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2장, 이스라엘, 그리고 《1970년 초여름에》

[287호 거꾸로 읽는 성경]

2014-09-25     김구원 개신대학원대학교 구약학 교수

최근 이스라엘 방어군(Israel Defense Force)과 하마스 반군 사이의 전쟁 기사를 언론에서 자주 접한다. 언론이 연일 쏟아내는 관련 기사 중 필자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이스라엘 방어군에 입대한 미국인 막스 스타인버그(Max Steinberg)가 하마스와의 교전 중 사망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군대에 갈 필요가 없었던 유대계 미국인이 왜 이스라엘 방어군이 되어 목숨 걸고 싸웠을까? 갑자기 초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이 ‘이스라엘 젊은이들은 고국에 전쟁이 났다는 소문을 들으면, 해외에 유학 중이라도 자진 귀국하여 전쟁에 참여한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당시엔 정말 그럴까 했는데, 막스의 죽음 소식을 들으니 전혀 틀린 말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우리나라도 예전과 달리 많은 해외 영주권자들이 자발적으로 국방의 의무를 감당하고 있지만 그것은 ‘군필’이 주는 법적 사회적 혜택, 나아가 한국 군생활의 비교적 향상된 질 때문일 것이다. 물론 막스가 이스라엘 군대에 입대한 것도 실제로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로 역이민하기 위한 방편으로 선택한 일이었다. 여기서 변하지 않는 사실은 건국 이후 주변 아랍국과 늘 군사적으로 대립했던 이스라엘이 젊은이들의 ‘희생’을 끊임없이 필요로 했다는 것이다.

군복무 정당화에 인용되는 창세기 22장, 그리고 《1970년 초여름에》
오늘날 이스라엘 정부는 세속 정부임에도 젊은이들의 희생, 즉 군복무를 당연한 것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늘 구약 성경을 사용한다. 이때 가장 중요하게 인용하는 본문이 창세기 22장, 일명 ‘아케다(결박) 본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창세기 22장은 현대 이스라엘의 건국과 운용에 핵심 역할을 수행한 본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부터 현대 이스라엘 소설가 A. B. 예호슈아1)의 단편 소설 《1970년 초여름에》(Bi-Thilat Kayitz, 1970)를 분석하면서 현대 이스라엘이 어떻게 성경 이스라엘과 혼란스럽게 교차하고 있는지를 살피려고 한다.

《1970년 초여름에》는 고령의 고등학교 선생에 대한 이야기다. 소설의 배경인 1970년은 1967년에 시작된 이집트와의 국지전이 공식적으로 끝나던 해이다. 제3차 중동 전쟁으로 불리는 6일전쟁이 1967년 6월에 벌어지는데, 이후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3년에 걸친 지리한 국지전을 이어간다. 소설의 배경은 그 지리한 국지전이 끝나던 해 여름이다. 1인칭 관점으로 쓰인 이 소설에서 고령의 교사는 친아들의 죽음에 대해 말한다.
1970년 초여름 날, 평소처럼 수업을 하던 그는 교장선생님의 뜻하지 않는 호출을 받는다. 그리고 오랫동안 미국 살다가 가족과 함께 최근 역이민한 아들이 전쟁에서 작전 중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 선생님은 죽은 아들의 시체를 확인하기 위해 군병원에 갔지만, 죽은 ‘아들’은 자신의 아들이 아니었다. 군의 사망자 신원 확인 과정에 오류가 발생했고, 그의 아들은 살아 있었다. 이것이 주인공이 1인칭으로 들려주는 이야기의 대강이다. 즉 적어도 화자 입장에서는 죽었다고 생각한 아들이 살아 돌아온 셈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마지막에 가면 독자들은 아들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 자체가 그 늙은 교사가 상상으로 꾸며낸 것임을 알게 된다.

