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본 《21세기 자본》

[289호 커버스토리]

2014-11-26     김회권 숭실대 기독교학과 교수

I. 다시 묻는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 에드워드 핼리트 카(Edward H. Carr)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부단한 대화이면서 과거와 미래의 대화라고 규정한다. 역사가는 과거의 사실로부터 일련의 교훈을 도출하는데 그 근거가 이상적 미래사회에 대한 선이해라고 말한다. 미래사회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전망을 가질 때 과거의 사료(史料)로부터 의미심장한 교훈이 도출된다는 말이다. 카에 따르면,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현재에 비추어 과거에 대한 이해를 촉진하고, 과거에 비추어 현재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며,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통해 미래를 위한 교훈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5장 “역사의 진보”에서 카는, 역사 서술에 있어서 과거에 대한 어떤 건설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신비주의나 냉소주의에 빠지게 된다는 견해를 피력한다(김택현 역, 165쪽). 카는 여기서 역사의 의미는 종말론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관철되는 것이라고 믿으며 역사의 의미가 내세관 같은 데 있다고 믿는 기독교역사가(니콜라이 베르자예프, 라인홀드 니이버, 아놀드 토인비 등)들을 신비주의자로 힐난하는 한편, 역사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으며 원리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사건들의 연속이라고 믿는 역사냉소주의자도 비판한다. 특히 예수님의 재림을 통한 역사의 완성을 너무 신봉한 나머지 역사 진보의 중간단계를 설정하지 않고 종말론적인 태도만 견지하는 기독교역사관에 대한 카의 비판은 서구 기독교유신론의 역사관 이해가 얼마나 빈곤한지를 새삼 일깨워준다.

물론 카의 기독교역사관 이해는 불충분하고 정확하지도 않으나 그동안 주류적, 타계주의적 기독교역사관의 불철저한 역사의식을 질타하는 목소리로 귀 기울일 만하다. 카는 기독교-유대역사관이 목적론이긴 하지만 충분히 역사내적인 진보목표를 제공하지 못해 종말론적인 신비주의로 흘러갔다고 비판하면서, 역사 진보의 목표를 역사내적인 현실목표로 설정하는 소위 세속적인 의미의 목적론적 역사관을 주창한다. 카는 5장 말미에서 역사내적인 진보의 목적을 설정한 기독교역사가 알렉시스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 1805~1859)의 견해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토크빌은 신학적인 역사관을 견지했지만, “평등의 발전”을 역사적 진보의 기준이라고 말했다는 점에서 카의 주목을 끌었다.

만일 우리 시대 사람들이 평등의 점차적이고 진보적인 발전이 역사의 과거요 미래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면, 이 한 가지 발견만으로도 그 발전에는 신의 뜻이라고 하는 신성한 성격이 부여될 수 있을 것이다. (A.De Tocqueville, Preface to Democracy in America)

토크빌은 기독교종말론을 소박할 정도로 간략하게 사회과학적 용어로 치환했던 것이다. 역사의 알파요 오메가인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역사가들은 역사의 의미를 종말이라는 특정시점과 관련지어 추구할 것이 아니라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보편역사의 방향설정에도 모종의 영향을 끼쳐야 한다. 예를 들면, 신자유주의 글로벌 시장전체주의 체제 바로 너머에 올 좀 더 기독교적인 세계체제를 기획하고 구상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카는 역사 자체의 방향감각, 즉 역사의 진보를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만이 역사를 쓸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역사가는 이 방향감각을 갖고 과거의 여러 사건을 해석할 수가 있고, 미래를 내다보면서 오늘날의 인간 에너지를 해방하고 재조직화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임을 넘어 과거의 여러 사건과 장차 점차적으로 출현하게 될 미래사회의 여러 목적과의 대화이기도 한 것이다.

마르크스적 혁명을 역사적 진보의 대표적인 사례로 제시하는 5~6장은 왜 80년대 이후 한국의 운동권 대학생들이 필독도서 1호로 이 책을 독파했는지를 보여준다. 그중에서도 특히 카는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서 사회개혁을 실현할 수 있다는 신념”을 대표하는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의 진보를 향도하는 것으로 간주될 여지가 있다고 본다. (인간이 통제할 수 없었던) 객관적인 경제 법칙에 대한 복종으로부터, (의식적인 행동을 통해) 자신의 경제적 운명을 지배할 수 있는 인간능력에 대한 신념으로의 이행은 인간사에 대한 이성 작용에서의 발전을, 즉 자기 자신과 환경을 이해하고 지배할 수 있는 인간능력의 증대를 나타내는 것이므로 환경 지배권의 증가로 정의되는 역사의 진보를 성취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성의 사회적 기능, 즉 인간 공동체에서 이성의 중심기능은 단순히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하는 것이 된다(212쪽).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낙관적 기대가 살아있던 1960년대의 역사인식이라는 한계를 드러내는 한 편, 민중이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제들을 합리적으로 파악하고 자신의 정치경제적 환경을 변혁할 수 있는 능력을 과시한 점은 20세기 혁명(러시아 혁명, 모택동의 중국 등)의 중요한 측면들 중 하나라는 점을 강조한다.

