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홀리데이 외에는 ‘답’이 없었던 30대 청년의 고백

[296호 커버스토리]

2015-06-25     김도성 33세 알바생
   
▲ "한 달간은 근육통으로 인해 자다가 몇 번씩 깼다."(사진: 김도성 제공)

2년 전, 서른한 살 때였다.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하고 호주로 가서 일하기로 결심했다. 다소 우발적인 결정이었다. 학교에서 아르바이트하던 중이었다. 문자가 한 통이 왔다. 카드 이자 때문에 돈을 빌리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발신자는 아버지. 앞으로의 진로를 위해서 차곡차곡 모으고 있던 돈을 보내드렸다. 잔고는 언제나처럼 제로(0)에 가깝게 되었다. 그 순간, 호주에 가 있던 선배가 권유해준 호주 워킹홀리데이가 떠올랐다. 단 일말의 지체도 없이 가기로 결정했다. 오래도 버텼다. 돈 없이 공부만 하면서.

참 못났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나가 하나님께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애면글면 어떻게 이렇게 저렇게 살아왔는데, 아 물론 나의 어리석고 비겁했던 행동들을 인정하지요, 하지만 내가 많은 것을 바라나요, 도대체 내가 필요할 때 무엇 하나 도와준 적이 있나요, 돈이 그렇게도 중요한 것이니 좋아요, 내가 직접 해결할게요.’ 뭐 이런 식으로. 뜨겁게.

나에게 돈은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리키는 기호였다. 20대 초반까지도 경제적 욕구를 충분히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래서였나. 남들은 취업 준비한다고 난리였는데, ‘여유’를 부리며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있었으니…. 어릴 때는 착하게 행동하면 우리 집 잘 살게 해주신다고, 대학 때는 열심히 공부하면 유학 보내주신다고 믿었다. 물론 그때는 내가 그런 믿음을 갖고 있는 줄 몰랐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돈과 거리를 두는 순수성을 지키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불쑥불쑥 욕구 불만이 터져 나올 때마다, 하나님을 탓할 수는 없으니, 부모님을 탓할 수 없으니, 나 자신을 탓하는 게 가장 편했다. 그러다가 지치면 허무감에 젖었다. 세상은 두려운 곳이었고, 난 겁쟁이였다. 내면의 세계로 도피했다. 그래도 그때는 순수한 겁쟁이였다.

호주로 떠나다
수중에 200달러만 들고 가야 했다. 단지 일하러 가는 건데 준비하는 과정에서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자주 들었다. 그만큼 모든 기반이 취약했다. 그러나 스스로 부여한 역할에 대한 집념도 강했다. ‘나는 이렇게 저렇게 해야만 해.’ 호주행은 하나님께 제안한 또 한 번의 거래였다. ‘돈 벌 테니 안전하게 일하고 오게 해 주세요.’ 거래 가능한 건 쥐뿔도 없으면서 내가 지켜온 그 순수성이란 걸 담보로. 이제는 온갖 것들이 뒤섞여버린 순수성 말이다.

호주에 도착했으나 여섯 달을 기다려야 했다. 애초에 일하려고 했던 소고기 공장(육가공 공장)이 내가 도착할 때쯤부터 사람을 뽑지 않았다. 그래도 호주 오기 직전에 울고불고 기도했던 감각(?)을 살려서 처음 한두 달은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석 달이 지나고 넉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난 둘 중 하나였다. ‘하나님 이게 뭡니까’, 또는 ‘역시 난 안 돼.’ 

머리로는 도리질하며 침착해보려고 해도 당장 생존이 달려 있으니 시름이 깊어갔다. 나중에는 멍해졌다. 주변 사람들 앞에서는 침묵했다. 신세 한탄은 스스로 꼴 보기 싫어했으니까. 부모님 영향 같다.
넉 달 만에, 일을 시작했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주변 친구의 도움을 받아 단기로 우체국 청소 아르바이트를 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 골목길, 거리마다 깊은 잠에 빠진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시커먼 하늘에는 별이 쏟아질 듯 빛나고 거리에는 도둑고양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나밖에 없다. 가끔 취객 한 분 나와 주신다. 싸늘한 새벽 공기를 가르며 열심히 페달을 밟았다. 새벽부터 일하러 가는 나는 아등바등 심각한데, 정취는 필요 이상으로 고고하다. 달빛에 빠져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때의 감흥이란, 달콤씁쓸…. 악에 받쳐 생떼 쓰며 우는데 사탕 물린 아이처럼.

6개월이 다 될 때쯤, 이 도시에선 제대로 된 일을 구할 수 없어 다른 도시로 떠나기 며칠 전이었다. 소고기 공장에서 사람을 뽑으니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항상 안 된다고만 생각하다가 막상 되니 아무런 감흥도 들지 않았다. 그래 됐구나. 됐네. 그래서 뭐.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적어도 소 내장과 사투를 벌이기 전까지는 그랬다. 

