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운동의 뿌리는 기도입니다
[298호 커버스토리]
![]() | ||
| ▲ 구럼비에서의 기도 ⓒ조성봉 |
자신을 보수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적지 않은 분들이 평화운동을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활동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선입관 때문에, 성경에는 평화를 위해 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 할 책임과 의무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음에도 그 가르침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 만 보고,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잘 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화운동은 영적인 일이다. 영성이 빠진 평화운동은 단지 전략과 방법론에 국한 되어버릴 수밖에 없다. 그런 평화운동은 승리의 희망이 있을 때는 적극적이고 열정적이지만, 패색이 짙어지고 현실성이 없어지면 더 이상 지속될 수가 없다. 시민사회단체의 평화운동이 갖는 한계를 똑같이 지니고 있는 셈이다.
‘개척자들’의 뿌리, 기도 모임
‘개척자들’은 평화를 만들기 위해 모인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다. 이 개척자들 공동체의 출발은 기도 모임에 있다. 1990년대 초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용산구 보광동 언덕배기에 있는 보광 중앙교회의 청년들 십여 명이 단기 선교를 다녀왔다. 그 후 가난하고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현지의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을 돕고 있는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하는 모임이 시작되었다.
주일 저녁 모든 예배가 끝난 후 교인들이 다 떠난 텅 빈 교회의 어두운 지하실에서 교회 식당에 남은 찬밥을 함께 나누어 먹고, 아득히 먼 곳에서 만났던 낯선 형제자매들과 선교사님들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기도를 드렸다. 때로는 우리가 이렇게 기도를 드린다고 그분들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의심도 들었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이라는 어린아이 같이 단순 소박한 믿음을 붙들고 매주일 드리는 이 기도 시간을 거르지 않았다. 우리는 이 기도 모임을 거창하게 ‘세계를 품은 기도 모임’이라고 불렀다.
1993년 여름, 내가 청년부 전도사를 사직하고 독일교회의 초청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청년들에게 계속 기도할 것을 당부하였지만, 인도자 없이 이 기도 모임을 지속할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도 내가 이 기도 모임의 인도자라는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청년들은 내가 독일에서 신학 공부를 하고 있었던 5년 동안 변함없이 모여서 세계를 품고 기도를 드렸다. 나는 그제야 우리 젊은이들이 함께 모여 드리는 이 기도 모임의 진정한 인도자가 내가 아니라 우리 주님이시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기도 모임에 대한 더 깊은 신뢰를 갖게 되었다.
몸은 따로 떨어져 있었지만, 나도 이 기도하는 젊은이들의 사진들을 반지하 집의 한 구석방에 붙여 놓고 학교 가기 전후 아침저녁으로 그들과 함께 품은 꿈을 잊지 않고 기도로 올려드렸다. 무릎을 꿇은 채 이 청년들의 사진을 바라보다 보면, 사진에 담긴 눈망울들이 정말 살아서 내 앞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이들에게 빨리 돌아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독일에서도 학위를 비교적 일찍 마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독일에서 학위를 마칠 즈음 한 신학대학과 월드비전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이 있었지만, 나는 아주 단순히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이 젊은이들의 기도 모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은 함께 개척자들을 이끌고 있는, 당시 청년부에서 만난 이들이 나 때문에 인생이 꼬였다고 우스갯소리를 하지만, 나는 너희들이 기도 모임을 계속 하지 않았으면 내 인생이 더 안락하고 쉬웠을 거라고 농담을 한다. 아무튼 우리는 ‘세계를 위한 기도 모임’으로 인해 함께 만나게 되었고, 뭉치게 되었고,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다.
세계를 위한 기도, 그 기도에 대한 책임
처음 세계를 위한 기도 모임은 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활동하시는 선교사님들과 현지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러다가 아프리카 중부 르완다와 브룬디의 부족 전쟁이나 보스니아의 내전 지역을 둘러보면서, 점차 전쟁이나 재난 같이 인류가 겪고 있는 심각한 문제들과 그로 인해 고난 받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로 변화되어갔다. 대상도 그리스도인들뿐 아니라 무슬림들과 같은 타종교인들로 확대되었다.
