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된다는 것

[293호 독서선집]

2015-03-30     조희선 책 읽는 전임 주부

남편과 함께 동남아의 섬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숙소가 시내와 멀리 떨어진 바닷가에 자리를 잡았는데, 오락시설이라곤 수영장뿐인 호텔이었다. 그래서인지 노부부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그들은 수영보다는 책을 읽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토록 아름다운 바닷가에 사람이 없어 조용한 것만큼이나 인상적인 광경이었다.
 
말수는 적고 미소는 온화한 그들을 보며 내 나라 노인들에게서 느끼지 못했던 편안함을 느낀 것은 순전히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들에겐 육체적인 나이듦과는 다른 무엇이 있었던 걸까? 자신의 경험과 생각에 갇히지 않고 타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려는 여유와 겸손이 만들어내는 모습이었을까?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그들을 보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나이가 들면 어른이 되는가?
‘젊음은 인생의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라고 한 사무엘 엘먼의 시 <젊음>을 떠올린다. “젊음은 인생의 한 시기가 아니요, 마음의 상태이다/ 장미빛 볼과 붉은 입술, 유연한 무릎이 아니라/ 의지와 풍부한 상상력과 활기찬 감정에 달려 있다/ 젊음이란 기질이 소심하기보다는 용기에 넘치고/ 수월함을 좋아하기보다는 모험을 좇는 것이고/ 이는 스무 살 청년에게도, 예순 노인에게도 있다/ 단지 나이를 먹는다고 늙는 것은 아니다/ 이상을 버릴 때 우리는 늙는다./ 그대와 나의 가슴 한가운데에는 무선국이 있다./ 그것이 사람들로부터 또는 하늘로부터 아름다움과 희망과 활기/ 용기와 힘의 메시지를 수신하는 한, 그대는 영원히 젊으리라”

어른이 된다는 것도 단지 나이든 어느 시기를 넘어 마음의 어떤 상태에 이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비록 신체의 활력이 약해져 여전히 감정까지 활기차지는 못해도, 이상을 품고 모순된 현실에 저항하며 모험을 좇는 젊음들과의 사이에 무선국을 두고 그들의 아름다움을, 용기와 힘을 응원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에 이르는 것 말이다. 

《잉여의 시선으로 본 인문학의 공공성》은 인간에게 ‘잉여’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나이 많은 이들이 살았던 세상과는 다른, ‘너무나도’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의 고통을 안타까워하며 그들의 저항들을 적극적으로 응원하는 (나이와는 무관한) ‘어른’들의 글모음이다. 

많이 기다리고 기대하며 응원해야 하는 이름, 젊음! 이를 재촉하고 서열화하고 일찌감치 분류해버리는 이 사악한 제도를 완전히 뒤엎는 힘은 가지지 못했을지언정, 적어도 어른으로서 나는 바깥으로 분류되고 잉여로 분류된 아이들을 자꾸자꾸 ‘주워오는’ 어른일 수는 있지 않을까? 난 너희를 사랑한다고. 너희가 가진 수백의, 수만의 잠재성과 다양성을 기대한다고. 그것이 이 세상을 새롭게, 아름답게, 희망스럽게 만들거라고. 그래서 너희는 여전히 필요한 존재라고. 개인으로든 집단으로든 어른 세대가 자신들의 ‘잉여상태’를 자조하는 청(소)년 세대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이 그거 아닐까?(백소영)

젊음과 사악한 제도, 그 안에서 어른 됨에 대한 백소영의 응원은 얼마나 적절한지.

 

어른 됨에 눈 뜬다는 것
내가 어른 됨에 눈을 뜬 것은 딸아이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세 살 때 딸은, 잠시 집을 비웠다가 돌아와 활짝 열린 아파트 현관문을 보고 놀란 엄마를 놀이터 그네에 걸터앉아 넉넉한 미소로 반겨주던 아이였다. 네 살 때는, 병원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까꿍’ 놀이를 하다가 삽시간에 사라진 아이를 혹 누가 데려갔나 싶어 무엇부터 할지 몰라 하며 이 골목 저 골목 돌아다니다 아파트 5층으로 뛰어 올라갔을 때, 엄마가 집에 와서 자기를 기다릴 거라고 생각했다며 아파트 현관 문 앞에 앉아 엄마를 기다려주던 침착한 아이였다. 그 딸은 어려서부터 책을 읽어달라 조르더니, 길을 건너면서도 책을 읽었다. 그런 딸아이를 나는 참 대견해했다. 어떻게 자랄까? 어떤 사람이 될까? 기대감으로 가득 했다. 

그런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학교의 슬픔이 시작되었다. 학교는 매일 숙제를 내주었고, 줄을 세워 등수를 매기는 건 아니었지만 정기적으로 시험을 보게 했다. 개포동이라는 신생 동네에 밀집한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 한 반 학생 수가 80명이 넘어 책상 사이로 선생님이 쉽게 지나다닐 수 없었던 조밀한 교실. 3월생에 비해 지적 성장이 늦다면 늦을 수 있는 11월생. 그리고 키가 큰 딸은 교실 맨 뒷줄에 앉아야만 해서였을까? 시험문제가 요구하는 답을 충분히 써내지 못했다. 

대견해 보이던 딸은 어느새 내게 열등생으로 비치기 시작했고, 곧 나는 기대를 거두고 의심의 눈으로 딸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저마다 타고난 아름다움은 아랑곳 않고 점수로 아이를 재단하는 슬픈 교육이 나와 대부분의 부모들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을  인식한 건 딸이 중학교 2학년, 그러니까 청소년 때였다. 내 딸과 또래 청소년들을 응원할 마음으로 신학 공부를 시작했고, 교회와 학교에서 청(소)년들을 만나면서 나는 그들로부터 아름다움과 희망 용기와 힘뿐 아니라 사회가 변하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을 절망을 함께 보았다.

   
정강현 지음 / 푸른봄 펴냄

‘많은 말’로 가르치는 게 어른인가?
재작년 여전히 젊은 쉰 살의 동료가 갑작스럽게 자살을 택했다. 병든 사회, 사악한 제도와 무관하지 않은 죽음이었다. 정강현의 소설집 《말할 수 없는 안녕》에는 수많은 자살자를 지켜본, 자살대교라는 오명을 쓴 ‘마포대교’가 1인칭 화자가 되어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자살은 어느 대기업이 돈을 푼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사회가 병들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이 사회를 뜯어고치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벼랑 끝에 서본 적 없는 사람들은 가난해서, 병들어서 외로워서 강물로 뛰어든 사람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당신들의 의지가 약해서라고. 가진 것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고. ‘자살’을 뒤집어 읽으면 ‘살자’가 된다고. 그러니까 당신도 어떻게든 살아내라고. 사는 데 아무런 아쉬움이 없는 사람들은 도무지 살 방법이 없는 사람들을 향해 증권시황 읽듯 무심한 조언을 쏟아냈다.

많은 말로 가르치기를 즐기는 나이 많은 이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얼마나 힘겨운지…. 
나이 드는 것말고 어른이 된다는 것을 고민한다.    

 

조희선
결혼하여 아이들을 키우다 늦깍이로 신학을 한 뒤 한동안 청년 사역에 몸담았다. 지금은 은퇴한 남편과 함께 살림하고 손자 보는 재미로 살고 있는 ‘전임(full-time) 주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