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투쟁이다

[296호 거꾸로 읽는 성경] 갈라디아서 1:6~10

2015-06-25     정용섭 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한국 기독교인에게는 착한사람 콤플렉스가 깊숙이 자리한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가능한 다른 사람과 싸우지 말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건 기독교 신앙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좋은 게 좋다는 식의 태도가 옳은 것도 아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복음은 오히려 투쟁적이다.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는 부단한 신학논쟁을 통해서 형성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보더라도 복음은 투쟁적이다. 그 단초를 우리는 바울의 갈라디아서에서 찾을 수 있다.

‘다른’ 복음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간단하게 인사를 끝낸 뒤에 뜸도 들이지 않고 돌직구를 날린다. 웬만하면 에둘러 말함직도 한데, 바울은 아주 노골적인 표현을 마다치 않는다. 6절을 보라. ‘당신들이 은혜와 하나님을 떠나서 다른 복음을 따르다니, 내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과격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가 아주 심각하다는 데에 있다. 오늘날로 빗대서 말하면, 어떤 교회가 신천지에 휘둘리고 있는 상황과 비슷하다.

그런 상황이 위 대목에서 몇 번에 걸쳐 언급된 ‘다른 복음’이라는 단어에 압축되어 있다. 복음이면 복음이지 ‘다른 복음’은 또 뭐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분들이 있겠지만, 바울의 이런 표현은 아주 정확한 말이다. 우선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복된 소식이라는 뜻의 복음은 헬라어 ‘유앙겔리온’의 번역이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복음이라고 한다. 궁극적으로는 예수님 자체가 복음이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십자가와 부활이 복음의 핵심 콘텐츠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정답이다. 그러나 그것이 왜 복음인지 근거를 충분하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작업이 간단하지 않다.  

우선 십자가 사건을 보자. 그 당시에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구원의 길로 받아들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유대인들도 그렇고, 헬라인들도 그렇다. 고린도전서 1장 23절에 따르면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다. 이런 표현은 사실적이었다. 십자가는 명실상부한 실패였으며, 생명을 잃는 사건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하고 외쳤다. 그런데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걸 통해서 생명을 얻는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죄가 용서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교육을 받고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런 대답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죄의 용서가 왜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가능한지에 대한 충분한 근거를 대라는 요청을 우리는 피할 수 없다. 

부활의 사정은 더 깊고 신비롭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다른 사람들도 알아볼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지만, 부활은 오직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만 경험된 사건이었다. 부활의 주님은 빌라도 총독이나 가야바 제사장, 또는 유대 민중들에게 나타나지 않고 오직 그를 따르거나 따르게 될 사람들에게만 나타났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의 명단을 제시했다. 그들이 경험한 예수의 부활은 실제로 무엇이었을까? 다시 죽어야 할 현재의 삶으로 재생한 것은 아니다. 부활은 종말에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일어나게 될 궁극적인 생명으로의 변화다. 그 부활로 인해서 예수의 십자가는 사죄의 근거가 된다. 복음에 대한 이런 기초적인 생각을 바탕에 깔고 바울이 일단의 주장을 ‘다른 복음’이라고 비판하고 있는 갈라디아서의 문제를 자세하게 살펴보자.  

초기 기독교는 우리의 예상과 달리 매우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신학적인 논란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크게는 세 분파이다. 첫째는 히브리파 기독교인, 둘째는 디아스포라 기독교인, 셋째는 이방인 기독교인이다. 히브리파 기독교인은 이스라엘 땅에서 태어나서 살아가는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 여기에 속한다. 디아스포라 기독교인은 이스라엘 땅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태어나거나 오래전에 이스라엘을 떠난 유대인들이다. 이방인 기독교인은 말 그대로 혈통적으로 유대인이 아닌 기독교인을 가리킨다. 이 세 분파에서 일어난 신학적, 또는 실천적 문제의 관건은 유대교와의 관계를 어떻게 맺느냐, 구체적으로 말하면 토라와 할례로 대표되는 율법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거칠게 표현하면, 히브리파 기독교인들은 토라와 할례를 받아들였고, 이방인 기독교인은 거부했으며, 디아스포라 기독교인은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가까이 할 수도 멀리 할 수도 없음)의 입장을 취했다.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주로 히브리파 기독교인들이 주축이었고, 소아시아를 비롯해서 헬라 지역과 로마 지역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뒤섞여 있었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이방인들이 주축이 되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던 바울은 우여곡절 끝에 이방 기독교를 대표하는 인물이 된다. 그는 이방인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토라와 할례를 받아들이자는 절충주의를 철저하게 배격한다. 그의 입장이 갈라디아서에 자세하게 피력되어 있다. 자신이 전한 예수의 복음이 반(半)유대주의 세력에 의해서 훼손되는 위기 상황을 돌파하려는 시도다.   