왜 그는 친아들이 전쟁에서 죽었다는 환상을 갖고 살아야 했을까? 그것은 집요한 은퇴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가 은퇴하지 않고 버틴 이유와 관계가 있다. 선생은 3년 전 학교로부터 은퇴 권유를 받았을 때,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이유로 거부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사명이 군 입대를 앞둔 고3학생들에게 ‘희생’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성경을 가르치는 그는 이스라엘의 건국과 그 후 지속된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구약 성경을 이용했다. 성서 히브리어의 세세한 문법 사항을 거론하면서 아들뻘 되는 학생들에게 군 입대가 얼마나 귀한 일인지 설명한다. 이스라엘 정부의 정책을 합리화해준 것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아들이 죽었다는 환상을 가지게 된 것은 학생들을 속인 것에 대한 본능적인 미안함 때문이다. 더구나 그 스스로는 자신이 설교하는 희생을 감당한 적이 없다. 그는 군대에 다녀오지 않은 것이다. 이런 미안함이 자신을 상상 속에서 아들을 희생시킨 아버지로 만들어 버렸다. ‘이스라엘’을 위해 아들을 희생시킨 아버지의 입장에서 학생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들의 죽음이 선생의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현대 이스라엘의 아버지 세대가 아들 세대에게 희생을 요구할 아무런 성경적 근거가 없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창세기 22장은 하나님이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으로 시작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명령에 지체 없이 순종하여,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한다. 한편 이삭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번제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마지막 순간 하나님이 번제물로 숫양을 예비하여 이삭은 죽음을 면하고 아브라함도 아들을 아끼지 않았다는 칭찬과 함께, 보상적 축복도 약속받는다.

이 본문은 제2성전기 이래로 하나님에 대한 최고 헌신의 예로 유대인들 사이에 자주 인용되었다. 역사 대부분을 박해 가운데 살았던 유대인들은 순교 혹은 희생의 궁극적 이유를 이 아케다 본문에서 찾는다. 이삭은 순교자였고, 아브라함은 그 순교자를 낳은, 혹은 ‘만든’ 아버지였다. 위의 소설에서 순교자를 낳은 그리고 만드는 아버지인 성경 선생은 아브라함의 아바타이고, 그 선생의 환상 속에서 죽은 아들(실제로는 살아 있는)과 입대를 앞둔 고3학생들은 이삭의 아바타인 셈이다. 여기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는 하나님의 역할을 이스라엘 정부가 대신하고 있다는 점이다.

군사 작전을 성경으로 합리화 하느라 ‘누더기’가 된 노인
이처럼 《1970년 초여름에》는 창세기 22장을 참조한 소설이다. 그러나 저자는 주인공들의 성격을 성경 인물들과 전혀 다르게 구성함으로써 정부, 아버지 세대, 그리고 아들 세대 사이의 관계가 성경의 하나님, 아브라함, 이삭 사이의 그것처럼 이상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창세기 22장의 아브라함은 이삭과 그 후 모든 유대인들에게 절대 권위의 인물이지만, 소설 속의 성경 선생은 현실로부터 유리된 괴짜로, 또한 친아들은 물론 젊은 세대와 소통하지 못하고 갈등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아들도 이삭과 달리, 아버지의 종교적 신념을 거부하고 조롱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현대 이스라엘의 아버지 세대와 아들 세대 사이의 심리적 갈등은 소설의 첫 장면, 즉 고령의 선생이 학교에 출근해 교실로 들어오는 장면에서부터 감지된다. 책의 민족인 유대인들에게 교실, 그것도 성경 교실은 그 권위가 가장 존중되어야 할 공간이지만, 소설 작가는 교단에 선 성경 선생을 우스꽝스럽고 심지어 다소 정신 나간 사람으로 묘사함으로써 신성한 권위자로서의 성경 선생의 이미지를 무너뜨린다. 아울러 첫 장면에서 우리는 그 노령의 선생이 얼마나 고립된 과거에 머물러 사는지도 깨닫게 된다. 그는 3년 전 은퇴 권고를 받았으나 자리에서 물러나기를 거부하면서 학교 내 다른 선생님들과, 심지어 교장선생님과도 거의 대화하지 않게 된다. 이 때문에 그를 강제 은퇴시키기 위해 새로 채용된 선생님이 학교에 부임한다는 소식도 듣지 못하여, 수업 첫날 한 교실에 두 선생님이 들어오는 해프닝도 발생한다. 성경 선생은 자신의 성경을 ‘누더기’로 표현하는데, 이것은 노령으로 누더기가 된 그의 몸 상태를 지칭할 뿐 아니라 끊이지 않는 정부의 군사 작전을 성경으로 합리화하느라 누더기가 된 그의 마음 상태다. 누더기가 되기까지 그가 성경을 가르치면서 고3학생들의 입대를 ‘준비’시킨 데는 결국,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존재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이삭’의 끊임없는 희생이 필요하다는 믿음-이 맹목적인 믿음은 성경 본문에 대한 문자적 해석을 통해 뒷받침 됨-이 작용한다.

