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퍼하고 분노하고 행동하는 예수

[284호 커버스토리] 메멘토 0416: 분노를 넘어 행동으로

2014-06-23     김근수 《행동하는 예수》 지은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벌써 두 달이 훌쩍 지났다. 유가족뿐 아니라 온 국민이 슬픔에 잠겼다. 정부 당국이 구조작업을 소홀히 하는 모습에 국민은 분노하고 있고, 그 슬픔과 분노가 행동으로 이어져 시위와 항의가 계속되는 중이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특별한 사건에 부닥칠 때 사람의 본심이 자연히 드러나게 된다. 개인의 정치적 견해 차이에 따라 세월호 참사를 보는 시선이 사람들 사이에 뚜렷이 나뉘고 있다.

그리스도교 내부에서도 일부 개신교 목회자들이 어이없는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런 충격 앞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우리의 경험을 결국 예수의 시각으로 해석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다. 예수 외에 또 다른 판단 기준을 우리가 어디서 빌려올까. 그러니 우리가 예수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느냐가, 여기서 가장 중요하겠다.

세월호 참사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슬픔’과 ‘분노’는 신학에서 가치 있는 개념인가? 불의한 사회를 보면서 느끼는 분노는 신학적으로 무의미한 감정인가? 슬픔과 분노에서 그치지 않고 저항하는 행동은 그리스도교에서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슬픔과 분노와 행동은 역사 속의 예수에게 어떻게 여겨졌을까? 혹시 슬픔과 분노와 행동에서 인간은 하나님께 다가서는 계기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날 수 있다.

하나님께 다가서는 여러 방법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고 믿음을 가까이하는 방법에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신학은 크게 보면 세 가지 계기에서 시작된다. 개인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세 가지 주제에서 믿음은 출발한다.

1. 피조물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프란치스코)
2. 개인의 죄에 대한 뉘우침(바울, 루터)
3. 세상과 역사의 악에 대한 분노(해방신학)

세 가지 방법 중에 어느 방법이 다른 방법보다 더 우월하거나 열등하지는 않다. 세 가지가 한꺼번에 밀려들기도 하고, 차례로 오기도 하고, 반복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내가 택한 방법이 남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깊이 고뇌하는 계기가 내게는 뚜렷한 의미로 다가오지 못할 수 있다.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언제부턴가 적어도 개신교에는 마치 위 ‘방법2’가 하나님께 다가서는 거의 유일한 길로 자리 잡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렇게 배운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을 보는 방법에도 큰 허점이 생겼다. 개인의 죄 문제를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현상이 생긴 것이다.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께 다가서는 사람은 거의 이단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 흐름까지 생겨났다.

물론 우리 시대에도 방법2는 여cpd_number_getuserall전히 일정하게 유효하다. 그러나 방법2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다가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 또는 3의 방법에서 하나님을 더 진지하게 생각하고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자연과 환경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깊이 묵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전 세계 대다수 사람들이 여전히 가난에 시달리고 있다. 세상의 불의는 사라질 줄 모르고 오히려 더 악화되는 것만 같다. 이러한 시대에 하나님을 찾는 여러 방법이 진지하게 논의되어야 할 것 같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바울이 차지하던 지위에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성서를 보는 사람들의 눈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한국 개신교에는 2번이 하나님께 다가설 수 있는 거의 유일무이한 방법처럼 여겨져 왔다. 그러한 분위기가 세월호 참사 같은 엄청난 사회적 사건에 대한 적절한 신학적 이해와 분석을 적지 않게 방해하고 있다. 방법2의 시각에서 세월호 참사를 본다면 어느 정도까지 말할 수 있을까. 우선 사고를 일으킨 선원 등 개인의 죄가 부각될 것이다. 구조를 소홀히 한 정부 측 대응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할 여력은 나오기 힘들다. 개인의 죄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2번 시각에서 사회적 악에 대한 정확한 분석은 나오기 어렵다. 심지어 개신교 신자가 아닌 탑승객들의 슬픈 운명에 대해 예수를 믿지 않은 탓이라고 함부로 단정할 위험도 있다.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한국 그리스도교는 자신의 신학적 시각을 뒤돌아볼 계기를 맞은 것 같다. 죄의 시각으로 그리스도교를 보는 방법으로는 악에 대한 분별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이번 기회에 1번과 3번의 시각으로 신앙에 접근하는 방법을 개신교에서 더 진지하게 검토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성서를 보는 방법에서도 마찬가지다. 1번과 3번의 시각에서 역사의 예수를 다시 살펴볼 수 있다. 성서공부에 많은 시간을 들이지만 성서를 제대로 아는 성도가 적은 한국 개신교의 실정을 바라보자.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성서를 2번 시각으로만 바라보는 관행에 젖어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바울식 시각 말고도 예수에 다가서는 훌륭한 방법이 또 있다. 성서를 대하는 눈도 다양해질 필요가 있다. 교회 안에서 푸대접받아온 1번과 3번을 새롭게 주목하면 좋겠다. 지나치게 강조된 2번 방법이 차차 자제되면 참 좋겠다.