소 내장 무더기와의 사투
소 내장 무더기가 긴 콘베이어 관을 타고 내 앞으로 철퍽 떨어지자 체액과 피와 오물이 다채롭게 어우러져 튀어 올라 얼굴을 적신다. 이미 정신은 반쯤 나간 상태라서 닦아야겠다는 생각은 들지도 않는다. 입에서는 연신 욕이 터져 나온다. 어머니의 마법주문이 생각났다. ‘아니야, 욕을 할 수는 없어. 인격을 지켜야지. 그래, 차라리 예수님이라고 불러보자.’ 

“예수님!…”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그러다 어느새 다시 욕지거리를 하고 있다. 하면 할수록 도대체 내 몸 어디에 있었는지 힘과 패기가 솟아올랐다. 이건 뭐지. 화풀이로 아무 죄 없는 내장 무더기에 대고 연방 주먹질을 하고 있다. 난민으로 와서 일하는 스리랑카 동료들은 낄낄대며 웃는다.

하루에 1,600마리의 소를 잡는 공장이다. 살아있는 소를 죽여, 거꾸로 매달면 2층에서 칼을 쥔 사내가 그 소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부위별로 원통형 관을 통해 내려보낸다. 내가 맡은 부위는 작은창자다. ‘작은’창자라지만 절대 작지 않다. 10미터 길이. 황소(bull)의 그것이 내려올 땐, 두 팔로 안기 힘들 정도로 큰 관이 막힌다. 

내가 하는 일은 창자를 펼쳐 공기그라인더를 이용해 내장을 자르고 롤에 말리게 하는 일이었다. 공기 ‘그라인더’. “예상되는 위험은 손 절단”이라는 오리엔테이션 교육내용이 머리를 스친다. 딱 한 번 졸았다. 저녁에는 공부를 한번 해볼까 하고 책을 읽다 잠든 다음 날이었다. 그래, 돈 벌러 와서 공부는 사치였다. 

점심시간은 10분. ‘먹는다’는 동사보다는 ‘넣는다’는 동사가 어울린다. 

한 달 동안은 잠자다 꼭 몇 번씩 깼다. 호랑이 기름 정도는 발라줘야 한다. 침대에서 기지개를 켜면 근육이 비명을 지르며 엑스터시가 온다. ‘노동이 기도요, 기도가 노동이다.’ 몇 개월이 지나면서 일이 익숙해졌다. 노동에는 어떤 신비로운 힘이 있어서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걸까. 지루하고 힘들 때면 내 과거의 과오를 씻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잡기도 했다. 온갖 기억과 생각과 상상이 떠오른다는 점에서 기도와 노동은 유사하다. 몸은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의식은 내면을 향해 고도로 집중해서 스스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할 때도 있다. 물질을 다루는 일에 깊이 빠져들다 보면 저도 모르게 어떤 의식 상태에 도달하기도 한다. 

나만 서러웠다…
걸어가자면 한 시간을 훌쩍 넘기는 거리였다. 하지만 중고로라도 자동차를 끝내 사지 않았다. 대신에 과감하게 로드바이크(자전거)를 구입해서 출퇴근을 했다. 나중에 처분하기도 좋다는 말에 혹한 것이다. 그렇게 6개월을 지금이 건기라는 것만 믿고 타고 다녔다. 

비가 안 왔을 리가 없다. 로드바이크는 차체가 가볍고 타이어의 두께가 매우 얇아 속력이 무척 빠른 대신에 조종하기가 무척 까다롭다. 작은 턱에도 예민하게 요동친다. 동이 트지도 않은 어둑한 새벽녘이었다. 경사가 급하고 긴 언덕길을 쏜살같이 내려가고 있었다. 바람 소리가 날카롭게 윙윙거렸다. 갑자기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내 몸이 붕 뜨더니 그대로 거꾸러졌다. 뭔가 다리가 화끈거리고 정신은 황망하다. 자세히 보니 웬 묵직한 플라스틱 파이프 하나가 덩그러니 있다. 팔꿈치와 다리는 쓸리고 자전거는 체인이 풀려 있다. 

욱했다. 또 징징거리는 성격이 튀어나왔다. 하나님에게 온갖 불만과 역성을 토해 냈다. 그래도 일해야지, 부랴부랴 자전거를 끌고 걸어가 일을 시작했다. 하루가 어찌나 길던지. 이 상태로 일을 끝마친 나 자신이 대견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의 그 안도감이란. 침대에 누워 천천히 사고의 순간을 떠올렸다. 내가 뒹굴었을 때 지나가는 차도 없이 주위의 나무들과 풀들과 새벽달은 쥐 죽은 듯 적막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나만 서러웠다.