복음의 왜곡
바울은 당시 주류였던 반(半)유대주의 세력과 당당히 맞선다. 갈라디아 교우들을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갈 1:7) 하는 사람들이라고 비판했다. 그들과 적당한 선에서 타협할 길은 없다. 여기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게 아니라, 다만 토라와 할례가 더불어 필요하다는 사실을 주장했을 뿐이다. 이들도 당연히 기독교인들이다. 표면적으로는 히브리-기독교인, 또는 유대-기독교인으로서 여전히 유대교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바울을 향해서 ‘너만 잘났냐? 왜 그렇게 팍팍하냐? 우리도 모두 예수 믿는 사람들이며, 토라와 할례를 주장하는 것도 기독교 공동체를 위한 일이니, 타협점을 찾아보자’ 하고 말했을지 모른다. 또는 ‘당신은 정식 사도도 아닌 주제에 웬 말이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다’고 핀잔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누가 옳은가? 

오늘 우리는 갈라디아서가 기록되던 당시의 교회 형편을 소상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누가 옳은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바울이 반박하는 유대-기독교인들도 기독교인인 것만은 분명한 마당에 그들을 무조건 배격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궁극적인 판단은 종말에 재림하실 주님이 하실 터이니 그때까지 유보하기로 하고, 지금 우리는 주어진 정보 안에서 나름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 판단의 기준은 바울이 언급한 ‘다른 복음’, 즉 복음의 ‘왜곡’이다. 복음의 왜곡은 용납할 수 없다. 단지 복음을 전하는 형식이 다르다면 대립까지 가지는 말아야 하겠지만 본질이 왜곡된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복음의 왜곡을 확인하는 작업은 쉽지 않다. 아마 바울의 적대자들도 자신들의 복음이 왜곡되었다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볼 때 그들은 참된 복음이 아니라 다른 복음에 휩쓸린 것이다. 바울의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계시에 근거한다(1:12). 이런 주장은 일방적인 것처럼 보인다. 상대방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받은 계시에 따르면 당신들은 틀렸어’라 말하면 누가 그 말에 귀를 기울이겠는가. 여기서 바울의 계시 경험을 모든 사람이 이해하고 인정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건 쉽지 않다. 오늘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우리의 주장도 다른 종교인들의 눈에는 일방적인 것으로 보이는 이치와 같다. 이 모든 문제를 단숨에 해결할 수는 없다. 바울이 무엇을 주장하는지 정확하게 따라가는 게 최선이다. 

바울은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사실을 자유에 근거해서 논증한다. 유대-기독교인들이 복음을 왜곡했다는 사실은 그들의 가르침으로 인해서 갈라디아 신자들이 자유를 상실했다는 데서 확인할 수 있었다(5장 이하). 만약 그들의 가르침이 갈라디아 신자들의 영혼을 자유하게 했다면 바울은 아무 소리도 못 했거나, 안 했을지 모른다. 자유의 상실과 복음의 왜곡은 정비례한다. 복음이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려면 이를 추종하는 사람의 영혼이 자유로운지 아닌지를 보면 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사실 오늘도 상당히 많은 기독교인들이 삶에서 영적인 자유를 상실했다. 더 근본적으로 기독교 신앙이 자유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이들도 많지 않다. 오히려 자유를 잃는 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자유의 상실은 곧 불안으로 나타난다. 신앙생활 자체에서도 그렇고, 세상살이에서도 그렇다. 신앙생활이 복음보다는 율법에 치우쳐 있다는 증거다. 예를 들어 십일조, 주일성수나 새벽기도 같은 것들이 모두 신앙적인 불안 요소가 된다. 한평생 이런 것들을 조심스럽게 지켜나가는 것이 신앙의 근본이라고 여긴다. 심지어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불행을 이런 것과 직결시켜서 생각한다. 주일성수를 못했더니 자동차 사고가 났다는 식으로. 이는 복음의 자유가 아니라 바벨론 포로의 삶이다.
 
