뻬루에서 오스까 로메로를 묵상하다

[294호 커버스토리]

2015-04-27     이유진 뻬루 기독교 연구생
   
▲ 2013년 오스까 로메로 서거를 기념하는 행진 중 펄럭이는 깃발. (사진: CNS)

“까르멘, 너에겐 로메로 대주교가 어떤 분이니?”

아침마다 연구소 문을 열어주는 까르멘(Carmen Pinazo Suárez)에게 물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남미보다는 중미에서 더 추앙하는 것 같은데? 최근에는 로메로의 생가를 박물관으로 만들어 유품이라도 보고 그의 정신을 이어받으려는 엘쌀바도르 신자들의 움직임이 적극적이야.”

로메로에 대해 아는 뻬루 사람들은 생각보다 적었지만, 알고 있는 이들의 기억은 강렬했다. 결혼 후 남편과 함께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한 친구 엘비라(Alfonso Elvira Urrutia)는 가톨릭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인지 로메로를 매우 존경하고 있었고, 뻬루 감리교 감독인 하비에르(Javier Ochoa Jara) 목사도 로메로에 대해 “그리스도인의 모범이자 진실을 용감하게 전한 예언자”라고 추켜세웠다. 뻬루의 루터교 신학자인 빅또르(Víctor Mendosa)는 “신앙을 위해 싸운 예언자이자,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그리스도인에게 죽임당한 순교자”라고 표현했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임당한? 그렇다.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은 누구나 유아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기 때문에 로메로를 암살한 이도 ‘겉으로는’ 그리스도인이었을 테다.

가톨릭 신학자이자 역사학자인 호쎌루이스( José Luis Franco Meléndez)도 그를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아 가난하고 짓눌린 민중과 연대해 불의를 폭로하고 약자를 지키다 순교한 인물”로 소개했다. 엘쌀바도르 태생이지만 정치적 혼란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가 개신교 목사가 된 제씨(Jessi Alas)에게 로메로에 대해 물었더니, “아, 로메로 대주교님이요?” 하고 바로 존칭을 쓰며, 로메로는 엘쌀바도르에서 영웅과도 같은 인물이라며, 설교도 좋았고 좋은 일을 많이 했다고, 매우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 뻬루에서 나와 같이 살고 있는 현지인 가족은 4대째 개신교를 믿어오지만, 로메로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라틴아메리카 개신교에 깃든 해방신학
이 글을 쓰고 있는 곳은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이하 ‘해방신학’)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구스따보 구띠에레스(Gustavo Gutiérrez)가 1974년에 여러 지식인과 힘을 합해 문을 연 연구소(Instituto Bartolomé de las Casas)이다. 2013년, 자료를 찾기 위해 처음 이 연구소를 방문했을 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뻬루는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이지만 가톨릭 신자가 80% 이상이어서 개신교도로서 행동을 조심하게 되는데, 이들이 내가 개신교도인 걸 알면 혹시 불이익을 당할까 싶어 굳이 나의 종교를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내 말투에서 개신교 티가 느껴졌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종교가 무어냐고 물어 오기에 개신교라고 대답했다. 말해 놓고 나니 스스로 민망하여 “그러나 우리는 같은 하나님을 믿고 있으니까…”라며 지금 생각하면 하지 않아도 될 설명을 구구절절 한참이나 하였다.

뻬루는 다른 라틴아메리카보다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살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여느 라틴아메리카 나라보다 더 열려 있고 특유의 밝고 활발한 힘이 느껴지는 곳이다. 우리에겐 잘 알려진 옛 잉카제국의 매력적인 문화를 느낄 수 있는 뻬루에서 임무를 마치고 다른 나라로 떠났을 때, 마치 다시 돌아가야 할 고향처럼 느껴져 가슴앓이를 했을 정도로 내게는 특별한 곳이다. (나는 1998년부터 지금까지 멕시코, 코스타리카, 뻬루, 니까라과 등지에 머물며 절반이 넘는 기간을 중·단기 선교사로 지냈다. 뻬루 기독교 역사로 박사 논문을 쓰기 위해 2014년 말에 다시 뻬루를 찾아 5개월째 머물고 있다.)

