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도 이력서

[298호 커버스토리]

2015-08-26     김영봉 와싱톤한인교회 담임목사, 《사귐의 기도》 저

나는 소위 ‘모태 신앙인’이다. 모계로만 3대째 신앙을 지켜 온 가정에서 태어났고, 할머니와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신앙적인 분위기 안에서 자랐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 우리 동네에 강력한 은사 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우리 동네에는 미군부대가 있었는데, 그곳에 직장을 잡아 이사 온 남자 집사가 그 은사 운동의 진원지였다. 그에게서 방언과 신유와 축사의 은사가 강력하게 일어났고, 동네 아낙들이 그 집사에게 몰려들었다. 밤이 되면 거의 매일 동네 어느 집에선가 그 집사가 인도하는 기도회가 있었고, 그곳에서는 온갖 신비한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내 어머니는 그 모임의 중심에 계셨다. 3대 종갓집 맏며느리였던 어머니는 남편이 초등학교 교사였던 까닭에 머슴을 두고 농사일을 돌보아야 했다. 어머니가 끼니마다 먹여야 하는 입이 스물이 넘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머니는 은사 운동에서 숨통을 찾으셨다. 낮에는 진이 빠지도록 일을 하고 저녁이 되어 가족의 밥상을 차려 놓고는 기도회로 모이는 집으로 달려가셨다. 그곳에서 어머니는 삶의 짐을 질 만한 영적 힘을 얻었고, 덤으로 방언의 은사를 받으셨다. 어머니는 홀로 기도할 때도 자주 방언을 하셨는데, 그분의 방언은 발꼬임이 아니라 분명한 언어로 들렸다. 

어머니는 당신의 믿음을 네 아들에게 전해주고 싶어 하셨다. 3대째 여성들로만 이어져 내려 온 믿음을 다음 대에서는 남성들에게도 전하고 싶어 하셨다. 남편의 전도를 위해서도 간절히 기도했지만, 아들들을 위해서도 땀 흘려 기도하셨다. 새벽마다 아들들의 이마에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하셨다. 어머니의 기도 소리로 인해 새벽에 자주 잠에서 깨어났던 기억이 있다. 어머니의 기도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자는 척하다가 다시 잠에 들곤 했다.

어머니는 기도회와 부흥회에 나를 자주 데리고 다니셨다. 도시로 전학 갈 준비를 하던 형은 아버지의 경계 때문에 포기해야 했고, 내 아래의 두 동생은 데리고 다니기에는 너무 어렸다. 그래서 어머니가 선택한 대상이 나였다. 어머니에게 끌려 가기는 했지만, 싫어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기도회나 부흥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신기하기도 했고, 어른들의 ‘뜨거운’ 기도를 받는 것도 왠지 좋았다. 신유, 축사, 입신 같은 현상들을 일상의 일처럼 보고 자랐고, 나도 어머니처럼 기도의 용사가 되고 싶었다. 

꺼질 줄 모르고 타오르던 은사 운동은 서서히 잦아들었고, 나도 형을 따라 도시로 유학을 떠났다. 내가 유학을 간 도시에는 고모가 시집 가서 살고 있었는데, 고모를 따라 나간 교회에서도 은사 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지난날 방탕한 삶을 살았던 담임목사가 극적인 회심을 하고 나서 성령 운동에 심취했다. 당시에 유명하다는 부흥사들을 불러 한 해에 서너 차례 부흥회를 열었다. 나는 학업에 지장이 없는 한 열심히 집회에 참석했고, 그러는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는 신앙적인 전환을 경험했고, ‘주의 종’으로 나를 드리겠다는 서원도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성장 과정을 통해 나는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 혹은 ‘만사를 변화시키는 기도’를 가장 이상적인 기도로 여기게 되었고, 또한 그렇게 기도하며 살았다. 나의 기도는 늘 목소리가 쉬도록 부르짖는 기도였고, 하나님을 지치도록 몰아붙이는 결사적인 기도였다.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여 응답을 얻어내려면 그렇게 기도해야만 한다고 배워 왔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보아온 ‘기도의 전사’들은 모두 그렇게 기도했다. 청소년기와 청년기에 문제를 만날 때마다 그렇게 기도했고 그 힘으로 문제를 돌파했다. 

‘주의 종’이 되겠다고 서원한 나는 신학대학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했다. 당시 회심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아버지는 박봉의 교사 월급으로 힘들게 도회지 유학을 시킨 아들이 신학대학에 가서 목사가 되겠다는 말에 크게 실망하셨다. 신학대학에 갈 거라면 당장 자퇴를 하고 시골에 와서 농사를 지으라고 하셨다. 당시 아버지의 성정을 생각하면, 그 말은 진심이었다. 공부를 계속하여 뜻을 이루려면 아버지의 반대가 누그러질 때까지 물러서는 수밖에 없었다.

