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강] 욥기를 읽는다는 것

[290호 김기석 목사의 욥기 특강]

2014-12-30     김기석 청파감리교회 목사, 문학평론가

안녕하십니까? 오늘부터는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지만 실은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성경의 한 책 이야기를 해나가려 합니다. 욥기입니다.

욥 하면 뭐가 떠오르시나요? ‘무고한 자가 겪는 고난’ ‘흠이 없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 ‘세 친구’ ‘욥의 아내’ ‘비슷한 말이 끝도 없이 반복된다’ 등 대개 이 정도입니다. 결말이 어처구니가 없다거나, 그를 생각하면 위로가 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극단적인 고통을 겪은 욥을 생각하면 지금 자신이 겪는 고통은 견딜만 하더라는 것이겠지요.

욥기 하면 떠오르는 구절이 있습니까?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8:7).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1:21).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16:19). 대개 이 정도입니다. 또 있나요?

사람들은 어떤 텍스트를 읽든 그 텍스트가 감추고 있는 보물에 접근하기보다는 자기 삶의 정황에 필요한 말들만 발췌하여 기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작고한 시인 기형도는 〈우리 동네 목사님〉이라는 시에서 목사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이미지와 좀 다른 목사 한 분을 소개합니다. 그 목사는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이 없습니다. 손 노동을 좋아하는 그는 폐렴으로 둘째 아이를 잃기도 했습니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뒤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교인들에게 강조한 것이 있습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습니다. 그게 왜 분노해야 할 일인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고백과 삶이 분열되어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기 싫어서였을까요?

저는 그 말을 성경 읽기는 삶을 통해 완성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욥기의 세계를 산책하면서 우리 삶의 실상과 만나고,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 시선이 깊어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욥이 실존 인물이 아니란 말이냐”라는 물음에 대하여
욥기가 어느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인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도입부를 볼까요?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1:1). 옛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실 때 “옛날옛날에 ~이 살고 있었대”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과 유사하지요? 지명은 나와 있는데 시대를 짐작해 볼 만한 정보는 아예 없습니다.

인물에 대한 정보도 그렇습니다. 욥이면 욥이지,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라니요? 이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저자가 인물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사실 혹은 사건 전달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표정을 보니 “그러면 욥이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말이냐?”고 묻고 싶은 것 같군요.

사람들은 일쑤 사실과 이야기를 혼동합니다. 욥은 실존 인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담아내기 위해 저자가 선택한 전형적인 인물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성이 진실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른들이 “옛날옛날에~” 하고 이야기를 시작한다고 하여 아이들이 “에이, 꾸며낸 이야기잖아. 진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줘”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그 이야기 속에 진실이 담겨 있음을 압니다. 그 이야기가 바로 자기가 속해 있는 세상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는 그 이야기가 탄생할 만한 삶의 자리가 있는 법입니다. 이야기를 잘 들어보면 마치 배경 음악처럼 그 이야기가 탄생한 상황이 드러납니다. 사람들이 민담이나 전설 혹은 설화에 주목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그걸 분석할 능력이 좀 부족하니까 전문적인 학자들의 도움을 받는 게 좋겠습니다.

학자들은 욥기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칙령으로 해방되어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에 돌아온 이후의 상황을 반영한다고 말합니다. 그런지 안 그런지는 앞으로 본문을 읽어가는 과정 중에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귀환 이후의 상황은 에스라 느헤미야 학개 스가랴 등의 책에도 잘 나와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푸른 꿈을 안고 찾아온 고국 땅에서 귀환자들은 절망만 수확하게 되었습니다. 기억 속에 아름답게 새겨져 있던 고국산천은 황폐하게 변했고, 성전마저 무너져 예루살렘은 을씨년스럽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두 손을 들고 반겨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나오느니 한숨뿐입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핑계거리를 찾습니다. 탓할 대상을 찾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무능한 지도자들에게 눈을 흘기기도 합니다. 그래 봐야 곤고한 상황이 해결될 리 만무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아픔과 고통이 고스란히 반영된 이야기를 들으며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제 아버지는 평생토록 한복을 입고 지내셨습니다. 일제 강점기 시작 무렵에 태어나셔서 20세기를 거의 관통하며 사셨으니 참 고난에 찬 인생을 사셨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세상을 떠나시기 몇 년 전부터 집에 계실 때면 늘 들으시던 음악이 있습니다. 무료할 때 들으시라고 ‘국악’ 테이프를 사드렸는데, 그중에서도 ‘회심곡’ 테이프가 늘어질 정도로 듣고 또 들으셨습니다. 노래꾼은 사람이 어떻게 잉태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돌봄을 받으며 자랐는지 처연한 음색으로 들려주었습니다.