기도의 초점은 그들의 구원이나 영적 필요보다도 그들이 겪는 전쟁이나 기아, 재난으로부터 그들을 구해달라는 절박하고 시급한 내용들이었고, 그렇게 드린 기도들은 우리를 괴롭혔다. 기도를 드리고 나면 항상 그들을 위해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 따라다녔다. 세계를 위한 기도는 그렇게 우리가 중보기도한 사람들을 찾아가도록 압박했다. 물론 우리가 기도드린 모든 곳을 찾아갈 수는 없었지만, 반복해서 기도드릴 수밖에 없었던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동티모르나 인도네시아 분쟁 지역들에는 기도한 이후의 책임감 때문에 그 분쟁과 갈등 지역으로 직접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기도하던 현장에 우리 형제나 자매들을 파견하면 그 현장에 대한 관심은 훨씬 더 커졌고, 우리의 기도도 더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변해갔다.
2001년 을씨년스런 늦가을 저녁, 우리는 습관을 따라 지하 기도실에 모여 세계를 위한 기도를 드렸다. 9·11테러 이후인 그날은 테러를 지원하고 테러범의 수괴 빈라덴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함으로 인해 아프가니스탄 주민들이 겪고 있는 희생과 고난을 기억하며 기도를 드렸다. 기도 모임을 마치자 유복희라는 자매가 자신이 아프가니스탄을 가기 원하니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우리는 모두 놀라서 우리가 이 여린 한 여자 청년을 그 미지의 분쟁 지역으로 파송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논쟁했다. 안전도 확보되지 않았고 지원은커녕 연락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것도 연약한 여성을 그런 위험하고 열악한 분쟁 지역으로 보내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라고 다수가 언성을 높였다. 사실 그랬다. 당장 아프가니스탄에 가면 머물 곳과 묵을 처소조차 알 수 없는 막막한 상태였다. 그때 그 자매가 입을 열어 떨리는 여린 목소리로 우리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미국의 침공으로 난민들이 출국 행렬을 이루고 있음에도 아프간을 떠나지 못하고 남아 두려움과 체념 속에 빠져 있는 어린이들과 연약한 사람들과 함께 계시기 위해 수많은 난민들의 흐름에 거슬러 올라가시는 주님의 모습을 봅니다.”
그 말을 듣는 우리 모두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초저녁 시작되었던 기도 모임은 벌써 자정을 훌쩍 넘겼고, 우리 모두는 하나 둘씩 일어나 이 자매를 품에 안아 주었다. 그리고 이 자매가 걸어가야 할 멀고 험한 길을 마음으로 함께 갈 것을 결의하였다.
결국 그녀는 아프간 북쪽에 위치한 이맘사헵이란 지역의 한 난민촌을 찾아가게 되었고, 그 난민촌에서 살면서 난민들과 같이 곰팡이가 슨 빵을 먹고 흙탕물을 마시며 지냈다. 그녀가 한 일은 아프가니스탄 난민들과 더불어 살면서 어린이들과 함께 놀고 노래나 단순한 내용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개척자들의 아프가니스탄 사역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분당샘물교회의 단기선교팀 납치 사건이 발생한 2007년 말까지 우리는 지뢰지대 안에 놓인 파괴된 학교를 재건하며 평화를 가르치는 학교를 열었다.
구럼비의 기도와 반전평화운동
개척자들이 제주 강정마을에서 평화사역을 시작한 것은 2011년 3월부터였다. 당시 강정마을 주민들은 법정투쟁에서 연거푸 패소했고, 기대하던 보루가 무너진 것처럼 실망하고 낙심해 있었다. 강정마을에는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었고,이 침묵은 강자 앞에서는 무릎을 꿇어야만 한다는 굴욕적인 체념과 냉소였다. 정부와 해군은 이제 강정마을에 평화가 온 것처럼 호도했다.