노령의 선생과 대조적으로 그의 아들은 새로운 세속적 이스라엘을 대표한다. 그는 예루살렘의 히브리대학 사회학부 교수로 부임하면서 고토로 ‘귀환한 유대인’이다. 즉 그는 아버지 세대처럼 종교적 이유로 예루살렘으로 역이민 한 것이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이유로 예루살렘에 역이민 했다. 시오니즘의 종교적 수사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아들은 아버지와 전혀 다른 종류의 ‘이스라엘인’이다. 이런 아들에 대해 느끼는 아버지의 생소함이 그들의 첫 만남에서 드러난다. 고령의 아버지는 아들을 공항에서 만났을 때, “내 아들을 알아 볼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오랜 미국 생활을 한 아들이 몰라보게 달라졌다-실제로 아들은 머리가 희끗하고, 몸이 불고, 구렛나루까지 기른 초중년으로 묘사됨-는 의미지만, 상징적 차원에서는 지난 세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생겨버린 심리적 문화적 거리를 잘 보여준다.

이후 전개에서도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불통이 강조된다. 아버지와 아들의 첫 번째 대화 장면에서 아들은 아버지에게 아직도 학교에서 가르치는지 묻는다. 아버지는 단호하게 “물론이지. 그것도 성경만 가르친다”라고 대답한다. 아버지도 아들에게 미국에서 무슨 전공을 했냐고 묻지만, 아들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말해도 아버지는 잘 모를 것이라는 듯 대답을 흐린다. 두 사람 사이의 불통은 아들이 글을 영어로만 쓴다는 사실에서도 심화된다. 아버지는 “아들이 나에게 메모를 건네도, 전부 영어라 알 수 없다”고 불평한다.

이제 대화가 이스라엘의 정치 상황으로 넘어간다. 아버지는 자신이 가르친 학생들이 전쟁에서 죽어가고 있다고 말하며, 지금은 역사의 위기라며 절망한다. 그러나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시대적 절망에 관심이 없다. 아들의 이런 무관심은 아들의 아들, 즉 선생의 손주가 하는 영어 옹알이, 그리고 선생의 며느리가 히브리어 대화를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과 묘하게 어우러져 불통의 파토스를 강화한다.

이스라엘인들의 ‘집단 책임의식’
한편 고령의 선생은 자기 아들을 보면 수업시간에 말 안 듣고 떠드는 자신의 학생들이 생각난다고 말하는데, 이 말은 궁극적으로 ‘아들의 희생’ 모티브로 이어진다. 선생의 성년 아들(예비군)이나 고3학생들(현역) 모두 전쟁에서 희생될 그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인의 의식에 뿌리 깊이 자리한 ‘집단 책임의식’(collective responsibility)을 보게 된다. 집단 책임의식은 교장이 그 선생에게 아들의 죽음을 고지하는 장면에서도 나타난다. 교장은 아들의 죽음을 전하면서, 선생을 매우 친절하게 대한다. 지금까지는 은퇴시키려는 교장과 은퇴를 거부하는 선생 사이에 잦은 말다툼이 있었고 둘은 사이가 매우 안 좋았다. 그러나 아들이 전사했다는 소식에 교장은 마치 자기 아들이 죽은 것처럼 애통해 한다. 집단적 책임의식의 발로이다. 심지어 집까지 배웅해주며 연신 도와줄 일이 없는지를 묻는다. 이처럼 그 선생이 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것은 절대로 개인적 상실로 머물지 않는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지금의 예루살렘)으로 갔듯이 아들의 부고를 들은 노령의 선생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자식의 집에 들러 그 가족들에게 상황을 알리기 위함이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차 안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말을 한다. “예루살렘으로 갈 때… 당신은 차가 그곳으로 올라가는지 내려가는지 알 수 없다.” 지금까지 소설 작가는 노인이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설정을 취했다. 그런데 여기서 처음으로 2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여 독자를 소설 속으로 끌어들인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노인이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인들이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을 표현할 때 대부분 ‘올라간다’라는 말을 사용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는 성경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아직도 자주 쓰인다. 일부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여행한다’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올라간다’는 표현을 여전히 선호한다. 후자는 유대인의 종교성을 테스트하는 리트머스 시험지 같이 쓰이기도 한다. 오늘날 한 주의 첫날을 ‘주일’이라 말하는지 ‘일요일’로 말하는지의 문제와 유사하다.