진자리는 인자하신 어머님이 누웁시고 마른자리는 아기를 뉘며
음식이라도 맛을 보고 쓰디 쓴 것은 어머님이 잡수시고 달디 단 것은 아기를 먹여
오뉴월이라 짧은 밤에 모기 빈대 각다귀 뜯을세라 곤곤하신 잠을 못다 주무시고
다 떨어진 세살부채를 손에다 들고 왼갖 시름을 다 던지시고
허리둥실 날려를 주시며 동지섣달 설한풍에 백설이 펄펄 날리는데
그 자손은 추울세라 덮은데 덮어주고 발치발치 눌러를 주시며

왼팔 왼젖을 물려놓고 양인 양친이 그 자손의 엉둥 허리를 툭탁치며
사랑에 겨워서 하시는 말씀이 은자~동아 금자~동아 금이로구나
만첩 청산의 보배동아… 순지 건곤의 일월동아
나라에는 충신동아 부모님전 효자동아 동네방네 위엄동아
일가친척의 화목동아 둥글~둥글이 수~박동아
오색비단의 채색동아 채색비단의 오색동아
은을 주면 너를 사고 금을 주면 너를 사랴 애지중지 기른 정을 사람마다
부모은공 생각하면 태산이라도 무겁지 않겠습니다

연세가 많아지시니 일찍이 세상을 떠나신 엄부자모(嚴父慈母, 엄격한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가 그리우셨던 모양입니다. 어떤 근원적 슬픔에 접속되었다고 할까요. 아버지는 그렇게 생의 말년의 울울한 심사를 풀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열치열(以熱治熱), 이한치한(以寒治寒)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열은 열로 다스리고 차가움은 차가움으로 다스린다는 말입니다. 슬픔의 감정 또한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슬플 때 슬픈 노래를 들음으로 슬픔을 다스립니다.

욥기를 읽는 이들은 어떤 이들일까요? 삶이 봄날처럼 화창하고 평안한 이들은 잘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대개는 삶이 쓸쓸하고 곤고하여 견딜 수 없는 이들이 읽습니다. 욥기를 읽다보면 연민과 비슷한 감정이 일고, 어느 사이에 자기 삶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지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겠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연민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연민은 파괴적 또는 고통스러운 악이 어떤 사람에게 부당하게 발생하는 것을 볼 때, 또한 그런 일이 우리와 우리의 친구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으며 또 일어날지도 모를 때 생기는 괴로운 감정이라 정의할 수 있다.”

지금 더할나위없이 행복한 사람, 혹은 모든 희망을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에게는 연민의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 법입니다. 그 이야기가 핍진성이 없어도 연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일이 내게도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비로소 연민의 감정이 일고 그것은 카타르시스로 이어집니다. 카타르시스는 본래 약제를 통해 인체 속에 생긴 불순물을 씻어내는 것을 일컫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그것이 확장되어 부정한 것을 깨끗하게 씻는다는 의미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욥기를 그런 관점에서 읽을 수는 없을까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 기술된 욥기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세계가 어느 날 갑자기 낯설게 변할 때 우리는 당황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옛 질서가 무너져 내릴 때, 든든하다고 생각했던 세계가 흔들릴 때, 상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을 때,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욥기 독자들의 상황이 그러했습니다. 착하게 살면 복을 받고 악하게 살면 벌을 받는다는 단순논리로는 해명되지 않는 세상이 그들 앞에 있었던 것입니다. 욥기는 율법의 가르침이 부질없어 보이는 현실, 성전 체제가 더 이상 사람들을 위로하지 못하는 현실, 인습적인 지혜로는 도저히 풀리지 않는 생의 현실 앞에서 망연자실한 사람들을 바라보며 기술된 것입니다.

아카드어로 ‘욥’이라는 말은 ‘하늘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뜻이랍니다. 말의 경제성이 대단하지요? 욥의 존재 자체가 질문입니다. 숨어계신 하나님을 찾는 애타는 외침인 셈이지요. 이쯤되면 이름이 운명이라는 말을 함부로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람의 몸이 뒤집힌 물음표 같지 않습니까? 시인 김승희 님의 시 한 대목을 들어보세요.