이제는 내 삶의 일부분이 된 라틴아메리카. 인류의 해방운동사와 그리스도교 신학사에 한 획을 그은 ‘해방신학’이 태어난 이곳 라틴아메리카에 머물면서, 가톨릭에 대하여 소수자일 수밖에 없는 개신교가 이 거대한 해방신학의 흐름에 어떻게 반응하였을지 궁금하였고, 학위 논문의 주제로 삼아 씨름하는 와중에 가톨릭뿐 아니라 개신교에도 해방신학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흔히 해방신학을 가톨릭 고유의 유산으로 알고 있지만, 저명한 해방신학자 호쎄 미게스 보니노(José Míguez Bonino)나 루벰 알베스(Ruvem Alves)는 개신교도였다. 브라질 교포 1.5세이자 한인 해방신학자인 성정모가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하다고 꼽은 다섯 명의 해방신학자 중 이 두 사람이 꼽혔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해방신학은 결코 가톨릭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해방신학이 가톨릭의 전유물인 양 되어버린 까닭은 무엇일까? 해방신학이 모습을 드러내는 1960년대는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에서 정치적 갈등과 이로 인한 사회 변화가 빠르게 몰아치던 시기였는데 1959년 쿠바혁명의 성공, 뻬루 광산업의 국유화와 토지개혁 등으로 대규모의 극빈층(1970년대에는 뻬루 국민의 55%가 극빈층이었다)이 발생하던 때이기도 하다.

또한 가톨릭교회사에 일대 변혁을 가져온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있었고(1962~1965년), 더 놀랍게는 라틴아메리카의 주교들이 라틴아메리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꼴롬비아의 메데인(Medellín)에 모여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를 열기도 했다(1968년).

가톨릭교회의 갱신을 이끌어낸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다른 종교와의 공존을 천명하고 가톨릭의 정체성에 관한 탐구를 일으키면서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당대의 핵심 사회문제였던 ‘가난’의 문제에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가난하고 짓눌린 이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관한 질문이 터져 나왔고, 결국 가난한 이들을 우선 고려하고 이들과 연대하고 이들에게 헌신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삶이었고 그리스도인의 삶이어야 한다는 내용의 해방신학이 생겨난다. 특히 메데인 주교회의를 통해 ‘가난’의 문제를 공론화하였으며, 해방신학의 선구자 구띠에레스가 이 회의에서 해방신학의 기초 내용을 발표하면서 바티칸과 라틴아메리카 전역으로 퍼져 나갈 수 있었다.

1960~1970년대에는 가톨릭과 개신교가 이러한 신학 활동을 함께 펼치기도 하였지만, 오스까 로메로가 활동했던 1970~1980년대에는 테러리즘과 군사정권 및 보수 세력의 압력으로 쇠퇴의 길을 걷는다. 게다가 가톨릭과 달리 조직적 기반이 약했던 라틴아메리카 개신교는 비교적 활발했던 초기 해방신학마저 갈수록 힘을 잃어갔다.

실제로 라틴아메리카 개신교는 1980년대 들어서서야 빠른 성장세를 보이는데, 1960~70년대만 해도 전체 인구의 5%에도 미치지 못하는 소수 종교에 불과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뻬루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 개신교 안에서는 비록 소수이지만 지금도 해방신학과 그에 터한 신앙 활동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정되고 닫힌 신학으로서가 아니라 새롭게 펼쳐지는 시대 상황에 대한 창조적인 신학적 이해를 시도하며 그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담장 너머 오스까 로메로
라틴아메리카가 나에겐 제2의 고향과도 같지만, 그렇다고 내가 라틴아메리카 사람일 수는 없다. 나는 뻬루의 가톨릭교인도, 뻬루의 개신교인도 아닌 대한민국의 개신교 역사학도로서 ‘라틴아메리카의 로메로’를 이해하고 싶다. 그가 태어난 엘쌀바도르는 1841년 ‘엘쌀바도르 공화국’으로 독립한 후 수십 년간 지속된 군사 쿠데타와 독재정권, 농민 무장봉기, 총파업과 반독재투쟁으로 정치적 불안이 이어져 왔다. 1987년엔 엘쌀바도르 평화조성을 위한 UN 결의가 나오기도 하였고, 특히 로메로가 대주교로 활동하던 1970년대 후반에는 이념 갈등이 격화되고 정치적 암살이 빈발하는 등 사회 불안이 증대되었다.