문제는 그 선생의 주장처럼 현대 이스라엘에서는 예루살렘으로 여행할 때, 그곳으로 올라가는지 내려가는지를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은 분명히 ‘올라가야 할’ 곳이지만 그것이 현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자명하지 않다. ‘올라가다’라는 표현은 창세기 22장 2절의 ‘번제’를 반영한다. 번제로 번역된 히브리어 ‘올라’(ʿôlāh)는 ‘올라가다’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시오니즘의 명분을 의미하는 ‘일라’(ʿilāh)도 실은 ‘올라가다’라는 히브리어 동사에서 유래했다. 예루살렘으로 여행할 때 올라가는지 내려가는지 여부가 분명하지 않다는 언급은 예루살렘의 종교적 의미에 대한 현대 이스라엘인들의 혼란을 암시한다. 지난 3천 년간 ‘거룩한 도시’로 추앙된 예루살렘이 ‘정말 그럴 가치가 있는 도시인가?’라는 의심을 받는 것이다. 아울러 그곳에서 행해지는 ‘희생’의 가치에 문제를 제기한다. 오늘날도 계속 수많은 ‘이삭’들이 번제물로 모리아산에 올라야만 하는가?

‘현대 이스라엘’과 ‘성경 이스라엘’의 불통과 혼란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선생의 행보는 그가 주변의 이웃과 겪는 소통의 어려움을 부각시킨다. 아들의 아파트에서 일하던 아랍 가정부에게 아들의 죽음을 알리려 했으나, 가정부는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선생은 아랍어를 모르고 가정부도 히브리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더구나 그는 소통하기 위해 손짓발짓하며 (그가 보기에) ‘무의미한’ 소리를 내는 아랍 가정부를 ‘원숭이’ 같다고 비하한다. 아랍 가정부와 소통에 실패한 아버지는 며느리와의 소통도 실패한다. 집으로 돌아온 며느리에게 고대 히브리어로 인사를 건네지만 그녀는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 아들의 죽음도 언어가 아닌, 자신의 검정색 수트와 침울한 얼굴 표정으로 암시할 뿐이다.

아파트를 나와 아들의 직장인 히브리대학의 캠퍼스에서 만난 미국인 교환학생들과도 그는 불통을 경험한다. 영어를 쓰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야기를 시도하지만, 역시 소통에 실패한다. 나아가 그는 교환 학생들로부터 연장자로서의 존경도 받지 못한다. 교환학생들은 노령의 선생을 “당신” 혹은 “노친네”라고 부른다.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부각되는 것은 아버지 세대가 점차 정치적 사회적 현실에서 유리되고 고립되면서, 전에 누리던 권위들을 상실해 가는 것이다. 이 고립과 상실을 타개하기 위해 아버지 세대는 더욱 성경 본문의 전통적 문자적 해석에 천착하고, 그 과정에서 성경의 이스라엘과 현대 이스라엘 사이의 구분이 없어진다.

노인은 아들의 시체를 확인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아들 부대가 있는 요르단 국경으로 이동한다. 택시 안에서 그가 본 풍경들은 성경지리 용어들로 독자들에게 전달된다. 그가 인지하는 ‘현대 이스라엘’은 ‘성경 이스라엘’과 구분되지 않는 것이다. 아버지이자 성경 선생이 경험하는 현실은 늘 성경 본문을 통해 굴절된 것이다. 아들이 근무하던 부대에 도착하니 군 랍비가 그를 맞이한다. 랍비는 그를 영안실로 안내해 아들의 신원을 확인하게 한다. 그러나 노령의 선생이 확인한 시체는 아들이 아니었다.

