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을 거부한 성직자

[294호 커버스토리] 영화로 만나는 ‘순교자’ 로메로

2015-04-27     옥명호 편집장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지 말라?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습니다.”

작년 8월 프란치스코 교종이 한국 방문 과정에서 남긴 유명한 말이다. 교종이 방한 일정을 모두 마치고 돌아가는 전세기 안에서 가진 기자회견 때였다. 방한 기간 동안 세월호 유가족들을 여러 차례 만났는데 이로 인해 정치적 논란이 있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리본을 떼고) 중립적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 있었지만,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습니다.”

실제로 교종은 방한 당시 세월호 유가족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노란 추모리본을 건네받은 뒤 이를 왼쪽 가슴에 계속 단 채로 연이은 미사에 참여했다. 그런데 추모리본을 달고 반나절쯤 지나자, 어떤 사람이 교종에게 다가와 정치적 중립을 지키기 위해 리본을 떼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말했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4박5일의 방한 기간뿐 아니라 귀국행 기내에서도 왼쪽 가슴에 추모리본을 계속 달고 있었다 한다.

프란치스코 교종이 남긴 말은 인간의 고통에 대해 연민과 긍휼과 연대감을 품기보다는 ‘정치적 포지션’을 먼저 따지는 냉담함과 무감정에 대한 질타로 다가왔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이들을 두고 ‘정치적 중립’을 부르대는 언사야말로 실로 정치적이지 않은가.

오래전 꽤 인기를 끈 사극의 주인공이 던진 대사 한마디가 오랫동안 회자된 적이 있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상대방의 아픔을 같이 아파하는 이 말이 굳이 연모의 대상에게만 해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도 바울의 권면도 결국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롬 12:15)

예수께서는 이 말을 몸소 보여주시지 않았던가.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미 장례가 다 끝난 3일 후에야 찾아간 예수를 만나자,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도 울고 그녀를 따라간 사람들까지 모두 비통한 눈물을 쏟았다. 그들을 바라보시며 예수께서도 마음이 비통하여 괴로워하셨고 기어이 눈물을 쏟으셨다.(요 11:33, 35)

홀로코스트 문학의 대표작이라 불리는 《나이트》(예담)의 작가 엘리 위젤이 쓴 희곡 《샴고로드의 재판》(포이에마)은 ‘신에 대한 모의재판’을 극중극 형식으로 다룬 작품이다. 집단학살과 성폭력이 휩쓸고 간 샴고로드라는 마을의 어느 여관을 배경으로, 마을에서 일어난 집단학살과 폭력을 하나님은 왜 방관하셨는지, 이 비극에 대해 하나님은 유죄인지 무죄인지를 모의재판에서 다툰다. 이 희곡에 인상적인 등장인물이 나오는데, 그는 모의법정에서 하나님의 변호인을 자청하고 나선 나그네 샘이다. 그의 변호는 상당히 차분한 데다 꽤 논리적으로 들려서 반박하기가 쉽지 않게 느껴진다.

“신은 의로우시며, 그분의 길은 공정”하다고 말하는 샘은, 정작 마을 주민들이 당한 처참한 고통에 대해서는 지극히 무심하게 무감각한 태도를 보인다. 그런 그를 향해 여관의 심부름꾼으로 일하는 마리아는 단호하게 외친다.

“그는 심장도, 영혼도, 감정도 없어요! 그는 사탄이에요, 정말이라고요!”

신의 변호인인 나그네 샘은 시종일관 차분하고 합리적으로 신을 옹호하는 논지를 펴면서 마치 ‘합리주의 신학자’다운 면모마저 내보인다. 그러나 마리아가 말한 바에 따르면, “비애감이 없는 것, 감정과 열정과 공감과 연민이 없는 것”이야말로 ‘악’이다.(《샴고로드의 재판》, 202쪽)

극의 마지막에 가서 샘의 숨겨진 정체가 드러나는 장면에서 그의 “합리적인 신학”에 속아넘어간 등장인물들(그리고 무대 밖 독자들)은 모두 경악한다. 인간의 고통에 대한 비애감, 공감, 연민이 없는 것이야말로 다름 아닌 사탄의 실체였던 것이다. 

‘구름 속’ 로메로, 땅으로 내려오다
영화 속에서 만난 오스카 로메로는 “심장도, 영혼도, 감정도 없”는 ‘합리적인 신학자’가 아니었다. 영화 <로메로>를 처음 본 건, 20여 년 전이었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비디오대여점에서 빌려본 <로메로>는, 영화가 끝난 뒤에도 나를 충격과 전율 가운데 말없이 한참을 서성이게 했었다. 20여 년이 지나 DVD로 다시 보았을 때도 여전히 강렬한 호소로 다가왔다.