슬픔, 예수 인간성의 기초
예수의 삶은 한마디로 슬픔과 분노와 행동이 연결된 삶이다. 예수는 어린 시절 고향에서 아주 가까운 세포리스라는 마을을 로마군대가 불 질러 없애버린 사실을 부모나 지인들에게 들으며 자랐을 것이다. 또한 예수 주변엔 많은 이방인들이 살고 있었다. 예수의 부모는 아들에게 왜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땅에 들어와 사는지 자주 설명하였을 것이다. 예수는 왜 자기 땅에서 살면서도 마치 남의 땅에 사는 것 같은지 고뇌하며 살았을 것이다. 부모님 손을 잡고 자주 순례하던 거룩한 예루살렘에 왜 로마군대가 들어와 있는지 의아했을 것이다.

예수의 궁금증은 끝이 없었을 것이다. 왜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대교 대사제(제사장)들은 로마황제를 위해 하루 두 번씩 제사를 지내고 있는지 예수는 이상하게 보았을 것이다. 식민지 신세로 사는 동족 지배층이 왜 로마군대에게 협조하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가난하게 사는 어부, 농부, 날품팔이를 보면서 동족의 삶에 큰 슬픔을 느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90퍼센트가 가난하게 살던 모습을 보고 겪으면서 유대인 예수의 슬픔은 끝이 없었을 것이다. 동족의 운명,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대해 예수는 슬픔을 느꼈을 것이다. 예수가 슬퍼한 대상은 유일하다. 바로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누구에게 슬픔을 느끼는지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신학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불의한 세력이 거짓 눈물을 보이며 도와달라고 선거운동을 하는 것은 그 세력이 유권자인 국민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국민들이 사리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그런 짓을 서슴지 않고 하는 것이다. 슬퍼할 대상을 정확히 분별하는 것이 슬픔을 제대로 느끼는 데 가장 중요하다. 불의한 세력이 무너지는 모습에 슬퍼할 필요는 없다.

예수는 슬퍼할 대상을 정확히 알았다. 예수는 거짓 눈물에 속지 않았다. 그러한 슬픔에 대한 그의 분별 있는 태도가 나는 예수의 인간성을 이루는 제1요소라고 보고 싶다. 그래서 최초로 쓰인 예수 이야기, 즉 마가복음을 해설한 나의 책 제목을 “슬픈 예수”라고 지었다. 슬픔에서 출발한 예수이기에 인류에게 참된 기쁨의 소식, 즉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분노, 예수 삶의 원동력
그리스도교에서는 분노라는 단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분노는 인격적인 결점이자 죄에 가까운 심리적 상태로 자주 묘사된다. 그래서 심지어 사회악에 대한 의로운 분노조차 그 신학적 가치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분위기가 있다. 죄에 대해 지나치게 몰입하는 경향은 악에 대해 무관심을 가져오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그러나 명백히 말하지만 분노는, 특히 의로운 분노는 신학의 출발점이다. 구약성서에서 분노는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근거이기도 했다. 사회악에 대한 의로운 분노는 신학의 출발점이다.

