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탐욕의 다수결 사회, 대안으로서의 비움

[290호 커버스토리]

2014-12-30     이범진 기자

시인 박노해는 최근 지은 시 <살면서 들은 말 중>에서 가장 무서운 말, 가장 폭력적인 말, 가장 절망적인 말을 꼽았습니다.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변화에 맞춰 다 바꾸라” “부자 되세요”라는 말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시대를 ‘탐욕의 다수결인 민주화 시대’라 했는데요. 그야말로 개인은 물론 국가, 세계에 이르기까지 탐욕의 질서가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희망찬’ 새해가 밝았으나 우리를 맞이하는 사회는 희망을 말하기 쉽지 않아 보입니다. 많이 벌고 많이 쓰는 것을 미덕이라 여기는 사회, 절약과 절제를 ‘찌질’하게 여기는 사회, 한마디로 욕망 부추기는 사회입니다. 박노해의 진단처럼 탐욕의 다수결이 만든 사회입니다. 모두 탐욕에 물들었습니다. 익히 확인해왔듯, 탐욕의 끝은 전쟁입니다. 정녕 돌이킬 수 없는 것일까요?

신영복 선생은 《강의》에서 “과잉 생산과 대량 소비로 귀착될 수밖에 없는 현대 자본주의의 거대한 낭비 구조를 조명하는 유력한 관점”으로 묵자(BC. 479~381)의 사상을 소개합니다. 특별히 ‘절용’(節用)의 관점으로 오늘을 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절용은 물건을 아껴 쓰는 검소함입니다. 절용은 밖에서 땅을 빼앗아 나라의 부(富)를 늘리는 대신 쓸데없는 비용을 줄여서 두 배로 늘리는 것입니다. 재물의 사용에 낭비가 없게 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묵자의 사과론(辭過論)입니다. 과소비를 없애는 것이지요. 반전론의 대안이라 할 만합니다.”(389쪽)

전쟁을 막는 방법으로 ‘절용’을 제시한 것이 눈에 띕니다. 쉬운 말로 바꾸면, 아나바다 운동으로 반전·평화의 세상을 이루자는 것이니 다소 허황합니다. 그러나 우리 개개인의 욕망이 모여 오늘의 탐욕 사회를 만든 것이니, 역으로 개인의 욕망부터 끊어내고 비우는 게 대안이자 순리이겠지요.

인간은 욕망에 따라 움직입니다. 작은 유혹에 걸려 넘어지는 것도 다 욕망 탓입니다. 만찬이 차려진 뷔페에서 우리의 위를 가득 채우기 때문에, 세계의 절반 이상이 굶어 죽습니다. 이 명확한 인과관계를 인식하지 못하고 애써 무시하는 까닭에 탐욕의 세상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가 좋게 변하기는커녕 더 야만의 사회로, 전쟁으로 달음박질칩니다.

이에 맞서는 전략으로 비움을 제안합니다. 감히 ‘비움’이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탐욕의 다수결인 사회가 너무 강력하니까요. 그래도 많은 이들이 ‘비움’을 실천한다면, 지금의 세상이 더 나빠지지 않게, 더 야만의 세계로 치닫지 않게 버틸 수는 있지 않을까요? 세상을 변화시키겠다, 원대한 목표를 삼기엔 현실이 너무 암담합니다.

일단 2015년 한 해의 목표는 탐욕의 인력(引力)으로부터 버텨내는 것으로 삼으면 어떨까요? ‘비움’으로 말입니다.

책임기획_이범진 기자 poemgene@gosc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