뽑을 수 없는 가라지들

[286호 오두막에서 만난 사람들]

2014-08-29     이재영 오두막공동체 대표

 

▲ ⓒ정영란

예수님께서는 가라지를 뽑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명백히 주님 자신만의 권한이고, 유일회적 심판 때에야 이루어질 일이라 하신 것입니다. 가라지는 마귀의 의도적 개입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라지를 뽑으면 안 되는 이유가 알곡들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비난, 비판, 정죄를 하지 않아야 하고, 선악 간에 시시비비하면 안 되는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복음으로 산다는 의미는 법으로 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선악과를 범하여 선악을 알게 되자 당연한 귀결로 법을 얻게 되었고 그것의 결국은 “돌로 쳐라! 죽여라!” 등등의 폭력이었습니다. 돌로 치고, 죽이는 것도 폭력이지만 법의 테두리 안에는 정신적 영적 폭력성도 포함됩니다.

그 모든 법은 죽음으로서만 해소되고 무력화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법에 대하여 죽어주심으로 우리가 자유하게 된 것이 바로 진리이고,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악의 실체를 인정하시면서도 그것을 선의 반대개념(적대개념)으로 보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원론자들의 견해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악을 결핍과 미성숙으로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충만으로 어두움이 빛에 소멸되듯이 그렇게 채워지고, 성숙되어야 할 모든 것에 대한 표징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 ⓒ정영란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그 옛날 인류의 조상에게 선악과를 범하도록 부추긴 바로 그 마귀입니다. 그는 도적질한 선악의 지식으로 비난, 비판, 정죄의 당위성을 입증하고 소위 정의라는 이름의 폭력을 정당화하려고 가라지를 심어놓은 것입니다. 복음을 다시 법으로 돌려놓기 위한 계책이지요. 가라지 뽑기는 용서와 화해일치를 벗어나 법을 고수하는 자들이 자초할 심판의 모형입니다. 우리는 자신들의 선악관 또는 나름의 법들로 형제자매들의 가라지 됨에 대한 우려와 의심을 품고 급기야는 분열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불안증 가운데 살아가지만 이것이 마귀의 노림수라는 걸 깊이 유념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라지는 원수이기 때문에 사랑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원수를 위하여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겠습니까? 그 모든 말씀은 우리를 위한 말씀 아니겠습니까? 서두가 길었습니다. 우리 공동체에도 가라지가 있었음을 고백하려고 합니다.

공동체를 파괴하는 ‘가라지’
지금까지 공동체를 이뤄오면서 도저히 함께 살 수 없는 정신 병리적, 반사회적 가라지도 있었고, 어두운 영에 사로잡힌 신앙적, 영적 가라지도 있었습니다. 알코올중독으로 인해 심하게 경계성 인격장애를 갖게 된 한 형제가 있었습니다. 이 형제가 성실하고 열심일 때는 아무도 따를 수 없을 만큼 헌신적이지만 어느 순간 돌변하여 마귀같이 되어버립니다. 지능도 높아서 교묘하게 사람을 옭아매고, 괴롭히며 나름대로 정의를 부르짖으며 근거 없는 고소와 고발을 남발합니다. 이 같은 자신의 의도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번에는 자기 자신이 직접 심판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하면서 새로 지은 공동체 예배당에 휘발유를 뿌려놓고 불을 지르려 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가라지를 뽑지 말라는 말씀 때문에 끝까지 그를 품고 살아보려고 참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화재의 위험성 앞에서는 소방서에 신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직 불이 나지 않은 집에 소방차를 부르려니 상황설명이 불가피했습니다.

이 때문에 합천경찰서에까지 비상이 걸리게 되었습니다. 소방관과 경찰관의 기지로 발화 직전에 그는 체포되어 공동체를 떠났습니다. 우리가 뽑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둔 자충수에 의해 뽑혀나가게 된 가라지였습니다. 우리는 지극한 사랑으로 보살피려 노력했지만 그는 고마워하기 보다는 “우리 출소자들 때문에 당신들이 거기에 빌붙어 살 수 있게 된 것이므로 우리에게 고마워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출소자들) 때문에 유명해지면 안 되니까 실상을 파헤쳐서 우리를 주저앉혀야 한다고 협박했습니다. 계속 자기들에게 잘해주는 걸 보면 뭔가 켕기는 구석이 있는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말입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그런 게 아니라 주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할 뿐이라 설득했지만 오히려 우리를 위선자라고 비웃었습니다.

