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다니다 떠났다, 10년만에 돌아오다

[291호 커버스토리]

2015-01-28     이규혁 효창교회 청년

10년이 다 된 지금도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왜 18년 만에 돌아왔습니까? 하고. 그러면 나는 머뭇거린다. 왜냐하면, 그게 왜냐하면 말이지요….
- 공지영, 《수도원 기행》 중에서

20년 다닌 교회, 하루아침에 접다
2004년, 20년 동안 다닌 교회를 하루아침에 나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주변 사람들은 꽤나 거창한 이유로 교회를 나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단한 이유? 전혀 없었다. 그냥 ‘귀찮아서’였다!

교회에 다니려면 성가신 일이 많다. 우선 최소 일주일에 한 번은 예배에 참석해야 한다. 한 번이 뭐 그리 어렵겠느냐만, 그날이 일요일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일요일은 누구라도 쉬고 싶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이불에서 기어 나오기 싫고, 사람 만나는 것조차 때로 짜증스럽다. 한 주의 스트레스를 어떻게든 풀고 싶은 날이 바로 일요일, 교회에서 말하는 주일이다.

그런 날 이른 시각에 일어나 회사나 학교 가는 날보다 더 치장에 신경 써야 한다. 예배는 그야말로 고문이다. 영락없이 1시간은 꼼짝 않고 불편한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한다. 목사의 설교가 지루할 땐 쏟아지는 졸음과 사투를 벌여야 한다. 예배 이후 시간은 더 괴롭다. 처음 본 사람, 보기 싫은 사람, 관심 없는 사람에게 둘러싸여 밥을 먹는다. 어떤 진수성찬이 나오더라도 집에서 혼자 텔레비전 보며 끓여먹는 라면 맛을 따라올 수 없다. 서로 오가는 근황 이야기도 불편하다. 정말 관심이 있어서인지, 자신의 친절함을 과시하기 위함인지 별 쓸데없는 질문들을 한다. 마치 사춘기 소년이라도 된 것처럼 교회만 가면 사람이 싫고, 대화가 싫고, 만사가 싫어진다.

재밌는 일도 포기해야 한다. 무엇보다 토요일 늦게까지 뭘 할 수가 없다. 친구들과 밤새 술 마시며 수다 떠는 일은 언감생심이다. 다음 날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술 냄새 풀풀 풍기며 교회에 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PC방에서 밤새 게임을 하거나 때때로 내기 당구치기도 할 수 없다. 젊을 때 그렇게 다녀보라는 여행도 꿈같은 이야기다. 무박여행은 피곤하기만 하고 재미도 없다. 1박2일로 어디 가자니 예배 참석 안 하는 게 마음에 걸린다.

이런 것들이 주일 오전 예배를 참석하기 위해 포기해야 할 것들이다. 그런데 어떤 교회도 성도들에게 주일 오전 예배 참석만 해도 올바른 신앙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청년부 모임이나 예배는 대체로 토요일에 있다. 놀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면서 주일에 교회 가는 것도 서러운데, 토요일까지 반납하는 건 왠지 비극적이다. 여기에 주일학교 교사니, 성가대니, 주보 편집부니 뭐라도 봉사직 하나 맡으면 한 주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른다.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새벽기도까지 나가면 그야말로 노역 수준이다.

이런 게 귀찮아서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왜 교회 나오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창피하기도 하고 뭔가 폼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 가는 것보다 노는 게 더 좋고, 게을러서 교회에 나가기 싫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냥 토요일 일요일은 놀고 싶고 쉬고 싶었다. 늦잠 자고 싶었다. 혼자 방구석에 콕 박혀, 재미있는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고 싶었다. 집이 답답하면 친구들 만나서 게임 하거나 당구 치거나, 술을 마시고 싶었다. 여자친구와 데이트하거나 여행을 다니고 싶었다. 그런데 교회가 방해가 되었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지 않기로 했다.  

‘광야의 선지자(?)’가 되다
한국교회가 위기라는 말은 10년 전부터 귀 아프게 들었다. 교회에 다니지 않은 기간과 딱 맞물렸다. 교회에 안 나가는 이유를 미화하기 좋은 소재가 되었다. 한마디로 한국교회라는 곳이 ‘더러워서’ 못 나가겠다고 하면 끝이었다. 게으르고 노는 게 좋아서 안 나간다는 말보다는 더 품위 있고 그럴 듯했다.