일반 대학에 진학한 뒤 처음에는 신학생과 다름없이 생활했다. 대학 4년을 영적인 탐색 기간으로 삼겠다고 생각하고 신앙생활에 더 철저하게 임했다. 하지만 속절없이 대학 문화에 서서히 물들어갔고 나의 믿음은 흐려졌다. 3학년이 지나면서 소명감도 잊혀졌고, 신앙 생활도 황폐해졌다. 대학 문화에도 흥미가 없어졌고, 하루하루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이것이 무엇일까? 어떻게 이 어둠과 무감각을 벗어날 수 있을까? 선택지는 몇 가지 있었다. 군대로의 도피가 있었고, 쾌락으로의 몰입도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둘 다 해답이 아니었다. 그렇게 돌파구를 찾는 동안 문득 ‘아, 이것이 영적인 어둠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다.

그때, 여름 방학 기간에 열릴 중고등부 수양회에 교사가 부족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것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낮에는 아이들을 위해 봉사하고, 밤이면 나의 영적 어둠을 붙들고 씨름하기로 마음먹었다. 수양회는 어느 산에 있는 기도원으로 갔는데, 아이들이 취침을 하고 나면 홀로 강단 십자가 아래서 ‘철야’로 기도에 몰두했다. 밤을 새워 기도하고 새벽에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나 일정에 참여했다. 그때의 심정은 얍복강에서 밤을 새워 씨름했던 야곱의 그것과 같았다. 

기도하면서 어릴 때 자주 보았던 성령 체험이 나에게 일어나기를 간절히 구했다. 나의 어두운 하늘이 두 쪽으로 갈라지는 기적을 보고 싶었다. 강력하게, 절절하게, 목이 쉬도록 구하면 응답이 된다고 배웠고 또한 그렇게 보아 왔다. 그래서 몸부림치며 기도했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나에게는 그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다. 목은 잠기고, 몸은 지치고, 수양회는 끝이 났다. 나는 아이들을 모두 내려 보내고 그곳에 더 남고 싶었다. 하지만 책임자로서 아이들을 안전하게 인솔하여 귀가시키는 것이 더 중요했다. 산을 내려오면서 “이래도 안 되면 어쩌란 말입니까?” 하고 하나님께 호소했다.

그 기도가 ‘헛수고’가 아니었음을 안 것은 며칠이 지난 후였다. 그토록 나의 숨통을 조이던 영적 어둠이 걷히고 있음을 발견했다. 느슨했던 믿음이 다시 되살아났고, 잊었던 소명감도 회복되었다. 흑백 사진처럼 의미없고 권태로워 보였던 일상이 다시 총천연색으로 빛을 되찾았다. 그러한 회복으로 인해 대학을 졸업하면서 신학대학원으로 진로를 변경하게 되었고, 이번엔 아버지께서도 나의 결정을 존중해 주셨다. 아들의 세속적 성공에 대한 소망이 여전히 있었지만, 이제는 아들의 뜻을 존중해야 할 때라고 느끼셨던 것이다.

신학대학원에서 나는 ‘열공’에 빠졌다. 4년 동안 맛을 보았던 경영학과는 전혀 달랐다. 경영학이 신학보다 못하다는 뜻이 아니라, 나의 관심과 적성에 신학이 맞았다는 뜻이다. 대학 입시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다. 어떤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신학 공부가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실존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학문이니 얼마나 재미가 있었겠는가! 게다가 4년 동안이나 미뤄왔던 공부였다. 그렇게 ‘열공’한 덕분에 유학의 문도 열렸다. 