소고기 공장에서 일한 지 단 4개월 만에 학자금 대출금을 다 갚았다. 1천만 원 정도. 의외로 허무했다. 이자 내기에도 쩔쩔맸는데, 나의 마음가짐은 그때와 아무것도 다른 게 없는데, 단지 이렇게 일해서 계좌로 들어온 돈을 또 어디론가 다른 계좌로 이체시켰더니 그걸로 끝이었다. 이게 이렇게 쉽게 해결되다니. 그동안 뭘 하고 살았나 싶은 낭패감과 고충 하나를 간단하게 없애버린 돈의 위력을 실감하는 데는 시간이 좀 필요했다. 

아마도 집과 공장만을 오가며 일만 하다 보니 그랬을 것이다. 게다가 축하해줄 사람도 옆에 없었으니까. 공장 생활은 메말라 척박하고 끔찍하게 지루한 일상이다. 장난과 성적인 농담이 아니면 웃을 일이 없는 곳이다. 그래도 돈 없이 살 수는 없으니 다들 어떻게 해서든 남아 있으려고 한다. 더럽고 치사해도 말이다. 난민으로 온 좀 게으른 스리랑카와 미얀마인들, 부지런한 베트남인, 악착같은 중국·대만 사람들, 강인한 육체를 가진 브라질인, 간혹 보이는 아프리카인들. 대다수는 호주에 정착해 집도 사고 차도 사고 주말엔 파티도 연다. 모국에 있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테다. 그들도 그들 나름으로 무리를 짓고 공동체로 살아간다. 공장 노동자들의 경우에는 모국어와 돈은 먼 타국에서도 그들을 이어주는 강력한 울타리다. 사실 돈은 나를 한국에서 호주로 연결해준 통로다. ‘시급’을 주제로 노동자들과 한참을 이야기꽃을 피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바로 하나님 나라다. 의식하지 못한 채로 있을 때도 있었지만, 돈은 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서 주된 대화 주제였다. 심지어 다른 주제를 이야기할 때도 돈은 그 배후에 있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하나님 나라가 현실에서 왜 그토록 추상적으로 느껴졌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었다. 개척 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나에게는 돈 자체가 다분히 관념적인 것으로 치환돼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축복해주셔야만 획득할 수 있는 돈, 죄의 본성을 뿌리 뽑지 못했음으로 자격 미달, 축복 명단에서 제외, 다시 노력하면 언젠가 반드시 축복해주신다는 한 번도 이뤄진 적 없는 희망가. 

베네딕트 규칙서는 ‘육체노동’을 논하며 ‘한가함은 영혼의 원수’라고 말한다. 뒤집으면 노동의 결과로 얻은 열매의 생생함과 실재성이 영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영혼을 지키는 한 방편이라는 얘기다. 어쩌면 돈은 영적인 하나님 나라의 육체적인 혈액과 같다. 그 돈이 무엇을 의미하든지 간에. 돈이 목적이 되어버린 전도된 관계도 있고, 영적인 것만 추구하면서 실제로는 돈에 파묻혀버린 관계도 있다.

왜 날 태어나게 하셨을까? 
집에서는 단연 유튜브였다. 쉬는 날에는 그저 침대에 누워 유튜브 탐사에 여념이 없었다. 엄청난 정보들은 물론, 이곳에는 세계와 만나려는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있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세상의 중심에 서서 널리 소통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래서 유튜브는 진정 혁명이다. 심리적으로도 고립돼 있던 나에게 유튜브는 그나마 세상과 만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허무해질 때도 있었지만.

   
▲ "공장 인근에 핀 꽃들을 보며 그 시간을 견뎠다." (사진: 김도성 제공)

어느덧 일이 끝나가고 있었다. 몸도 몸이지만 하루에 아홉 시간을 소 내장만 보며 칼질한다는 건 정신적으로도 쉽지 않았다. 영양제만 10알 넘게 먹으며 버텼다. 식사 시간에 잠시 나와 오가는 길,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하늘을 보며 버텼다. 공장 가건물 벽 넝쿨처럼 피어난 꽃들을 보며 견뎠다. 그것들은 너무 맑아서, 너무 예뻐서 마냥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게 만든다. 하늘과 꽃들은 그저 묵묵하게 제 할 일을 하고 있었고 그 자연스러움 앞에서 나의 답답함과 지루함을 투덜거리는 게 어색했다. 무슨 꽃이었는지, 1년 내내 피고 졌다. 물어봐도 아는 사람 하나 없었다.