내가 강정마을에서 처음 한 것은 기도하는 일이었다. 해군기지 찬성과 반대로 마을 공동체가 사분오열된 상황에서, 부모와 자녀가 대립하고 형제들이 다투었으며 삼촌과 조카가 싸웠다. 나는 파괴된 강정마을 주민들이 서로 화해하고 예전처럼 평화로운 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기를 기도드렸다. 또한 불의한 강자 앞에서 굴종적인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는 강정마을 주민들이 용기를 내어 자신의 정당한 의견과 요구를 주장할 수 있기를 기도했다.
당시 강정마을 바닷가에는 구럼비라는 넓은 너럭바위가 펼쳐져 있었고 그 바위 위에서는 맑고 깨끗한 샘물들이 흘러나와 작은 시내를 이루거나, 선녀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이라도 할 것 같은 아름다운 연못들이 흩어져 있었다. 구럼비 바위는 아름다울 뿐 아니라 거룩한 제단과도 같았다. 나는 매일 먼동이 틀 무렵 이 원시적인 제단 같은 구럼비에서 강정마을의 정의로운 저항과 평화를 위해 기도드렸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도 할 수 있었던 가장 의미 있는 일은 기도드리는 일이었다.
2011년 9월 2일 해군이 구럼비 바위 주위를 높은 장벽으로 둘러싸고 출입을 금지했을 때 걸어갈 수 없다면 바다로 헤엄쳐서 구럼비로 가서 기도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새벽 바다는 어둡고 차가웠다. 그러나 구럼비에서 기도드리는 것이 나의 가장 우선적인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새벽 바다에 몸을 던질 수 있었다. 때로는 파도와 너울이 앞을 가로 막기도 했고 해군과 해양경찰이 바다에까지 뛰어들어 나를 붙잡기도 했다. 한 번은 새벽에 출항하는 어선이 어둠 속에서 수영을 하고 있는 나를 식별하지 못하고 충돌하는 바람에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바닷가 바위 위에서 기도를 드리다가 너울성 파도가 나를 덮쳐 몸이 갑자기 떠밀려 바위에 부딪힌 적도 있었다.
그런 상황을 겪을 때마다 ‘이렇게 기도하는 일에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자문했었다. 그때마다 나는 그렇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특권이다. 물론 아무 곳에서나 기도드릴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드리겠다고 약속한 장소에서 기도하기를 원한다면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리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해군기지 건설 부지였던 구럼비는 내게 그런 거룩한 기도의 처소였다. 해군과 공사장 인부들이 내가 구럼비에서 기도드리는 것을 막기 위해 위력으로 제지하려고 하면 할수록 기도드리는 일 자체가 반전평화운동으로 비추어졌다.
나에게 기도는 평화운동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다. 기도는 평화의 영성으로 나를 채우는 일이요, 끊임없이 새로운 힘과 용기를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는 젖줄과도 같은 것이다. 어떠한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를 믿으며 자리를 지킬 수 있는 힘의 근원으로 우리 존재를 연결시키는 통로다. 나는 진정한 승리는 위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상대방을 위력으로 제압하지 않고 감화를 통해 변화시킬 때 비로소 평화적인 방법으로 승리를 얻는다.
적대하는 상대자로 인해 분노가 치밀 때면 다시금 마음에 새기는 간디의 말이 있다. 적에게 이기려면 그 적을 가족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그런 사랑이 내 안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사랑을 구한다. 기도는 평화로운 승리를 위한 분명하고도 확실한 길이라고 나는 믿는다. 평화를 원한다면, 그리고 평화운동을 하려 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기도의 신비를 경험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기도하는 사람만이 참된 평화의 불씨가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송강호
장로회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철학으로 석사 학위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실천신학으로 박사 학위(Th.D.)를 받았다. 사단법인 개척자들 대표, 분쟁지역 파견 선교사 담당 간사 등으로 섬겼으며, 현재 평화활동가로 활동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평화, 그 아득한 희망을 걷다》(IVP)가 있다.