토마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엄격하게 번역하면 ‘21세기 자본론’)에서 카를 한 번도 인증하지 않지만 자신도 모르게 카의 역사이해, 역사변동의 원인, 진보하는 역사에 이해를 성실하게 반영하여 놀라운 정치경제학 역사서를 써냈다.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이 제목의 인상과는 달리 자본가들에 맞서는 노동자들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 부와 소득의 불평등을 국가정책의 개입으로 해소 혹은 완화해 보자고 제안하는 책이라고 말한다. 피케티는 19세기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정치경제학적 관심을 이어받았으나 그것의 미래예측력까지 이어받았다고 주장하지는 않으며, 지극히 한시적으로 유효한 분석과 전망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자신의 책은 ‘21세기 여명기의 자본론’이라고 말한다.

《21세기 자본》은 3세기에 걸친 경제사상사에 대한 압축강의와 그것과 관련된 수학공식들, 도표들, 이론들 등 일반 독자들이 쉽게 접근하기 힘든 전문경제사 서적이긴 하지만, 웬만한 인내심만 가지면 이 책의 후렴구처럼 반복되는 중심논지를 파악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책을 읽다보면 중세 기독지성인들이 그리스철학이라는 공통필수교양을 구비하듯이, 오늘날 기독지성인들은 정치경제학의 중심 논쟁이나 쟁점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사회과학적 기초지식을 구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압박감에 시달리게 된다.
이 글에서는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요약하고 그 중심논지에 대한 기독교적 응답과 논평을 제시하고자 한다. 

II. 《21세기 자본》 요약과 중심논지

이 책은 이론적, 수학적 모델에 치중하여 부와 소득의 불평등화 현상을 외면하던 계량경제학의 놀이터에 다시 한 번 19세기 정치경제학적 화두, 즉 불평등과 부의 재분배 및 사회 존속을 가능케 하는 이상적 사회적 국가체제 등에 대한 담론을 폭탄처럼 던졌다. 이 책은 18세기 산업혁명 이래로 250여 년간 진행되어온 미국과 유럽 20여 국가에서의 부와 소득의 불평등 심화과정과 그 완화방안을 다룬다. 이 책의 중심논지는 자본투자의 회수율(rate of return)이 오랜 기간에 걸쳐 경제성장률보다 더 높으면 부의 집중이 초래될 뿐 아니라 부의 불평등한 분배가 사회적, 경제적 불안정성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불평등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내재적 특질이며 국가개입(경제민주화적인 대의를 가진 민주적 통제)을 통해서만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피케티는 불평등을 줄이고 지극히 소수의 통제 아래 대다수의 부가 장악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범세계적인 차원에서 은행 정보를 교환하고 징세되지 않는 자본의 도피처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한 누진적인 부유세 도입을 제안한다. 이 책은 자본주의가 개혁되지 않으면 민주적 사회질서 자체가 위협받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책의 구성과 각 장의 중심주장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서장
50쪽 정도의 서장에서 저자는 부의 불평등 문제가 경제학자들만의 관심사가 아니라 사회적 구성원 모두의 관심사여야 함을 역설한다. 그러고 나서 부의 분배와 불평등 문제에 대한 19세기 이래의 고전적 학설들(맬서스, 아더 영, 리카도, 마르크스, 구즈네츠 등)을 간략하게 검토한다. 다음으로 저자는 분배문제가 경제학적 분석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말한 후 이 책이 활용한 자료들, 연구의 주요결과, 불평등을 완화하는 요인과 분배의 양극화를 추동하는 힘들, 양극화의 근본요인, 연구의 지리적 역사적 범위, 이론적 개념적 틀, 그리고 책의 개요를 다룬다.   

3세기에 걸쳐 20개국 이상의 상위계층 시민들의 납세기록 등의 자료들을 분석한 이 책이 불평등 양극화의 원인에 대해 제시하는 해답들은, 부와 소득분배의 밑바탕에 있는 메커니즘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줄 새로운 이론적 틀에 기초한다. 즉 자본의 수익률이 생산과 소득의 성장률을 넘어설 때 자본주의는 자의적이고 견딜 수 없는 불평등을 자동적으로 양산하게 되며 이러한 불평등은 민주주의 사회의 토대를 이루는 능력주의의 가치들을 근본적으로 침식한다는 것이다. 피케티는 부의 분배는 매우 중요한 문제여서 경제학자, 사회학자, 철학자들에게만 맡겨둘 수 없다고 말한다. 또한 자신의 책이 역사적 자료로부터 사실과 패턴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설명할 수 있는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작동원리들을 분석함으로써 민주적인 토론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그 토론의 관심이 더 정의로운 사회를 구성하는 촉매로 사용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한다.

피케티는 부의 분배 문제에 관해 학설을 제시한 학자들 중 카를 마르크스의 통찰을 부각시키는데,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분석은 몇 가지 면에서 여전히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첫째, 그는 (산업혁명 기간에 나타난 믿기 어려울 정도의 부의 집중에 관한) 중요한 물음을 품고 가용한 방법들을 동원해 그에 답하려고 노력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가 제시한 ‘무한 축적의 원리’에는 핵심적인 통찰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피케티는 마르크스를 의식하고 《21세기 자본》을 썼다고도 볼 수 있다.