호주에서의 2년이 끝나갔다. 한국이라는 나라에 돌아가기가 너무나 싫었다. 먼저 돌아갔던 선배가 말했다. 

“오지 마, 여기 헬(hell)이야!” 

더욱이 진로 문제, 가족과의 관계 문제, 집안 형편의 문제가 그대로 쌓여 있었다. 그렇다고 호주에 계속 머물 이유도 명분도 딱히 찾을 수 없다. 기술을 익히면 살 길이 보인다고도 하건만 심신이 너무 지쳐 동기부여가 되질 않았다. 항공권을 끊으면서도 돌아간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나. 한국에 돌아가서 (무엇을 하든) 잘해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2년 동안의 호주 경험이 다시 초기화된다고 생각하니 당혹스러웠다. 부모님과 얽히며 살자니 간섭받는 것이 싫었고, 독립하자니 뚜렷한 목적의식이 없었다. 

그때쯤 친구의 초청으로 방문한 호주 캠퍼스는 온갖 나라에서 온 학생들로 활기가 넘쳤다. 불현듯 호주에 남아 대학을 다니고 싶은 갈망이 생겼다. 가슴이 뛰었다. 한번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거기서 끝. 돈 걱정 없이 대학에 다닐 수 있는 신분(계급) 상승 욕구를 꿇어 앉혔다. 능력도 환경도 안됐다. 이번에는 예전처럼 습관적으로 하나님과 거래를 해볼 여지도 없었다. 살아온 날들이 후회스럽기도 하고 무엇보다 허무하다. 이렇게 살고 싶었던 건 아닌데.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건 아닌데. 허무하다. 중요한 질문. 왜 날 태어나게 하셨을까? 난 왜 태어났니? 왜 사니? ‘노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되고 나와 하나님의 ‘관계’는 여전히 남아있다.

하나님의 쿨한 스타일
막상 한국으로 들어오니 가족을 만나서 반갑고 친구들을 보니 기뻤다. 단 서울의 공기는 빼고. 당장 내가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뭘 해야만 하는 것도 없다. 의외로 동요가 일어나지 않는다. 설마 돈 몇 푼 모았다고 그럴 리는 없을 텐데. 될 대로 되라는 식이다.

‘엿 먹이다’라는 표현이 있다. 사전에는 ‘속되게 슬쩍 골려 주거나 속인다’는 뜻이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로 하나님이 왜 날 태어나게 했느냐는 질문이 머릿속에서 힘차게 맴돌았다. 어느 날이었다. 문득 ‘엿 먹이다’는 표현이 스쳤다. 하나님이 얼마나 쿨한 존재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랬다. 하나님은 쿨한 스타일이다. 태어나고 싶지도 않았는데 별문제 없다는 듯이 태어나게 하시는 하나님. 원하지도 않았는데 인생이라는 게임 한 판 둬보자고 손 붙잡고 데려와 판을 펼치시는 하나님. 고통으로 징징거려도 그건 네가 해결할 문제라고 깔끔하게 잘라 말씀하시는 하나님. 겨우 이 정도의 일뿐이랴.

자연은 그렇게 쿨한 하나님을 닮아있다. 구구절절 내 개인 사정에는 관심이 없다. 하나님이 쿨하다는 말은, ‘의미’가 아니라 ‘관계’를 보라는 말처럼 들린다. 냉소, 냉담 혹은 무관심과는 절대로 다르다. 쿨함은 관계 속에만 있다. 어떤 대상의 한 면만을 알고 있다가 언제라도 전혀 다른 면을 접할 때는 당혹스럽기가 그지없다. 이 당혹감의 정체를 폭로해줄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전지전능하다? 섬세하다? 인격적이다? 이런 언어는 타격받은 내 감정을 만회해 주지 못했다. 그렇다고 서로의 역할과 의무를 강조하는 규범적인 언어들도 아니었다. 어쩌면 하나님이 히죽거리시며 날 엿 먹이고 있다.(우스갯소리인 것만은 아니다. 비꼬는 것 같지만 진심이 없지 않다.) 

이 말은 나 자신도 잘 모르고 있던 나의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지점을 건드린다. 신기하지. 어떤 감정이 해소되고 받아들여진다. 물론 현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지만. 이제 다시는 하나님의 쿨함을 가공해서는 안 되겠다. 쿨하다는 건 개념이 아니라 스타일이니까. 그리고 하나님은 쿨내 진동이지만, 나는 의외로(?) 뒤끝 작렬이라, 이렇게 징징거린다.   


김도성
개척 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학부에서 기독교학을 공부했다. 대학원에 진학해 철학을 공부하다가 쫓기듯 호주 워킹홀리데이에 갔다. 소 내장과 사투를 벌이다가 2년 만에 돌아와 지금은 틈틈이 아르바이트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