뻬루의 루터교 신학자 빅또르의 설명에 따르면 “로메로는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바티칸으로부터 대주교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977년 자신의 친구, 예수회 사제 루띨리오(Rutilio Grande)가 강론에서 해방신학을 언급했다는 이유로 군부에 의해 처형당하는 것을 보면서, 로메로는 가난하고 짓눌린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한다. 정치적 폭력으로 자신이 사목하던 사람들이 희생되는 현실을 견딜 수 없었다. “◯◯씨가 실종됐으니 조사 좀 부탁한다”고 경찰에 연락했으나 “알겠다”라는 대답 외에는 아무런 조치도 없는 암울한 정치 상황을 겪으며, 로메로는 미사와 강론, 군중집회, 라디오를 통해 직접 정치적 폭력을 고발하는 등 더 강력한 행동에 나선다.

이러한 격변의 시기에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로메로 외에도 꼴롬비아의 사제 까밀로 또레스(Camilo Torres), 뻬루의 개신교 목사 호르헤( Jorge Párraga) 등 수많은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이 폭력에 희생당하는 민중 현실을 증언하면서 이들의 편에 서다가 희생당했다. 뻬루의 ‘진리와화해위원회’는 “희생된 이들은 생동하는 희망의 상징이요, 인간의 존엄성과 정의, 평화라는 가치를 업신여기는 어두운 세력에 대항하는 것을 상징한다”고 해석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개신교의 모습은 라틴아메리카 개신교와는 매우 다르다. 우리나라 가톨릭의 모습 또한 라틴아메리카 가톨릭과는 다르다. 아니, ‘틀리다’는 표현을 써야 할 것 같다. ‘다르다’고 해서 틀린 것이 아니라는 핑계의 담장을 쌓아올린 우리나라 개신교에 오스까 로메로 대주교의 삶을 전해주어야 한다. 가난하고 짓눌린 사람의 편이 되어주고, 그들을 위해 헌신하는 것은 우리와 ‘다른’ 모습이 아니라, ‘옳은’ 모습이다. ‘그른’ 길을 가는 한국의 개신교에 라틴아메리카 기독교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뻬루 해방신학의 유산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연구소와 더불어 뻬루 개신교 해방신학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또 다른 연구소(Asociación Educativa Teológica Evangélica)를 2013년에 이어 2014년에 다시 방문하면서 받은 강한 인상, 그동안 20여 개국을 다녔지만 그 어디서도 보거나 느끼지 못한 충격을 말해야겠다.

그곳에 계신 분은 연구소에 보유된 고문서들을 일일이 찾아주고, 나의 인터뷰에 친절하게 응해주고, 복사며 필요한 공간과 시간을 제공해주었다. 아울러 빡빡한 내 일정을 배려해 근무일도 아닌 토요일에 연구소의 도서관을 열어준 어느 목사님과 이들의 몸에 밴 낮은 자세, 상대를 존중하는 모습과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스스로를 내어주는 행동에서, 설교나 수업시간에 언급되던 ‘섬김’이란 단어를 그제야 목격한 듯했다. 이론으로는 배웠지만 실례를 보지 못해 실감하지 못했던 섬김의 가치에 대해 비로소 생각해보게 되었던 것이다. 단순한 도움과 섬김을 넘어서 자신의 신앙과 헌신, 투지와 고집이 묻어 있는 깊고 무거운 것이었다.

