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연재를 맺으며…

[289호 권서]

2014-11-27     박명철 프리랜서 저술가

1.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개인적으로 참 굵고 드센 물살이 휩쓸고 지나갔다. 교회의 희망을 생각했고, 교회의 절망을 보았으며, 그럼에도 그 희망이 남았을까 희망하여 보는 시간이 이어졌다. 그리고 권서들을 만났다. 한 달에 며칠씩 그들의 사역에 대해 보고한 글을 읽었고, 읽을 때마다 그저 보고서 문체에 갇힌 ‘사람’의 실종이 안타까워 막막해 하거나 때로는 짜증을 부렸다. 디테일한 지식의 부족 탓이지만 그 앙상한 지식의 뼈대만 가지고 100년을 거슬러 올라 그들의 마음에 내 마음을 포개어 보려고 무던히도 몸부림했고, 마음의 아귀가 맞지 않아 삐거덕거릴 때마다 그 시대의 편린들을 찾아 오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다 보면 겨우 마음 한 조각이 겹쳐지는 순간이 나타났다. 그 순간이 내게는 유일한 끈 같았다. 그 끈을 부여잡고 한 땀 한 땀 글을 엮었다. 무엇 하나 날렵하고 무르익은 게 없는 터라 글발은 어기적거리기 일쑤였다. 그렇게 스물두 번의 글을 납품하듯 송고했다. 

2년이 흐른 지금, 나는 더욱 아득한 막장에 이르렀다. 내가 그린 권서들의 이야기가 어쩌면 통째로 거짓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져버렸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세계가 펼쳐졌을 가능성이 더욱 크기 때문이다. 그 세계가 어떠하든 서로 어긋난다는 사실만으로 이 스물두 편의 글은 쓰레기가 되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픽션일지라도 진실을 담아낸다면 더욱 가치 있는 글이다. 그러나 픽션과 팩트를 겸한 ‘팩션’의 틀에 담은 글이면서 사실도 진실도 담아내지 못했다면 이것이야말로 쓰레기일 것이다. 어쩔 것인가? 나는 픽션의 테두리를 끌어들여 사실을 죽이고, 팩트의 조각들을 끼워 맞추느라 진실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말이다.

2.
그저 권서로 살다 간 이들을 기억하고 감사할 뿐이다. 19세기가 저물어가던 무렵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때로는 굶으며, 핍박을 당하며, 고난의 길을 간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들이 산비탈을 깎아 밭을 일구듯 한반도 곳곳을 복음으로 개간하였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두 무명의 선교사이자 프런티어에서 하나님 나라의 국경을 넓혀가던 전사들이었음을.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넓은 길을 보지 않고 그들이 지닌 경륜과 지식으로 무엇보다 권서의 직분을 충실히 감당하고자 애썼다. 그들은 겸손하였고, 책(성경)을 퍼뜨리고자 집요했으며, 핍박을 받고도 인내했으며, 조리 있게 전하였다. 때로는 학자였고, 때로는 친구였으며, 때로는 스승이었다. 그들의 걸음이 다져진 곳에서 누군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세워졌으며, 다시 그들처럼 복음을 전하는 권서가 태어났다.

그들이 보급한 성경은 아직 잠들어 있던 인성을 깨웠고, 억눌렸던 존재를 일으켜 세웠으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인생이 목적지를 갖게 해주었다. 때로 그들은 식민지의 민중으로 노예처럼 살아가는 비굴함에서 벗어나고자 독립만세를 주도하였고, 독립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의 벗이 되어주기도 했다. 이처럼 오래된 나라 조선은 어쩌면 그들과 더불어 근대의 시간 속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므로 권서 없는 근대의 출발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

2년 동안 경작한 원고의 결실이 이것이다, 하고 말하기에는 모자람이 없지 않다. 그렇더라도 이들의 수고와 눈물을 기억하고 기리는 일 또한 나에게는 깜냥에 벅찬 일이어서 가벼이 여길 수 없는 부분이다.