피케티는 자본주의 사회가 진척됨에 따라 부의 불평등이 심화되고 자본의 무한 축적이 이뤄져 자본수익률이 제로가 될 것이라고 예견한 마르크스와 달리, 경제성장이 이뤄짐에 따라 소득불평등이 점차 해소될 것이라고 주장한 사이몬 쿠즈네츠를 비판한다. 1913~1948년 사이에 미국의 소득불평등이 급속히 감소한 사실에 근거해 1950년대 냉전기에 자본주의적인 불평등은 감소하고 있다는 ‘쿠즈네츠 곡선’은 잘못된 논거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실증적 토대는 극히 취약했다. 1914~1945년 사이에 모든 부유한 국가에서 나타난 소득불평등의 급속한 감소는 무엇보다도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전쟁이 (특히 많은 재산을 가진 이들에게) 불러온 강력한 경제적, 정치적 충격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1930년대와 1975년 사이에 1-2차 세계대전, 대공황, 부채 요인으로 발생한 침체가 엘리트가 소유한 많은 부를 파괴했고 이 사건들은 정부들로 하여금 소득재분배를 위한 정책들을 채택하도록 몰아갔다(특히 2차 세계대전 후). 그 결과 부의 불평등이 완화되었고 아울러 이 시기의 빠른 경제성장은 상속된 부의 중요성을 감소시켰다. 이는 쿠즈네츠가 묘사한 산업부분 간 이동의 평화로운 과정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현상이었다.

따라서 부의 불평등 양상은 분배문제를 다시금 경제학적 분석의 중심으로 되돌려 놓고 있다. 피케티는 분배의 문제를 경제 분석의 중심에 놓고 고투한 19세기의 경제학자들의 커다란 공적을 인정한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불평등 문제를 경제 분석의 한가운데에 되돌려놓고 19세기에 처음 제기되었던 질문들을 다시 제기했어야 했다. 너무나 오랫동안 경제학자들은 부의 분배를 소홀히 했다. 이는 한편으로는 쿠즈네츠의 낙관적인 결론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학자들이 이른바 대표적 경제주체 모형(representative agent model)에 바탕을 둔 극히 단순한 수학적 모형들에 지나치게 의존했기 때문이다.

피케티는 불평등의 수준 자체뿐 아니라 불평등의 구조, 다시 말해 사회집단 간 소득과 부의 불균형의 원인, 그리고 그 불균형을 방어하거나 비난하기 위해 동원되는 다양한 경제적, 사회적, 윤리적, 정치적 정당화의 방법들에도 많은 초점을 맞추었다. 불평등은 그 자체로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핵심적인 문제는 그 불평등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 불평등에 합당한 이유가 있는가이다.

피케티는 자신이 새로운 역사적 자료들을 통해 얻게 된 중요한 결론들을 진술한다. 첫째, 부와 소득의 불평등에 관한 어떤 경제적 결정론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부의 분배의 다이내믹스가 수렴과 양극화가 번갈아 나타나도록 하는 강력한 메커니즘을 가동시킨다는 것, 그리고 불안정하고 불평등한 힘이 지속적으로 승리하는 것을 막는 자연적이고 자생적인 과정은 없다는 것이다.

부와 소득의 양극화 요인들은 무엇인가? 첫째, (아직까지는 비교적 일부 지역에 국한된 문제이지만) 가장 많은 돈을 버는 이들은 나머지 사람들과 격차를 빠르게 벌려가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요인은 성장이 미약하고 자본수익률이 높을 때 부의 축적 및 집중화 과정과 관련된 일련의 양극화 요인들이 강력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둘째 요인이 장기적으로 부의 불평등한 분배에 대해 주된 위협이 된다. ‘r>g’라는 부등식으로 표현한 이 근본적인 불평등은 이 책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r=연평균 자본수익률, 즉 자본에서 얻는 이윤·배당금·이자·임대료·기타 소득을 자본총액에 대한 비율로 나타낸 것. g=경제성장률, 즉 소득이나 생산의 연간 증가율)

자본수익률이 경제성장률을 크게 웃돌 때는, 논리적으로 상속재산이 생산이나 소득보다 더 빠르게 늘어난다. 이런 상황에서는 거의 필연적으로 상속재산이 노동으로 평생 동안 모은 부를 압도할 것이고 자본의 집중도는 극히 높은 수준에 이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수준의 집중도는 능력주의의 가치, 그리고 현대 민주사회의 근본이 되는 사회정의의 원칙과 맞지 않을 수도 있다. 더욱이 이같은 양극화의 근본적인 요인은 다른 메커니즘(예. 저축률)에 따라 강화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두 가지 요소가 리카도의 희소성 원리에 따라 더 악화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케티의 결론은, 장기적인 생산성 증가율이 제로(0)라는 엄격한 가정에 기초하는 마르크스의 무한 축적과 영속적인 양극화 법칙보다는 덜 묵시록적이며 덜 결정론적이다. 저자는 불평등 심화를 정당화하는 논리 효과를 상쇄할 수 있는 공공정책이나 제도로 ‘누진적인 글로벌 자본세’를 착상한다.