신학을 시작하고 유학을 하면서 나는 기도와 영성에 대한 책을 모으기 시작했다. 의도적으로 마음먹고 한 일은 아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책들이 눈에 뜨이면 자꾸 사 모으게 된 것이다. 나중에 돌아보니, 다시금 내 안에서 영적인 갈증이 깊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영적으로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기에 영성에 관한 책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그때에도 늘 기도하고 살았지만, 항상 기도가 부족하다는 느낌으로 살았다. 영적으로 마땅히 도달해야 할 지경까지 이르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 자주 나를 불편하게 했다. 하지만 그 느낌의 정체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 학위 과정도 끝나고, 목사가 되고, 신학 교수가 되었다. 그러는 과정에서도 크고 작은 영적 어둠을 만났고, 그럴 때마다 보따리 싸들고 기도원에 가서 며칠씩 기도하여 해결했다. 그것은 마치 물을 마시지 않고 지내다가 갈증이 깊어지면 물가에 찾아가 물을 퍼마시는 것 같은 행동이었다. 그것이 내가 훈련받은 기도 생활이었다. 물론, 일상생활 중에도 기도했다. 신학 교수가 되고 나서도 교회 생활에 충실했다. 교회 현장을 떠나면 내 신학은 죽는다는 믿음으로 충실히 교회 생활을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신학 교수가 되고 나서 내 생활은 점점 더 분주해졌다. 불러 주는 곳이 많아졌고, 그것을 즐겼다. 낮에는 학교에서 가르쳤고, 밤에는 교회로 다니면서 강의 혹은 집회를 인도했다. 내가 속한 교단에서는 “교회에서도 통하는 교수”로 인정받았고, 학교에서는 “설교처럼 강의하는 교수”로 인정을 받았다. 사실, 그것이 나의 바람이자 소망이었다. 나는 교수가 되기 위해 신학을 공부한 것이 아니었다. 교인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 ‘좋은 목사’가 되는 것이 나의 소망이었다. 그 소망을 어느 정도 이루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 또 하나의 시커먼 영적 어둠이 내 영혼 안에 형성되고 있었다. 나의 전공이 신약성서였으므로 늘 성경 본문과 씨름했고 성경에 대해 강의했고 성경에 대해 연구 논문을 썼다. 교회 생활도 충실히 했고, 개인 영적 생활도 나름 성실히 했다. 그렇게 생활하는 사람에게 영적 먹구름이 뒤덮인다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신학 교수 생활을 시작한 지 6년 정도 지났을 때, 그대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어두운 구름에 휩싸이게 되었다.

사실, 아무 문제 없다고 스스로 속이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나 자신과 이웃을 속일 수 있는 자료는 나에게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어둠을 뚫고 싶었다. 외적인 인정보다 내면적인 해갈이 나에게는 더 중요했다. 겉으로는 심하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병적 증상들이 내면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새 나의 소명은 직업으로 바뀌어 있었다. 겉으로는 복음을 위해 헌신한다고 말하며 동분서주했지만, 실은 인정받는 것을 즐겼고 경제적인 부수입도 즐겼다.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은 여전히 행복한 일이었지만, 이제 그것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어 가고 있었다. 신학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다 버렸다고 고백했던 것들을 어느덧 하나씩 다시 주워 모으고 있었다. 영성은 나의 직업을 위한 치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결과로 영적으로는 고갈되고 있었고, 정신적으로는 오염되고 있었으며, 육신에는 여러 가지 이상 신호들이 생겼다. 두통이 자주 생겼으나, 진통제로 무마하고 앞으로 내달렸다. 열정적으로 강의했고, 부지런히 글을 썼으며, 오라는 곳에는 마다하지 않고 달려갔다. 겉으로 많은 것을 이루는 것 같았지만, 그 열매는 부실했다. 반면, 나에게 중요한 사람들과의 관계에는 소홀해졌다. 겉으로는 행복한 부부로 살았지만, 내면적으로는 점점 소원해졌다. 나의 내면에서는 스멀스멀 일탈에 대한 유혹도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나를 가장 괴롭게 한 것은 영적으로 질식할 것 같은 답답함이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진짜’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이제까지 준비하고 노력하고 힘써 온 모든 초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었다. 그런데 그 관계는 점점 부실해져 갔고, 정작 나는 다른 것들을 붙들고 사는 것 같았다. 문득,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에 사로잡혔고, 또 한 번의 영적 투쟁을 시작할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그리하여 어느 해인가, 방학을 시작하자마자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기도 실험을 시작했다. 기도에 대해 그동안 보고 배운 모든 것을 ‘모른다’ 치고 처음부터 새로 배우기 시작했다. 유학 시절부터 ‘나도 모르게’ 모아 온 기도와 영성에 관한 책들을 꺼내어 하나씩 정독하면서 기도와 영적 생활에 대해 실험과 실습을 하기 시작했다. 문제 해결을 위한 강청 기도에만 의존했던 나는 새로운 기도의 경지를 탐험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을 통해 기도에 대한 나의 기본적인 시각이 바뀌었다. 기도는 문제 해결을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을 얻어내는 도구도 아니었다. 물론 그런 면도 없지는 않으나, 기도는 가장 우선적으로 하나님과의 사귐이었다. 예수께서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말씀하신 영적 하나됨을 이루는 과정이었다. 그것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바울 사도 역시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영적 합일을 추구했고 또한 그것을 경험하고 살았다. 

기도의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내가 즐기는 기도 방법도 바뀌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물러 있는 침묵기도를 즐기게 되었고, 주님의 말씀 혹은 주님의 영광을 묵상하는 기도를 즐겼다. 기도의 대가들이 남긴 기도문들을 읽으면서 그것을 나의 기도로 만들었다. 새벽마다 시편을 서너 편씩 소리내어 읽으면서 나의 기도로 올려드렸다. 홀로 있을 때면 조용히 영창을 불러가며 내 마음의 기도를 올렸다. 때로 부르짖는 기도도 올렸으나, 그것은 더 이상 문제 해결을 위한 간구가 아니었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하나님을 향한 열망의 표현이었다.

