자는 정책(산아제한)이었는데, 나는 아들 딸 구별없이 ‘둘씩’만 낳아 묵묵히 키웠어. 아이들이 다들 잘 자라주어서, 지금 큰애(아들)는 공인회계사 하고, 둘째(딸)는 출판사 다니다가 지금은 번역일을 하고, 셋째(아들)는 변호사, 막내(딸)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일해.
아이들이 다 착했어. 공부머리가 있었던지 공부들을 잘해준 덕에 우리가 보람을 많이 느꼈지. 셋째까지는 연년생이고 막내만 세 살 터울이야. 그러니까 애들이 컸을 때는 대학 가방만 4개였어. 아이들이 대학 다닐 때 장학금도 받고 힘이 많이 돼줬지. 그런데 실상 아이들 키우는 건 집사람이 거의 다 한 셈이야. 고생이 많았지. 장사도 하면서 애들 키우랴 살림하랴….
부산에서 은행원으로 직장생활을 잘하며 살고 있는데, 잘 되려니까 주변에서 유혹이 들어왔어. 투자를 권유하는 거야. 어찌 보면 은행원인 내가 신용이 좋다는 게 자만심이 되었던 것 같아. 고객 명함에 내 사인만 있으면 은행에서 돈을 빌려줬을 정도였거든. 그런데 제대로 투자를 해서 사업을 해봤던 게 아니라, 그냥 시작도 하기 전에 완전 사기를 당한 거였어. 당해도 크게 당했지. 그래서 은행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
다행히 취직이 금세 되었어. 은행 근무 경력이 있으니까 그랬을 거야. 금속제조회사 경리과장으로 들어갔는데, 그때 서울 올라와서 처음 받은 월급이 15만 원이었지. 내가 다른 건 다 서툰데 숫자는 한 번 들으면 잊어버리질 않아. 들으면 바로 머리에 입력이 돼버려. 은행일도 그래서 할 수 있었던 거겠지. 경리부장도 하고 감사도 하고, 줄곧 재정이나 재무 분야에서 일했어. 숫자 감각은 지금도 그대로야. 몸은 늙어도 그건 안 늙는 거 같아. 하나님이 주신 은사지. 감사할 따름이야. 그런데 사소한 거라도 손기술이 필요한 쪽은 영 자신 없어. 예전엔 형광등도 못 갈았어. 등이 나가면 그냥 촛불을 켰지. 요즘이야 할 줄 알지만, 그땐 그 정도였단 얘기야.
북아현동으로 이사 와서 교회는 길 건너편의 아현장로교회로 갔어. 당시에도 북아현동에 교회가 많았는데, 이사 오면 교회부터 찾아보잖아. 수요일 저녁예배 때 아현교회에 갔다가, 연세가 한 50 정도 되는 성도 한 분이 우리 집까지 찾아왔더라고. 수요예배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새로 왔다는 걸 아셨는지 집까지 찾아오신 거였어. 집사님이셨는데, 그분 때문에 아현장로교회를 다녔지. 교회 등록하고 나오라는데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 탓에 그냥 그 길로 등록하고 다닌 거야. 그때부터 지금까지 36년째 줄곧 다니고 있지. 작년에 장로직에서 은퇴를 했어. 20년 동안 장로로 섬겼는데 호적 나이가 늦어서 작년에 은퇴했지.
‘종지기’에서 ‘기도방’까지
교회는 여섯 살 때 처음 갔어. 둘째누나가 성탄절에 교회 가면 사과 준다고 해서 따라간 거야. 그때부터 지금까지 다니고 있으니 한 70년 된 건가. 어렸을 때 무슨 열심이었는지 교회의 새벽기도 종을 내가 쳤어. 우리 땐 교회 종탑이 있어서 새벽예배든 주일예배든 예배 시간을 알리는 종을 쳤거든. 열두 살 때부터 새벽기도 종을 내가 쳤어. 그런데 시계가 없으니까 시간을 잘 모르잖아. 닭울음 소리를 듣고 종을 쳤는데, 새벽 1시에 종을 쳐서 온동네 사람을 깨워놓고 난리가 난 적도 있었지.
나는 그 종지기 노릇이 좋았어. 다른 사람에게 안 빼앗기려고 새벽 1시에도 치고, 2시에도 치고 했어. 그 어린 나이에 예배 시간을 알리고 새벽을 깨우는 게 그렇게 뿌듯하고 뭔가 좋았던가봐. 그 시절 교회는 성령의 불이 붙었던 거 같아. 지금은 교회가 참 세속적이고 물량적이 되어 버린 것 같아 안타까워. 게다가 너무 많이 갈라져서 지금 교단이 120개가 넘잖아. 하나님 뜻이 아니라 자기 뜻에 따라 지도자가 교단을 쪼개고 새로 세우고 한 거지. 언젠가 여론조사를 본 적 있는데, 우리나라 교회는 성장기를 지나 이젠 쇠퇴기에 접어들었다고 되어 있더라고.