이러한 가치와 함께 이들의 ‘낮은 자세’ 또한 내 마음을 깨뜨렸다. ‘겸손’이라고 표현하기에도 부족한, 바닥까지 낮아져 있는 듯한 이들의 태도와 행동은 진지하면서도 밝고 분명했으니, 이런 영성이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탐구하고 싶을 정도였다. 누구를 평가할 위치도 아니고, 일부분이 전체인양 설명하는 것이 잘못인 줄 알면서도, 이들과의 만남이 신선한 충격을 주어 나의 내면을 채우는 힘이 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뻬루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 가톨릭 해방신학자들이 개신교 해방신학자들과 교류하고 있는 그 사이에서 나는 이쪽과 저쪽의 말을 들으며 오늘도 배움을 더한다. 과거 16세기 타락한 가톨릭에 저항해 개혁을 부르짖으며 나온 개신교의 초기 정신을 기억할 때, 어떻게 보면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스스로 변화를 시도한 가톨릭은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개신교보다 더 개혁적인 건 아닌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창조주께서 필요를 더해주신다고 하셨는데(마 6:33), 우리들의 필요와 위기에 막혀 내 안, 우리 가족, 우리 교회, 우리나라에 갇혀 하나님 나라를 보기 어렵다. 선지자 이사야가 그렇게 강조하던 공평과 정의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린 우리네 현실을 자각한다. 하나님 나라의 수많은 사역 가운데는 막힌 담을 허시고 둘을 하나 되게 하시는 역사(엡 2:14)가 있을진대, 우리는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는 물론이고 개신교 안에서도 수많은 교단과 교파로 갈라져 높디높은 담을 쌓아놓고 있다.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으시는 그리스도의 뜻(마 9:13)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신앙은 교회 건물, 예배와 모임을 벗어나지 못한 채 교회 건물 밖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역동에 동참하지 못하고 스스로 소외된다.

오스까 로메로의 삶과 영성,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이 과연 이 시대 우리나라 개신교에 던지는 메시지가 있다면 무엇일까? 이 거대한 질문에 짧은 지면으로 답할 수는 없을 테지만, 재정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가난하고 짓눌린 사람을 우선할 수 있다면, 불의한 사회에서 억압당하고 생명을 잃어가는 사람을 먼저 고려한다면, 제도적으로 묶여 희생당하는 개인을 구하기 위해 행동한다면, 사회적 약자와 의사결정 과정에서 소외되는 소수의 의견을 대변하고 그들과 연대한다면, 나와 다르다고 배척하고 제외하는 것이 아닌 열린 태도로 참여하게 한다면, 나도 살고 그도 살게 하는 상생의 길이 있지 않을까. 그리스도의 영, 진리의 영이 이끄는 역동에 참여하는 특권과 생명을 누리는 길이 있지 않을까. 오늘도 고민은 계속되고 배움은 이어진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
로메로가 살았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그 상황을 살피자면 로메로의 행동은 굳이 종교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 사회적 불의와 폭력에 대한 지극히 상식적인 태도였는지 모른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며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셨는데(요 15:12-13), 로메로는 이 위대한 사랑을 실천한 인물임에 틀림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살고자 결단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특권을 받았다. 나는 해방신학자도 아니고, 어느 특정 신학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싶은 마음도 없으며, 1960~1970년대의 특별한 역사적 배경 속에 등장한 해방신학이 우리의 신학이길 바라지도 않는다. 그러나 가난하고 짓눌리며 불의로 소외당하는 이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관심을 깨달아 그분의 몸이 되고자 한 라틴아메리카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희생과 삶을 보고 들으며 이들이 감당한 역사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고, 예수처럼 살고자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한 나의 책임을 더 구체적으로 의식하게 되었다.

개인이 받은 영혼 구원의 생명력은 사회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역동에 의해 능력과 열매로 나타날 때에야 비로소 다른 개인을 구하고 살리는 힘으로 추동된다. 개인과 사회의 진보를 방해하는 인종, 국적, 신분, 학력, 직분, 성, 종교의 담과 벽을 뛰어넘어 그리스도 앞에 우리는 모두 동등하게 핏값을 치러 산 바 된, 귀하다 여김 받는 신부이다. 각각의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통해 고유한 그리스도의 모습과 덕을 품고 있는 각 대륙의 기독교가 막힌 담장을 넘나들며 더불어 대화하고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역동하는 그날을 바라본다.   

이유진
1998년부터 라틴아메리카 등지를 다니며 장·단기 선교사로 일해왔다. 한국에서 기독교역사학으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현재는 ‘뻬루 기독교 역사’ 관련 학위논문을 쓰기 위해 뻬루에 머물면서, 현지 연구소와 신학교 등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자료조사 및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