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 단체의 지속가능성? 노동인권부터 챙겨라!"

[287호 청년주의] 기독 단체 청년 실무자 3인의 직격 뒷담화

2014-09-25     오지은 기자

▲ ⓒ복음과상황 이범진

■ 직격 뒷담화 주인공 3인

기승전병(A단체)
뜻을 품고 기독단체에 들어갔으나, 이렇게 뒷방에 모여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하게 된 현실을 안타깝게 여기는 청년. ‘기승전병’은 기승전결에 요즘 신조어인 ‘병맛’이 결합된, 병맛스러운 결말이라는 뜻.

그냥철수(B단체)
특출난 것도, 소개할 것도 별로 없는, 그러나 간첩은 절대 아닌, 그냥 청년 김철수(본명 아님).

지랄풍년(C단체)
지랄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자신의 지랄 정도야 더해도 굳이 폐가 되겠냐며 맘껏 지랄을 떤다는 피가 뜨거운 청년.

‘기독운동단체’에 속했거나 소속된 2030 청년 실무자들의 익명 토크를 듣고자 한 건,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한국 개신교 단체들의 숨은 관행과 조직문화를 빛 가운데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앞으로도 복상은 한국 개신교 각 영역에 속한 2030 실무자들의 목소리를 연속으로 담아낼 예정이다.) 십수 년에서 수십 년 된 단체에서 최소 1년 이상 일한 청년 셋이 모여, 그동안 피부로 느낀 고충을 3시간여 동안 자유롭게 치킨과 함께 ‘뜯어’보았다.

밖으로는 소중한 가치를 일구어 나가려 분투하는 단체들이지만, 안에서 실무를 맡고 있는 젊은 실무자들의 속마음은 타들어간다. 그래서 “탈출구가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 누군가는 그만두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 순간이 올까봐 두렵다. 이들이 닉네임의 보호막 뒤에서 쏟아내는 뒷담화 속에 우리가 비판해 마지않는 한국 기독교의 문제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것은 아닐까? 참여자들은 이 기사가 나가면 ‘회장님’과 ‘사장님’1)들은 틀림없이 자신들의 신상을 제일 궁금해 할 거라며 철저한 보안을 요청했다.

‘헌신 팔이’는 이제 그만!
-개선점을 이야기하면 ‘헌신도 테스트’로 응답받는 현실
시작부터 불을 당긴 화두는 ‘헌신’이었다. 대화 참여자인 세 명 모두 직간접적으로 ‘헌신도’를 의심받은 적이 있다. 자발성을 내포해야 마땅한 이 헌신도 시험은 특히 급여를 포함한 근로복지 규정이나 환경에 대해 문제제기를 할 때 반격 무기로 사용된다. 세 사람 월급의 평균은 100만 원대 초반 수준이다. 낮은 급여 수준은 열악한 단체들의 사정상 어쩔 수 없는 문제로 받아들인다 치더라도, 이에 대한 문제제기 자체를 헌신도와 엮어서 받아들이는 관리자의 태도는 다른 문제다.

지랄풍년 기독교단체에서 일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의무와 권리에 적용되는 이중잣대 혹은 일관성 없는 원칙이었다. 고정적 출퇴근, 추가근무, 업무 완성도 등 의무는 강조하면서, 급여를 비롯한 처우개선 등 권리를 말할 때는 일에 대한 열정과 헌신을 의심받는 분위기가 있다. 여기가 회사지 무슨 이상한 교회인가. 개선해야 할 점들을 이야기할 때, 방어하는 패턴이 식상한 것도 문제다. 책임자가 아니어서 너는 잘 모른다는 식이거나, 지금까지 잘 굴러왔는데 새삼 왜 문제 삼느냐는 분위기 말이다. 조직 구성원으로서 문제의식을 느끼고 어렵게 꺼낸 말에 적절히 반응하지 않을 땐 참 답답하다. 급여 문제도 입사 때는 ‘지속적으로 더 나은 급여를 약속’했지만, 실제는 달랐다. 조직의 현실은 양해 대상이 되고, 개인의 사정은 아마추어라고 여겨지는 이중잣대….