유력한 목사의 섹스 스캔들이나 횡령, 배임 사건은 교회 욕을 실컷 할 수 있는 단골 메뉴였고, “가나안 성도”가 된 것을 정당화하는 핑계가 되었다. 교회당을 크게 건축하려다 부도난 이야기도 반가운 소식이었다.

“바벨탑 짓다 무너진 꼴이군.”

그러니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는 투로 말하면 그만이었다. 여기에 더해 인터넷이나 책 좀 뒤적거려, 신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척하면 더욱 그럴싸한 핑계를 댈 수 있었다.

“교회 가면 십일조, 건축헌금 등 각종 헌금을 내라는데, 그게 과연 성경적인가? 십일조라는 건 구약 시대 레위지파를 위한 사회 제도지, 오늘날 그게 어찌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라 할 수 있나?”
“성전을 건축하겠다며 헌금을 걷는데, 예수가 이 땅에 온 이후로 교회당을 성전이라고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목사가 무슨 주의 종인가, 그냥 하나의 직업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은가!”

교회 욕 해보겠다고 마음먹으니 한도 끝도 없었다. 어느덧 홀로 제도 교회의 부정을 고발하는 광야의 선지자가 되어 있었고, 자신을 근사하게 포장하는 자기기만에까지 이르렀다.

“난, 무교회주의자야. 우치무라 간조 알지?”

실은 우치무라 간조에 대해서 아는 거라고는 그가 일본인이라는 것뿐이었다.

10년만에 떠난 곳으로 돌아오다
21살에 교회를 떠났고, 31살에 교회로 돌아왔다. 10년 동안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았다. 누구 눈치 보지 않고 하겠다는 공부, 일, 유흥까지 다 해봤다. 하고 싶은 거 다 하며 살았는데 결국 돌아온 곳은 그렇게 싫던 교회였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보자. 한국교회가 그렇게 썩어 빠졌나? 한국교회가 소돔과 고모라를 방불케 할 정도의 심각한 위기 상황에 있나? 오히려 그나마 교회가 낫다고 말해주고 싶다. 한국교회가 전쟁터라면 세상은 생지옥이다!

요새 말 많은 영화 〈쿼바디스〉나 〈뉴스앤조이〉 기사들을 보면 한국교회가 꽤나 엄청난 위기 상황에 놓인 듯하다. 그런데 위기인가? 난 오히려 기회라는 생각이 든다. 큰 교회 목사들이 더 크게 사고 쳐 줬으면 좋겠다.

병은 감춰져 있으면 치료가 불가능하다. 영화나 기사들 때문에 교회를 떠날 필요가 없다.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몰상식한 사건들, 부정을 고발하는 〈쿼바디스〉, 〈뉴스앤조이〉 역시 기독교 언론이 아닌가. 불의만 판치는 한국교회가 아니고, 회개하라 외치는 자들도 우후죽순 일어나고 있으니 이것은 기회라 할 만하지 않나.

교회를 떠난 10년 전이나, 다시 돌아온 지금이나 교회는 그대로다. 변한 건 나 자신밖에 없다. 일요일 아침, 쉬는 날이라고 늦게까지 잠만 자서 좋은 꼴 못 봤다. 할 일 없이 황금 같은 시간만 허비했다. 토요일 밤 늦게까지 친구들과 술 못 마시고 못 놀면 어떤가. 살기 힘들다는 신세 한탄도 한두 번이지 매번 모여 그런 이야기 나누는 일도 참 못할 짓이다. 졸음과 싸워가며 목사의 설교 듣는 것도 고문이라고만 생각할 게 아니다. 정말 이상한 목사 아니고서야 인생에 도움 안 되는 소리 하지 않는다. 집에서 멍청하게 텔레비전 보고 있느니 귀찮아도 설교 듣는 게 낫다.

자기계발이나 여행 다닐 시간이 없어서 교회 다니기가 힘들다고도 한다. 나는 교회 안 다닌 지난 10년 보다, 교회로 간 최근 1년 동안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더 많은 곳으로 여행을 다녔다. 모르는 사람과 밥 먹고 어색하게 대화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다. 가식이어도 좋다. 언제 우리가 누군가의 삶에 대하여 10원만큼이라도 관심 가진 적이 있는가.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새벽기도에 꼬박꼬박 참석하는 것도 유익한 게 더 많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기도 하지만, 자신과의 대화이기도 하다. 정기적으로 꾸준하게 자신과 대면할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되는 것이다. 살면서 교회 말고 어디서 그런 시간을 가져보겠나.