이 책을 떠받치는 이론적 개념적 틀은 1789년 프랑스혁명 당시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 제1조에 들어 있다. 사회적 차별이 ‘오직 공익에 바탕을 두는’ 한에서만, 그 자체로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피케티는 사회를 조직하는 최선의 방법에 관한, 그리고 공정한 사회질서를 이루기 위한 가장 적절한 제도와 정책들에 관한 토론에 기여하기 위해 이 책을 저술했다. “더욱이 나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적용되고 민주적 토론을 통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법의 지배 아래 정의가 실질적으로 실현되는 것을 보고 싶다.” 서장 말미에서 저자는 자신의 책이 경제학 못지않게 역사에 관한 책이라고 선언한다. 서장은 짧지만 이 책의 중심논지, 방법론, 논거 등을 다 담고 있기에 책 전체의 압축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1부 소득과 자본은 “1장. 소득과 생산”, “2장. 성장: 환상과 현실”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이 책을 떠받치는 기본개념들(국민소득, 자본과 부, 자본/소득 비율, 자본주의의 제 1기본법칙)에 대한 설명을 시작으로, 세계적으로 소득과 생산의 분배가 어떻게 이뤄졌는가를 개관한다. 자본주의 제1기본법칙은 자본소득 분배율〓자본수익률×자본/소득 비율이다. 세계단일경제권 참여가 글로벌 불평등을 초래하지만 세계경제 참여 자체가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국내적, 국제적 차원의 불평등 완화 메커니즘 중 대표적인 요소가 지식의 확산이다. 글로벌 성장과 국제적 불평등은 적합하고 효율적인 정부가 이 지식의 확산을 선용할 때 완화될 수 있다. 2장은 산업혁명 후 인구와 생산 성장률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상세하게 분석한다. 장기간에 걸친 경제성장은 인구증가에 의한 경제성장과 경제적 요인에 의한 성장이 있는데 후자가 바람직하다. 물론 경제성장이 불평등 감소나 적어도 엘리트 집단의 빠른 교체에 기여할 수 있으나 개인 능력과 재능을 발현시켜 주는 경이로운 수단은 아니다.

2부 자본/소득 비율의 역동성은 국가 차원의 자본/소득 비율의 장기적인 전망과 국민소득 중 자본과 노동의 전반적인 분배문제를 검토한다. 21세기 세계적 차원에서 국민소득이 노동과 자본 사이에서 어떻게 분배되는지를 조사한다. 3장은 장기간에 걸친 경제지표자료를 보유한 영국과 프랑스에서 일어난 18세기 이후의 자본 변천을 검토한다. 4장은 독일, 미국의 자본 변천을 검토한다. 5~6장은 3~4장의 자본 변천 분석을 전 세계적으로 확장한다. 여기서 저자는 역사적 경험에서 미래예측을 위한 교훈을 도출한다. 앞으로 수십 년간 자본/소득 비율, 자본과 노동의 상대적인 몫이 어떻게 바뀔지를 예상한다. 2부의 교훈은 역사적 과정에서 자본과 자본소유로부터 나오는 소득의 중요성을 필연적으로 감소시킬 수 있는 자연발생적인 힘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 년 동안 전통적인 의미의 자본(토지자본, 부동산, 금융)에 대한 인적 자본(노동생산성, 기술, 지식)의 승리와 그 결과 초래된 불평등 완화는 순수한 기술과 경제적 힘에 의한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적 개입 때문임이 밝혀졌다. 생산성 향상과 지식 확산으로 인한 현대의 경제성장은 마르크스가 예언한 재앙은 피할 수 있게 했으나 자본주의 구조 자체를 바꾸지는 못했다. 노동에 비해 자본의 거시경제학적 중요성은 여전하다. 

3부 불평등의 구조는 개인수준의 소득이나 부의 불평등 문제, 즉 세습자본주의를 다룬다. 세습자본주의는 19세기 같은 저성장 환경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7장은 노동소득의 분배 대 자본소유와 자본소득의 불평등 수준을 자세히 다룬다. 모든 사회의 소득불평등은 노동소득 불평등, 자본소유와 자본이 창출하는 소득의 불평등, 그리고 이 두 가지 상호작용으로 생기는 불평등으로 구분된다. 발자크의 소설 《고리오 영감》은 이 문제를 정확하게 다룬다. 소설에서 사악한 달변가인 보트랑은 공부, 재능, 노력을 통해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이라고 외친다. 유산을 통해 얻는 소득이 노동소득보다 그 상대적 중요성이 더 크다는 것이다. 노동과 관련된 불평등도 무시하면 안 되지만 자본과 관련된 불평등이 더 극심하다. 20세기 선진국들에서 일어난 부의 분배 현상 중 주요한 구조적 변화는 세습(유산)중산층의 성장이다.

8장은 프랑스와 미국을 비교하며, 불평등의 역사적 다이내믹스(감소와 증가)를 분석한다. 프랑스의 경우 상위 10%에서는 여러 세계가 공존한다. 상위 10% 중 하위 5%는 소득의 80~90%를 노동 보상으로 얻은 진정한 경영자들의 세계다. 위로 올라갈수록 노동소득이 차지하는 비율은 빠르게 감소하고 자본소득의 비율은 언제나 급격하게 상승한다. 1980년대 이후 프랑스에서 증가된 불평등은 대기업과 금융기관의 최고위 경영자들의 보수가 엄청나게 늘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도 유사하지만 프랑스보다는 더 복잡한 다이내믹스를 보여준다. 미국에서는 임금불평등의 전례 없는 증가가 슈퍼경영자의 출현을 초래한다. 슈퍼경영자의 출현으로 인한 소득 10%내의 동거체제가 미국 소득불평등의 대부분을 설명하지만 자본소득이 이 불평등 발생에 아무 역할을 하지 않은 게 아니다. 1980년 이후 자본소득 불평등의 상당한 증가가 미국 소득불평등 증가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프랑스와의 차이점은 미국의 경우 소득계층의 훨씬 위쪽으로 올라가야 소득에서 자본소득이 우위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임금불평등 심화는 임금 분포의 최상위층, 즉 상위 1%와 더 나아가 상위 0.1%의 임금이 엄청나게 가파르게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9~10장은 세계최상위계층 데이터베이스(WTID)에서 역사적 통계자료가 확보가능한 모든 나라들의 노동과 자본 불평등을 분석한다. 9장은 노동소득 불평등의 다이내믹스를 다루는데 1980년대 이후 미국에서 임금불평등이 폭발하고 영미권 국가들의 특이현상인 슈퍼경영자가 등장한 원인을 논한다. 이런 현상은 기술 변화 같은 전반적이고 선험적인 요인보다는 국가간의 제도 차이에서 비롯된다. 모든 영미권 국가에서 최근 수십 년간 나타난 소득불평등의 주된 원인은 금융부문과 비금융부문 양쪽에서 슈퍼경영자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또한 9장은 영미권 국가를 포함한 여러 국가(유럽, 일본)에서 불평등이 역사적으로 다양한 양상을 보이며 전개된 원인들을 탐구한다. 거시경제학의 관점에서 보면 유럽국가들과 일본에서는 최고 소득의 폭발적인 증가가 미친 영향이 미국에 비해 제한적이었다. 미국과 영미권은 가장 많은 보수를 받는 개인들이 생산성이라는 잣대로 자신들의 급여를 스스로 정하는 제도 때문에 슈퍼경영자들의 도약이 일어났고 그것이 강력한 양극화 요인으로 작동했다.