기승전병 급여도 문제지만, 나는 노동절(근로자의 날)에 못 쉬었다. 헌신자이자 사역자라며 노동절에 쉬지 않는 것이다. 헌신이든 사역이든 노동 아닌 게 어디 있나. 입사 면접 때 돈 벌기 위해 지원했다고 지원동기를 밝히자 면접관이 웃었던 기억이 있다. 내가 직업으로 이 길을 선택한 것이 고용인에게는 웃긴 일이라니. 게다가 우리 ‘회사’2)는 인력이 빠져나가도 공고도 내지 않는 통에 일이 과중되어 남은 인력들이 탈탈 털렸다. 공고도 내지 않고, 회장님이 지인을 통해서 입맛에 맞는 인물을 언제까지고 알아보는 식이었다.

그냥철수 내 경우는 “당신은 직원이 아니라 활동가다”라는 말을 꽤 들었다. 여기서 활동가란 ‘보수와 상관없이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 그래서 급여가 아닌 사례비를 받았다. 활동가를 직업인으로 보지 않는 잘못된 인식이 팽배하고, 노동자에 대한 개념도 상당히 왜곡되어 있는 것 같다.

‘답정너’3) 문화, 우린 동역 관계가 아니었다
-토론 없는 불통 분위기, ‘부하’로 전락하는 실무자
회사에서는 개선해야 할 문제들이 때로 도마 위에 오른다. 그때 관리자를 비롯한 팀원들이 개선점에 대해 소통하는 과정을 거쳐 서로의 생각을 듣고, 다른 입장에 대해서도 충분히 공감하는 계기를 만든다면 (시간이 걸려도) 문제 자체는 오히려 좋은 방향으로 회사를 이끌 수 있다. 조직 내 구성원들이 얼마나 서로 수평적인 구조 하에서, 상명하달식이 아닌 동역 관계를 이루고 있는지가 소통 정도를 알아보는 중요한 척도일 수 있다. 그런데 세 청년의 문제의식이 겹친 부분은 젊은 실무자들의 의견은 거반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상위 관리자 집단이 겹치는 경우가 많은 기독교 단체 내에서는 회장님의 전화 한 통으로 연중 계획과도 무관한 일이 갑작스레 생기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그냥철수 조직 내에 새로운 제안이 많이 나와 기존의 안들과 상승작용을 일으켜 더 넓어지고 완전해지는 분위기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자주 생각했다. 그런데 현실은 윗선에서 의견 쳐내기에 바쁘다는 거다. 회의 때 계속 부딪히고, 젊은 실무자들 이야기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럴 땐 회의할 필요 없이 아예 미리 다 정해서 해야 할 일만 알려 달라고 하고 싶어진다. 이미 말했지만 “너희는 직원이 아니라 활동가다”라고 해놓고 정작 회의 때 의견이 달라지면 “여기가 일반 회사 같으면…”이라는 말도 나오고, 마지막으로는 “요즘 애들은”까지 나온다. 선호도에서 다름의 문제가 틀림의 문제가 돼버리는 경우가 꽤 있다. 예를 들어 사업마다 따라오는 디자인 선택의 문제가 그렇다.

기승전병 어르신들은 ‘답정너’들인가 보다. 언론처럼 데스크와 기자 간의 역할 분담이 분명한 경우는 비교적 나을지도 모르겠는데, 활동가의 경우는 보통 하는 일이 비슷하다 보니 더 어려운 것 같다. 다른 생각은 곧 틀린 생각이 되고 만다. 사실 내가 무언가를 책임감 있게 시도하려 해도 소통도 없이 내 의견이 잘려버릴 때, 내가 할 수 있는 결정들이 점점 줄어들 때 이건 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 아닌가. 달리 말하면, 어차피 내 일이 아니다 하고 생각해야 정신건강 지키며 계속 일할 수 있지 않겠나. 사실 우리 단체는 회장님이 전화 해서 “이거 좀 해봐”라면서 전혀 다른 맥락의 일거리를 던지는 일이 마구 있었는데 정말 괴로웠다.