한국교회의 영성이 죄책감에 터 잡고 있다는 사실도 복음의 왜곡에 대한 방증이다. 이 죄책감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이런 불안 심리를 자극하고, 그것을 심리적으로 벗어나게 하는 방식으로 기독교 신앙에 접근하는 일단의 흐름을 가리켜 청교도, 각성운동, 부흥운동이라고 한다. 이런 큰 흐름이 수세기에 걸쳐서 유럽과 미국에서 크게 일어났다. 이런 신앙운동의 특징은 여럿인데, 그중에 세 가지만 뽑는다면, 개인주의적 영성과 도덕주의, 그리고 회심이다. 이런 청교도적 영성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니다. 문제는 18~19세기 유럽과 미국에서 필요로 했던 영성이 20세기와 21세기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죄책감에 기반한 영성으로 인해서 오늘 한국 기독교인들은 세상 도피적인 삶의 태도를 보이고, 역설적으로 사회 윤리적 책임감의 결핍에 떨어졌다. 나이만 들었지 정신적으로 유아 상태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이런 교회가 자기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교회성장이다. 목사와 일반 신자 모두 이런 교회성장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자유의 손실을 보상받으려고 한다. 이런 신앙을 복음적으로 건강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신앙적 포퓰리즘
복음의 왜곡 앞에서 바울은 절망하고 분노한다. 그는 차마 입으로 꺼내기 힘든 말까지 쏟아낸다. “저주를 받을지어다.”(8, 9절). 오죽했으면 그가 반복해서 저주 운운했겠는가. 바울이 자기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저주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또는 문학적 수사에 불과한 것인지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복음이 왜곡되는 사태 앞에서 바울이 아주 민감하게 반응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바울은 자신의 표현이 지나쳤다고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저주 운운한 뒤 곧이어 10절에서 두 가지 신앙적 태도를 대비한다. 사람들에게 좋게 하는 것과 하나님께 좋게 하는 것 사이의 대비이다. 사람들에게 좋게 하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토라와 할례를 받아들이는 신앙이며, 하나님께 좋게 하는 것은 오직 예수를 향한 믿음에만 천착하는 신앙이다. 전자는 지금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에 들어와서 원래 바울이 전한 복음과 다른 복음을 전하는 예루살렘의 유대-기독교인들의 신앙이며, 후자는 바울을 중심으로 한 이방-기독교인의 신앙이다. 이를 조금 풀어서 본다면, 사람들에게 좋게 하는 것은 사람에게서 구원의 가능성을 찾는 것이며, 하나님께 좋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구원의 가능성을 두는 것이다. 이런 대답이 상투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실제로는 기독교 신앙의 아주 엄중한 어떤 사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좋게 하는 것은 눈에 확 드러난다. 감동적이기도 하고 현실적이기도 하다. 반면에 하나님께 좋게 하는 것은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목사들도 ‘신자들에게 좋게 하는’ 걸 추구한다. 일종의 신앙적 포퓰리즘이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것이다. 그런 신앙행태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종말론적 하나님의 통치를 실제로 느낄 수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기복주의라는 세속원리에 떨어지는 게 아니냐는 얘기다. 이해는 하지만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건 결국 복음의 왜곡이자 훼손이기 때문이다. 그런 방식의 복음 이해가 고착되면 한국교회는 결국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복음은 투쟁이며 진리 논쟁이다. 더 나가서 복음은 분노다. 거룩한 저항이다. 나사렛 목수의 아들이었던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율법학자들 중심의 종교 권력에 저항했다. 그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처형당했다. 우리는 그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이다.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바울은 혼합주의적인 ‘다른 복음’ 전도자들과 치열하게 투쟁하다가 그들에게 밀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이름도 없이 죽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바울을 통해서 복음의 진수를 알게 되었다. 이런 복음의 투쟁 역사에 우리는 지금 어떻게 참여하고 있을까.  
 

정용섭
서울신학대학교와 같은 대학원, 독일 뮌스터 대학교, 계명대학교(박사)에서 공부했다. 계명대학교와 영남신학대학교 강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과 대구샘터교회 담임목사로 섬긴다. 지은 책으로는 《설교란 무엇인가》 《주기도란 무엇인가》 《속 빈 설교 꽉찬 설교》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 《설교의 절망과 희망》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 《에큐메니칼 교회사 3》 《사도신경 해설》 《신학과 철학》 《여기 계신 하나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