10~12장은 자본소유 분배변천사를 다루는데 10장은 19세기를 거쳐 1차 세계대전까지 유럽에서는 부가 집중되었으나 20세기에는 부의 집중이 완화되었는데 그 이유(자본으로 인한 고소득의 감소)가 무엇인지를 논구한다. 여기서 저자는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가난한 사람들보다는 더 부유하며 국부의 4분의 1에서 3분의 1을 소유하는 “세습중산층”의 등장이 20세기 전반에 소득불평등이 줄어든 이유와 선진국들이 자본소득자 사회에서 경영자 사회로 옮겨간 이유를 대체로 설명해준다고 본다(프랑스, 영국, 스웨덴). 더 나아가 10장은 부의 양극화 메커니즘으로서 역사 속 자본수익률 대 성장률 공식을 소개하며 왜 자본수익률이 성장률보다 높은가를 논구한다. 자본수익률이 성장률보다 높아야 할 논리적 필연성은 없으나 이는 역사적 사실로 드러난다. 이런 상황에서 균형분배는 존재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부의 불평등이 과거 수준(벨 에포크, 1880~1914년)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 부분적인 이유는 시간(1945년 이후 부의 불평등이 심화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세금(자본소득에 대한 상당한 세율정책. 세금효과는 장기적인 부의 분배구조 변화초래, 상속세, 최상위소득 누진세), 그리고 경제성장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오늘날 유럽의 부의 집중도가 벨 에포크에 비해 낮은 이유는 우연적 요인들(1, 2차 세계대전)과 자본 및 자본소득에 부과된 세금제도 때문이다. 세금제도가 무너지면 과거 수준의 불평등으로 복귀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며 더 악화될 수 있다. 따라서 현대적 경제성장의 특징이나 시장법칙 같은 것이 부의 불평등을 줄이고 조화로운 안정을 달성할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11장은 상속재산의 중요성 변천사를 다룬다. 자본수익률과 경제성장률의 차이에는 인류역사상 관찰되었던 고도의 부의 집중을 설명하는 ‘축적의 논리’가 포함되어 있다. 이 장은 자본형성에서 상속과 저축의 상대적인 역할이 장기적으로 변천해 온 과정을 자세히 살핀다. 자본수익률이 현저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경제성장률보다 높은 경우, 거의 필연적으로 과거에 축적된 과거 자산의 상속이 현재 축적되는 자산인 저축을 압도한다. ‘r>g’는 과거가 미래를 잡아 먹어버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노동을 하지 않고도 과거에 만들어진 자산이 노동을 통한 저축으로 만들어진 자산에 비해 자동적으로 더 빠르게 성장한다. 거의 필연적으로 과거에 만들어진 불평등, 즉 상속을 더 지속적으로 과도하게 중요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높은 인구증가율을 가진 미국보다 프랑스 등 유럽국가에서 이 경향이 더욱 뚜렷하다. 경제성장률이 1~1.5%로 하락하고 자본수익률이 4~5% 수준으로 유지되면 자본소득분배율이 치솟고 그 결과 최상층에게 집중된 자본이 다음 세대로 상속되어 세습자본주의가 등장한다. 이 때 기회균등이나 능력주의는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부자들은 정치권력을 상품처럼 사들여 민주주의를 부식시킬 것이다. 높은 자본/소득 비율, 즉 과거 세대의 “죽은 손”과 자본의 높은 수익률이 오늘날 선진자본주의의 사회적 토대를 파괴한다.