로메로는 본래 지극히 보수적이고 전통주의적인 신학자요 성직자였다. 영화 초반부에 산살바도르의 고위 성직자들이 로메로를 가리켜 수군대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로메로가 본디 어떤 성향의 성직자인지를 잘 보여준다. 로메로 주교를 가리켜 “살바도르가 불타도 태연할 사람”이라며 대화를 주고받는다.

“저분은 타협을 잘하는 편이라 풍파는 없겠지요?”
“책벌레지요. 난리가 나도 모를 겁니다.”

그의 전기 《오스카 로메로》(분도출판사)는 “로마식 교육을 받은 이 보수적인 성직자”인 “로메로가 대주교가 되자 권력자들은 마음을 놓았다”며, “살바도르의 주교들 역시 두 다리 쭉 뻗고 잠잘 수 있게 되었다고 좋아들 했다”라고 썼다. 그리고 “그의 개인 영성은 다소 보수적인 전통, 보수적인 교육이나 언행 쪽으로 더 기울어져 있었다”고 평한다.

영화 속 대주교 착좌식 강론에서 로메로가 한 말 또한 그의 성향을 단적으로 잘 말해준다.

“우리 교회는 전통적인 방식의 중립을 지키면서 정의를 추구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보수적 전통주의자 로메로 곁에는 고통받는 빈민들의 현실에 뛰어든 진보적인 그란데 신부가 있었다. 로메로는 친구가 너무 급진적인 건 아닌지 염려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진정한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고 진심으로 존중한다. 영화의 들머리에는 두 사람이 산살바도르 시가지를 거닐면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회 소속의 친구 그란데 신부가 말한다.

“예수님은 구름 속에 계시지 않아요. 그분은 여기 이 땅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면서요.”

예수가 세상 속에 우리와 함께 계셨듯이, 교회 또한 세상 속에 있지 세상과 분리된 ‘구름 속’에 있지 않다. 예수의 방식은 세상의 역사와 현실 한복판으로 뛰어들어(incarnate) 함께하는 데 있었지 ‘구름 위’에서 도가의 신선처럼 저 천상의 일과 천상의 이야기만 하는 데 있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처럼 교회가 이 땅, 세상의 역사와 현실을 이야기하면 ‘정치 이야기 하지 말라’고, ‘중립을 지키라’고 부르대는 건 왜일까.

구름 위에 있는 양 세상과 분리된 ‘거룩한’ 이야기만 하면 그보다 안전한 상황은 없으리라. 그러나 예수께서 안전을 추구하셨다면, 저 천상에만 머물러 계셨어야 했다. 이 고통과 눈물, 슬픔과 애통한 일이 비일비재한 세상 속으로는 결코 임하시지 말았어야 했다.

영화에서 군부의 고위급 장성이 구름 속에서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하면 안전할 거라고 한 말은 틀리지 않았다. ‘교회 안’에만 머물러 “(권력층과 지주들을 향한) 복음 전파의 사명”에만 충실했다면 로메로는 주교직을 더 오래 누리면서 비명에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교회 안과 밖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the voiceless) 고통당하는 빈민들을의 목소리가 되어 폭력과 억압, 살인을 일삼는 악한 권력층을 향해 담대하게 외치기 시작한다.

중립을 거부하고, 현실에 ‘개입’하다
비교적 담담하게 흘러가던 영화는 그란데 신부의 암살 사건 이후 긴박하게 전개되기 시작한다. 대주교 착좌식이 끝나고 축하연이 한창이던 밤, 그란데 신부가 로메로를 찾아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정말 뭘 모르시는군요? 농지개혁이나 임금, 인권에 대해 (자신이) 생각한 것을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산주의자로 몰립니다. … 공포 속에 살아요. 데려가서 고문하고 죽이고… 안 믿으시지요?”

로메로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다. 믿지 않았기 때문일 게다. 그란데 신부의 말이 진실이었음은 얼마 안 있어 그의 잔인한 죽음으로 드러난다.

어느 날 자신의 사목 현장으로 차를 몰고가던 그란데 신부는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총격을 당해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다. 그때 말없이 그의 주검을 바라보던 로메로의 내면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그날 이후 로메로는 그란데가 말하던 그 현실에 눈뜨기 시작하고, 그란데가 항상 친구가 되어주던 엘살바도르의 군부 정권과 지주들에게 억압받는 사람들,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로 조금씩 돌아서기 시작한다.

당시 엘살바도르의 가톨릭 교회가 어떠했는지는 어느 대지주가 로메로에게 한 말에서 잘 드러난다.