그냥철수 우리도 비슷한 일을 겪는다. 일을 내려주는 쪽은 단체의 연간 계획이나 당면 업무들과 무관하게 자신들이 할당하는 계획이 더 중요하다는 식이다. 그러니 일 위에 일이 쌓인다.

지랄풍년 그런 상황에 적응되지 않던 입사 초반의 내 고민이 ‘내가 운동대행을 하고 있는 건가’였다. 회장님이 별도로 내려주는 일을 수행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장님도 못 막는다. 연말 연초에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아이디어를 내면 ‘여태껏 해온 방향과는 다르다’는 말로 퇴짜를 맞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젊은 세대에 새롭고 신선한 것을 원하면서도, 충분한 논의와 습득과정이 없이 배제당하는 경험이 누적되다보면 어느새 기존 방향과 방식에 길들여지게 되는 것 같다.

“그래도 기독교 단체인데…”
- 한국사회의 노동인권 평균치보다 훨씬 밑도는 현실
자유로이 이야기를 나눈 지 두 시간이 넘어가면서, ‘그래서 결국 기독단체의 문제는 무엇인가’에 대한 토론으로 이어졌다. 첫 직장이건 이직한 직장이건, 입사 때 어렴풋하게라도 품었던 성경적 가치를 좇는 기독교 단체에 대한 기대는 일종의 환상이었던 것일까. 결국 기독교 단체의 문제는 한국사회 안의 문제와 겹쳤다. 오히려 일반사회 수준을 밑도는 경우도 있다. 이런 상태로 기독교운동을 지속할 수 있을지….

기승전병 기독 단체라면 인권이든 노동권이든 그 의식 수준이 일반 사회보다 높아야 하지만, 현실은 ‘상식선이라도 지켜주면 좋겠다’이다. 앞서 이야기한 ‘헌신도 테스트’ 같은 건 기독 단체를 벗어나면 겪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지인이 기독 단체에서 나가 일반 기업에 취직했는데 훨씬 즐기면서 일하더라.

그냥철수 실상 기독 단체일 때 오히려 활동 범위가 제한되기도 한다. 점점 더 자유해진다기보다는 제한선이 생기는 그런 느낌?

지랄풍년 돌이켜보면 입사 때 기독 단체라는 것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냥 ‘기독교’ 빼고 그냥 여러 인간이 모여 꾸려가는 ‘단체’라고 생각하면 속이 더 편해질 것 같다. 입사 후 지인에게서 들은 말이 ‘신대원 다녀라’였다. 신학을 공부한 목사 중심의 엘리트주의를 염두에 두고 해준 말이었다. 이런 문제는 일반 사회보다 우리 쪽이 더 심한 것 같다. 사장님들 중에도 이런 고민 하는 분들이 상당할 것 같은데, 이런 상황에서 기독 단체들이 지속가능성을 고민하는 걸 보면서 정말 방법을 몰라서 고민하는 건지 궁금하다.

기승전병 방법을 몰라서라기보다는, 의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냥철수 퇴사하는 편이 개인적으로는 편하다. 적어도 기독교운동단체에서 계속 일하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든다. 회장님이나 사장님 세대와 우리 세대는 연결 고리가 별로 없는 것 같다. 2030세대는 결국 소모되다가 이 바닥을 떠나게 되고, 그 결과 연결성은 사라지지 않을까.

지랄풍년 시간이 지날수록 일하는 단체 안에서 개선점에 대한 논의를 어떻게 잘 풀어나갈 수 있을지 고민한다. 그런데 정작 이야기를 꺼내더라도 먹히지 않고, 그럴수록 용기가 점점 없어진다. 결국 현상유지에 만족하며 지내거나 아니면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 오면 안녕을 고하게 된다는 사실이 정말 싫다. 나에게 개선의 능력도 없고, 이러다 결국 의지도 사라질 거라는 사실도 힘들다. 

진행_오지은 기자 ohjieun317@gosc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