12장은 부의 불평등 다이내믹스를 개별국가적 관점에서 분석하는 이전 장들과는 달리 21세기 초 수십 년간의 범세계적인 부의 불평등 문제를 취급한다. 국제적 부의 불평등이 미래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세계적 수준의 부의 불평등 다이내믹스와 오늘날 작용하는 주된 힘들을 분석한다. 이를 위해 세계적 개인부자들의 부 집중, 국가간 불평등을 연구한다. 대부분의 경제모형 예측과는 달리 모든 사람의 자본수익률은 동일하지 않다. 부유한 사람의 평균수익률이 보통 사람의 평균수익률보다 높다. 글로벌 부의 계층구조에서 최상위 십분위 혹은 백분위의 재산이 더 낮은 십분위의 재산보다 구조적인 이유로 더 빠르게 성장한다면 당연히 부의 불평등은 무한히 증가하게 된다. 그러므로 불평등한 자본수익률은 r>g라는 부등식의 효과를 크게 증폭시키고 악화시키는 양극화의 힘이다. 이 양극화의 유일하게 자연적인(정부개입 없는) 대항력은 경제성장이다. 그러나 낮은 인구증가율과 낮은 경제성장시대에 접어든 선진국에서 이 대항력은 기대하기 힘들다. 12장은 마지막으로 오늘날 국가경계를 넘은 글로벌 자본의 조세피난처 은닉문제를 다루면서 세계화된 자본주의에서 자산을 추적하는 과업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자산의 지리적 분포를 분석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언급한다.

4부 21세기 자본 규제는 사실들을 확인하고 관찰된 원인들을 이해하는 데 치중한 1~3부의 논의, 분석, 관찰, 평가로부터 규범적이고 정치적 교훈을 도출한다. 13장은 지금 상황에 적합한 사회적 국가의 모습을 검토한다. 18세기 이래로 부의 분배와 불평등 구조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분석한 1~3부의 분석을 바탕으로 미래를 위한 교훈을 이끌어내고자 한다. 20세기 두 차례 세계대전이 그 이전의 불평등을 상당 부분 해소하고 불평등 구조를 변화시켰다는 사실에서 한 가지 중요한 시사점이 발견된다. 2010년대에 접어들어, 사라진 듯했던 부의 불평등이 역사적 최고치를 회복하거나 심지어 이를 넘어서는 수준에 다다랐다. 1990년대 이후 가속화된 새로운 세계경제는 엄청난 기대와 거대한 불평등을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이런 현실에 직면해 저자는 앞에서 각종 자료를 통해 밝혀낸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오늘날의 전 세계적 세습자본주의를 정당하고 효율적으로 통제할 만한 새로운 정치제도로서 부의 불평등을 막는 조세제도와 공공정책을 가동시키는 사회적 국가를 제시한다.

13장은 거의 한 편의 감동적인 설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먼저, 저자는 끝없는 불평등의 악순환을 피하고 자본축적의 다이내믹스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기 위한 이상적인 정책으로 자본에 대한 글로벌 누진세를 제안한다. 피케티는 대부분 2차 세계대전 후 소득상의 차이가 급속하게 줄어들었던 이유가 임금 불평등은 그대로인데 비해 부동산 불평등의 감소가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 시기의 불평등 감소는 전쟁 직후에 시행된 고도로 누진적인 소득세 때문이라고 본다. 이것이 가장 부유한 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잉여자본을 축소시킴으로써 부동산 집중의 위력을 상쇄했다는 것이다. 피케티는 2%까지 올라가는 누진적 연례세금과 80%까지 이르는 누진적 소득세를 신설해 불평등을 줄일 것을 제안하는데, 여기에는 또 다른 장점이 있다. 부를 노출시켜 민주적인 감시가 이뤄지게 하는 것인데, 이는 은행 시스템과 국제자본의 흐름을 효과적으로 규제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이 자본세는 경제의 투명성과 경쟁의 힘을 유지하는 한편 사적 이익에 앞서 공공의 이익을 증진할 것이다. 전 세계적 차원에 못 미치는 국가적 차원 혹은 한 차원 낮은 다양한 형태의 자본세도 대안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진정한 전 세계적 차원의 자본세가 유토피아적 이상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상에는 못 미치지만 이러한 과세를 받아들일 의지가 있는 국가에서부터 지역이나 대륙적 차원에서 자본세를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자본세 문제를 좀 더 광범위한 맥락, 즉 부의 생산과 분배, 그리고 21세기에 적합한 사회적 국가의 건설에서 국가의 역할이라는 맥락에서 분석하고 검토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회적 국가가 맡은 과업 중 하나는 현대적 재분배인데 이것은 국민기본권의 확장논리를 의미한다. 현대적 재분배는 노골적인 방식으로 부자로부터 빈자에게로 소득이 이전되는 방식이 아니다. 그보다는 의료, 교육, 연금을 비롯해 대체로 보편적이고 동등한 혜택이 돌아가는 공공서비스와 대체소득을 위한 재원을 조달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대체소득의 경우, 형평성 원칙은 종종 평생소득에 대략 비례하는 대체소득을 지급하는 형태를 띤다. 교육 및 의료와 관련해서는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소득(또는 부모의 소득)과 관계없이 모든 국민에게 실제로 동등한 혜택이 주어진다. 현대적 재분배는 기본권의 논리 그리고 기초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일정한 상품에 대한 평등한 접근이라는 원칙에 따라 이뤄진다.
1789년 프랑스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 제1조 둘째 문장은 “오직 공익에 바탕을 둘 때만” 불평등을 용인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사회적 불평등은 오직 모두에게 이익이 될 때에만, 특히 가장 불리한 입장에 처한 사회적 집단의 이익에 공헌할 때에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권리와 기회가 가장 적은 사람들의 이익에 공헌하는 한, 기본적인 권리와 물질적 혜택은 가급적 모두를 대상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이런 해석은 미국의 철학자 존 롤스가 《정의론》에서 제시한 ‘차등의 원칙’과 그 취지가 유사하다. 그리고 만인의 최대의 평등한 ‘역량’에 관한 인도의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의 접근법 또한 기본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20세기의 선진국들이 보여주었던 사회적 국가의 현대적 재분배는 교육, 의료 및 퇴직연금과 관련된 기본적인 사회적 권리들에 기초하고 있다. 오늘날 이런 조세제도 및 사회적 지출이 직면한 한계와 도전이 무엇이든 간에, 이것들은 역사적인 측면에서 거대한 일보를 내디뎠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빈곤국과 신흥국에서도 사회적 국가 건설의 실현 가능성이 불확실할지라도 그리고 심지어 비관적이라 할지라도 이것이 대체로 바람직하다고 본다. 부유한 국가와 국제기구에 신흥국에 무역정책 등을 통한 부당한 간섭이나 방해를 하지 않고 신흥국이 새로운 세금과 잃어버린 세수를 회복할 때 공공부문의 서비스를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피케티는 개발도상국의 실정에 맞는 사회적 국가 형성을 권고하고 기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서유럽 국가들이 국민소득 대비 세수는 약 45~50%에서 안정된 것으로 보이는 데 비해 미국과 일본의 경우는 이 비율이 약 30~35% 수준에 고정된 것으로 보인다.