예수는 자기 시대의 정치 상황을 훤히 꿰뚫어 보았다. 이 사실은 신학에서 흔히 외면되어 온 주제다. 예수가 세상에 나타나기 이전 30여 년의 시간은 예수에게 덧없이 흐르는 일상의 무의미한 반복이 아니었다. 예수는 30년 동안 끝없이 고뇌를 거듭하였다. 세상에 나타날 것인가 말 것인가. 나타난다면 언제 나타날 것인가. 누구를 스승으로 모실 것인가. 어떤 메시지를 들고 나타날 것인가. 어떤 말과 행동을 할 것인가. 수없이 작전을 짜고 계획을 고치기를 거듭한 단련의 시간이었다. 예수가 아무 생각 없이 느닷없이 세상에 나타났다고 보는 것은 짧은 생각이다. 인류 구원의 주제를 가지고 세상에 나타나는 사람이 아무 계획도 없이 불쑥 등장할까.

의로운 분노는 세상과 역사를 정확히 보는 데 도움을 준다. 의로운 분노는 부적절한 심리적 자기학대가 전혀 아니다. 의로운 분노는 세상을 바로 보고 올바르게 고치는 원동력이 된다. 의로운 분노가 없는 단순한 연민은 구조악을 보지 못하게 방해할 수 있다. 의로운 분노는 가난한 사람들이 악의 세력에게 당당히 저항하도록 도와준다.

예수의 분노는 크게 두 세력에게 향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1. 자기 땅을 무력으로 통치하는 식민지 세력인 로마군대
2. 로마군대에 빌붙어 이익을 얻으며 동족을 배신한 유대교 지배층

행동, 예수 삶의 핵심 가치
만일 예수가 슬퍼만 하거나 분노에만 그쳤다면 예수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슬퍼만 하고 분노만 하는 예수를 가난한 사람들이 가까이했었을까. 행동하지 않는 사람을 유대교 지배층이 미워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저 슬픔과 분노에 잠겨 있는 이름 없는 사람을 로마군대가 정치범으로 체포할 필요가 있었을까. 행동하지 않는 사람을 정치범으로 처형할 필요가 있었을까.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적어도 두 가지를 분명히 말하고 있다.

1. 예수는 행동하는 인물이었다.
2. 예수는 정치적으로 로마군대에 위협적인 인물이었다.

이 두 가지를 빼놓고서는 예수에 대해 적절히 이야기할 수 없다. 예수의 죽음이 신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따지기 전에 십자가 죽음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담긴 뜻을 먼저 살펴야 한다. ‘죄 사함’이라는 십자가 죽음의 의미가 예수가 정치범으로 처형된 사실을 흐리게 해서는 안 된다. 의미 파악에 앞서 우선 사실관계 파악이 중요하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정치범으로 처형되었기 때문에 예수의 죽음이 죄 사함의 의미를 비로소 갖게 된 것이다. 예수의 죽음은 죄 사함의 은총을 가져왔다는 해석 때문에 예수가 십자가에 정치범으로 처형된 것이 결코 아니다. 그 순서를 정확히 인정해야 한다.

예수가 저항하지 않았거나 행동하지 않았다면 로마군대가 예수를 처형했을 리 없다. 십자가 죽음은 예수가 정치범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정치범은 십자가에서 처형되었고, 종교범은 돌로 쳐 죽였다. 예수는 유대인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은 것이 아니고 로마군인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 예수는 종교범이 아니라 정치범이었다. 예수는 종교범으로 처형되지 않았다. 예수를 유대인들이 죽인 것이 아니다. 예수는 유대교 지배층과 종교논쟁의 결과로 유대인에 의해 사형이 집행되지는 않았다.

로마군대가 예수를 죽였다. 재판도 로마군사법정에서 열렸고, 사형판결도 로마인 총독이 했으며 사형집행도 로마군대가 하였다. 유대교 지배층이 한 짓은 예수를 체포하고 로마군대에 넘겨주고 나쁜 소문을 퍼뜨린 것이 전부다. 예수 죽음의 주범은 로마군대요 유대교 지배층은 겨우 종범에 불과하다. 당시 유대교 백성 전체가 예수 죽음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유대인 후손들이 예수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한다거나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는 주장은 부적절하고 지나치다. 