지금 다니는 교회가 이상하고, 목사가 이상하면 자신에게 맞는 교회를 찾으면 된다. 교회 수가 중국음식점보다 많다는데, 자신에게 맞는 교회 하나쯤 없을 리 없다. 정 없다면 마음 맞는 사람끼리 교회 공동체 만들면 된다. 어려운 일 아니다. 정작 어려운 건 마음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는 기만
“난, 나의 행복을 위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뿐이에요”라고 많은 사람이 말한다. 맞는 말이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하고 싶은’ 일들 중 사람들은 ‘자신에게 편한’ 일만 교묘하게 골라낸다는 점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편한 것, 익숙한 것만 ‘진짜 내가 원하는 일’이라 착각하며 자기기만에 빠진다. 내가 10년 만에 교회로 돌아온 건 자기기만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 정체성은 있지만 교회 안 나가는 사람을 놓고 가나안 성도라 하는데 내가 꼭 그 짝이었다. 신앙이 흔들린 적은 없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주님이고,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위해’ 신앙공동체 또한 꼭 필요하다는 생각에 변함없었다. 진심으로 바라고 원하는 일이었지만,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 내게 편하고 익숙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실천하는 게 싫어서 암세포 떼어내듯 내 안에서 교회를 도려냈다. 그리고 스스로 합리화하기 위해 그럴듯한 핑계거리를 찾아 갖다 붙였다.

“한국교회는 썩었어.”
“한국교회에는 하나님이 없어.”

십팔번처럼 말하고 다녔다. 그런데 나는 얼마나 깨끗하게 살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으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었다. 자신을 근사하게 포장하기 위해 다른 이의 신앙공동체를 부당하게 낙인찍고 평가한 것만 봐도 참 허접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와 같은 이유로 떠난 이들에게
교회에 돌아 온 지 이제 1년이 조금 넘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교회에 실망하거나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떠나는 사람을 여럿 보았다. 이유는 각양각색이었다. 그들 중 한 명은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위로 받고 싶어서 교회를 왔는데, 교회가 그 역할을 못해주니 떠난다고 했다. 할 말이 없었다. 교회가 어때야 하는지 나 역시 모르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교회가 사람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생경한 말처럼 들렸다.

세상과 교회는 이분법으로 나눌 수 없다.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사람들이 곧 세상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곧 세상인데, 세상에 존재하는 상처와 아픔이 교회라고 없을 수 있나. 우리 중 누구도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 다만 마음이 그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뿐이다.

가나안 성도들이 무슨 마음으로 교회를 떠났는지 다 알 수는 없다. 이유야 많을 거다. 다만, 나와 같은 이유로 교회를 떠난 사람들에게는 해주고픈 말이 있다. ‘하고 싶은 일’은 분명한데도 편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 일을 외면하거나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으면 좋겠다고. 교회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마음 깊이 느껴진다면, 귀찮고 성가시더라도 자신이 속할 공동체를 찾아야 한다. “한국교회가 썩었다”라는 명제를 놓고 “그래서 교회에 가지 않는다”로 귀결할 만한 논리적 근거는 전혀 없다. 안 썩은 교회 엄청 많다.

언젠가 한 청년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 친구는 예전의 나처럼 교회 나오기 싫은 이유가 분명했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와 이야기하면서 ‘이 친구 참 빨리 늙어버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30대 초반에 벌써 달관한 느낌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자신감과 확신이 나오는지 궁금했다. 꽤 진지한 표정으로 “교회나 인간에게는 희망이 없다” 말하는 그에게 물었다. 도대체 너 자신은 얼마나 믿을 만한 사람이기에 자신의 판단을 그렇게 확신하느냐고. 그는 ‘빠름’과 ‘성장’만을 추구하는 세상과 한국교회가 결탁했다고 말했다. 자신은 ‘느림’과 ‘배려’의 미학을 쫓는다고 했다. 나는 다시 한 번 짜증이 났다. 사실 난 의심하고 있었다. 느림? 배려? 다 좋은 말인데, 과연 그러한 삶을 누가, 어디에서 실천하고 있단 말인가? 나로서는 교회보다 좋은 장소를 모른다. 그런데 그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다는 걸까? 

이규혁
학부 때 기독교학을 전공했다. 현재 서울 청파동에 있는 한독선연(한국독립교회ㆍ선교단체연합회) 소속 효창교회 청년이자 사무장 집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