14장은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추세에 비추어 누진적 소득세를 다시 검토해 볼 것을 제안한다. 피케티가 내리는 규범적 결론은 1990년대 말 이래 프랑스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자들에 대한 감세와 그로 인한 부자들의 사회 공헌 감소가 임대계급(the rentier class)이 더 이른 시기에 엄청난 재산을 재구축하는 것을 방조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 경향은 그가 말하는 세습자본주의를 초래할 것이고, 극히 적은 수의 가문이 부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상황을 야기할 것이다. 피케티는 19세기부터 지금까지 25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경제자료 분석을 통해 점증되고 심화되는 부의 집중은 스스로를 개선하지 못한다는 것을 논증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범지구적인 부유세를 신설해 부의 재분배를 이뤄야 한다고 제안한다. 15장은 21세기 상황에 맞는 누진적 자본세의 형태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유럽의 부유세, 중국의 자본 통제, 미국의 이민제도 개혁, 각국의 보호무역주의 부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규제와 누진적 자본세를 비교한다. 16장은 공공부채라는 절박한 문제를 논의하며, 자연자본의 질이 떨어지는 때에 공공자본 축적의 최적 수준이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를 고찰한다.

결론
결론 또한 거의 한 편의 설교다. 기독교가 오랫동안 망각하던 예언자적 사회관여 영성이 드러나는 저자의 학문적 강론은 설교처럼 감동적이다. 저자는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경제학을 제안하면서 결론을 맺는다. 저자는 경제학이 다른 사회과학 분야보다 더 높은 과학적 지위를 얻었다는 것을 내비치는 경제과학이라는 표현을 싫어하며 대신에 ‘정치경제학’이라는 표현을 훨씬 더 좋아한다. 경제학과 다른 사회과학 분야를 구분하는 유일한 차이가 경제학이 정치적이고 규범적이며 도덕적 목적을 지니는 데 있음을 말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정치경제학은 한 나라의 경제와 사회 조직에서 국가가 해야 할 이상적인 역할을 과학적으로 또는 적어도 합리적이고, 체계적이며, 조직적으로 연구하고자 했다. 경제학이 던졌던 질문은 어떤 공공정책과 제도가 우리를 이상적인 사회에 더 가깝게 이끄는가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피케티는, 모든 시민이 전문가가 될 수 있는 선과 악의 문제를 연구하겠다는 이 겁없는 열망이 비현실적으로 들릴지언정 필요한 목표이며 참으로 없어서는 안 될 목표임을 역설한다. 아울러 그는 다른 이들의 견해와 자료를 비평하거나 파괴하는 역할에 만족하지 말고, 또한 정의와 민주주의, 세계 평화와 같은 숭고하지만 추상적인 원칙들을 들먹이는 데 만족하지도 말고, 다른 모든 지식인과 시민처럼 사회과학자들도 사회적 국가든, 조세 체계든, 아니면 공공부채든 간에 특정 제도와 정책들에 대해 선택하고 주장해야 하며 필요시 공개적인 논쟁에 참여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스스로의 방식으로 정치적이기 때문에 정치와 경제 등 정의와 올바른 사회질서의 문제를 정치적 엘리트에 맡겨두고 자신은 논평가라고 자임하며 4~5년에 한 번씩 투표 하는 정도의 구경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피케티가 보기에 너무나 오랫동안 경제학자들은 정치 사회 문제들에 대한 명확한 기술도 없이 순수한 이론적 고찰에 지금까지 아주 많은 에너지를 허비했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경제학자들은 통제된 실험에 바탕을 둔 실증적 방법에 대한 열의로 가득하다. 우리가 역사에서, 특히 지난 세기에 대한 연구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불완전한 것일지라도 그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둘도 없이 귀중한 것들이다. 경제학자들이 쓸모 있게 되려면 무엇보다 더 실용적으로 방법론을 택하고, 이용할 수 있는 수단들은 어떤 것이든 써보고, 그래서 다른 사회과학 분야와 더 긴밀하게 협력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저자는 이와 동시에 다른 분야의 사회과학자들은 경제적 사실들에 대한 연구를 경제학자들에게만 맡겨두지 말아야 하며, 어떤 숫자가 튀어나올 때 무서워 도망치거나 모든 통계는 사회적 구성물일 뿐이라고 자위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18세기나 19세기를 연구할 때는 물가와 임금, 또는 소득과 재산의 변화가 정치나 문화의 논리와 거의 또는 전혀 관련이 없는 자율적인 경제논리를 따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20세기를 연구할 때는 그런 환상이 곧바로 깨져버린다. 소득과 부의 불평등이나 자본/소득 비율의 곡선을 언뜻 보기만 해도 정치는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경제적 변화와 정치적 변화는 떼려야 뗄 수 없게 얽혀 있어서 함께 연구해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우리는 경제적 하부구조와 정치적 상부구조라는 극히 단순하고 추상적인 개념을 버리고 국가, 조세, 부채를 구체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모든 사회과학자와 저널리스트와 논평가, 모든 노동조합 활동가와 온갖 부류의 정치가, 특히 모든 시민은 돈과 돈에 대한 측정, 돈을 둘러싼 사실들 그리고 이 역사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지키는 데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숫자 다루기를 거부하는 것이 가난한 이들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III. 《21세기 자본》이 기독청년에게 던지는 세 가지 도전