랍비는 성경 율법에 대한 철저한 순종을 통해 특정한 사회적 위계를 보수하는 인물을 대표한다. 저자는 그런 랍비를 매우 우스꽝스럽고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인물로 그림으로써, 그가 대표하는 세계 질서 자체를 비판한다. 시체의 신원이 바뀌었음을 알아챈 랍비는 당황하며 “무엇인가 크게 잘못되었다”고 사람들에게 속삭이듯 말하는데, 이것은 (표면적으로 시체 신원 확인이 잘못되었음을 의미하지만) 깊은 의미에서는 그가 믿어온 현실이 실제가 아닐 수 있다는 무의식적 깨달음을 암시한다. 랍비는 남의 아들의 주검을 바라보는 고령의 아버지에게 무슨 조언을 해야 할지 당황한다. 비록 친아들이 아니지만, 전쟁에서 죽은 ‘아들’의 시체를 본 그에게 옷을 찢으라고 해야 하는지 순간 고민한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곧 시작되는 안식일에 맞추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 위해, 상심한 노령의 아버지를 홀로 부대에 남겨둔 채 고속도로를 내달린다.

현대 이스라엘과 성경 이스라엘이 혼란스럽게 교차하는 모습은 그 선생이 아들과 함께 작전한 병사들과 나눈 짧은 대화 속에서도 드러난다. 노인의 백발과 그가 내뱉는 고전 히브리어에 감탄한 병사들이 그에게 먼저 말을 건다. 한 병사가 자기의 옛 역사 선생님도 그 노인과 비슷한 외모에 비슷한 말투를 했다고 말하며, 무슨 역사를 가르치는가를 묻는다.

“무슨 역사를 가르치세요?”
“유대인의 역사. 내가 자네의 역사 선생과 비슷하다고?”
“네! 그러나 조금 차이가 있어요.”
“무슨 차이인가?”
“역사와 성경의 차이죠.”
“뭐라고?”

역사와 성경의 차이라고 말하는 병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 선생의 모습에서 이스라엘의 현실 정치과 성경 역사를 구분 못하고, 언제나 성경 본문의 눈으로 현대 이스라엘 역사를 보려 하는 ‘아버지 세대’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야기의 마지막에 이르러, 마침내 아버지는 죽은 줄만 알았던 아들과 만난다. 아들은 예비군으로 잘 근무하고 있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을 건넨다. “예비군 복무는 어떠냐?” 이 때 아들은 짜증스럽다는 듯이 말한다. “보시면 아시잖아요.” 마치 국가가 아니라 아버지가 자신을 군대에 보내기라고 한 듯 대답하는 아들의 말은 자신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아버지 세대에 대한 아들 세대의 불신을 반영한다. 자신들을 군대에 보낸 것이 바로 성경과 현실을 구분 못하는 아버지 세대라는 의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소설 속 아들은 “예언과 정치”라는 책을 준비 중이었다. 이 제목은 끊임없이 지속되는 징병과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을 곡해하는 이스라엘의 현실을 비판하는 듯하다.

지금까지 A. B. 예호슈아가 창세기 22장을 참조한 단편 소설 《1970년 이른 여름에》를 분석하면서, 저자가 현대 이스라엘과 성경 이스라엘이 혼란스럽게 교차하는 현실을 어떻게 비판하는지 살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도 현대 이스라엘에 대한 다양한 의견과 감정들이 존재한다. 이 소설은 현대 이스라엘과 성경 이스라엘의 관계에 대한 논의에 좋은 사색거리를 제공한다.

■ 참고 문헌
A. B. Yehoshua, Continuing Silence of a Poet: The Collected Stories of A. B. Yehoshua(NewYork:Syracuse Universeity Press, 1998); A. C. Swindell, Reforging the Bible(Sheffield:Sheffield Phoenix Press, 2013).

김구원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고대 근동과 구약 성경의 비교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개신대학원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한국교회의 개혁은 평신도들의 성경 말씀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실천에서 출발한다고 믿으며, 평신도들이 성경을 올바로 읽게 하는 책을 저술하는 데에 관심이 많다. 저서로 《성경, 어떻게 읽을 것인가》 《사무엘상》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