신앙생활을 지금까지 별 어려움 없이 해온 것도 감사한 일이야. 앞서 얘기했지만, 열한 살에 할아버지, 아버지, 동생을 차례로 떠나보냈는데, 제대로 기도할 줄도 모르던 때였어. 그때가 위기라면 위기였을까. 그저 “하나님, 도와주십시오”라고 할 밖에 달리 할 말이 없더라고. 7년 전 대장암 수술을 받을 때도 그랬어.
인생길이라는 게 걷다 보면 갈 바를 알 수 없는 막막한 순간이 참 많이 찾아와. 그래서 누구나 초짜고 초행이겠지. 내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도 375장 “나는 갈 길 모르니”야.
나는 갈 길 모르니 주여 인도하소서
어디 가야 좋을지 나를 인도하소서
어디 가야 좋을지 나를 인도하소서
…
아이 같이 어리니 나를 도와주소서
힘도 없고 약하니 나를 도와주소서
힘도없고 약하니 나를 도와주소서
이 나이쯤 살아오면 아무리 평범하게 살았다 해도 풍파가 없을 수 있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이나 재정 위기, 질병… 온갖 고난과 고통이 찾아오잖아. 하나님 원망한 적 없냐고? 내가 긍정적인 사람이라 그런지 그런 생각 든 적이 없어. 그냥 신앙생활 잘하라고 하나님이 경고하시는구나, 매를 드시는구나 하면서 받아들였지. “고난은 인생을 가르치는 대학”이라는 말이 있던데, 내 잘못을 깨닫고 인생을 더 배우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어.
나는 신앙생활이 그렇게 뜨거운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밋밋하지만 그냥 꾸준히, 성실히 해온 거지. 신앙이 뜨거웠던 이들 가운데 교회를 떠나고 아예 하나님도 떠나는 사람들을 여럿 봤어. 그걸 보면서 너무 뜨거우면 저렇게 식는 것도 빠르구나, 너무 뜨거운 신앙도 권장할 만하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 신앙도 삶과 마찬가지로 일관성이 중요하다는 생각도 했고.
우리 아이들에게도 내가 따로 신앙교육이라는 걸 시키진 못했어.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교회만은 성실히 다니라고 말해온 게 다야. 항해 과정에는 풍랑을 만나거나 암초에 부딪히는 경우가 있다, 끝까지 참으면서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이지.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라고. 아이들에게 가장 강조했던 이야기도 그것이고, 하고 싶은 말도 그게 전부야.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 매달려라….
교회에서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우리 때하고는 다르게 참 발랄하고 자유분방해 보여. 활기 있게 움직이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아. 부럽기도 하고. 단지, 공공의식이 우리 때보다는 좀 결여되어 보여서 아쉬워. 자기가 사용한 공간이나 자리 정돈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하는데…. 예의가 많이 희박해져 가는 모습도 그렇고…. 꼭 교회만 그런 게 아니라 사회 전체가 그렇게 되는 것 같아. 지나친 자기 위주, 자기 중심적 사고방식 탓 아닌가 해.
나이 드니까 시간이 남아돌아. 그래서 성경을 필사하고 있어. 이미 두꺼운 노트가 몇 권이나 쌓였어. 집 안에 따로 기도방이 있어서 새벽마다 기도 시간을 가지는데, 이 나이 되어서야 겨우 습관을 들이게 됐어. 그 전에는 나도 날마다 정해놓고 기도하는 게 참 어려웠어.
남은 소망
아까도 말했지만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모질지 못해서 파란만장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어. 돈이 생기면 어떻게 알고 사람들이 몰려드는지, 주변에 사람이 찾아와서 사기를 당하거나 돈 문제로 어려움이 생기면 집사람과 싸움이 벌어지곤 했지. 부부싸움 원인이 그거 하나였어.
지금은 누가 도와달라고 해도 형편이 안 되니까 과거처럼 거절 못해서 어려움 겪을 일은 없어. 능력이 없어지니까 어쩔 수 없이 거절할 수 있게 된 거야. 이젠 작은 도움 요청 정도만 들어주는 형편이야. 아이들 돕는 단체 같은 데서 후원 부탁하는데 거절할 수가 있어야지. 10년째 하고 있는데 큰 돈도 아니고 또 내 어린 시절 생각하면 그걸 어떻게 안 주겠어. 돈 없어서 학교를 못 다닌 게 아직 맺혀 있어서, 할 수 있다면 그런 학생들을 위해 장학사업을 하고 싶어.