첫째는 시대의 중심문제인 불평등, 양극화, 사회분열을 정조준하는 피케티의 학문적 열정이다. 그는 시대의 중심문제를 정면으로 붙들고 씨름하는 예언자적인 지식인의 면모를 보여준다. 피케티는 자본(이윤, 배당금, 이자, 임대료, 그리고 기타 자본파생 소득) 회수율(r)과 경제성장률을 연동시키는 공식에 근거하여 중심논지를 전개한다. 경제성장률이 낮을 때 부는 노동으로부터 오는 집중보다 자본으로부터 오는 집중이 더 빨리 이뤄진다. 부의 분배가 양극화하고 더 큰 부의 불평등을 조장하는 근본적인 동력은 r>g 불평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똑같은 공식을 갖고 상속재산을 분석한다. 그 결과 오늘날의 세계는 세습자본주의로 회귀하고 있으며 경제의 많은 부분이 상속된 부에 의해 지배당한다. 그들의 힘은 증대되고 과두체제를 만들어낸다. 피케티는 앞으로도 낮은 경제성장이 이뤄지는 세계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견한다. 그가 말하는 자본주의의 내재적 불평등 법칙은 두 가지다. 첫째, ‘국민소득 중 자본소득의 비율〓자본수익률×자본/소득 비율’이다. 자본수익률이 올라가거나 자본/소득비율이 커지면 자본소득의 분배율이 커진다는 얘기다. 둘째, ‘자본/소득 비율〓저축률/경제성장률’이다. 이 두 가지 내재적 법칙 때문에 21세기 세습자본주의로 회귀하고 있다. 상속을 통한 소득이 노동소득보다 더 중요하고 지배적인 세습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이에 대한 피케티의 처방은 최상위 1%에 대한 소득세와 상속세 최고세율의 대폭인상과 글로벌 부유세 도입이다. 이처럼 피케티는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인생 현안인 불평등, 양극화의 문제를 붙들고 고투하며 세계적 파장을 일으킨다. 《21세기 자본》은 시대의 중심문제를 외면하는 기독교는 복음의 위력을 실제 삶의 문제에 적용하고 과시할 기회를 영구적으로 봉쇄한다는 엄중한 진리를 깨닫게 해준다.

이 책이 기독청년에게 던지는 두 번째 도전은 13장 “21세기를 위한 사회적 국가”와 “결론”에 등장하는 사회과학도의 철저한 현실관여적, 현실변혁적 기상이다. 13장과 결론은 그 자체로 참으로 학자적인 냉정함과 예언자적 파토스를 동시에 분출하고 있다. 더 정의로운 사회를 품고 학문적 열정을 쏟는 청년의 열정이 이 책 전체에서 생생하게 느껴진다. 자본주의 사회를 전복하지 않고 부와 소득의 불평등 효과를 최대한 억제하고 사회통합적인 정책을 찾아보려 애쓰는 모습에서 사회과학적, 인문학적 상상력의 위엄을 본다.

마지막으로 기독교회는 역사의 끝만 자폐적으로 바라보는 종말론적인 기독교역사관에 매몰되지 말고 역사의 중간목표도 설정해 인류역사의 진보를 견인하는 현실변혁적 지성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카는 역사의 끝에 집착하는 신학자들의 종말론적인 풍조를 비판하며 역사의 외부에 역사의 목표를 설정하는 과오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많은 복음적 기독교인들은 역사의 끝(휴거, 지구탈출론적 구원, 육체이탈적 영적 탈출, 영혼과 육체 분리 구원)만 보지 역사의 중간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에 도달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는 유기체적으로 자라고 점차적으로 커가는 나무다. 하나님 나라에 근사치적으로 접근하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우리 각자는 동시대에 두신 하나님의 뜻을 이뤄드리려고 노력해야 한다. 칼 헨리가 《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에서 비판하듯이, 복음주의 기독청년들이 전천년설적 재림신앙에 매몰되어 현실사회의 중요과제를 포기하고 외면한다면 세상의 모든 공적 영역은 불신자들의 독무대가 될 것이다.  

김회권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서 공부했으며, ESF(한국기독대학인회)에서 회심하고 신앙 훈련을 받은 뒤 11년간 ESF 간사로 섬겼다. 장신대 신대원을 나와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성서신학석사 및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모세오경 1, 2》 《김회권 목사의 청년설교》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사도행전 1, 2》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