“교회는 창녀요. 가장 높은 고객에게 아부나 하는.”

그런데 이제 로메로는 그 ‘가장 높은 고객’과 그들의 기득권을 충직하게 보존하면서 그들과 공생하는 ‘군사 정권’에 대한 아부를 끝내고, 그들에게서 돌아서기 시작한다. 그것은 가톨릭 교회 내의 반발과 자신의 신변에 대한 위험을 동시에 불러오는 일이었다.

그 뒤 그가 목격하는 엘살바도르의 현실은 참혹하고 끔찍한 것이었다. 보안대에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는 현실, 참혹하게 죽임을 당해 쓰레기 하치장에 나뒹구는 주검들, 아이들이 학교를 오가는 백주대낮에 길 한복판에 벌거벗긴 채 죽임당해 버려진 시신…. 무고한 시민뿐 아니라 그란데 신부처럼 가톨릭교회의 사제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참담한 현실에 눈뜨기 시작한 로메로가 행동하기 시작한다. 대통령 당선자에게 항의하기 위해 수차례 찾아간 것이다. 로메로의 항의 방문에도 당선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히 말한다.

“문제는 어디에나 있지요. 교회가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됩니다. 정치는 우리가 합니다.”
심지어 그는 죽임당한 그란데 신부를 모함하기까지 한다. “그는 공산주의자요.”

그 말에 로메로는 분노한다. “그건 거짓말이오!”

“그가 살해된 날도 그는 세례를 주고 오는 길이었소.”

그렇다. 그건 거짓말이었다. 권력을 잡은 자가 자신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이들을 ‘공산주의자’라고 모함하는 장면은 무척 낯익은 느낌이 들어 씁쓸함을 자아낸다. 40여 년 전 저 먼 라틴아메리카의 일이 아닌, 오늘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목격하는 장면 아닌가 해서다. 무상급식 중단에 반대하는 엄마들을 “종북”으로 모함하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지 않던가.
 

▲ 존 듀이건 감독의 <로메로>

<로메로> vs <본회퍼>
영화는 온건한 보수 성직자가 폭압적이고 불의한 사회 현실에 눈뜬 이후 교회의 오해와 권력과 기득권층의 끊임없는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어떻게 고통당하는 사람들 편에 서서 싸우는지 보여준다. 어떤 이들은 <로메로>가 당시 엘살바도르 군부를 지원하던 배후인 미국의 역할을 제대로 다루지 않아 아쉽다지만, 영화에서 로메로의 강론을 듣던 신자들이 기립박수를 하는 장면에서 관객은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지난주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이 나라에 더 이상 무기를 보내지 말라고. 우리 국민을 죽이는 데 쓰일 뿐입니다.”

영화에는 로메로가 미사 중 전하는 강론과 라디오 강연이 자주 등장한다.

“우리의 신앙은 현실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저는 빈부의 극심한 차이가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 믿습니다. 거기에서 모든 폭력이 생깁니다.”

그의 강론과 강연을 보면, 그가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에 대한 소망을 끝까지 놓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 에릭 틸 감독의 <본회퍼>

“교회는 자유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 안에서 실현되고(incarnate), 박해를 함께 견뎌야 합니다.”
“교회의 사명은 가난한 자들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함께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교회는 구원을 얻게 됩니다.”

로메로는 라디오 강론에서 “어떤 군인도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서 (권력자의) 명령을 따를 필요는 없다”고 말하지만, 그는 하나님보다 권력의 명령을 더 높게 여긴 암살자에게 미사 중 총격을 당해 최후를 맞는다.

“한 사람의 주교는 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의 교회는 결코 죽지 않을 것입니다.”

영화 <로메로>를 다시 본 지 얼마 되지 않아, 지난 4월 9일로 서거 70주기를 맞은 디트리히 본회퍼의 전기 영화 <본회퍼>(원제: Agent of Grace)를 보았다(두 편 모두 온라인서점에서 구입 가능하다). 안전을 염려하여 귀국을 만류하는 숱한 권면을 뿌리치고 결국 히틀러 치하의 조국 독일로 돌아간 본회퍼. 그가 반나치 저항운동(히틀러 암살 계획)에 나서는 과정과 약혼녀 마리아와의 만남, 게슈타포의 체포와 끈질긴 심문, 그리고 마침내 플로센뷔르크 교도소에서 처형당하기까지를 영화는 담담하게 그려낸다. 신 형상의 담지자인 인간의 생명을 경시하던 당대의 악한 존재에 결연히 맞서는 본회퍼의 모습에서 로메로가 겹쳐 보이는 건 우연이 아니다.

“악한 행위를 하는 것보다 악한 존재가 되는 것이 더 나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