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밑바닥에서 만난 참 모습

[284호 오두막에서 만난 사람들]

2014-06-24     이재영 오두막공동체 대표

▲ ⓒ정영란
많은 출소자들을 이모저모 돕고 말씀도 전하곤 했지만, 그들에게서 돌아오는 모습들은 겉치레에 불과했습니다. 그들과 진심으로 하나가 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더욱 명료하게 각인될 뿐이었습니다. 그 벽이 꽤 높고 두텁다는 사실을 확인할 뿐이었습니다. ‘그래도 좀 더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 우리의 사랑이 아직 모자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함께 사는 것’만이 답이겠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간헐적으로 도와줄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삶을 함께 나누면서 나아간다면 애정과 신뢰가 형성될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진실한 관계가 맺어져야만 실질적 변화를 이룰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한 것이지요. 실제로 그들은 우리가 잠시 자기들을 도와주다가 사정에 따라서는 사라질 수 있는 존재들이라 여겨, 마음을 놓지 않았고 안전하다 느끼지도 않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룹홈을 만들어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재정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습니다. 모자라는 재정을 메우기 위해 아내 소유였던 아파트와 내가 물려받은 집까지 다 팔았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아내는 모자라는 선교책자 발행 비용과 공동체 생활비를 보태기 위해 금은방과 세공업체를 연결해주는 일을 하면서 매월 수백만 원의 비용을 감당했습니다.

이런 생활이 10년쯤 계속되자 지칠 때로 지친 아내가 반기를 들었습니다. 이 일을 그만두든지, 아니면 이혼까지 심각하게 고려해봐야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쯤에서 눈치 채셨을지 모르겠군요. 이번 ‘오두막에서 만난 사람들’은 바로 좌절과 실패의 밑바닥에서야 하나님과 마주한 우리 부부입니다.

돈벌이 사업에 뛰어들다
우리 부부는 이 사역을 잠정적으로 접고, 돈을 넉넉히 벌어 공동체 식구들의 생계와 장래를 안전하게 만든 다음 재개하기로 합의하고 돈벌이에 뛰어들었습니다. 아내는 금은방 외무생활을 정리하여 조그마한 금은방을 개업하였고, 나는 화물차를 한 대 사서 전세임대 기사생활을 시작했습니다. 2년쯤 지났을 때 친구 권유로 단체급식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어찌나 사업이 잘되던지 주위 사람들이 시새울 만큼 나날이 확장되었습니다. 학교, 회사, 병원 등으로부터 위탁급식 계약을 위해 다른 유명한 업체들과 입찰 경쟁에 참가하라는 권유가 쇄도하였고, 어떤 때는 수의계약으로 일이 진행될 정도로 업체에 대한 신망도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벌어들인 돈 대부분을 사업 확장에 재투자했기 때문에 현금 흐름은 계속 쪼들리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전에 크게 신세를 진 친구의 누이가 찾아와 자신의 절박한 사업 상황을 호소하면서 잠깐만 도와주면 회복할 수 있겠다고 도움을 청해왔습니다. 현금지원이 어려웠던 나는 당좌수표를 백지위임하여 담보용으로 빌려주었는데, 모든 담보가 그렇듯 이게 화근이 되어 3년의 악전고투에도 불구하고 부도를 내게 되었습니다. 처음 제공한 담보수표는 회수되었지만, 이리저리 분산하여 대체 발행된 수표를 돌려막다 보니 3년째에 이르러서는 원금의 2배에 가까운 금액으로 불어났고, 마지막 5천만 원을 막지 못해 부도가 난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거래처에서 사정을 알고 대가 없이 대부분의 수표를 회수해주어 벌금도 내지 않고 부도사태는 잘 수습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가까운 친척들에게 진 빚은 그냥 탕감받은 채 은혜를 갚지 못하고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부도로 사업을 접어야 할 위기상황에서도 50여 명의 직원들이 자신들의 모든 예금을 털어서 자원하여 돕는 등 주위의 자발적 도움으로 또 다시 재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재기 과정에서 흑심을 품고 도와준 지인의 술책에 빠져 사업은 또 다시 발목이 잡히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어쩔 수 없게 된 우리는 믿고 도와준 사람들과 그 흑심의 소유자에게 사업체를 분할하여 나누어주고 빈 몸으로 사업 현장을 떠나야 했습니다.