3.
때로는 피사체를 깔본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피사체란 내가 그려야 할 권서들의 마음이다. 선교사들의 보고서 속에 갇힌 권서들은 독자인 내게 불친절하고 마음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들은 멀리 있었고, 하도 멀어서 때로는 그 마음을 왜곡하여 내 마음에 잘라 붙이기도 했다. 글은 가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되어버린 셈이었다.

애당초 그들의 마음에 닿으려던 게 욕심이었는지 모른다. 제 마음조차 알지 못하면서 주제가 넘어도 한참을 넘었던 것이다. 하물며 한 세기를 가로질러 새 세상을 열고자 한 기상을 내 안의 좁은 세계로 끌어들이려고 한 셈이니 한심스럽지 않은가. 나는 지금 여전히 100년이나 멀리 떨어진 그들에 대해 알지 못한다.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에 인생을 던진 까닭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들이 만난 예수가 어떤 예수였는지, 그 예수가 열어준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그렇게 캄캄한 세상을 살아가며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보급하는 일이 진정 희망이었던 까닭을, 나는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이럴 수도 있었고, 저럴 수도 있었다며 나름 그 까닭을 나열하였으나 결론은 ‘그래서?’라는 원점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그 증인이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다. 지금 나는 그들을 권서의 현장으로 내몰았던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이방인처럼 서성거린다. 그들은 성경을 짊어지고 떠났으며, 나는 그들이 떠난 자리에 홀로 남았다. 그들은 왜 떠났을까, 생각해보지만 여러 가지 자잘한 담에 가로막혀 실마리를 찾을 수가 없다. 풀리지 않는다. 그 사이 해가 저물고 떠난 이들은 돌아와 내일을 준비한다. 나는 어느새 조급해진다. 떠나지 못한 사람이 떠난 이들의 결심을 그려낼 수 없는 법이다. 그릴 수 없는 그림을 강박하여 억지로 그리기 위해 나는 그들을 깔봐야 했다. 잴 수 없는 마음을 잘라 내 마음에 오려붙인, 그 터무니없는 용기의 밑바닥에는 놀랍게도 그런 깔봄이 있었던 것이다.

4.
교회는 희망일까, 나는 그 대답 앞에서 머뭇거린다. 어쩌면 주님의 부르심 앞에서 이방인으로 서 있는 까닭도, 권서들이 떠난 자리에서 그들의 뒷모습만 지켜보고 서성거리는 까닭도, 결국에는 교회가 희망이고, 희망일 수밖에 없으며, 희망이어야 한다는 젊은 날의 열정이 낡아버린 탓일 게다. 내 나이는 어쩌면 그 열정이 낡기까지의 시간이기도 했다.

사족을 하나 달자면 나를 포함하여 한국교회가 유별나게도 역사 읽기에 게으르다는 사실이다. 물론 역사를 가공하거나 창의적으로 엮는 일에 게을렀던 것도 사실이다. 지나간 이야기들을 다듬어 오늘과 이어주는 일은 비단 역사학자들만의 몫이 아니다. 관심을 가진 작가들의 몫이기도 하고, 작가를 길러내는 출판시장의 몫이기도 하다. 물론 나로서는 그 작업의 일단에 참여한 보람을 느끼기엔 내놓은 작업의 결과가 허술하고 보잘것없어, 오히려 길을 내기보다 길을 막는 꼴이 되지나 않을지 두렵다. 

 

박명철
<기독신문> <뉴스앤조이> <기독교사상> 기자를 거쳐 <아름다운동행> 편집장으로 기독교 매체를 만드는 일을 해왔으며, 신앙을 삶으로 살아내는 현장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알리는 데 매진해왔다. 현재는 CBS 라디오의 책 소개 코너를 맡고 있으며, 《사람의 향기 신앙의 향기》 《교회학교 부흥을 꿈꾸는 이들에게》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