“나는 하나의 희미한 물음표,/ 어느 하늘, 덧없는 공책 위에,/ 신이 쓰다버린 모호한 문장처럼/ 영원히 결론에 이르지/ 못하는 나는 하나의 병든 물음표.”

<신의 연습장 위에>라는 시의 일부인데요, 가슴이 저릿해지지 않나요? 자기를 ‘신이 쓰다버린 모호한 문장’ 같다고 느끼는 이 도저한 비애. 욥을 생각할 때마다 이 시가 떠오르는 것은 유한한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연민 때문일 겁니다.

욥기의 상당 부분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마찬가지로 전통적 지혜에 끝없이 의문부호를 붙이는 욥과 그것을 어떻게든 지켜내려는 세 친구 사이의 갈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전복적 지혜와 인습적 지혜의 충돌이라고 할까요? 욥은 자기 경험세계의 파탄을 통해 하나님의 정의가 어디에 있는지 묻고, 친구들은 욥에게 불경한 언설을 그치라고 윽박지르는 식입니다. 나중에는 엘리후라는 젊은이까지 등장해서 논쟁이 좀 복잡해집니다.

본문의 세계로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 좀 짚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욥기의 기술체(記述體, style)는 두 가지입니다. 굳이 구분하자면 1~2장과 42:7 이하는 산문체 서술입니다. 하지만 그 외의 부분은 운문체 서술입니다. 그러니까 욥기는 산문체 부분이 운문체 부분을 에워싼 액자 구조라고 보면 됩니다. 사람들에게 익숙한 것은 대체로 산문체 부분입니다. 그 부분은 욥이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지, 그가 갑자기 어떤 불행에 빠지게 되었는지, 고난 속에서도 그가 얼마나 신실한 믿음을 보였는지, 그래서 마침내 얼마나 큰 복을 누리게 되었는지를 전해줍니다. 구성도 단순하고 메시지도 확실합니다.

그에 비하면 운문체 부분(3장부터 42:6까지)은 매우 복잡합니다. 그렇게도 경건했던 욥이 하나님께 마구 대듭니다. 그리고 친구들끼리 우정에 금이 갈 정도로 치열하게 논쟁을 벌입니다. 겸손하던 욥의 언어도 격정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토론이 어떤 결론을 향해 나아가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인내심이 좀 부족한 사람들은 중간 부분을 과감하게 건너뛰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됩니다. 욥기의 핵심은 바로 운문체 부분에 있기 때문입니다. 운문체 부분은 욥과 그의 세 친구인 엘리바스, 빌닷, 소발의 논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3의 비대칭적 논쟁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비슷비슷한 말들이 반복되는 것 같아 때로는 읽기 지겹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운문체 부분에는 욥의 긴 탄식과 엘리후의 일방적인 연설, 그리고 마침내 나타나신 하나님의 까칠한 질문도 나옵니다. 미로처럼 복잡한 논쟁과 이어지는 말들에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천천히 읽어나가다 보면 욥과 친구들을 당혹케 했던 현실이 바로 우리의 현실임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손쉬운 해답을 구하지만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가라지 비유 생각나세요? 어떤 사람이 밭에다 좋은 씨를 뿌렸습니다. 사람들이 잘 때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습니다. 싹이 나고 마침내 결실할 때가 되었는데 가라지도 보이는 겁니다. 당황한 종들이 주인에게 달려가서 말합니다.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마 13:27). 원수의 소행이라는 말을 듣고 종들은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하고 묻습니다. 하지만 주인은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고 말합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했던 겁니다.

세상은 선과 악으로 딱 갈리지 않습니다. 선과 악이 만수산 드렁칡처럼 얽혀 있습니다. 전적으로 선한 사람도 없고, 전적으로 악한 사람도 없습니다. 착종(錯綜)되었다는 말은 바로 이런 상황을 이르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웃을 함부로 ‘심판하지 말라’ 혹은 ‘정죄하지 말라’ 하신 것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욥기 읽기에 앞서 염두에 둘 것
욥기를 읽어나갈 때 몇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편에 서서 사태를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의 대변자를 자임합니다. 욥은 땅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시련이 부조리하다는 것입니다. 욥이 지금껏 기대왔던 신학으로는 그 고통의 의미를 찾을 수 없기에 그는 거듭거듭 하나님께 의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악한 자들이 벌을 받고, 선한 이들이 상을 받는 것이 그가 의지해 온 신학입니다. 그런데 그 신학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된 겁니다. 욥을 힘들게 했던 것은, 이미 작동하지 않는 신학을 가지고 친구들이 끊임없이 그를 꾸짖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불행을 겪는 이들을 보면 위로한답시고 하늘의 관점에서 말을 할 때가 없지 않습니다. 스스로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 가운데 하나는 누군가의 불행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 그것이지요. 말을 해야 할 때와 입을 다물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입을 다물어야 할 때 발설되는 말은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의 상처를 더 크게 만들기도 합니다.