그해 방학은 온전히 기도 실험에 보냈던 것 같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충분한 시간 동안 기도하고 말씀 묵상을 하고 일기를 썼다. 어떤 때는 한나절 동안 나의 기도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개학이 되고 난 후에도 나의 우선적인 관심과 노력은 기도와 영적 생활에 있었다. 수업이 시작되기 한 시간 전에 출근하여 연구실에서 홀로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묵상을 했다. 점심 시간이 되면 간단히 식사를 하고 기도실을 찾았다. 집회 혹은 특강 초청을 사양하기 시작했다. 영적 생활에 방해가 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영적 생활이 삶의 우선순위의 가장 높은 자리에 있게 되었다.

영적인 변화는 금세 나의 말과 행동으로 드러났다. 나 자신보다 다른 사람이 먼저 변화를 알아차렸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고, 일을 대하는 태도 역시 바뀌었다. 눈빛과 걸음걸이도 달라졌다. 가장 가까이 있는 가족들이 그것을 보았고, 학교에서 만나는 교수들과 학생들이 그것을 알아보았다. 나의 영적 숨통을 조이는 것 같았던 답답함이 사라졌고,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진짜’로 느껴졌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고요히 머물러 나의 영혼이 그분의 사랑과 은혜 안에 잠기는 시간을 매일 즐기다 보니 사람들의 인정에 휘둘리지 않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회복되었고, 일탈에의 유혹이 온 데 간 데 없어졌으며, 허둥대던 팔이 제 자리를 찾았다.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은 인생과 세상을 보는 나의 눈을 환히 열어 주었다. 과거에도 가난의 문제와 사회 정의의 문제에 대해 꽤 날카로운 의식을 가지고 살았다. 그것은 다분히 교육을 통해 의식화된 결과로 생긴 것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사귐은 그 문제들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게 해 주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대하게 해주었다. 경험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동기와 방법과 결과에서 상당한 차이를 만들어낸다. 의식화된 노력은 자기 의로 흐르기 쉽고 지속성도 매우 약하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사귐은 정의의 문제를 위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게 만들 뿐 아니라 자기 의를 쌓는 잘못에 빠지지 않게 한다.

그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영적 어둠을 뚫기 위한 투쟁적 기도를 하지 않았다. 나의 기도가 문제 해결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매일의 사귐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때때로 영적인 위기를 겪는다. 영적으로 둔감해지는 시기도 여러 번 겪었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와 같은 영적 위기가 아니었다. 어떤 영적 단계에서 진보하지 않고 오래 머물러 있으면 그런 위기가 찾아온다. 그것은 더 깊어져야 한다는 신호다. 수학을 공부하는 학생이 이차방정식만 풀고 있으면 곧 무료함이 찾아오듯, 영적인 세계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변화를 거친 후에 보니,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영적 고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학교에서 나에게 영적인 고민을 상담해 오는 학생들이 대부분 이런 문제로 씨름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돕기 위해 나의 영적 여정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사귐의 기도》(IVP)다. 결과는 전혀 예상 밖이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내 경험에 공감했다. 한국교회가 기도를 그만큼 잘못 가르쳤다는 뜻이다.

“기도는 사귐이다.”
이 정의는 지난 2천 년 기독교 역사를 통해 거듭 확인되어온 진리다. 기도의 깊은 경지를 경험했던 사람은 누구나 기도를 하나님과의 영적 사귐으로 정의한다. 기도를 통해 추구할 것은 당면한 문제 해결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적 합일이다. 기도는 응급 상황에서 하나님께 올리는 구조 요청이 아니라 매일 나누어야 하는 사랑의 사귐이다. 그렇게 하는 기도는 노동이 아니다. 전투가 아니다. 감미로운 광야의 식탁이며 영적 안식이다. 그것 없이 사는 것은 자신의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 길이다. 그래서 기도는 늘 내 일상의 가장 중요한 자리에 있다. 사귐의 자리에 머물러, 나는 바울 사도가 말했던 그 사건이 나에게 더 진하게 일어나게 되기를 소망한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이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고린도후서 3:17~18, 새번역)  

김영봉
미국 버지니아 소재 와싱톤한인교회(www.kumcgw.org) 담임목사로, 영성 목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키우고 진정한 신앙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힘쓰고 있다. 감리교 신학대학원(M.Div.), 미국 SMU의 Perkins School of Theology(STM), 캐나다 McMaster University(Ph.D.)에서 공부한 뒤 1992년부터 10년 동안 협성대학교에서 신약학을 가르쳤다. 《사귐의 기도》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 《숨어 계신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아프다》 《가장 위험한 기도, 주기도》 《팔레스타인을 걷다》 등 다수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