▲ ⓒ정영란

창고 구석에서 보낸 매서운 겨울
모든 것을 총동원하여 사업 재기에 쏟아부은 뒤여서 우리 가족에게 남겨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식구들이 거처할 집까지 경매에 넘어가고 부모님은 여동생 집에, 아이들은 친구 집에, 우리 부부는 벗이 운영하는 섬유회사 창고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을 서울 여동생 집에 보내드리기 위해 부산역에서 배웅해드렸을 때 아버님께서 남기신 말씀은 지금도 귀에 쟁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기뻐하라고 하셨는데, 지금은 도저히 기뻐할 수가 없구나.”

추운 겨울 떠나가는 기차를 향해 손을 흔들다가, 뒤돌아서서 눈물을 감추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잃은 상황에서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매달렸지요. 그동안 우리 믿음이 최고라고 자부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곧잘 비웃기도 했는데, 내 의지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던 모든 교만이 마치 반석 위에 떨어진 유리그릇처럼 산산이 조각나고 있었습니다.

그동안은 마치 하나님이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나를 사용하시려면 당연히 지원해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처지에서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친구가 운영하는 회사의 섬유창고 구석에 세워둔 장롱들 틈에 침대를 놓고 전기장판 하나에 의지해 매서운 겨울밤을 지새워야 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겨울을 보내고 이제 막 봄이 오던 2001년 3월 어느 날, 아내에게 모 대학 매점의 직원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그러나 출근 후 며칠이 지나고 바로 아내에게 안면마비가 와서 입이 비뚤어진 채 출근해야 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물론 우리의 절박한 상황은 그것을 부끄러워할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찬바람 맞으며 새벽기도도 빠지지 않았지요. 우리 부부는 계속 기도하는 가운데 지금껏 ‘믿음’이라고 여겼던 의지를 내려놓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야 함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깊은 회개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환상으로 지금의 오두막공동체가 있는 골짜기를 보여주셨고, 그 언덕 잔디밭에 내가 들어있는 나무관이 땅속에 묻히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두막공동체에 뼈를 묻고 평생 사역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지요. 순종하는 마음으로 “아멘”이라 화답할 때, “모든 것을 버리라”는 주님의 음성도 들려왔습니다.

같은 시기, 아내에게는 학개서 말씀과 스룹바벨의 비전을 주셨습니다. 학개서 말씀은 정확하게 우리의 상황을 해석해주는 것이어서, 우리는 지금까지의 모든 여정이 하나님께서 주관하신 역사임을 가슴 깊이 아로 새겼습니다.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군의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느니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 집에 빨랐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단물을 그쳤으며 내가 한재를 불러 이 땅의 산에, 곡물에, 새 포도주에, 기름에, 땅의 모든 소산에, 사람에게, 육축에게,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임하게 하였느니라.”(학 1:6-11)

아내와 나는 이 말씀대로 깊이 회개하였습니다. 내 집을 먼저 세우겠다고 하나님의 공동체를 뒤로 미룬 일을 회개했고, 여기에 보태어 모든 것을 내 의지와 노력으로 도모해 내가 주인공이 되고 하나님은 마음씨 좋은 보조자로 전락시킨 죄,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모든 신앙적 잘못과 자아를 고백하였습니다.

출소자들이 하나둘 모이다
추운 겨울날 우리는 그 창고에서 외투를 입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마스크까지 하고 손을 비벼대며 다시 선교책자 《문밖에 서서》를 집필하기 시작했고, 몇 푼 안 되는 생활비에서 난방비를 줄여 얻은 돈 3만여 원으로 매주 다과를 준비해 토요일마다 출소자들을 만나러 갔습니다. 사역을 잠시 멈춘 사이에 부산 엄궁동으로 옮겨간 이들이 있는 한국갱생보호공단 부산지부였습니다.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전도하며 고충을 상담하는 일을 5년 만에 다시 재개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점진적으로 길을 열어주셔서 집필중인 선교책자 출판비용도 매월 사람을 바꿔가며 공급받게 해주셨고 생활도 조금씩 여유롭게 해주셨습니다. 게다가 꽁꽁 얼어붙었던 인간관계도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별도의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임대아파트도 생겨 부모님을 다시 모셔올 수 있었으며, 공동체를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동래 산성에 20여 평의 오두막과 3만 평의 땅도 빌렸습니다.

출소자들이 한 명 두 명 모이기 시작하였으며, 땅이 경작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공동체의 이름을 ‘애린원’이라 하였습니다. 사랑 애(愛), 이웃 린(隣), 동산 원(園)으로 ‘이웃사랑의 동산’이라는 뜻이지요.

이재영
경남 합천에서 아내 최영희 권사와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태복음 10:42)는 말씀에 따라 연약한 자들과 함께 공동체를 일구며 살고 있다. 오두막공동체 카페 http://cafe.daum.netodumaklove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