둘째, 욥기를 읽으면서 사람들이 당혹감을 느끼는 까닭이 무엇인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욥의 말보다 친구들의 말이 더 은혜롭게 들리기 때문일 겁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았나요? 욥의 말은 종작없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는데 비해 친구들의 말은 논리정연합니다. 물론 나중에 가면 그들의 말도 다소 흔들리지만 말입니다. 문제는 욥이 주인공이니까 그의 편을 들어야 할 것 같은데 친구들의 말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는 사실입니다. 당황스럽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우리가 그만큼 전통적인 지혜 혹은 인습적인 지혜에 익숙하다는 말일 겁니다. 하나님께 마구 대드는 욥을 보면 불경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욥기의 새로움은 여기에 있습니다. 욥은 그런 지혜가 작동되지 않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욥의 말이라고 다 맞는 것도 아니고, 친구들의 말이라고 다 그른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옳고 그름의 척도로 그들의 논쟁에 접근하면 욥기의 본질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발화된 말의 내용에 집중해야 할 때도 있지만, 그 말이 발설되는 상황이나 심리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도 있는 법입니다. 언어는 소통의 도구이지만 때로는 소통을 가로막는 벽이 될 때도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막스 피카르트는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않는 말은 소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셋째, 욥기의 주제를 무고한 자의 고난과 하나님의 정의로우심이라고 못박는 것은 다의적(多義的)으로 읽을 수 있는 텍스트에 굴레를 씌우는 일입니다. 어쩌면 이 책은 독자들에게 정답 없는 삶을 살아갈 용기가 있느냐고 묻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인생이란 시간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에 응답하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두에게 혹은 모든 경우에 들어맞는 답은 없습니다. 인간을 지칭하기 위해 철학자들이 ‘실존’ 혹은 ‘현존재’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도 어쩌면 물음 앞에 서 있는 인간의 처지를 드러내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연의 세계’가 속절없이 무너질 때 세상은 불안정해집니다. 실존은 크게 흔들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욥에게 닥쳐온 고난의 이유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도 살아갈 이유를 찾는 것이 더 어려운 일입니다.

넷째, 욥을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과거의 인물로 규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형태와 정도는 다르지만 지금 우리 시대에도 욥은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경제질서는 어떤 의미에서 ‘욥들’을 양산하는 체제입니다. 욥기를 읽어가는 동안 신문을 옆에 두고 함께 읽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 사회의 그늘진 곳에 있는 이들의 목소리는 중심부에 있는 이들의 귀에까지 미치지 못합니다. 욥기를 읽어가면서 우리 곁에 있는 ‘욥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성경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진짜 메시지를 듣지 못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제 오늘의 이야기를 마무리할 시간이 되었네요. 욥기를 읽는다는 것은 세상에 던져진 유한한 존재로서의 우리 삶의 실상과 만나는 것입니다. 삶은 무겁기도 하고 가볍기도 합니다. 이어령 선생님은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력을 발견했던 뉴턴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자기를 놀라게 하는 것은 다른 데 있다고 말합니다. 대체 어떤 힘이 나무를 위로 밀어올리고 열매를 맺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는 시몬느 베이유의 ‘중력과 은총’을 가지고 그 신비를 설명합니다. 중력은 아래로 잡아당기는 힘이고, 은총은 위로 끌어올리는 힘입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힘이 함께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욥기를 읽어가면서 이 두 힘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유익할 것 같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김기석
감리교신학대학교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청파교회 전도사, 이화여고 교목, 청파교회 부목사를 거쳐 1997년부터 청파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흔들리며 걷는 길》 《삶이 메시지다》 《오래된 새 길》 《아슬아슬한 희망》 《기자와 목사, 두 바보 이야기》 《일상 순례자》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아씨시의 프란체스코》 《예수 새로 보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