이스라엘을 식민지로 사로잡고 무력으로 지배하던 로마군대가 예수의 언행에 크게 위협을 느낀 것이 틀림없다. 예수를 반드시 제거해야 할 이유가 로마군대에게 분명히 있었다. 악한 사람이 가장 먼저 선한 사람을 알아본다. 악의 세력은 누가 자기들에게 위협적인 사람인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린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는 행동은 그리스도인의 의무다. 그리스도인의 가슴에는 불의한 권력에 대한 저항 유전자가 이미 새겨져 있다. 우리의 스승 예수는 불의한 세력에 저항하다가 정치범으로서 죽임을 당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1. 불의한 세력에 저항해야 한다.
2. 불의한 세력을 편들어서는 안 된다.

개인의 능력과 신념에 따라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불의한 세력에 저항해야 한다. 그 저항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혹시 저항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저항이 있다. 불의한 세력을 편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불의한 세력을 편들지 않는 것이 저항의 첫걸음이다.

목회자 개인의 생존을 위해서, 또는 교회 존립을 위해서 불의한 세력을 편드는 언행은 예수를 배신하는 행위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입으로 예수를 고백한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무신론자에 불과하다. 그런 사람은 예수와 아무 관계 없는 사람이다. 겉보기에 목회자 노릇을 하고 있다 해도 말이다. 누가 진짜 그리스도인이냐 여부는 목회자로 사느냐 또는 세례를 받았느냐 여부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래서 교회개혁이 중요한 것이다. 사회개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행동은 반드시 교회개혁과 함께해야 한다. 먼저 교회개혁이고 그 다음이 사회개혁이다. 사회개혁의 중요함과 시급함을 외면하자는 뜻이 전혀 아니다. 제대로 사회개혁을 하려면 반드시 교회개혁을 먼저 해야 한다는 뜻이다. 남미 해방신학은 이러한 순서를 수십 년간 뼈저리게 체험하였다.

1. 먼저 교회개혁을 해야 한다.
2. 교회개혁 없는 사회개혁 없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새로 발표한 회칙 “복음의 기쁨”은 이런 순서를 정확히 말해주고 있다. 개혁되지 않은 교회는 사회개혁을 외칠 명분도 없고 능력도 없다. 교회가 사회개혁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하더라도 사회에 폐를 덜 끼쳤으면 좋겠다. 교회개혁 없이 사회개혁을 외치는 것은 교회의 잘못을 감추는 교묘한 수법일 수도 있다.

한국 개신교나 천주교는 이미 사회악에 상당히 몸담고 있는 형편이다. 교회는 사회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장애물로 드러나고 있다. 지금 교회가 사람들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교회를 걱정하고 있다. 지금 개신교와 천주교는 사회를 염려할 형편이 못 된다. 자신의 잘못된 처신을 추스르기에도 바빠서 감히 사회를 염려할 형편이 못 된다.

세월호 참사에서 보여준 정권의 무능과 비인간성, 밀양에서 보여준 국가폭력의 잔인함은 그리스도인들을 분노케 하고 있다. 그러나 개신교 일부에서만 불의한 권력에 대한 저항의 행동이 보일 뿐 대부분 개신교 성도들과 목회자들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무관심한 태도에 그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불의한 권력을 편드는 처신을 보이는 목회자도 있다. 일부 목회자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잘못된 목회자를 따르는 책임은 결국 각 성도에게 있다. 누구도 악을 따르도록 강요당하지 않는다.

지금 한국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먼저 회개해야 할 사람은 종교 지도자들이다. 책임과 권한이 큰 사람일수록 더 큰 죄를 범하기 쉽다. 지금 한국의 대형교회 목사들이나 천주교 주교들은 크게 뉘우치고 반성해야 한다. 그들이 예수를 인용하여 평생 누리는 호사에 대한 무서운 꾸지람을 하나님께 받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사람들을 속인 종교인에게는 지옥의 가장 뜨거운 불이 준비되어 있다. 하나님을 거슬러 하나님께 죄를 지으면, 그 어디에도 빌 곳이 없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따르라고 사람들을 설득하기가 몹시 미안한 시대에  살고 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고백하기도 너무나 송구한 시대에 지금 우리가 있다. 참으로 부끄러운 풍경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김근수  
천주교 평신도 신학자로 마가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마태복음 해설서 《행동하는 예수》를 펴냈다. 독일 Mainz 대학교에서 신약성서, 남미 엘살바도르 UCA대학교에서 유명한 해방신학자 Jon Sobrino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현재 제주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