 

 

▲ ⓒ정영란

그의 망상은 같은 출소자들을 향하기도 했습니다. 식구들 누구도 그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그들에게 참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맡기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참다 참다 더는 참지 못하던 식구들의 아우성 때문에 이 형제를 내보내기로 결심하고 부산공동어시장에서 장사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조건으로 보냈습니다. 성공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며칠이 지나 형과 함께 술을 마시다가 폭행을 했는데 그만 형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가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그를 변호하기 위해 탄원서를 쓰는 등 백방으로 뛰어다녔습니다. 그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치사 원인이 과음일 수도 있다는 의견이 받아들여져 폭행 부분만으로 3년형을 받았습니다. 3년 옥살이를 하는 동안 면회도 하고, 영치금도 넣어주고, 계속 편지도 주고받는 등 열심히 보살폈습니다. 이 큰 사건으로 인해 그가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출소 후에 다시 받아들였던 것인데 우리에게 온 지 두 달여만에 또다시 이렇게 망가져 갔던 것입니다.

갱생보호공단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중증 알코올중독임을 단번에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친구가 자기를 죽이려 한다면서 우리 공동체에 숨어 살면 안 되겠느냐고 부탁을 해왔습니다. 우리는 이 형제의 심각한 알코올중독을 치료하기 위하여 알코올클리닉에 입원시켜 치료도 진행하고, 국제금주학교의 목사님도 초빙하여 12주간 금주절제교육을 실시하는 등 여러 가지로 애를 썼지만 별 효과가 없는 듯 보였습니다. 알코올클리닉의 담당 의사는 그를 두고 “술을 마시면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 된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하신바 대로 가라지를 뽑지 않기 위해 그를 붙잡았던 세월이 10년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님께서도 어쩔 수 없으셨는지 뽑아 가셨습니다.

 

 

가라지들의 협박, 고소, 고발
또 한 형제는 대학 시절 운동권이었는데 그때 받은 고문후유증과 교통사고 장애로 힘들어했습니다. 그는 노자를 열심히 연구하기도 했는데 그 때문에 참자유와 참겸손이 뭔지 깨달았다면서 상식에 반하는 행동도 거침없이 해댔습니다. 부엌 싱크대에 소변을 보는가 하면 아무 데나 가래침을 뱉었고, 수염은 지저분하게 기르고 목욕도 하지 않아 몸에서 생선 썩는 냄새가 지독했습니다. 그럼에도 그와 함께 앉아 식사를 할 때 우리 식구들은 구역질을 참으며 먹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익숙해지도록 강요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느닷없이 밥값을 좀 해야 되겠다며 설거지를 자청했습니다. 그의 불결 때문에 내키지 않았지만 그 때문에 또 서운해할지 몰라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그가 장애인을 혹사시켰다면서 청와대 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넣어버렸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 가족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물론 별문제 없이 잘 해결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형제에게 상담을 비롯한 정신과 치료가 필요하다 판단하고 먼저 가벼운 상담을 시작했는데 이 형제는 쪽지 한 장 남기고, 인사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사람을 함부로 변화시키려는 오만방자함을 더 참을 수 없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따위 행위를 계속하지 말 것을 엄중히 경고한다. 이 무식한 기독교인들아! 하하하….”

또 한 형제는 알코올중독으로 거의 죽게 된 상태에서 어떤 목사님이 데리고 왔습니다. 이 형제는 몸과 정신이 총체적으로 망가져 4개 분야의 외래진료와 입원치료 10개월을 받은 끝에 겨우 가벼운 노동을 할 수 있게 회복되었습니다. 그가 그동안 보살펴 준 은혜에 감사한다면서 “뭔가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고 자청하기에 닭 모이 주는 일을 시켰습니다.

몇 달이 지나자 그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인건비 문제로 우리를 노동청에 고발하였습니다. 우리는 소환장을 받고 마음이 많이 상해있는데, 그는 아침기도 시간에 우리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등 혼란스러워했습니다.

우리 공동체 30년 역사 안에 많은 가라지들이 오갔지만 우리가 직접 뽑아낸 가라지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너무 이상주의적이고, 몽상적이면서도 급진적인 신앙이라고 나무라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게 사랑에 근거하는 소망이고,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불가능하더라도, 우리의 사랑이 원인이 되는 소망과 믿음을 향하는 거라면 하나님께서 외면하실 것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우리 식구들은 가라지들과 함께 살면서 5리를 가자는 부당한 요구에 10리로 충만케 하고 온전케 하는 산상수훈의 복된 의미를 제대로 깨달아가는 중입니다.

힘든 시련도 한 때 우리에게 주셨던 훈련이었는지, 요사이 강성 가라지들은 들어오지 않습니다. 아직도 우리 식구들은 연약한 가라지들을 보석같이 품어 안고 삽니다. 어느 날 우리를 방문했던 모 찬양사역자가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비록 사회에서는 쓸모없고 오히려 방해되는 존재로 여겨졌지만,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고 가장 늦게 가는 자와 함께 가는 공동체의 삶이 있기에 어느 누구도 자기 몫에 뒤처지는 사람 없이 빛나는 보석처럼 살아가는 오두막 공동체입니다.”

이재영
경남 합천에서 아내 최영희 권사와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태복음 10:42)는 말씀에 따라 연약한 자들과 함께 공동체를 일구며 살고 있다. 오두막공동체 카페 http://cafe.daum.netodumaklove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