공부 못한 아쉬움은 참 질기고 오래 가는 거 같아. 예전에 직장생활할 때도 방송통신대를 두세 차례 입학했다가 결국 졸업은 못했어. 경영학 전공이었는데, 직장일과 자꾸 겹치는 바람에 휴학할 수밖에 없었지. 복학한다 해도 이젠 안 받아주겠지뭐. 올해 1월에도 어느 사이버대학교 경영학과에 지원을 했는데, 등록금이 제법 들길래 애들한테 슬쩍 운을 뗐는데 별 반응이 없어서 그냥 접었어. 앞으로도 공부는 계속 하고 싶어. 기회만 된다면 경영학과를 마치고 싶어. 형편 때문에 할 수 없이 대학을 포기해서 그런가봐. 그리고 여행도 좀 더 자주 다니고 싶고. 여행을 좋아하는데 늘 마음으로만 바랐지 형편이 안 돼서 잘 못갔거든. 남해나 제주도, 포항처럼 바다 쪽을 좋아해. 해외는 성지순례를 아이들과 함께 가고 싶어. 이건 쉽진 않을 것 같아.
정치판을 보면 답답한 게 너무 자기 주장만 내세워. 상대에 대한 이해나 양보가 많이 결여되어 있는 것 같아. 지금 대통령도 국내적으로는 양보와 화합을 잘 만들어가야 하는데, 아무래도 소통에 문제가 있어 보여. 외교 쪽으로는 잘하는 것 같은데, 그게 아쉬워.
지금도 나는 일할 기력이 있고 일하자는 곳이 있어서 감사해. 오늘도 이따가 면접을 보러가. 나이 70 넘은 노인이 인크루트 홈페이지에 지원서류를 올려놨더니 감동받았다면서 연락이 왔어. 서류를 보니 자기네 회사에 적합한 것 같다면서, 구체적인 업무를 놓고 의논하자더라고. 영업 쪽을 맡길 것 같은데, 내가 그 분야 경험은 없어서 좀 걱정이 되긴 하지.
요즘 젊은 사람들은 급여에 따라 직장을 이리저리 옮기는 것 같은데, 여지껏 난 그런 적은 없었어. 물론 장래성이나 동료와의 관계 문제로 사직 고민을 한 적은 있지. 그런데 월급 때문에 사표 내려 한 적은 없어. 직장생활이야 어느 직장이나 힘들겠지만, 시키는 일만 하기보다는 좀 창의적으로 자기 분야를 공부하면서 일해나가면 좋겠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세우고 자랑할 만한 게 없어. 내 인생에 점수를 준다면 한 60점이나 될까? 아마 우리 집에서는 60점도 못 받을 거야. 그래도 정부 시책(가족계획)을 어기고 2남2녀를 낳아 키운 건 참 잘했다고 생각해. 그 아이들이 내가 이날 이때까지 버틸 수 있는 힘이 돼 줬어. 경제적으로야 힘들었지만, 참 잘한 일이었지.
부부나 가족 사이에서는 이기는 싸움이란 건 없어. 이겨서 어떤 유익이 생기냐 말이야. 지는 게 이기는 거야. 나도 그걸 이제야 깨달아. 가정이 화목하기 위해서는 구성원 모두가 져주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데, 그게 참 어려워. 내 경험상, ‘3초 룰(rule)’이라는 게 있어. 마음이 상하는 말을 들으면, 최소한 3초의 여유를 가져야 해. 여유를 가지면 맞공격이 나가지 않거든. 3초를 못 참아서 싸움이 벌어지는 거야.
요즘은 자서전을 쓰고 있어. 내가 살아온 날들을 정리해보는 중이지. 지나온 날들의 기쁨과 슬픔, 괴로움과 고통을 글로 다시 정리하면서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는 거지. 돌아보니 인생의 10%가 행복했고, 나머지 90%는 힘겨웠어. 그게 나뿐일까. 다른 사람들도 그럴 거야. 이 땅 위의 인생이 수고와 고생 아닐까 싶어.
올해로 결혼한 지 47년째야. 집사람에겐 모든 게 다 고마워. 딱 하나, 모든 게 내 잘못이었을지라도 그로 인해 나도 고통당하고 있는데 거기에 대고 가차없이 매질(비판)할 땐 원망스럽기도 했지. 하지만 힘겨웠을 때 포기하지 않고 견뎌주어 고마워. 곁에 있어준 것도 그렇고.
이제 천천히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하나님 곁으로 갈 준비를 해야지. 하나님 만나면 무슨 얘길 할까 생각도 하면서.
진행 옥명호 lewisist@gosc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